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2. 그해, 여름. -57-
* * *
다시 돌아온 술자리.
체감상 거의 30분 만에 돌아온 술자리는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우선 형철과 상철 형제 그리고 미나가 제법 취한 상태였다.
설거지 한다며 자리를 뜨기 전까진 셋 다 멀쩡했는데 주방에서 쓰리썸을 하는 사이 어찌나 술잔이 돌았는지 다들 얼굴이 뻘개져 있었다.
"미나야, 괜찮아?"
특히 미나는 셋 중 가장 술이 약해서인지 제대로 몸을 못 가눌 정도로 휘청거렸다.
"무슨 술을 그리 많이 마셨어?"
"별루 안 마셨어···. 딱 세 잔?"
"엉?"
미나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미나라도 고작 석 잔에 취할 리는 만무. 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상철에게 물었다.
"아···. 아껴둔 양주를 마셨더니 그리 됐네."
"양주요?"
"주종을 바꿔 양주로 넘어갔거든, 근데 도수가 제법 있다 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나가 들고 있던 언더 락 잔을 뺏어 맛을 보는데, 굉장히 독한 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보통 아이템을 복용하면 알콜이 자동 분해되면서 문자 그대로 술이 물처럼 느껴지는데, 이건 어찌나 도수가 높은지 분해가 덜 되어 살짝 알콜 맛이 올라왔던 것이다.
"윽, 이거 도수 몇 도에요?"
"45도?"
"아니, 이건 너무 독한 술 아니에요?"
"독하긴 해도 목 넘김이 제법 괜찮거든. 이 정도는 마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쩝."
상철이 핑계를 대는 모습이 얄미웠다. 굳이 술이 약한 미나에게 취할 게 뻔한 독한 술을 먹인 게 그 의도가 불순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점수를 따야 하는 이상, 화를 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아무래도 제 여자친구는 술이 약해 못 버틸 것 같아요. 먼저 재우는 편이 좋겠어요."
"벌써 재워?"
"나 안 취해써어!"
미나가 떼를 썼지만, 이미 혀가 꼬부라진 게 느껴질 정도.
나는 미나의 손목을 잡으며 귓속말했다.
"그만 마셔. 너 지금 얼굴 터질 것 같아. 정 아쉬우면 잠깐 숙소에서 쉬었다 다시 나오든가."
"쉬었다가 다시?"
"그래. 이렇게 달리다간 나중에 진짜 기절한다고. 오늘 밤도 그냥 뻗을 거야?"
기대하는 바를 넌지시 전달하자 미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젯밤 그냥 잔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잠깐 쉬었다가 온다고 한 것이다.
"저, 지금 너무 빨리 마셔서 아주 잠깐만 자고 올께용."
"미나 벌써 들어가게?"
"아니, 좀 있다 다시 온대요. 오늘 새벽 늦게까지 놀아야죠."
"그럴래?"
미나가 비틀거리는 통에 내가 옆에서 부축했다.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올게요."
"그래. 짧고 굵게 가는 것보다, 가늘고 길게 가는 편이 좋지.
얼른 방에다 재워주고 오라고."
"네."
미나를 부축해 건물로 올라가는데 이미 다리가 살짝 풀려 있었다. 제 혼자 몸을 못가눌 정도로 취한 미나를 보자 화도 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엔 내가 옆에서 못 챙겨서 벌어진 일이었다.
"어휴, 술도 약하면서 왜 이렇데 초반부터 달렸데?"
"아니 아니 나 진짜 쬐끔 마셨는데···."
미나가 억울하다는 듯 횡설수설했지만, 제대로 말도 끝맺음을 못 할 정도였다. 결국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선 미나를 들쳐 업고 가야했다. 미나는 나에게 업히자 찰싹 달라붙었다.
"앙, 좋다. 도훈이가 업어주고."
"좀 자고 나면 괜찮아 질 거야."
"으응, 나 꼭 깨워야 돼?"
"알았어."
방에 도착해 미나를 침대에 눕히자 긴장이 풀렸는지 사지를 뻗고 완전히 널브러졌다.
"음냐, 음냐."
그대로 곯아떨어진 미나를 보고 의문이 들었다.
‘두 형제가 잠깐 사이 미나를 완전히 보내버렸는데? 대체 무슨 속셈이지?’
[독한 술을 꺼내든 걸 보니 슬슬 계획을 시작한 거 같은데요?]
‘계획?’
[아까 민희양이 말했던 상철의 계획 말입니다. 술을 취하게 만들어 이곳을 난교 파티장으로 만들겠다는.]
‘흐음. 근데 미나가 다른 사람보다 술이 약하다보니 먼저 뻗어버렸나 보군.’
나는 정신 못 차리고 뒤척이는 미나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생각했다.
‘이건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잘 되다니요?]
‘상철이 페이스를 끌어 올렸으니 좀 있음 술자리가 엉망진창이 될 거야. 오히려 미나가 먼저 나가 떨어진 편이 차라리 나아.’
[주인님 말마따나 한 두 시간 있음 깨지 않을까요? 순식간에 독한 술을 마셔서 빨리 취한 것 같은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재워 버리겠어.’
[미나양을요?]
‘저번에 쓴 수면제 아이템 있지?’
[네.]
‘전송시켜봐. 미나는 이쯤에서 아웃시켜버리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아. 지금 미나를 챙기려면 내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다는 셈이니까.’
[근데 내일 아침 미나양이 깨고나면 섭섭해 하는 거 아닙니까? 나중에 다시 깨워주기로 해놓고 안 깨웠다면서요.]
‘그쯤이면 이미 이곳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을 거야. 추한 꼴은 차라리 안 보는 편이 좋겠지.’
나는 수면제 성분이 든 아이템을 받아 미나의 입에 밀어 넣었다. 일전에 재벌가 망나니 고성민을 재울 때 썼던 숙면할 수 있을 때 숙면하세요 알약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숙면을 취한 것처럼 몸이 상쾌해지지만, 코끼리도 잠재울 수 있다는 강력한 효과를 지닌 아이템이다.
약을 먹여 미나를 완전히 재운 뒤 방을 나서는데, 은지에게서 깨톡이 도착했다.
-허은지 : 여친이랑 괜히 허튼 짓하지 말고 재우고 바로 와.
상철이 술 돌리는 페이스를 보니 조만간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은지는 아마 내가 잠깐 사이 미나와 한 판 하고 올거라 걱정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바로 전 쓰리썸을 뛰고 온 이상 성욕이 쉽게 회복될 리 없었다.
‘미친. 나를 무슨 섹스에 굶주린 색마쯤으로 여기는 건가?’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죠. 함께 외국 여행을 나온 미나양하곤 사귀지도 않는 사이라지, 첫날밤 이미 은지랑 호텔 방에서 뒹굴었지, 심지어 주방에선 몰래 민희랑 뒤치기를 하다 걸리기까지 했으니까요.]
‘아니 그거야···. 자기가 시켜서 한 거잖아?’
[아무튼 은지양이 주인님을 그렇게 오해하는 건 당연하다는 거죠.]
‘젠장. 똥 묻은 개가 겨 묻었다고 뭐라 하는 꼴이네.’
미나를 재우고 복귀한 술자리는 은지 말대로 완전한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독한 양주가 몇 바퀴 돌았는지 은지와 민희마저 얼큰하게 취한 모습. 그나마 두 사람은 미나에 비해선 술이 센 편이었기에 어떻게든 버티는 형편으로 보였다.
"왔어? 도훈이도 한 잔 해야지."
"아 넵. 따라주세요."
상철은 나까지 취하게 할 속셈인지 술을 벌컥벌컥 따랐다.
스트레이트 잔이 없다는 핑계로 글라스 잔에 가득 붓는 모습이 불순한 의도가 고스란히 읽혔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술은 물이나 마찬가지. 나는 글라스잔을 그대로 원샷해 보임으로써 무력시위를 했다.
"끄으! 확실히 좀 세네요."
"이야, 술 잘 마시는데?"
"아주 꾼이네 꾼."
"술 못 마신다더니 다 뻥이었네?"
독한 양주를 글라스로 원샷 때리는 모습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특히 형철은 박수까지 쳐가며 감탄했다.
짝짝짝!
"대단해. 어제도 느꼈지만, 여기서 술이 가장 센 거 같아. 주량이 대체 어떻게 되나?"
형철은 평소에도 술을 즐겨 마시는 편이므로, 술 잘 마시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으로 여겨졌다. 점수를 딸 기회라고 생각한 나는, 좀처럼 보이지 않던 술부심을 부렸다.
"주량이요? 그게 측정이 되는 건가요?"
"뭐라고?"
"아니. 제가 취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와하하하! 젊은 친구가 제법 허세가 있구만, 그래!"
"허세 아니고, 정말입니다."
"최대 얼마까지 마셔봤는데."
"소주로 1짝 정도?"
"1짝?"
"네. 서른병 들어가는 플라스틱 궤짝요."
"와, 진짜로?"
옆에서 듣고 있던 민희가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소주 한 궤짝을 혼자 다 마셨다고?"
아무래도 나가요 출신인 민희로선 술 좀 마신다는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접해왔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소주 한 궤짝은 거의 도시 전설로 내려오는 수준일 것이다.
"응."
"언제?"
"1학년 때 MT에서?"
"와···. 말 도 안 돼."
"도박 잘하는 거 보니 평소에도 블러핑이 너무 심한 거 아녀?"
상철도 못 믿겠다는 듯 허세로 몰아갔다. 왠지 여기서 주당같은 면모를 과시하면 형철에게 톡톡히 점수를 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이 술 잘 마시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진짜 한 번 보여드려요?"
"에이, 됐어. 또 그러다 여자 친구 따라서 뻗을라고."
"맞어. 여기서 소주 한 궤짝을 어떻게 구해? 먹고 죽을 소주도 없는데."
나는 상철이 들고 있던 독한 양주를 가리켰다. 두 병이 들어있던 상자에서 한 병은 진즉 끝났고, 나머지 한 명은 절반쯤 남아있었다.
"제가 저거 반병 원 샷 때리면 어때요?"
"저걸? 45도짜리를 원 샷 한다고? 아무리 반병이라도 저건 무릴텐데."
"너무 나간 거 아냐?"
"그래. 도훈아. 무리하지마."
다들 만류했지만, 그럴수록 호승심을 보이는 편이 형철의 점수를 딸 수 있는 길이었다. 실제로 그는 다른 사람과 달리 할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도발을 걸어왔다.
"진짜 도훈이 자네가 양주 반병을 원샷 때리면, 내가 오늘 통크게 쏨세."
"뭘 쏘실 건데요?"
나도 기세좋게 받아쳤다.
"뭐든, 원하는 건 말만하라고."
그때 잠자코 있던 은지가 형철에게 눈치를 줬다.
너무 막나가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렇지, 내 마누라만 빼고 말이야. 하하핫!"
"일단 마시고 나서 말씀드리죠."
나는 호기 좋게 양주병을 받아 들고는 단숨에 목뒤로 넘겼다. 보리차 같은 갈색의 양주가 꿀꺽꿀꺽 들어가는 모습에 다들 경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45도짜리 양주다.
다들 이미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술이 얼마나 독한지는 알고 있는 상태. 그걸 물처럼 꿀꺽꿀꺽 마시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저, 저 진짜 저걸?"
"우아. 사람이야 뭐야?"
하지만 워낙에 술이 독했기 때문에 알콜분해 아이템으로도 상당한 압박이었다. 어지간한 술은 물처럼 느껴지는 분해 아이 템으로도 끝에 살짝 쓴맛이 났다. 아마도 소주 한잔 정도 분량은 몸으로 흡수되는 기분이었다.
"꺼억!"
실제로 양주 반병을 원샷 때리자 형철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걸? 진짜로 마셨네?"
"우아, 뭐야 진짜 도훈이."
"너 술꾼이었어?"
"기가 막히는 구만."
나는 일부러 속이 쓰린 척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사기적인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끄윽, 머리가 핑 돌긴 하네요. 어쨌든 다 마셨죠?"
"대단하구만. 자네처럼 술 잘마시는 사람은 처음 봤네. 혹시 우리 회사 들어올 생각 없나?"
형철은 진짜로 내가 마음에 드는 듯 엄지를 치켜세웠다.
"제 전공이 체육교육이라···."
"상관없어. 바로 상무로 꽂아줌세."
"상무요?"
"술 상무 말이야. 술 접대만 잘하면 그만이거든."
"여보!"
어처구니없는 입사제의에 은지가 호통을 쳤지만, 형철은 막 무가내였다.
"왜? 사회생활 하면서 저렇게 술 잘마시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라고. 진짜 탐나는데."
"하하. 제가 임용시험 떨어지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아무튼 약속은 지키시는 거죠?"
"약속?"
"네. 방금 전에 제가 이거 다 원샷 때리면 원하는 거 들어주신다면서요. 형수님만 빼고."
"하하! 그래, 좋아. 내기는 내기니까. 원하는 게 뭔가?"
[뭘 바라시려고요?]
‘있어봐. 지금은 형철의 호감도를 따는 게 우선이니까.’
"앞으로 제가 형님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뭐라고?"
"제가 살면서 형님처럼 성공한 분을 만날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해서요. 그래서 이 기회에 평생 형님으로 모실까 합니다."
"아니, 이 친구가."
형철은 나의 소박한(?) 소원에 몹시 만족한 표정이었다.
옆에서 있던 은지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감정을 숨겼다.
"그래. 원하면 얼마든지. 한국 가서도 언제든 필요할 때 연락만 하라고. 갑자기 대학생 동생이 하나 생겼구만."
"감사합니다, 형님."
"하하, 도훈이 이 친구 보면 볼수록 진국이네. 어제 도박할 때부터 범상치 않더니만, 아주 배포가 커!"
형철은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한참 껄껄 거렸다. 이쯤에서 변화된 호감도를 체크해볼 필요가 있었다.
‘로시. 현재 형철이 호감도 확인.’
[넵.]
잠시 후 디스플레이에 뜬 형철의 호감도를 보자 72로 변경되어 있었다.
[오! 미션 최저치를 넘겼습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형철은 동생 상철이랑 달리 선이 굵고 호탕한 성격이거든.
쉽게 마음을 열지도 않지만, 한 번 주면 끝까지 가는 타입이랄까?’
[오.]
‘어젯밤 블랙잭에서 보여준 대담함, 그리고 오늘 양주 원 샷에서 보여준 패기. 거기서 형철에게 점수를 크게 딴 것 같아.’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마지막 소원에서도 형님이라고 부르겠다는 한 마디에 뻑 갔을 거야. 오히려 거기서 쪼잔하게 용돈이나 받으려고 했다던지, 사리사욕을 드러냈으면 저렇게 나를 믿지 않았겠지.’
[이제 그럼 상철의 호감도만 갱신하면 끝이군요.]
‘그렇지.’ 다시 술이 돌았고, 사람들은 점점 취해갔다.
그때 상철이 일어서더니 잠시 소변을 보겠다고 구석에 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를 기다렸다 따라섰다.
"뭐야? 도훈이 너도 노상방뇨하려고?"
"네 형님."
"어쭈. 나도 얼결에 형님이야?"
"형철이 형님 동생분이니 저에겐 둘째 형님이나 마찬가지죠."
"크크. 난 형은 모르겠지만, 난 그런 호칭 별로."
상철의 성격이 바로 나왔다.
그는 허울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타입은 처세에 능할 뿐 아니라 아부를 잘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넙죽넙죽 형님이라고 떠받들여봐야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딱히 정을 주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옆에서 소변을 누는 척 기다리고 있다가 상철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 드릴 말씀이."
"응?"
그에게는 득을 주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