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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80화 (1,147/2,000)

1163. 질투는 나의것-18-

"어, 집에서 쉬다가 나왔나 봐?"

"네?"

"아니, 복장이···."

때는 8월이 끝날 무렵, 무더위가 막바지로 기승을 부릴 때였다. 날이 너무 더워 짧은 돌핀 팬츠를 입고 나왔던 아영은 영철이 음흉한 눈으로 자신의 다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기분이 팍상했다.

‘뭐야. 어제부터 짜증나게.’

기분이 상한 아영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영철에게 말했다.

"돈 주세요."

"어, 어 그래. 줘야지."

지갑을 꺼내려던 영철이 불쑥 물었다.

"근데···. 기왕 만났으니 차가운 커피라도 한 잔 사줄까?"

영철은 여전히 스스로에 자신감이 넘쳤다. 어떤 여자든 자신을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저 커피 안 좋아해요."

"아···. 그럼 그냥 음료라도."

아영의 기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영철이 메뉴를 바꿨다. 하지만 아영은 더욱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빠, 그냥 돈이나 주세요. 날 더운데 피곤하네요."

명백한 거절.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영철은 더욱 오기가 일었다.

‘아니,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아니 그래도 여기까지 직접 왔는데···."

그녀를 만나기 위해 허겁지겁 택시까지 타고 왔다. 야구장관람료보다 비싼 비용이 이미 지불된 상황이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제가 당장 와서 갚으라고 했었나요?"

"뭐?"

"나중에 줘도 괜찮다는데, 오빠가 근처라고 알아서 온 거잖아요. 그리고."

아영도 점점 흥분했는지 말이 빨라졌다. 어젯밤 내내 도훈과 거사를 치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잔 마당에, 날파리처럼 들러붙는 영철에게 짜증이 확 치민 것이다.

"제가 어제 분명 말했죠? 저 오빠한테 조금도 관심 없다고.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오빠 바보예요?"

"······."

영철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바보라니. 어떻게 저렇게 예쁜 얼굴에서 저런 막말이 튀어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학과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영은 타고난 독설가였다. 여름 캠프에서도 자꾸 태영이 껄떡거리자, 말로 조져버린(?) 전례가 있었다.

"아, 아니 아영아···."

충격으로 말을 더듬는 영철을 향해 아영이 최후 통첩을 날렸다.

"됐어요, 그냥. 주지 마세요. 안 받을게요."

그러면서 휙 돌아서는데 영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아영이 돌려보내면 끝장이야!’

"박아영!"

영철이 큰 소리로 아영을 불렀다.

어찌나 목청이 큰지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초등학생 몇몇이 두 사람을 쳐다볼 정도였다.

"잠깐만 멈춰봐!"

아영은 짜증이 극도로 치밀었지만,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며 걸음을 멈췄다. 그 사이 영철이 쪼르르 달려오더니 아영의 앞에 섰다.

"미안해. 내가 너무 내 기분대로 행동했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

"너 할 말만 하고 가버리면 내가 뭐가 되냐?"

"뭐가 되긴요?"

"아니, 어쨌든 복학하면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서 얼굴 마주쳐야 하는데 서로 기분 상해서 헤어질 순 없잖아. 안 그래?"

"······."

영철의 말에 아영도 살짝 마음이 걸렸다. 예전처럼 아웃사이 더로 지내면 해당 없는 이야기지만, 지금은 학회장인 도훈을 도와 집행부로 활동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학과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한 영철과 척을 질 경우 여러모로 불편한 상황이 많을 것 같았다.

"내가 너한테 뭘 바라거나 그러는 게 아니야. 그냥 서로 기분만 풀고 가자고. 응?"

"···어떻게요?"

"10분만, 아니 5분만 나랑 얘기 좀 해."

"······."

아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놀이터 주변의 벤치를 가리켰다. 나무로 그늘져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도 좋은 장소였다.

"저기서 잠깐 얘기해요, 그럼."

"고마워, 아영아."

가까스로 아영을 붙잡은 영철이 아영과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의 대화가 두 사람의 관계에 결정적인 시기임을 직감했다.

‘최대한 신중해야 돼. 여기서 틀어지면 아영이랑은 영영 끝이야. 그냥 머리 굴릴 생각 말고 솔직하게 말하자.’

"뭔데요, 할 얘기라는 게?"

"저···. 아영아.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나 사실 너한테 첫 눈에 반했어."

"······."

"진심이야. 어제 야구장에서 처음 널 보는 순간."

영철이 최대한 진솔한 태도로 고백을 이어가는데 아영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오빠."

"그러니까 내 이상형을 만난···."

"오빠. 잠시만요."

"응?"

"휴-. 진짜 죄송한데 저 오빠한테 조금도 관심 없어요. 어제도 말씀 드렸잖아요. 제 타입 아니라고."

"아니, 그래. 그럴 수 있지. 남자들은 첫눈에 반하기도 하지만 여자들은 원래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아뇨."

"어?"

"그런 거 아니라고요. 오랫동안 지켜봐도 제가 오빠한테 마음을 줄 것 같지가 않아서요."

"아, 아영아."

"너무 기분 상해하지 않으셨음 좋겠어요. 오빠가 어디 부족하다거나 성격이 모나서 그런 건 아니니까요. 오늘 일은 다른 사람한테 절대 말 안 할 테니, 앞으로 이것 때문에 저랑 어색해 하실 필욘 없어요. 저도 그냥 없던 일로 할 테니까요."

"······."

"할 얘긴 다 끝난 거죠?"

이쯤이면 충분히 알아먹을 거로 생각한 아영이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때 좌절감에 고개를 떨구고 있던 영철이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아영을 향해 말했다.

"너···. 만나는 사람 있지?"

"···네?"

갑작스레 튀어나온 물음에 아영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실은 어제 정음이 몰래 도훈과 침대에서 뒹군 것이 마음속에 짐처럼 남아 있던 것이다.

눈치가 빠른 영철은 아영의 반응을 보고 자신의 직감을 확신했다.

"맞네. 남자친구 없다더니 나한테 거짓말한 거였어?"

야구장 편의점 앞에서 처음 까일 때 영철은 아영이 했던 이야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기요, 저 남자친구 같은 거 없거든요?

"아니 그건···."

"뭐야? 와 갑자기 열 확 받네? 처음부터 그냥 말해줬으면 내가 이렇게 찌질하게 안 매달렸을 거 아냐?"

"오빠, 잠시만요."

"너 왜 사람 병신 만들고 그러냐? 너 좋다니까 막 우습냐?"

"오빠!"

아영의 남자관계를 오해한 영철이 흥분하자, 조곤조곤 말하던 아영이 빽 소리쳤다.

"제 말도 좀 들어보시라고요!"

"뭐?"

"남자친구 없다는 말, 거짓말 아니에요."

"그럼 뭔···."

"저는 분명히 말했어요. 어디가서 이상한 소문 내기만 해봐요, 진짜."

그 말을 마친 아영은 영철을 버려두고 성큼성큼 아파트로 올라가 버렸다. 영철은 아영이 마지막에 남긴 말을 곱씹느라 그녀를 붙잡을 생각도 못했다.

‘저게 뭔 소리야? 잠깐만 그러니까 남자친구는 없는데 만나는 남자는 있다는 뭐 그런 얘긴가?’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 뿐.

남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에 아영이 보인 반응은, 분명 뭔가 켕기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남자친구는 아닌데, 남자친구같은 사람하고 만난다고? 그럼 썸남이라는 소린가?’

맨 처음 든 생각은 아직 공식적으로 사귀지 않은 썸남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아영이 마지막에 보인 히스테릭한 반응을 설명할 수 없었다.

-저는 분명히 말했어요. 어디가서 이상한 소문 내기만 해봐요, 진짜.

‘뭔가 이상해. 썸남이면 썸남이지, 어장관리 할 것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숨긴다고? 왜, 썸남의 존재를 숨겨야···.’

그 순간 영철의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한가지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엔조이?!’

거기로 생각이 미치자 뭔가 아귀가 맞기 시작했다.

‘맞네. 어쩐지 태도가 이상했어. 사귀는 남자가 없다는 건 분명 거짓말이 아닐거야. 본인도 그렇다고 했고, 절친인 정음이도 그렇다고 했잖아. 학과 다른 사람들도 목격한 사실도 없고.

근데 분명 내가 남자친구 있냐고 찔렀을 때 굉장히 놀란 표정이었단 말이야? 마치 있는데 몰래 숨기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 남자의 존재가 분명···.’

"···도훈이형?"

영철은 자기도 모르게 도훈의 이름을 발설하고는 놀란 표정으로 허겁지겁 말을 주워 담았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자조적으로 말했다.

"미쳤네, 미쳤어. 무슨 쌩뚱맞게 도훈이 형이야? 입이 주책이네."

괜히 생사람 잡는다는 생각에 영철이 실언을 자책했지만, 머릿속으론 한가지 단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아니지. 어제 내가 정음이랑 같이 귀가할 때 두 사람이 플랫폼에 남아 있었잖아. 그렇다면 둘이 따로 사라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닌데···.’

영철은 불순한 상상을 계속 확장시켰다.

‘어젯밤 내내 연락이 안 됐단 말이지. 분명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었는데 말이야.’

영철은 방금 전 보았던 아영의 피곤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일찍 잠에 든 건 절대 아니야. 마치 날을 샌 사람처럼 엄청 피곤해 보였거든. 화장도 안해서 그런지 살짝 다크써클도 보이고.’

영철은 점점 퍼즐이 맞아가는 기분이었다.

‘만약, 이건 정말 만약이지만 아영이 숨기고 싶은 비밀 애인의 존재가 도훈이 형이라면···.’

그러면 모든 설명이 가능했다.

두 사람이 따로 남은 것.

아영이 밤새 연락을 씹은 것.

점심이 다 된 시간인데, 유독 피곤해 보였던 것.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절대 들키면 안 되는 존재라는것.

‘도훈이형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아. 하지만 적어도 우리과 사람이야. 이름만 들으면 내가 바로 알만한 사람이 틀림없어.

그러니 저렇게 정색하면서 어디 가서 소문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겠지. 말해도 모를 사람이면 굳이 사족이니까.’

"하-. 씨발. 이게 뭔."

영철이 허탈한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엔조이나 즐기는 여자애 때문에 밤새 전전긍긍 고민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와, 진짜 순진하게 생겨가지고. 요새 스무살 짜리들은 뭐가 저렇게 까졌담?"

"엄마, 저 아저씨 담배 펴."

그때 놀이터 벤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영철을 향해 한 꼬마애가 소리쳤다. 옆에 있던 아줌마가 인상을 찌푸리자 영철이 허겁지겁 사과하며 담배를 비벼 껐다.

"아, 앗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아영의 아파트를 빠져나간 영철은 한 적한 장소를 찾아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생각해 보니 아영의 비밀 애인이 도훈이 형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실치 않아. 도훈이 형은 정음이랑 썸을 타는 사인데, 그 와중에 정음이랑 절친인 아영이랑 놀아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잖아? 어젯밤 두 사람이 헤어지고 다른 남자를 따로 만나러 갈 수도 있는 거니까 말이야.’

영철은 다시 논리를 가다듬으며 팩트와 추정을 구분했다.

무작정 도훈을 의심하기에는, 그가 어제 보여준 모습으론 다소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도훈이 형이 무슨 나처럼 카사노바도 아니고. 희준이한테 들으니 과에서 평판도 엄청 좋다더만 설마···.’

그와 친한 동기 왕희준의 말에 따르면 도훈은 엄친아 급이었다. 외모도 빼어나고, 운동 실력도 발군이면서, 동시에 공부까지 잘하는.

더욱이 능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평소 남자 후배들에게 평판도 좋고 여자 후배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라고 했다.

그런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가, 굳이 썸녀와 그 절친을 동시에 만나는 위험한 줄타기를 즐긴다는 것은 너무나 발칙한 상상이었다. 아니 적어도, 바람둥이긴 하지만 한 번에 한 여자만 만나는 영철에게는 믿을 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확인은 해봐야지 않을까?"

이제 영철은 아영에 대한 미련을 모두 접은 상태였다.

다만 궁금할 뿐이었다.

담배를 비벼 끈 뒤 굳이 쓰레기통을 찾아 꽁초를 버린 영철은 도훈에게 따로 깨톡을 보냈다.

-김영철 : 회장님. 어젠 잘 들어가셨어요?

-이도훈 : 이기자? 영철이니?

다행히 도훈은 실명과 다른 프로필 대화명만 보고도 영철임을 유추했다.

-김영철 : 넵, 이기자!

-이도훈 : 군인티 너무 내지마. 너 좀 있음 민간인이야.

-김영철 : 헤헤, 그래도 아직은 병장 말 호봉입니다요.

-이도훈 : 근데 어쩐 일이야?

-김영철 : 형님, 혹시 식사 하셨습니까?

-이도훈 : 점심? 아직 안 먹었는데.

-김영철 : 어제 술을 많이 마셨는지 제가 해장을 하고 싶어서요. 아직 식전이면 같이 가실래요? 곧 복학하는 것 때문에 형한테 여쭤볼 것도 있고 해서요. 형이 올해 1학기 복학하셨다고 들었거든요.

영철이 핑계를 만들어 도훈을 꼬득였다.

답변은 빠르게 날아왔다.

-이도훈 : 새끼야, 그냥 밥 사달라고 하면 되지 무슨 사내자식이 혓바닥이 그렇게 길어. 어디냐? 상대 쪽문 쪽에 콩나물 해장국 잘 하는데 있는데, 거기서 볼래?

-김영철 : 넵, 회장님. 감사합니다. 좌표만 찍어 주십쇼!

상호를 받은 영철은 다시 택시를 잡고 도훈이 알려준 가게로 이동했다.

* * *

"이 새끼 넉살도 좋네."

영철과의 톡을 끝낸 도훈은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톡에도 답장을 날리고 있었다.

-이도훈 : 그럼 오늘 저녁 뵙자는 거죠?

-황시엘 : 네. 월요일이 쉬는 날이라 뵈려고 했는데, 구단에서 갑자기 스케줄을 잡아 가지고요.

-이도훈 : 그럼 몇 시가 괜찮으세요?

-황시엘 : 오늘 일요일이라 2시 경기 시작이거든요. 5시 넘어 끝나니까 7시쯤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끝나는 대로 바로 연락 드릴게요.

-이도훈 : 네, 그럼 연락 주세요.

시엘이 주선한 소개팅이 하루 앞당겨졌다.

일요일이라 별다른 일정이 없던 도훈은 저녁에 시엘과 그 후배를 만나기까지 빈 시간 동안 영철을 만나볼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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