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0. 그해, 여름-35- >
***
"어? 제수씨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화장실을 다녀온 형철은 갑자기 등장한 민희를 보고 물었다.
"잠이 안 와서요."
"그랬어? 야, 넌 또 왜 슬롯머신에 앉아있냐?"
"카드 게임 혼자 하려니까 재미가 없더라고. 형, 나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잠깐 이것 좀 맡아줘."
"엥? 뭔 소리야?"
"아니 지금 코인 넣어 놓은 게 있어서 계속 돌려주기만 하면 돼. 잃어도 상관없고.‘
상철은 민희와 짠 대로 형철이 카지노에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만 남겨두고 밖으로 나갔다. 엉겁결에 슬롯머신 앞에 앉게 된 형철은 과하게 차려입은 민희를 보고 뻘쭘해 했다.
"거참, 녀석도…."
"그래도 아주버님 오셔서 다행이네요. 화장실 급하다고 저보고 대신해달라더라고요. 전 할 줄도 모르는데."
형철은 민희와 안면만 있지 단둘이 얘기한 적은 거의 없으므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그저 머신의 레버만 당기며 그녀의 야한 의상을 힐끔거릴 뿐이었다.
‘…무슨 옷이 홀복도 아니고.’
민희는 홀터넥 원피스라 불리는 종류의 몸에 딱 붙은 옷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가슴 윗골 부분이 가위로 자른 것처럼 구멍이 파여있어 무척 야해 보이는 의상이었다.
"참, 제수씨 무슨 일한다 그랬지?"
"학원에서 일해요."
"맞다, 선생님이랬나?"
"선생님이라기엔 좀 그렇고…. 그냥 학원 강사죠."
"선생이 별건가? 애들 가르치면 다 선생님이지, 하하."
어색함을 풀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으나 형철은 아무리 봐도 민희가 학원 강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애들 가르치는 데 홀복처럼 입고 다니는 선생이 어딨어? 상철이 이 새끼 공사 당하고 있는 거 아니야?’
본인 역시 동생을 함정에 빠뜨릴 계획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와중에 동생이 호구질을 당할까 우려가 되는 형철이었다.
가족끼리 서로 뒤통수 때리는 건 상관없지만, 쌩판 모르는 남에게 빨래질 당하는 꼴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름의 형재애랄까?
불쑥 의심이 든 형철이 문득 상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업소 출신인 줄 알았다니까? 아주 스킬이…
동생에게 그런 말까지 들은 터라 형철은 더 의심이 들었다.
‘풍기는 분위기도 야시시하고, 아무리 봐도 학원에서 강사나 하고 있을 와꾸는 아닌데….’
형철은 민희를 떠보려는 듯 물었다.
"참, 저희 동생하곤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거예요?"
"아…. 그게요."
물론 상철 역시 허술하지 않았다. 그는 민희를 미끼로 던질 계획을 세울 때부터, 디테일한 설정을 미리 잡아둔 상태였다.
민희가 연습한 대로 말했다.
"제가 실은 면허 딴지 3달밖에 안 됐거든요."
"운전면허요?"
"네. 아직 초보운전인데 그날따라 하필 비가 와 가지고…."
우연히 상철의 고급 세단을 후방 추돌로 박아버린 민희.
놀라서 망연 자실해 하는데, 상철이 차에서 내려 자기를 보고 그랬다고 한다.
"…예쁘니까 그냥 가시라면서."
"엉?"
민희는 일부러 얼굴을 붉히는 연기까지 하며 조그맣게 다시 말했다.
"진짜로 그러더라고요. 제가 자기 스타일이라고. 다친 데도 없고 범퍼는 자차로 처리할테니까 그냥 가면된다고."
"허허, 상철이 이 새끼 이거."
보통 사람이 들으면 어이가 없는 이야기였으나, 오히려 형철은 그 대답을 듣고는 역시 동생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형철은 상철이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은지를 많이 닮긴 했어. 몸매도 몸매지만, 눈매가 참 비슷하단 말이야?’
상철이 오래전부터 제 형수를 눈독 들인다는 걸 알고 있던 형철이기에 마누라를 닮은 민희의 외모에 어느 정도 납득을 하고 말았다.
‘하여간 변태 같은 새끼. 하필 골라도 꼭 은지 닮은 애를….’
"그땐 몰랐는데 원해 후방추돌은 제 과실이 백프로더라고요."
"그쵸. 후방이면."
"그래서 너무 죄송하고 미안해서 따로 연락을 드렸어요."
"연락을요?"
"나중에라도 병원에 가시게 되면 말해달라고 연락처를 교환했었거든요."
"아하."
"그래서 사죄의 의미로 저녁 식사를 한 번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자상하더라고요. 자신감도 넘치고. 전 그런 스타일 좋아하거든요."
듣고 있던 형철이 우스갯소리로 물었다.
"혹시 들이 박은 차가 너무 좋아서 그랬던 건 아니죠? 그거 1억 넘을 텐데."
"아, 아니에요! 저는 초보라서 어떤 차가 비싼 찬지도 잘 몰라요."
"엠블럼만 봐도 알지 않나?"
"엠블런스요? 아니, 그렇게 큰 사고는 아니었는데…."
민희가 무심결에 뱉은 말에 형철이 속으로 이상한 생각을 품었다.
‘뭐야? 지금 엠블럼하고 엠블런스를 구분 못 한거야?’
다시 의심이 들자 겨우 쌓였던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사람을 잘 믿지 않는 형철의 생격이 발동된 것이다.
‘아무리 대가리가 빠가여도 학원 강사쯤 한다는 사람이 그걸 몰라? 그러고 보니 너무 시나리오가 좋은데?’
형철은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스토리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것에 오히려 의문을 품었다. 흔한 로맨틱 코미디물의 클리셰처럼. 너무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게 더 수상했다.
형철은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적당히 웃어넘겼다.
"아, 그치그치. 큰 사고는 아니랬지?"
"네, 네."
"근데 제수씨는 그럼 전공이 뭐예요?"
"네?"
"아니 학원에서 무슨 과목 가르치냐고요."
"…수학요."
민희는 영어를 조금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캐릭터를 잡을 때도 수학 강사로 잡았다. 괜히 영어라고 했다가 싸이판에서 바로 뽀록 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 수학. 제수씨, 공부 잘했나 보네."
"아, 아니에요."
‘공부는 무슨…. 고졸도 못하고 중퇴인데….’
룸망주를 꿈꾸던 민희는 당연히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아니, 고등학교 2학년 때 중퇴를 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최종학력은 중졸이었다. 수학은 초등학교 분수 단원에서 진작에 포기했던 과목이고.
"잘됐네."
"네?"
"아니, 이거 777 뜰 확률이 얼마나 돼요? 가운데 3개만 나오면 되는데."
형철이 계속 레버를 당기고 있었기 때문에 슬롯 머신 화면에선 화면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형철은 미리 나온 두 개의 7을 홀딩하고 나머지 하나가 나올 때까지 주구장창 뽑는 중이었다.
조건을 따지고 비교적 간단한 문제.
이는 주사위를 굴렸을 때 특정 숫자가 나올 확률을 찾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테스트였다.
하지만 당연히 신분을 위장하고 있는 민희로서는 질문의 의도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어… 제가 도박 쪽은 잘 몰라서.‘
"…아. 그러시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형철이 생각했다.
애초에 도박은 수학적인 확률게임이고, 자신의 질문은 조금만 생각하면 초등학교 6학년도 대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이다.
‘직업이 수학 강사라고? 웃기고 있네. 어디서 감히….’
몇 마디 대화만으로 민희의 거짓말을 간파한 형철은 이제 그 저의가 궁금해졌다.
‘진짜 돈 많은 남자 벗겨 먹으려는 꽃뱀인가? 아니면….’
전자라면 눈에 빤히 보이니 다행.
자기가 아는 상철은 절대 호락호락한 타입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여자를 밝히긴 하지만 호구처럼 당하고 다니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더 큰 문젠데.’
두 번째 가능성은 민희가 사실 상철이 섭외한 인물이라는 것. 형철은 정말 그런 경우라면 이번 부부동반 여행에서 음모를 꾸민 사람이 자기 혼자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새끼 봐라? 마냥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건가?’
형철은 두 번째 가능성을 더 높게 쳤다.
몇 번의 질문만으로 곧바로 정체가 간파될 수준의 허술한 민희가, 벌써 3개월째 동생을 감쪽같이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상철은 자기보다 똑똑했으니까.
분위기가 살짝 이상해진 걸 느낀 민희가 무리수를 던졌다.
레버를 당기고 있던 형철의 손에 실수한 것처럼 가슴을 밀착시킨 것이다.
뭉클!
커다른 가슴이 손등에 닿자 민희가 놀란 표정으로 물러섰다.
"어머,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어색한 행동은 계속 민희를 의심하던 형철에게 확신을 갖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 씨발. 누굴 진짜 좆밥으로 아나. 작업을 저렇게 티나게 하면 어떤 머저리가 속겠어? 상철아, 니가 날 너무 우습게 봤구나.’
그 뒤로 민희는 계속 실수하는 것처럼 형철에게 스킨십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꿍꿍이를 알아 챈 형철에게는 어떠한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잘 됐어. 솔직히 재산 때문이라곤 해도 형으로서 미안한 감정이 적잖이 있었는데, 어차피 놈도 나를 견적 따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달까.’
상철은 그 뒤 한참 만에 자리로 돌아왔다. 형철은 아무렇지 않게 그를 반기며 카지노가 닫을 때까지 여흥을 즐겼다.
***
"이제 갈게요."
"하아, 하아…. 너 진짜 끝내준다."
"그럼 이만."
도훈이 서둘러 나가려고 하자 아직까지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은지가 말했다.
"내일도 여기 묵을 거지?"
"예?"
"이 호텔 말이야."
"…네."
"그래. 그럼 또 보자고."
"……."
두 번이나 기운을 뺀 도훈은 입을 다물었다. 벌써 4시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곧바로 방을 빠져나와 본래의 숙소로 복귀했다. 물론 나가는 길에 문패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오자 다행히 미나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중간에 한번도 깬 적이 없는 듯 방을 나설 때 모습 그대로였다.
도훈은 몰래 침대로 기어들어가 옆에 누웠다.
‘젠장, 별로 내키지도 않은 섹스를 두 번씩이나 봉사하고 올 줄이야.’
[업적을 노리신 거니까요. 생각대로 안 됐을 뿐이지.]
‘그나저나 저 아줌마는 너무 밝히는 거 아냐? 남편이랑 여행와서 젊은 남자랑 붙어먹을 생각을 하다니. 과감하다 못 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죠.]
‘일부러?’
[남편을 증오하니까요. 오히려 보란 듯이.]
‘흠. 그 남편 새끼도 정상은 아니야. 동생의 여친을 따먹을 궁리를 하고 있잖아.’
[총체적 난국입니다. 그들 부부는요.]
‘근데 아직도 의문점이 남아있어.’
[어떤?]
‘왜 점괘가 대흉이냐는 거지.’
[아.]
‘지금까지의 흐름만 봐선 그렇잖아. 업적이 두 개나 걸린 은지가 제 발로 나를 찾아오질 않나, 이렇게 공략이 쉬운 적이 없었다고.’
개중에 쉬운 업적도 있었지만, 어려운 업적의 경우 몇 달을 공을 들인 적도 있었다. 심지어 그러고도 아직 미완인 채로 남겨둔 것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 개나 되는 업적이 떠먹여 달라고 조르는 형국이었다. 도훈은 그 점이 너무나 수상했다.
[어쩌면….]
‘응?’
[어쩌면 대흉은 허은지가 아니라 그녀 주변 인물들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요?]
‘남편 말이야? 그 짜리몽땅한 땅딸보 새끼 말야?’
[외모만 보고 방심해선 안 됩니다.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은 모르니까요.]
‘왜? 난 딱 보니 알겠던데. 그 집안 형제 둘 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고생도 모르고 자란 부잣집 망나니들이잖아. 제 까짓것들이 뭘 어쩌겠어?’
[그런 편견이 무서운 겁니다. 전생의 주인님을 떠올려 보시죠.]
전생의 이도훈은 158의 단신. 외모는 볼품없었지만 아이큐는 전혀 꿀리지 않았다. 머리가 워낙 좋아 전국 단위급 천재소릴 듣기도 했었다.
[주가 전생의 주인님을 보고 키가 작다고 우습게 봤다면, 주인님은 그런 평가에 과연 동의했을까요?]
‘음…. 듣고보니 그렇네.’
[그러니 부디 신중하시고 또 조심하십시오. 가장 만만하게 봤던 상대가, 의외로 난적일수 있으니까요.]
‘으음. 알았어. 역시 나의 훌륭한 비서구나.’
[과찬이십니다.]
도훈은 잠을 청하며 생각했다.
허은지 공략에 걸림돌이 과연 무엇일지 파악해 보겠다고.
대흉을 대길로 바꿀 전환점이 어쩌면 그것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므로.
***
"일어나, 도훈아."
"으, 응…."
"좀 있음 호텔 조식 타임 끝난단 말이야. 많이 피곤했어?"
"조식?"
도훈이 눈곱을 떼며 겨우 눈을 떴다.
미나는 모르겠지만, 어젯밤 무려 3번의 섹스를 한 도훈에게는 당연히 피곤할 수 밖에 없었다.
‘으, 진짜. 은지한테 너무 기빨려가지고.’
"응. 우리 호텔 조식 서비스 신청 되있어. 근데 뷔페가 11시까지만 하거든."
"지금 몇시야?"
"지금 10시 반. 이제 30분 밖에 안 남았어. 나 배고프단 말이야."
"아! 이런. 금방 준비할게."
도훈이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뛰어나갔다.
싸이판 도착 첫날부터 아침을 굶을 순 없는 일이었다.
후다닥 세수를 마치고 간편한 차림으로 호텔 뷔페로 향한 시간은 10시 45분. 가까스로 마감을 맞출 수 있었다.
"오, 여기 조식 괜찮아 보이는데?"
"응. 투숙객들 후기 보니까 엄청 맛집이래. 그래서 여길 고른 것도 있어.‘
도훈과 미나가 맛있는 음식을 보고 신이 나서 접시에 담고 있는데 또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입장했다. 바로 형철과 상철형제 커플이었다.
뒤늦게 온 방문객으로 매니저가 난색을 표하더니 도훈에게 영어로 물었다. 점심 장사 준비 때문에 테이블을 치워야 하는데, 늦게 온 일행들과 합석을 해줄 수 있겠냐는 정중한 요청이었다. 다행히 같은 한국 사람 같다면서.
"뭐래 도훈아?"
영어를 잘 못 알아들은 미나의 물음에 도훈이 은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 팀이랑 합석해달라네?"
은지가 도훈을 보더니 몰래 혀를 날름거리며 윗입술을 핥았다.
< 1120. 그해, 여름-3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