1213. 2학년2학기-28-
대근은 혼자 컵라면을 후루륵 마시는 창범을 보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제대로 끼니도 챙겨 먹지 못하고 인스턴트 음식만 먹는 모습을 보자 괜스레 미안해진 것이었다.
"옛다."
보다 못한 대근이 금고 밑에서 뭔가를 꺼내 던졌다.
"뭐에요? 햇반이예요?"
"어. 오다가 주웠다. 너 해라."
"이거 대장 저녁 드실라고 챙겨온 거 아니에요?"
"···난 아까 많이 먹었어, 인마."
대근이 멋쩍어하며 시선을 피하자 창범이 그를 보며 말했다.
"귀신을 속이지 누굴 속여요, 지금. 제 능력 몰라요?"
"쓰지 마. 나한테 썼다간 죽는다 진짜."
"쓰래도 안 써요. 언제 플레이어가 나타날지 알고 스킬을 함부로 써요? 쿨타임 관리 못 해서 플레이어 놓치면, 나중에 감사팀에 추궁당할 게 뻔한데."
어느새 라면 면발을 모두 해치운 창범은, 햇반 뚜껑을 열더니 차가운 햇반을 그대로 국물에 풍덩 담갔다. 그리고는 전자렌지에 통째로 넣고 1분 간 돌렸다.
"뭐하냐 너?"
"이렇게 넣어서 돌리면 더 빨리 밥이 익더라고요."
"아니, 그렇다고 전자레인지에 컵째로 넣는 무식한 놈이 어딨어? 환경 호르몬 먹다 뒤지고 싶어?"
"어? 원래 컵라면 돌려도 되는 거 아니었어요?"
"그건 애초에 렌지용으로 나온 거고 인마. 어이구 진짜."
띵-
"어, 다 됐다."
창범은 대근의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렌지에서 컵밥을 꺼내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어휴, 말도 드럽게 안 듣네. 난 모른다. 그거 먹고 일찍 뒤지든 말든."
"대장."
"왜?"
"근데 저희가 제 명에 살 순 있어요?"
"···뭔 소리야 뜬금없이."
"아시잖아요. PK단이라고 무조건 플레이어를 이긴다는 법은 없다는 거."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저보고 환경호르몬 먹고 일찍이 뒤지고 싶냐면서요. 환경 호르몬 부작용 나오려면 앞으로 수십년은 더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난 어째 근데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드는데···."
창범의 센치한 반응에 대근이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나이도 어린놈이···."
"그냥, 우리 솔직해지자고요. 우리 하는 일 극한 직업이잖아요. 플레이어를 사냥 하다보면 우리도 사냥당할 수 있는."
"그러니까 힘을 키워야지. 플레이어 놈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우리가 힘을 키워도 언젠간 더 강한 상대를 만날지도 모르죠. 몇 해 전 제주도 지부처럼 지부 전체가 몰살···."
"야!"
결국 참다 못 한 대근이 카운터를 쾅 내리쳤다.
흥분한 그는 순간적으로 힘 조절에 실패한 나머지, 두꺼운 책상이 쩍- 금이 가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의 손엔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해라. 나 진짜 화내기 전에."
"아, 알았어요 대장. 죄송해요. 조용히 밥이나 처 먹을게요."
창범은 대근이 평소 동네 사람 좋은 아저씨처럼 허허실실 웃다가도 진짜로 화가 나면 말릴 수 없단 걸 알고 있었다. 그가 가진 역발산기개세의 완력은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으, 진짜 힘만 무식하게 세 가지고.’
"사장님. 여기 키보드 좀 닦아주세요. 누가 뭐 흘리고 간 것 같은데."
"아, 네. 갑니다!"
나이 어린 손님의 호출에 쪼르르 달려가는 대근의 뒷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여 창범은 일부러 외면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부장인 대근 역시 열악한 현실에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어디 있는 지도 모를 미호는, 실은 남자의 정기를 주기적으로 흡수하지 못하면 금세 피부가 쪼그라들어 말라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사내를 찾아 헤매는 중이었고.
갑자기 우울해진 창범은 컵밥을 먹다 말고 담배를 챙겨 흡연실로 들어갔다. 답답한 현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같았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사치는 오직 담배뿐이었다.
"···빌어먹을 플레이어 새끼들 같으니라고."
혼자 푹푹 연기를 내뿜으며 담배를 태우던 창범은 문득 흡연실 문 옆에 붙은 일일 점검표를 보게 되었다. 알바생끼리 인수인계를 위해 만들어 놓은 장부였는데, 그 중 ‘조소연’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꼭 체크하는 동그라미에 ‘스마일’ 마크처럼 눈과 입매를 그려놓았다.
"하여간 애처럼 유치하다니까?"
창범은 자신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스스로를 보고 흠칫 놀랐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창범일지라도, 한없이 얕은 자신의 마음은 조금도 볼 수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 자꾸 찾아오는 이유가 새로운 알바생인 조소연 때문인지, 아니면 대근 때문인지. 굳이 오늘 옷을 갈아 입은 이유가 괜한 헛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잠복을 위한 위장이었는지. 왜 자신은 흡연실 구석에 붙은 일일점검표의 글씨만 보고도 아빠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인지.
겸연쩍은 마음이 든 창범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때 대근이 흡연실로 따라 들어왔다.
"야."
"왜요?"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안 되겠다."
"또 뭐가요?"
"너, 그냥 연애부터 해라."
"네?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예요 갑자기?"
"내가 볼 때 니가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느니, 뒤지면 그만이라느니 헛소릴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지킬 게 없어서 그런 거 같아."
"제가 언제 또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요?"
"짜식아. 척하면 척이지. 암튼 너 연애 해라. 알았지?"
"싫어요. 갑자기 무슨···."
"그냥 좀 평범하게 살라고 인마! 여자도 만나고, 데이트도 좀 하면서. 맨날 여기 와서 게임만 쳐하지 말고. 밖에서 나가서 여자라도 좀 만나봐. 그러면 또 생각이 바뀔지 모르잖아."
"에이씨, 난 또 뭔소린가 했네. 됐어요."
"야. 내 말 진지하게 들으라니까? 원래 남자는 지킬 것이 있으면 강해지는 법이야. 내가 왜 억척스럽게 사는지 몰라서 그래?"
"아니··· 그래도 무슨 뜬금없이···."
"그니까 인마, 여자라도 좀 만나보라고. 또 아냐? 좋아하면 사랑하고 싶고, 사랑하면 결혼하고 싶고. 지켜줄 사람이 생기면 환경 호르몬 가득한 컵라면도 그만 처먹을지."
"됐다고요! 아씨, 나이 먹더니 잔소리만 늘어가지고."
창범은 더 듣기 싫다는 듯 흡연실을 빠져 나와버렸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 계속 대근이 해준 얘기가 맴돌았다.
-너, 그냥 연애부터 해라.
* * *
"흐읏, 진짜 너무 쪼이더라 오늘."
"나 맛있었어?"
"응. 몇 달간 개점 휴업한 보람이 있네."
"뭐래 진짜!"
서윤이 눈을 흘기더니 도훈의 등짝을 손으로 찰싹 때렸다.
폭풍 같은 섹스를 마친 두 사람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간만에 봐서 그런지 섹스보다, 섹스 후 나누는 토크가 더 즐거운 두 사람이었다.
"근데 이사는 어디로 가는 거야?"
"어. 학교 근처 도보 5분 거리 안으로."
"그럼 비싸지 않아?"
"그냥 뭐···. 어차피 전센데. 아버님이 보태주신다고 했어."
도훈은 스스로 돈을 벌었다고 밝히지 않았다. 괜히 그런 얘기를 꺼낼 필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구나···. 난 또 오해했네."
"무슨 오해?"
"아니, 너 여친 사겼다길래. 같이 동거하러 들어가는 줄?"
"풉! 뭐래? 대학생이 무슨 동거?"
"왜? 대학생도 성인인데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암튼 난 그런 건 별로야. 가끔 봐야 좋지. 맨날 붙어 있으면 피곤할걸?"
"배부른 소리하긴. 있을 때 잘해."
서윤은 도훈이 여친과 동거를 않는다는 말에 다소 안도했다. 만약 여친과 종일 붙어 있는 상황이라면 연락하기도 껄끄러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좀 긴장이 풀려?"
"응?"
"아니, 모텔 처음 들어왔을 땐 엄청 쫄아있었잖아. 너 답지 않게."
"그건···.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랬지."
"오랜만에 하니까 더 좋지?"
"···몰라."
"대답 안 해도 알겠네."
"치. 암튼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뭐가?"
"나랑 만나는 거. 진짜로 계속하려고?"
"너만 괜찮다면."
"여자친구한테는 안 미안해?"
"미안해야 해?"
"···응?"
"내가 너를 만나는 거랑 여자친구를 사귀는 건 별개의 문제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난 그래. 그러니까 그건 신경 쓰지마. 너만 괜찮다면 난 언제든 오케이니까."
"서울에서 광주는 너무 멀어."
"그건 내가 해결할 문제고."
"흠···."
"대신 너도 하나만 약속해."
"뭐?"
"좋은 사람 생기면 언제든 나에게 알려주기로."
"나도 남자친구 사귀라고?"
"그래야 공평하지. 나만 있으면 이상하잖아."
"난 사양할래. 바람 피우는 거 딱 질색이야."
"난 분명히 말했다. 언제든 다른 남자 만나도 좋다고."
"···치."
서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를 두고 어떻게 다른 남자를 만날 생각을 하니? 맨날비교할 게 뻔한데···. 성에도 안 찰걸.’
하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괜히 그런 말을 했다간 도훈이 부담을 느낄까 두려웠다. 도훈애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이 들진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그와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면 나름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완전히 잊히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이크, 지금 몇 시지?"
"3시 좀 넘었어."
"너 내일 출근해야 되지?"
"응."
"나도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겠다. 친척 집에서 자는 척하다 몰래 빠져 나온 거라서."
"아···. 그렇네. 근데 이 시간에 갈 수 있겠어?"
"택시 타야지 뭐."
"광주서 하동 가면 택시비 꽤 나올 텐데···."
"괜찮아. 너 보려고 일부러 나온 거니까."
"다음에는 그러지 마. 뭐하면 내가 서울로 올라갈게."
"그건 상황 봐서."
도훈은 택시 기사와 약속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늦지 않게 채비를 갖춰 모텔을 빠져나왔다.
"먼저 들어가. 너 가는 거 보고 갈게."
"아니야. 네가 먼저 가. 멀리 가야 하잖아."
"잠깐 늦게 출발한다고 목적지가 달아나진 않아. 택시!"
도훈이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택시가 앞에 도착하자 도훈이 서윤을 가볍게 포옹했다.
"다시 볼 때까지 몸 건강하고."
"으, 응.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나도."
서윤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택시에 올랐다.
그러면서 창문을 내려 도훈에게 소리쳤다.
"네가 먼저 연락해. 나 기다릴 테니까."
"왜?"
"···부담주기 싫어. 알았지?"
"그래. 조심히 들어가."
기사의 재촉에 서윤이 목적지를 말했다. 사이드 미러로 점점 작아지는 도훈의 모습을 보는데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아··· 다시 볼 수 있으려나?’
오늘 도훈을 만난 일이 왠지 꿈같이 느껴졌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그의 말에 술 먹고 꼬장을 부렸었는데···.
문득 도훈이 해준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잠깐 늦게 출발한다고 목적지가 달아나진 않아.
마치 그 말이 자신에게 일부러 들려준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그래···. 조금 늦을 뿐이야. 언젠간 도훈이 곁으로 갈수 있을거야.’
서윤이 도훈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한편 서윤이 탄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던 도훈은 곧바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억, 늦겠는데. 전화해 봐야겠다."
찜질방에서 기다리기로 한 택시 기사에게 전화를 걸자, 곧바로 통화가 연결됐다.
"저, 끝났어요."
-안 그래도 막 나오던 길인데, 어디로 모시러 갈까요?
도훈이 위치를 말하자 10분 안에 택시가 달려왔다.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기사 덕에 도훈은 한시름 놓았다.
"고맙습니다. 기다려 주셔서."
"나야 이 시간에 어차피 뺑이치느니 장거리 손님이 낫지."
기사는 광주 시내를 빠져나가자 마자 속도를 올렸다. 기사는 조용히 앉아있는 도훈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걸었다.
"보려던 일은 잘 됐고?"
"네?"
"여자 만나러 간 거 아니었어?"
"어? 어떻게 아셨어요?"
"에이, 내가 핸들만 20년 잡았는데, 손님들 얼굴만 봐도 알지. 그 새벽에 지리산 구석탱이서 광주까지 택시 타고 나오면 백퍼 여자문제지."
"하하. 맞아요."
"그래도 얼굴 보니 잘 해결됐나 보네. 잘 됐어."
"감사합니다."
기사는 양해를 구하더니 뽕짝 메들리를 켜고 신나게 밟기 시작했다. 찜질방에서 몇 시간 자고 나왔는지 새벽에도 눈빛이 쌩쌩한 게 도훈은 안심하고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음악 소리 때문인지 눈을 감아도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어우, 음소거 같은 건 못하나? 저 노래 좀 안 듣고 싶은데.’
[꺼달라고 하지 그러십니까?]
‘어떻게 그래. 저 양반은 저거 들으면서 달려야 속도가 나온다는데. 나 때문에 새벽 내 기다려준 사람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흐음,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이제 지리산만 도착하면 바로 서울로 직행하는 거지?’
[네. 마법의 문고리는 포털이 생성된 두곳을 직통으로 연결하니까요.]
‘근데 갑자기 생각났는데 지리산에 한 번 들를일이 있지 않았나?’
[지리산요? 무슨 일요?]
‘아니 그때 장군이랑···. 아, 맞다 산삼!’
[산삼이요?]
‘왜, 과부 귀신이 알려준 거 있잖아. 그거 나중에 다시 와서 캐가려고 했던 거.’
[오오오! 맞습니다. 그게 있었군요.]
‘위치 기억하지?’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잘 됐다. 지리산 온 김에 그거나 캐고 가야겠다.’
[근데 이 새벽에요?]
‘왜? 도착하면 새벽 5신데. 조금 있으면 해 뜰걸? 등산하기에 이른 시간은 아니지.’
[역시 주인님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