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4. 질투는 나의것-19-
약속을 잡고 외출 준비를 하던 도훈은 유독 외모에 공을 들였다. 거울을 보며 각종 미용 아이템을 치덕치덕 바르는 모습을 보고 로시가 물었다.
[저녁에 있을 소개팅이 신경 쓰이시나 보군요.]
‘소개팅?’
[황시엘 양이 타겟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명분은 주인님을 뵙고 싶어하는 다른 치어리더랑 소개팅이잖습니까.]
‘음, 그것도 그렇지. 근데 어차피 거긴 꽃놀이 패야. 정 힘들 것 같으면 갈아타면 그만이거든. 근데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그럼요?]
‘영철이 말이야. 좀 생기지 않았냐?’
[아···.]
실은 도훈은 영철의 등장에 살짝 긴장한 상태였다. 이제껏 운동이건, 공부건, 혹은 얼굴이건 모든 분야에서 체육과 탑티어를 차지하고 있던 그에게 막강한 도전자가 생긴 것이다.
[주인님이 전혀 밀릴 것 같진 않던데요?]
‘물론 전체적인 밸런스에선 상대가 안 되지. 그래도 녀석이 얼굴 하나는 끝내 주잖아. 약간 얼굴 천재 같은?’
[확실히 아이돌을 많이 닮긴 했더군요. 그럼 혹시 영철군을 의식해서?]
‘의식까지는 아니고. 그냥 꿀리고 싶지 않은 거야. 내가 평소에 대충 하고 다녀서 그렇지, 각 잡고 꾸미면 아이돌 뺨치거든.
’[그 정도는···.]
‘왜? 아이템이 있잖아. 혹시 여자들 화장한 것처럼 얼굴 꾸며주는 종류는 없나?’
[당연히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변장도 가능한데, 화장 정도는 우습죠.]
로시는 도훈을 위해 각종 화장품 아이템을 안내했다.
포인트가 남아도는 도훈은 쇼핑하듯 이것저것 여러가질 구매했다. 먼저 피부의 잡티를 보정하고, 톤을 일정하게 해주는 파운데이션 아이템을 바르자 그의 피부가 백옥처럼 깔끔하게 변했다.
거울을 보던 도훈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그러십니까?]
‘뭔가 이상한데.’
[천상계 화장 아이템의 특징입니다. 화장품을 발라도 한 듯 안 한 듯 티가 나지 않죠.]
‘아니 그게 아니라 사내놈 얼굴이 밀가루 반죽한 것 마냥 너무 하얗잖아. 내가 무슨 백인도 아니고.’
[아하. 색을 살짝 보정해 주시면 됩니다.]
도훈이 리터칭을 통해 색을 입히자 훨씬 자연스럽게 피부톤이 변했다. 도훈은 모공하나 보이지 않는 피부를 보고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팩트 하나 발랐다고 이렇게 사람이 달라보이다니.’
[피부가 그만큼 중요한 거지요.]
‘가만있어보자. 눈에도 살짝 힘을 좀 줘 볼까?’
[매직 아이라인 추천합니다. 외곽선에 맞춰 눈 전체를 확장시켜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내 눈을 키워준다고?’
[네. 한번 그려보십시오.]
도훈이 아이라이너를 들고 그리자 정말로 성형을 한 것처럼 앞트임 뒤트임이 더해지며 눈이 훨씬 커졌다.
‘와, 완전 휴대용 성형 기계네?’
[마법의 고무찰흙을 붙이면 코도 살짝 높일 수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쓰는 거야?’
로시의 설명에 따라 도훈이 살 색의 아이클레이를 조물락 거리다 코에 붙였다. 그리고 모양을 다듬자 잠시 후 뼈가 솟아난 것처럼 도훈의 코가 오똑하게 높아졌다. 마치 찰흙이 살로 변한 것 같았다.
‘우아, 티도 안나네?’
[당연하죠. 특수분장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기술입니다.
심지어 신경계통이 자동 연장되어 촉감도 느끼실 수 있습니다.
]
‘진짜?’
도훈이 덧붙인 부분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는데, 정말 자신의 피부처럼 촉감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우아, 대박. 이게 가능하다니.’
[천상계의 기술력은 특히 미용 분야에서 월등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어째서?’
[바로 여성 플레이어들 때문에요. 남성 플레이어와 달리 여성들은 플레이어의 특권을 이용해 자신을 꾸미는데 많은 공을 들입니다.]
‘오, 역시.’
[가령 지구와 다른 시스템에서는 대부분의 여성 플레이어들이 빼어난 미인으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이템을 이용해 늘 미용에 신경쓰기 때문이지요.]
‘신기하군. 그럼 그쪽 세계로 건너 가면 지나가던 아줌마도 미인인거야?’
[경국지색입죠.]
‘대박. 차원이전 같은 거 가능하면 좋겠다.’
[후에 랭커가 되시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뭐?’
[거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굉장히 복잡한 설명이라서요.]
‘오케이.’
도훈은 한참을 공을 들여 외모를 다듬었다.
아이템의 효능도 효능이지만, 본판이 원체 뛰어나다 보니 살짝만 다듬었는데도 잠시 후 엄청난 꽃미남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오! 주인님도 꾸며 놓으니까 장난 아니군요.]
‘당연한 소릴. 화장한 티 많이 안나지?’
[전혀요. 근데 영철군이 놀라겠군요. 어제 본 모습하곤 많이 달라져서요.]
‘소개팅 있어서 좀 신경썼다고 하면 되지.’ 도훈은 멋지게 차려입고 차를 끌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콩나물 해장국 가게에 들어서자 먼저 도착한 영철이 테이블에 혼자 앉아 폰을 만지고 있었다.
"여어, 도착했냐?"
도훈의 목소리에 영철이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앉아 인마. 무슨 조폭도 아니고."
"헤헤, 체육과 회장님은 맞으시니까요. 어, 근데···."
도훈이 가까이 오고서야 그의 얼굴이 달라졌다는 걸 확인한 영철은 순간 말문이 막히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헉, 도, 도훈이 형 맞아?’
어제 처음 야구장에서 처음 만난 도훈은 키가 크고 몸이 좋은 이미지였다. 얼굴보단 등빨이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딱히 얼굴에 대한 이미지는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냥 훈훈하다는 정도?
하지만 오늘 낮에 본 도훈은 같은 남자가 보아도 움찔 놀라게 할 만큼 엄청난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뭐해 인마. 음식 시켰냐?"
"아, 아직요. 형 근데···.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어?"
"아니, 어제랑 느낌이 달라서. 옷도 그렇고."
도훈이 얇은 여름 마의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치며 말했다. 안에는 흰색 셔츠에 바지도 무척 시원해 보이는 정장스타일을 입고 있었다.
"아, 이거? 하하. 사실 저녁에 소개팅이 있어서."
"소개팅이요? 누구요?"
"내가 말하면 누군지는 알고?"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그냥 있어. 나도 잘 몰라."
"아···, 넵."
영철은 도훈과의 대면에서부터 기가 팍 죽었다. 이제껏 자신의 월등한 외모로 상대를 얕잡아 봤던 그는, 그보다 더 빼어난 미남의 등장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 장난 아니네. 어제는 편한 옷 대충 걸치고 와서 몰랐는데 도훈이형이 진짜 잘 생기긴 했구나. 나랑은 비교도 안 되네.
’메뉴를 시켜놓고 기다리는 동안 영철이 물었다.
"형, 근데···. 제가 혹시 오해했나 싶은데."
"뭐?"
"정음이랑 잘 되시는 거 아니였어요?"
"정음이?"
"네."
영철은 도훈이 정음과 썸씽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굳이 그를 불러 점심을 먹게 된 것도, 도훈이 혹시나 양다리를 걸치는 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음도 아니고, 아영도 아니고 갑자기 제3자와 소개팅이라니? 만약 사실이라면 영철은 처음부터 되지도 않는 오해를 한 셈이었다.
"아···. 뭐 정음이랑 많이 친하지. 제일 아끼는 후배기도 하고. 근데 뭐? 아, 너 혹시 어제 같이 야구장 갔다고 사귀는 사이라고 오해한 거야?"
"아···. 아니에요, 제가 착각했나봐요."
도훈의 태도를 보고 영철은 자신의 추리를 바꾸었다.
‘둘이 썸을 타는 게 아니라, 정음이가 일방적으로 도훈이 형을 짝사랑하는 거였네. 그러니까 어제 도훈이 형 뒷담화까니까 열 받아 가지고 나를 때린 것이고. 헐, 대박.’
영철은 정음이 도훈의 사생팬 같은 존재라도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그게 아니면 오늘 당장 소개팅을 나간다고 꾸미고 나온 도훈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럼 정음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면, 아영이랑도 뭔가 있을 수 있다는 건데···.’
영철이 두 번째로 궁금했던 것은, 도훈과 아영이 단둘이 남았을 때 뭘 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영철은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 은근슬쩍 지나가는 말로 질문을 던졌다.
"어젠 잘 들어가셨어요? 4호선은 좀 널널 하던데요."
"어. 경기장에서 막 쏟아진 사람들이 몰려 가지고 완전 콩나 물시루 됐잖아."
‘음? 그럼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린데···. 아영이랑 따로 만난 건 아니라는 소린가?’ 도훈의 대답을 들을수록 영철은 자신이 헛다리를 짚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도훈 같은 미남이 뭐가 아쉬워서 정음이나 아영이를 데리고 논단 말인가? 진짜 마음만 먹으면 연예인하고도 사귈 수 있을 것 같은 비주얼인데.
"근데 형, 소개팅은 누구랑 하는 지 여쭤봐도 돼요?"
"소개팅이라긴 좀 그렇고···. 어제 실은 내가 화장실 가다가 황시엘 치어리더 만났거든."
"치어리더요?"
"어. 백산팀 치어리더, 머리 노랗게 염색해가지고. 몰라?"
"제가 치어리더쪽 까진 잘 몰라서. 아, 검색하면 나오겠네요?"
영철이 핸드폰으로 황시엘의 이름을 검색하자 곧바로 관련기사가 주르륵 나왔다. 기사를 클릭한 영철은 시엘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서 말했다.
"어! 이 분 기억나요. 어제 센터에 있있던 그분이죠?"
"응. 백산 치어리더 팀장인가 그럴거야. 인기도 엄청 많아."
"그래 보이네요. 와, 엄청 예쁜데요? 설마 이분이랑 소개팅하시는 거예요?"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도훈이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영철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도훈에게 재차 확인했다.
"헉! 진짜예요, 형?"
"보여줘?"
도훈이 깨톡을 열더니 오늘 약속을 잡았던 채팅 부분을 내밀었다.
"우아! 형 진짜 엄청나다. 역시!"
"학과 애들한테는 소문내지 말고. 잘 안될 수도 있으니까."
"넵. 입 싹 닫겠습니다."
영철이 입술을 지퍼로 잠그는 시늉을 했다.
동시에 그는 도훈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폐기했다.
‘그럼 그렇지. 도훈이 형처럼 잘나가는 사람이 뭐하러 아영이를 데리고 놀겠어? 와, 근데 진짜 대박이다. 치어리더랑 소개팅이라니···. 내가 스튜어디스 준비생까진 만나 봤지만, 형은 진짜 클라스가 다르구나.’
영철이 도훈을 우러러보고 있을 무렵, 도훈은 주문한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속으로 씩 웃었다.
‘역시 예상대로네. 영철이가 나를 의심하고 있었어.’
[근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음의 소리로 속마음을 들어볼생각까지 다 하시고.]
‘갑자기 연락해서 밥 먹자는 게 수상하잖아. 군대 가기 전까진 여자 엄청 밝혔다는 놈이 황금 같은 말년 휴가 기간에 남자 선배를 왜 보자고 하겠어?’
[아.]
‘보나 마나 정음이나 아영이 찔러보다가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 나한테 직접 확인하고 싶었겠지.’
[귀찮은 구석이 있군요. 주인님을 떠보다니.]
‘눈치가 제법 빠른 놈이야. 특히 여자 문제에 있어선 종전의 어리버리한 후배들과 달리 엄청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아.’
[마침 소개팅 약속이 있어서 의심을 불식시켰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렇지 근데 영철이가 아영이를 찔러볼 줄은 몰랐네. 처음엔 정음인가 했는데.’
[정음양이든 아영양이든 주인님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당연하지. 그런 부분은 조금도 걱정 안 해. 적어도 8선녀에 들어 있는 후배들이면 영철이가 아무리 찔러도 끄떡도 없을 걸. 그야말로 못 먹는 감이지.’
[그 사실을 영철 군이 얼른 파악해야 할 텐데 말이죠.]
영철은 어젯밤 아영이 따로 만난 남자가 누구였는지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다. 도훈의 명쾌한 대답에 맥이 탁 풀리며 아영에 대한 관심이 식은 것이었다.
오히려 같은 대학생인 도훈이 캠퍼스 바깥으로 왕성한(?) 연애 사업을 한다는 사실을 듣고는 갑자기 자신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씁-. 나는 기껏해야 사범대 투어나 하고 있는데 도훈이 형은 무슨 연예인급 여자를 만나고 다니네. 어휴, 쪽팔려.’
"너 전역 언제랬지?"
"이제 일주일 남았어요. 휴가 복귀해서 그 다음날 전역신고 하면 군생활 끝이에요."
"고생했다. 가만, 그럼 바로 2학기 복학이야?"
"네. 칼복학이죠 나름. 어쩌다 보니 시간이 딱 맞았어요. 형은 언제 전역하셨어요?"
"난 좀 됐지. 나같은 경우는 복학까지 시간이 남아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했었어."
"아···. 맞다. 복학 절차 때문에 형한테 궁금한 거 있었는데."
"어, 물어봐."
그 뒤의 대화는 복학에 관련된 이야기로 이어졌다. 도훈은 학회장으로서 최대한 상세하게 영철에게 알려주었다.
"여튼, 고생했다. 힘들었을 텐데."
"아니에요. 남자라면 당연히 가야죠. 군대 간 거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어요. 나름 국가에 봉사했다는 것에 만족해요."
"좋은 마인드네."
도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은근히 착한 것 같지 않냐?’
[영철군이요?]
‘어. 여자 관계는 복잡하긴 한데, 그 외에 부분에선 나무랄데가 없는 것 같아. 사교성도 좋고, 빠릿빠릿하고.’
[개폐급인 태영군과 비교해서 더 그런게 아닐까요?]
‘음, 태영이랑 빗대면 누구든 에이스지. 암튼 잘만 가르치면 믿고 맡길 수 있는 후배로 키울 수 있겠어. 안 그래도 마땅한 남자 후배 놈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영철과 대화를 나눠본 도훈은 간만에 쓸만한 후배가 들어왔다고 만족했다. 여성 편력이 살짝 걸리긴 하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 도훈이 누군가를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사내의 아랫도리 일은 묻지 않는 게 불문율이니까.’
그때 밥을 다 먹은 영철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릴 했다.
"아참, 형. 혹시 저녁에 있으시다는 소개팅이요.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