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2. 그해, 여름-27- >
***
"그 건은 어떻게 됐어?"
"어떤?"
"대성실업 납품 건 말이야. 이번에 사이즈 좀 크다며?"
"어. 깔끔하게 끝냈지. 납품 담당자 뒷돈 찔러주니 알아서 처리해 주더라고."
"박 차장? 하-. 그 새끼 하여간 돈은 존나게 밝혀요. 그러니 그 나이에 머리가 홀라당 벗겨졌지."
"형. 근데 나도 요새 좀 이마 쪽 조금 빠지는 거 같던데?"
"웃기지 마. 우리 집안에 탈모 유전자가 어딨어?"
"외할아버지 탈모 아녔어?"
"그랬냐?"
키 작고 배 나온 두 형제는 흡연실에서 잡담을 나누었다. 둘 다 골초였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가튼 내내 피울 것을 한 번에 몽땅 피울 것처럼 끊임없이 줄담배를 피워댔다.
두 형제는 뒤늦게 흡연실로 들어온 도훈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떠들기 시작했다.
"상철아. 근데 니 여친 쩔더라? 이번엔 진짜 결혼까지 가냐?"
"몰라 형철이 형. 아무리 그래 봐야 형수님만 할까? 나도 형수 같은 여자 만났음, 진작 노총각 신세 벗는 건데."
"인마. 가끔 보니까 좋아 보이는 거지. 너도 옆에 살면서 맨날 바가지 긁혀봐. 좋은 소리 나오나."
도훈은 두 형제 옆에 앉아 조용히 담배를 피웠다.
두 사람은 도훈을 아까 만났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물론 줄 서다 잠깐 본 사람이다 보니 기억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도훈은 두 형제보다 옆에 있던 여자들 때문에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들에겐 너무나 아까운 미녀들.
‘아까 그 노답 형제네.’
[노답이라뇨?]
‘못생겼지, 배 나왔지, 키 작지. 공공장소에서 큰소리치며 떠드는 걸 봐선 교양도 없지. 다 갖췄네, 아주. 훌륭한 형제야.’
[너무 평이 박하신 거 아닙니까?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건 좋지 못한 습관 같은데요.]
‘옛말에 생긴 대로 논다는 말이 있어. 딱 생긴 대로구만 뭘.’
[허어.]
"하여간 있는 사람이 더 하다니까? 솔직히 형수님 같은 여자가 어딨어? 형이 맨날 술마시고 늦게 들어와도 다음날 해장국 끓여줘, 게다가 형 2차도 몰래 나가지? 형수 그거 아는가 몰라?"
"알아도 모른 척이지. 아직 결혼 안 해봐서 모르는구만? 다 그러고 사는 거야 인마. 그나저나 난 제수씨가 훨씬 예뻐 보이더라. 나이도 어리지, 몸매는 오지지. 밤일은 잘해주냐?"
잠자코 듣고 있던 도훈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뭐야, 저 변태새끼들?’
[변태라뇨?]
‘둘 다 자기 옆에 여자보다 남의 떡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잖아? 동생은 형수한테, 형은 제수한테…. 그러면서도 서로 화도 안 내고 말이야. 뭔가 수상하지 않아?’
도훈은 흥미가 생겨 담배를 계속 피우는 척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말도 마. 솔직히 성격 지랄 맞아도 내가 계속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딱 그거 하난데."
"진짜?"
"아니 솔직히 처음엔 업소 출신인 줄 알았다니까? 아주 스킬이…."
"궁금하다. 어떤데?"
"겉으론 맨날 툴툴거리는데 속내는 음탕해 빠진 여자더라고."
"와, 존나 부럽네 이 새끼."
"형은 형수가 있는데 뭐가 그리 부러워?"
"새꺄. 사람이 밥만 먹고 어떻게 사냐? 간식도 가끔 먹어야지."
"맨날 접대하고 다니느라 간식 잘 사 먹고 다니지 않아?"
"그거랑은 또 달라. 원래 외식보단 집밥이 맛난 거 아니겠냐? 기왕이면 남의 집밥."
서로의 와이프와 여친들을 두고 입에 담지 못할 희롱을 일삼는 모습에 도훈은 점점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관계없는 제3자 앞이라지만, 음담패설의 수위로 평소 어떻게 사는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노답인 줄만 알았더니 완전 개막장 집안일세?’
[확실히 주인님 말대로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형이라는 놈은 자기 와이프보다 동생의 새여친을 눈독 들이지 않나, 동생은 형수를 어떻게 한번 해볼까 하고 호시탐탐 노리지 않나. 혹시 이것들 스와핑하는 부류들 아냐?’
[스와핑이라뇨?]
‘부부교환 말이야. 동생 쪽은 아직 결혼 전인 거 같지만.’
[세상에. 설마 그렇게나 막장이려고요?]
‘왜, 스와핑하는 사람 중에 의외로 직업 멀쩡한 사람들이 더 많다잖아. 전문직도 은근 있고.’
[대체 왜 그러는 거죠?]
‘자극이 무뎌진 거지.’
[무뎌져요?]
‘돈 많은데 여색을 밝히는 놈들은 끼를 주체 못 하는 법이거든. 맘만 먹으면 업소녀든, 스폰이든 얼마든지 여자를 만날 수 있으니까.’
[그럼 성욕은 충분히 해소하고 다니는 거 아닙니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거든. 처음엔 바람 피우는 것에 만족하다가도, 점점 그것만으론 만족을 못 하게 되는 거야. 그러다가 결국….’
[결국?]
‘스와핑이건, 초대남이건 막장으로 치 닿는 거지. 왜, 애자매 집안 최사장도 그랬고, 저번에 초대남으로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잖아.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 더럽다니까?’
[지나친 억측입니다. 두 사람의 언행이 도를 넘긴 해도 뭔가 작당 모의를 하는 것도 아닌데요.]
도훈과 로시가 두 형제를 흉보고 있는데,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낮추더니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었다.
‘뭐라고 떠드는 거지?’
[주인님 못 듣게 귓속말을 하는 거 같은데요?]
‘저거 엿들을 방법은 없나?’
[도청장치를 이용해 보십시오.]
‘아하.’
로시의 조언을 받은 도훈은 재빨리 도청 아이템을 흡연실에 부착한 뒤 밖으로 빠져나왔다. 둘만 남게 되면 주변을 의식않고 큰 소리로 떠들게 될 테고,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알았지? 그렇게 해보는 거다?
-알았어. 난 형만 믿을게.
하지만 도훈이 빠져나온 사이 두 사람의 대화는 벌써 끝난 상황. 도훈이 궁금증에 발을 동동 굴렸다.
‘아씨, 못 들었는데.’
그때 미나가 흡연실 쪽으로 찾아왔다.
"어? 도훈이 너 담배 다 피웠니?"
"네, 방금, 여긴 근데 왜요?"
"나 화장실 좀 다녀오려고. 자리에 짐 좀 봐줘."
"아…. 네."
미나의 등장으로 도훈은 궁금증을 삼킨 채 대기석으로 돌아가야 했다. 미나가 보고 있던 짐이라는 것도 실은 도훈의 기내반입용 캐리어였다.
‘에이씨, 그냥 아까 짐 붙일 때 같이 붙여 버릴걸.’
[컨테이너 벨트에서 수화물 찾기 귀찮다고 굳이 챙기신 분이 주인님 아니셨습니까?]
‘내가 이럴 줄 알았냐고.’
[근데 뭘 그렇게 남의 일에 궁금해하십니까? 어차피 주인님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인데요.]
‘하긴. 그렇지?’
도훈은 두 형제가 무슨 꿍꿍이를 계획햇을까 궁금했지만, 따지고 보면 둘이 스와핑을 하건 말건 자신과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단지 아까 마주친 두 여자의 미모가 몹시 예뻤기 때문에 잠깐 관심을 보였을 뿐이었다.
‘그래. 내 일에나 집중하자. 미션이든 업적이든 얼른 해치워야지.’
잠시 후 미나가 돌아오자 곧 탑승시간이 가까워졌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잡담을 나누는데, 같은 비행기 편 승객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
"신혼부부유?"
"네?"
"맞지? 좋을 때네. 좋은 추억 많이 남기슈."
아줌마는 밑도 끝도 없는 소릴 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도훈이 황당해하는데 미나는 기분이 좋은지 얼굴을 붉히며 도훈의 옆구를 푹 찔렀다.
"도훈아, 우리 신혼부부 같아 보이나 봐."
"아직 결혼하기엔 좀 이른데…."
"뭘? 서로 사랑하면 할 수도 있지."
"그래도 직장이 있어야죠. 결혼만 하면 밥이 알아서 나오나요?"
"돈은 뭐 내가 많이 벌면 돼."
"누나 요새 잘 나가나 봐요?"
"뭐, 나름? 처음엔 고생했는데 이제 자리 좀 잡았어. 강사도 더 늘렸고."
"아…."
"난 언제든 준비되어 있어."
도훈은 뜬금없는 소리에 살짝 놀랐다.
‘잠깐, 이건 또 뭐람?’
[미나양이 주인님을 결혼 상대로 점찍은 것 같은데요?]
‘이건 좀 많이 오번데.’
[원래부터 미나양이 주인님을 마음에 들어했잖습니까.]
‘아니 그거야…. 뭐 남자로서 좋아할 순 있다쳐. 근데 결혼은 좀 아니지 않냐? 당장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미나양은 사귄다고 오해할지도 모르죠.]
‘그런가?’
도훈은 미나가 자신을 결혼 상대로 점찍고 있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꼈다. 솔직히 두 사람이 나이 차가 얼마 안 나기도 했고, 미나 나이에 결혼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일렀다.
‘하긴…. 일찍 시집가는 애들은 대학 졸업하자마자 가기도 한 다던데….’
[게다가 미나양은 스스로 돈도 잘 벌고 있으니 경제력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죠.]
‘아이고, 됐다. 난 아직 총각 생활 더 즐기고 싶어.’
[미나양이 그걸 이해할지 모르겠군요.]
‘적당히 둘러대야지. 같이 여행 한 번 갔다고 결혼하는 사람이 어딨어? 난데없이 임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가만, 이거 설마?’
도훈은 갑자기 미나의 태도에서 뭔가를 직감했다.
신혼부부라는 오해에 지낯게 좋아하는 모습을 본 직후였다.
[왜 그러십니까?]
‘설마 임신 공격이었나?’
[임신공격요? 미나양이요?]
‘아니 왜 작정하고 배란기 때 덤벼들어서 질싸 유도하는 거 말이야. 미나가 그런 속셈으로 나와 함께 여행을 온 거라면….’
여행 일정은 모두 4박 5일.
호텔에 단둘이 묵는 시간이 많은 만큼 섹스도 잦을 것이다. 배란기 동안 집중적으로 질싸를 한다면 자칫 임신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도훈은 미나의 속셈을 간파하고 낭패감에 빠졌다.
‘아차차. 이거 밀월여행이 아니라 진짜 신혼여행이었구나!’
[하지만 주인님은 무정자증 상태잖습니까?]
‘미나가 그걸 모른다는 게 중요하지. 원래 나이가 어릴수록 애가 잘 들어 선단 말이야. 특히 미나처럼 건강한 여자들은 질싸 몇 번이면 금방 임신해 버릴걸. 미나도 그걸 노리는 것 같고.’
[흐음. 서로 다른 꿍꿍이가 있었군요.]
‘그렇지. 나는 외국에 나가는 겸 미나 몰래 업적을 달성할 생각이었다면, 미나는 이번 기회에 임신공격으로 내 발목을 잡으려고 했던 것 같아.’
[하아…. 거참, 미나양도. 어째서 그런 중요한 일을 주인님 몰래 꾸몄을까요?]
‘솔직히 대학생 때 애 아빠가 되고 싶은 남자가 어딨겠어? 당연히 내가 거절할까 봐 몰래 머릴 쓴 거지.’
[미나 양이 은근히 약은 구석이 있군요.]
‘대게 남자들은 사귀던 여자가 임신하면 엄청 당황한단 말이야. 막 책임져야 할 것 같고, 부담스러워 도망치는 놈도 있고.’
[주인님이 혼란스러워할 때 결혼을 제안하려는 계획이었단 말씀이시죠?]
‘그렇겠지. 가만보면 예전부터 계속 어필했잖아. 자기 돈 잘 번다고. 그러니 내가 직업이 없어도, 현재 대학생이라도 아무 걸림돌이 안되었던 거지.’
[이럴 수가.]
‘일단 미나 속셈을 알았으니 모르고 당해주는 척해야겠다. 어차피 무정자증 스킬이 있는 이상 임신 공격은 절대 불가능할 테니까.’
[그냥 솔직히 말하는 게 어떻습니까?]
‘미나한테? 뭐라고?’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 말로 설득될 거였으면 이런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겠지. 미나는 지금 작정하고 온 거야. 내가 고자 상태가 아니었다면 분명 빼도 박도 못 하고 당했을 거고.’
[무섭군요, 임신공격이란…. 하지만 주인님도 미나양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나요? 모난 구석도 없고, 능력 있는 여성인데.]
‘마음에 들긴 하지. 솔직히 과분할 정도야. 전생에 저런 여자를 만났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 임신 공격을 시도했을 걸?’
[호오. 그 정도입니까?]
‘얼굴 예쁘지, 몸매 죽이지, 성격 착하지. 게다가 자기 앞가림도 똑 부러지게 하지. 미나 정도면 1등 신붓감이지. 하지만….’
[하지만 주인님은 대물 플레이어시죠. 유부남이 되셨다간 업적 달서엥 크나큰 차질을 빚을 겁니다.]
‘내 말이. 그것 때문에 여친도 안 만드는데 결혼은 무슨.’
미나의 꿍꿍이를 눈치 챈 도훈은 모른 척 넘어갔다.
수십번 질싸를 해도 어차피 임신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
싸이판까지는 생각보다 긴 여정이었다.
도훈은 비행기 안에서 잠들었다 깼다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옆에 앉은 미나는 목에 베게를 끼운 채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도훈은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 올려 미나를 덮어 주었다.
‘예쁘긴 참 예쁘단 말이지.’
미나는 잠든 모습마저 귀여웠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미인과 단 둘이 외국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임신 공격에는 당해 줄 수 없지.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요의를 느낀 도훈은 통로로 빠져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야간 비행이기 때문인지 조명은 최소한으로 조도가 낮춰져 있었다.
화장실 앞에 이르자 문이 잠겨 있고 ‘사용 중’ 이라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앞 선 사람이 나오길 기다른 데 이윽고 문이 열렸다.
‘…어라? 이 여자는.’
도훈은 화장실에서 나온 여자를 보고 살짝 놀랐다. 아까 흡연실에서 만난 노답 형제 중 형의 와이프였던 것이다. 그녀는 놀라는 도훈을 보고 민망하게 웃더니 말을 걸어왔다.
"잠깐 있다가 들어가실래요?"
"네?"
"…혹시나 싶어서."
도훈이 보니 여자는 큰일을 보고 온 모양이었다.
냄새가 아직 배어 있을까 걱정하는 눈치.
"아, 네…. 알겠습니다."
"근데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나요?‘
여자가 도훈을 유심히 보더니 물었다.
도훈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1112. 그해, 여름-27-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