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3. 그해, 여름-28- >
***
나랑 구면이라고?
나도 모르게 여자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기억에 없는 얼굴이다.
‘로시, 누구지? 만난 여자가 하도 많아서 헛갈리는데?’‘
[저도 잘….]
사람은 까먹어도 인공지능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그 말은 나와 저 여자가 초면이라는 소리다.
"앗…. 실수, 내가 착각했나 봐요. 아는 사람을 많이 닮아가지고."
여자가 갑자기 말을 바꿨다.
에이씨, 괜히 긴장했네.
사실 외국 나가면 아는 사람을 전혀 안 만날 것 같지만, 은근히 세상은 좁다. 당장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일전에 만난 스튜어디스 보영을 만나면 어쩌나 싶은 걱정까지 했다.
"아, 네."
"신혼여행 가시나 봐요?"
"네?"
"아까 티케팅 할 때 보니…."
초면인 여자는 자꾸 말을 걸어 왔다. 아마 내가 미나와 함께 서 있는 걸 본 모양. 남편은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는데, 부인은 미나까지 함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여자친구에요."
"아하. 어쩐지 어린 것 같더라니. 여자친구 분이 하도 예뻐서 인상 깊었거든요."
"감사합니다."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
자기보다 어리고 예쁜 미나를 의식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쪽도 되게 미남이시고."
"네?"
대체 뭐하자는 수작일까? 유부녀라는 걸 뻔히 아는데 추파를 던지는 모양새가 심상찮다. 하긴, 이런 여자들이 있다.
소위 흘리고 다니는 부류들.
넘치는 끼를 주체 못해 마음에 드는 남자만 보면 은근슬쩍 호감을 드러낸다. 굳이 불필요한 말 한마디 더 걸고, 괜히 친한 척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무조건 바람으로 연결된다는 뜻은 아니다. 타고나길 남자를 밝히는 데다 남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싶은 성향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봐주길 바라며, 끊임없이 여성으로서 매력을 어필한다. 결혼을 했던, 애인이 있건 그 습관을 버리지 못 한다.
"부럽네요, 선남선녀 커플이라니."
"하하, 별말씀을."
적당히 둘러대며 말을 끊었다. 굳이 이런 여자와 엮여서 좋을 게 없다. 더구나 남편도 함께 있는 상황에서 원치 않은 오해를 살 수 있다. 피곤해질지도 모른다.
"호텔은 어디로 잡았어요?"
"네?"
"오늘 밤 묵을 호텔요. 레이트 체크인 하셔야 하지 않아요? 도착하면 자정인데."
여자는 간만에 말 걸 사람을 만났는지 쉽게 나를 놔주지 않았다. 오줌을 참고 있어 곤란했지만, 일단 매너상 대답을 해줬다.
"홀리데이 인 싸이판요."
"공항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어? 아세요?"
"픽업 서비스도 해주고. 맞죠? 신기하다. 저희도 거긴데."
"네."
우연히 첫날 묵을 호텔이 우리와 똑같았다.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됐네요. 좀 있다 같이 공항에서 이동하면 되겠네."
뭐가 잘 됐다는 건지 모르지만, 여자는 다소 신이 난 표정이었다. 이쯤 되자 슬슬 나도 그녀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왜 저러는 걸까요? 저 여자 유부녀 아닙니까?]
‘그러게. 배 나온 남편만 보다가 젊고 잘생긴 총각보니까 마음이 동했을까나?’
[불필요한 오해를 살까 걱정됩니다. 적당히 끊으시죠.]
‘그래야겠어. 어차피 공략대상도 아닌데.’
나는 양해를 구하며 화장실 문고리를 잡았다.
"저, 제가 좀 급해서."
"아차,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반가워서."
여자는 순순히 자릴 비켜주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화장품 냄새가 진하게 남아있었다.
‘뭐야? 여기서 화장이라도 고친 건가?’
다들 잠든 비행기에서 화장을 고치는 여자라니.
남 시선을 상당히 신경쓰는 타입일지도.
손을 씻고 밖으로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아직 그 유부녀가 밖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
"또 만났네요. 인연이가?"
"네, 네?"
"농담이에요. 깜빡하고 립스틱을 두고 와서."
여자는 나를 지나쳐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어디선가 립스틱을 찾아왔다.
"찾았네요."
"네. 그럼."
최대한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여자가 나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네?"
"혹시 고향이 대전인가요?"
"예?"
"아까 봤다는 그 닮은 사람요. 고향이 대전이었거든."
당연히 내 고향은 대전이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 몸의 원주인 이도훈의 고향도 대전이 아니다.
"아닌데요."
"아…. 그렇구나. 실례했어요. 나는 또 예전에 알 던 사람인가 했네."
여자는 아쉽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했다.
"암튼, 같은 호텔에 묵게 된 것도 인연인데 친하게 지내요. 저는 허은지라고 해요."
"아…. 네. 이도훈입니다."
느닷없는 통성명에 은지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빤히 보는데 은지가 양볼에 보조개를 피우며 끼를 부렸다.
"아이참, 손 부끄럽게…. 악수하자고요."
"아, 네."
은지는 기어코 악수를 받아내더니 내 손을 꼭 쥐었다.
살짝 힘을 주어 잡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 두툼한 것 봐. 확실히 키가 크니까…."
"아, 네, 넵."
은지는 계속 민망한 소릴 하더니 배시시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암튼 반가웠어요, 도훈씨. 나중에 차에서 봬요."
"…네."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미나가 잠결에 뒤척였는지 담요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다시 주워 그녀를 덮어주고는 한참 방금 만난 이상한 유부녀를 떠올렸다.
‘대체 뭐 하자는 플레이지?’
[아무래도 수상한데요.]
‘그러니까. 수법이 영….’
[수법이라뇨?]
‘처음 만난 사람보고 구면인 척 떠보는 거 말이야. 그거 전형적인 수법이거든. 괜히 말걸기 위한.’
[그렇군요.]
‘그리고 좀 이상한 게 도중에 말 끊고 화장실 들어갔는데 밖에서 기다렸잖아."
[화장실에 화장품을 두고 왔다고….]
‘아니. 없었어.’
[네?]
‘립스틱은 거기 없었다고. 그 좁은 선반 위에 여자 립스틱이 놓여 있었으면 내가 눈치를 못 챘을까봐. 그냥 손에 쥐고 있다가 다시 들고나온거야.’
[아니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그러니까. 그리고 결정적인 건 악수할 때.’
[악수할 때요?]
‘남자랑 달리 여자들에게 악수는 흔한 인사법이 아니야. 초면인 경우 더 그렇지. 남자 손을 덥석덥석 잡는 여자가 얼마나 있겠어?’
[하긴….]
‘거기다 악수를 하는데 손에 힘을 꽉 주더라고.’
[그게 저도 이상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강력한 인상을 남기고 싶은 거지.’
[인상이요?]
‘자길 기억하게 하려고.’
[흐음…. 곰곰이 듣고보니 의도적으로 접근한 느낌이 있는데요?]
‘나도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 내가 미나랑 같이 놀러 온 것은 여자도 이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마치 상관없다는 듯이 대놓고 들이댔잖아.’
[주인님이 마음에 들어서?]
‘마음에 든다고 처음 본 남자한테 어필을 한다? 그것도 정상은 아니지.’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필 묵는 호텔도 같은 곳이니….]
‘내가 홀레디이 인 싸이판에 며칠 묵기로 했지?’
[오늘 밤 포함 모두 2박 3일입니다. 그 뒤론 다른 곳으로 옮기고요.]
‘흠. 왠지 귀찮은 일에 휘말려 들것 같은 느낌인데….’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물론 아직까지 심증일 뿐이다. 하지만 아까부터 자꾸 저들 부부와 엮이는 게 영 불길했다. 형제는 스와핑 모의를 하는 미친 변태들이고, 유부녀인 부인은 처음 본 총각에게 추파나 던지는 도화살이 가득한 탕녀.
게다가 혼자라면 모를까, 이번에는 미나까지 함께하는 여행이다. 찝찝한 마음을 떨칠길이 없었다.
‘로시, 스킬 준비해.’
[네? 여기서요? 어떤….]
‘귀기묘묘.’
귀기묘묘.
무당인 장군을 공략하면서 획득한 스킬이다.
앞일의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으며 대흉(大凶), 흉(凶), 평(平), 길(吉), 대길(大吉)의 다섯 단계로 가까운 미래의 운세를 가늠해준다.
워낙에 사기적인 능력이라 한 번 사용하면 한 달간 봉인되는 강력한 예지 스킬이기도 하다.
[주인님이 많이 불안하신가 보군요.]
‘당연하지. 내 일도 아닌데 괜히 휘말리는 게 얼마나 짜증나는데? 이들 부부와 엮이면 어떨지 점괘나 한 번 봐줘.’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스마트 워치에 점괘가 떴다.
[대흉(凶)]
‘대흉?’
[아…. 이거 좋지 않은데요.]
‘최악이란 소리야?’
[좋지 않은 인연은 확실하군요. 최대한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때 글자가 사라지고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매우 사나운 운세입니다. 하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보세요.-
처음보는 메시지였다.
일전에도 스킬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는 단지 길흉화복만 표시될 뿐이었다.
‘오잉? 이건 뭐지? 스킬이 바뀌었어?’
[아닙니다. 동정남의 펜던트로 인해 사주풀이가 추가된 것 같습니다.]
‘오, 스킬 강화말이야?’
[넵.]
동정남의 펜던트는 보유 스킬 전체를 강화하는 특성이 있다.
자주 쓰지 않아 몰랐는데, 귀기묘묘 스킬 역시 업그레이가 된 듯 했다.
‘가만있자, 이게 전부야?’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보다 상세한 해설을 위해선 스킬을 보다 강화하셔야 합니다.]
‘흐음…. 전화위복이라니. 이게 대체….’
뜬구름 잡기는 매한가지였다.
대흉이 떴다는 건, 어쨌든 최악이라는 소린데 전화위복이라니? 설마 저들을 이용해 업적이나 미션을 해결할 수 있다는 소리일까?
[주인님께서 확실하지 않을 땐 도박을 걸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제가 볼 땐 저들을 무시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긴 한데….’
아직은 저들인 나와 어떤 식으로 엮이게 될 줄은 모른다.
다만 전화위복이라는 말에 여지가 남았다.
‘흐음.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니 일단 지켜보자고. 적당히 거리두기를 하면서 혹시나 미션이나 업적이 걸리면 그때 고민해 보는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가 말했잖아. 운세대로만 인생이 흘러가진 않는다고. 변수는 내가 만드는 거야. 기왕 업적 도전하러 가는 데 똥된장 구분하고 다 재끼면 남는 것도 없겠지.’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당연히.’
아무래도 싸이판에서 첫 번째 미션은 저들 부부와 얽히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
"와, 엄청 시골이구나, 여긴."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온 미나가 소감을 말했다. 비행기를 내린 후에도 한참 동안 검색대를 통과하느라 진이 빠진 직후였다.
"그러게. 공항이 생각보다 작네요."
싸이판 공항은, 국제공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외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긴 하지만 조그만 섬이다 보니 확실한 사이즈가 인천과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다만 한국과의 차이점은 저녁 바람이 상당이 신선하다는 것이었다. 열대야에 시달리는 한국에 비하면 이곳의 평균기온은 상당히 쾌적한 듯했다.
"우앙, 얼른 바닷가 가고 싶다. 참, 도훈이 너 왜 자꾸 존댓말해?"
"응?"
"아니. 말 편하게 하기로 했잖아. 가만보니 자꾸 말을 못 놓네."
"아 참 그랬지?"
"말 편하게 해. 난 괜찮으니까. 남들 앞에서 네가 존댓말 하면 내가 나이들어 보인단 말이야."
"알았어."
"히히."
미나는 핸드폰의 비행기모드를 폴더니 수신을 잡으며 물었다.
"넌 폰 안 켜?"
"나 로밍 안했는데?"
"안 했다고? 왜? 한국에서 연락오면 어쩌려고?"
‘그냥. 딱히 중요한 연락도 없고. 급하면 깨톡으로 문자 하겠지."
"아…. 그럼 내가 핫스팟 열어줄 테니까 잡고 있어."
"응."
미나는 도훈을 위해 핫스팟을 열어주더니 핸드폰을 뚫어지게 보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공항 주변으로 픽업차량을 보낸다고 했는데…. 어디지?"
"저기 아냐?"
도훈이 사람들이 모인 곳을 가리켰다.
"맞네. 10번 정류장. 어떻게 알았어?"
"아니 한국 사람들 모여있길래."
사실 도훈은 비행기 안에서 만난 은지를 본 것이었다. 그들 부부와 일단의 한국인들이 캐리어를 손에 쥐고 우르르 모여 있었다. 척 봐도 열 명은 되 보이는 듯 했다.
도훈과 미나는 짐을 끌고 정류장 앞에 섰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들이었는데, 자기 팀끼리 서로 잡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그때 은지가 도훈을 보더니 아는체를 하며 눈웃음을 흘겼다. 남편이 옆에 있는데도 과감한 태도에 도훈은 곧바로 시선을 외면했다.
‘대담한 거야, 무모한 거야?’
[들키면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요?]
‘어느 쪽이건 위험한 것은 매한가지지. 일단 쌩까야겠다.’
도훈이 일부러 은지의 시선을 피해 등을 돌리더니 미나에게 물었다.
"잘 잤어? 비행기에서 계속 졸던데."
‘응. 나 원래 머리만 대면 금방 자는 편이야."
"그렇게 오래 자면 잠 안 올텐데?"
미나가 도훈에게 찰싹 붙으며 속삭였다.
"왜? 자긴 그럼 자려고 했어?"
‘아…."
도훈은 갑작스러운 호칭에 당황했지만, 미나는 노골적으로 여자친구 행세를 했다.
"나 안 재워 줄건데?‘
"내, 내일 스케줄이…."
"히히, 그럴까봐 내일 오전은 일정을 다 빼뒀지. 자기가 그랬잖아. 빡빡하게 하지 말고 쉬엄쉬엄 하자고. 나도 생각해 보니까 그게 더 좋을 것 같아."
"으음…."
미나의 적극적인 태도에 도훈은 또 다시 임신 공격을 떠올렸다.
‘어휴, 첫날 밤부터 아주 쪽쪽 빨리겠구나. 미나는 나랑 여행을 온 게 아니라 씨를 받으러 온 것 같은데?’
[으음, 작정한 여자게 제일 무섭긴 하죠.]
"어, 저기 저 버슨가 보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했고, 정류장에 기다리던 승객들은 차례로 버스에 올랐다.
< 1113. 그해, 여름-2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