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9. 그해, 여름-14- >
모자를 눌러쓰고 급히 나가는 도훈의 뒷모습을 보며 소영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쉽네…. 병원만 아니면 콱 그냥.’
소영이 대딸에 그친 것은 이곳이 자신의 일터였기 때문이었다. 맘먹고 섹스를 하자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안 그래도 평소보다 진료를 오래 하는 바람에 담당 간호사들이 자신의 퇴근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만에 하나 섹스 중 문이 잠긴 것을 보고 놀라 강제 개폐를 하다 발각될 경우 이제껏 쌓아온 이미지가 한순간에 박살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선 곤란하지.’
안소영은 똑똑하다는 의사들 중에서도 엘리트 코스만 밟아 온 몸. 지금까지 눈비신 커리어를 위해 젊고 아름다웠던 나날을 희생한 걸 감안한다면, 순간의 정욕에 눈이 멀어 모든 걸 날려버리는 것은 미련한 행동이었다.
‘그래. 즐기는 건 뭐…. 혼자서도 얼마든지.’
소영은 여전히 열기가 가시지 않은 자신의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곳이 마치 작동 버튼이 된 것처럼 팬티 속에서 보짓물이 와락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팬티가 찝찝했지만 당장은 갈아입을 속옷도,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하아…. 생각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던 모양이네. 물이 많은 편이긴 해도 이렇게 흠뻑 젖진 않았는데.’
단지 대딸로 끝났지만 소영은 더 할 나위 없는 쾌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젋은 남성의 단단한 잦이를 실컷 주물러 본게 너무도 오랜만이기 때문이었다. 음과 양의 조화는 그 자체로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하긴 섹스를 안 한지….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던가? 나도 참 정신없이 살았구나.’
의사 생활은 밖에서 남들이 보는 것보다 훨씬 바빴다.
매일같이 밀려드는 외래 환자를 보는 것만도 진이 빠질 정도였는데, 그 와중에도 학회니 세미나니 뻔질나게 사람을 불러댔다. 존스 홉킨스라는 굴지의 외국 의대를 나온 그녀는 현재 정교수 전입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 활동 또한 게을리할 수 없었다.
차라리 남들처럼 국내 의대를 나와 대학병원에 계속 남았다면 교수가 되기는 좀 더 편했을텐데, 외국물 먹고 유턴한 처지다 보니 인맥과 기반을 처음부터 다지는 게 녹록치 않았던 것이다. 어느 바닥이나 마찬가지지만, 의학분야도 실력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스스로를 위로하던 소영은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똑똑-
옷매무시를 재빨리 가다듬은 소영이 들뜬 목소리를 애써 잠재우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안 선생님, 퇴근 안 하세요?"
간호팀의 얼굴마담이라 할 수 있는 박간이었다. 예쁜 얼굴과 유난히 큰 가슴 덕에 여자들 사이에서 질투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물론 프라이드가 센 안소영은 괘념치 않았다.
"가야죠. 마지막 진료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요. 저 기다리지 말고 간호사들 먼저 보내세요. 정시 퇴근 하셔야죠."
"네, 선생님.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참…. 박 간?"
"네?"
커다란 가슴 탓에 간호복 앞 단추가 터질 것 같은 지애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애씬 애인 없어요?"
"예, 예?
지애는 당황해서 하마터면 들고 있던 차트를 떨어뜨릴 뻔 했다. 소영이 의사치곤 간호사들에게 친절한 편이라곤 해도, 평소엔 업무 외적의 질문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물을 먹고 와서 그런지 몰라도 공과 사의 구분이 굉장히 명확하고 사생활에 대한 부분은 일절 터치하지 않는 주의였다.
지애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아직."
"아, 그렇구나."
"근데 왜 그러세요?"
"아니에요. 박간처럼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당연히 남자친구가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없다니까…."
갑작스러운 칭찬에 지애가 얼굴이 빨개졌다.
"아유, 왜 그러세요. 선생님이 훨씬 더 미인이신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사적인 질문이었다면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그럼 가보세요."
지애를 물리친 소영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의가 없었는지 피식 웃었다.
"뭐래, 나도 참."
실은 소영이 갑자기 남자친구 여부를 물었던 건 다름이 아니었다. 자신은 혼자라서 성욕을 제대로 못 푸는데 박 간호사는 어떻게 푸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내 앞가림부터 먼저지 무슨 오지랖을.’
박간의 등장으로 갑자기 흥미가 식은 소영은 의료가운을 옷걸이에 걸고 가방을 챙겨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퇴근하고 나면 저녁 먹거릴 사 들고 텅 빈 아프트로 향하는 게 그녀의 일상적인 루틴이었다. 단조롭다고 할 수 있지만, 목표를 향해 달려온 그녀의 인생은 늘 그랬다.
남들은 천재라고 치켜세웠지만, 뛰어난 성취 뒤엔 남모를 노력과 지독스러운 자기 절제가 있었다.
소영이 가방에서 카키를 꺼내 누르자 삑- 소리가 나며 차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차 쪽으로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걸어가던 소영은 자신의 차가 주차된 반대편에 서성거리는 남성을 발견했다. 뒷모습이라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굉장히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었다.
‘누구지? 키는 되게 큰데.’
사내는 뭔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누군가와 통화를 마치더니 실망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소영이 왠지 모습이 익숙해서 계속 쳐다보던 중 그가 마지막으로 진료를 받았던 이도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나! 여기서 또 만나다니. 이런 연인이….’
소영은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도훈을 불렀다.
"이도훈 학생? 맞죠?"
"어? 의사 선생님."
"여기서 뭐해요, 아직 안 가고?"
소영이 주차장에 온 시각은 도훈이 나간지 20분이 훌쩍 넘어서였다. 자신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도훈이 아직까지 병원 주차장에 남아 있는게 궁금했다.
"아…. 제가 좀 건망증이 심해서."
"네? 그게 무슨…."
"차 키를 흘려버렸나 봐요."
"아…. 혹시 병원에서요?"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저런.‘
소영은 힐끔 도훈의 차를 확인했다. 연식이 제법 되보이긴 했어도 나름 중형급이라 대학생이 몰기엔 유지가 힘들어 보이는 차였다.
‘등록금도 없어서 택배 상하차 알바하는 애가 자기차를 몬다고? 대학생 때?’
소영이 의아함을 느끼자 도훈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곧바로 해명했다.
"아, 이건 삼촌이 집에서 노는 차를 빌려 주신 거에요. 상하차하러 가려면 새벽 일찍 나가야 하는데, 너무 외진 곳이라 대중교통편이 마땅치 않아서."
"아하."
"근데 차 키를 잃어 버려가지고…."
도훈이 계속 쩔쩔매자 소영이 대책을 지시했다.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한 번 생각해 봐요. 차 키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어디였는지 기억나요?"
소영은 혹시나 도훈이 바지를 벗기던 중에 침상 위에서 흘린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렇다면 자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글쎄요…. 근데 병원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반바지 주머니 안에 차 키가 들어있던 느낌이 전혀 없었거든요. 뭉특하게 생겨서 툭 튀어나와 있어야 되는데, 그 전에 흘린것 같아요."
"저런. 그럼 사람 불러야겠는데요."
"그게…. 안 그래도 삼촌한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니까 사람 불러서 문 따면 된다더라고."
"근데요? 그렇게 하심 되잖아요."
"그래서 번호 물어서 통화해보니까 이 경우엔 키박스를 통째로 교체해야 한다는 비용이 좀…. 음…."
소영은 순간 이해를 못하다가 도훈이 대학생임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키박스 교체하는 비용이 부담되어서 그랬구나. 하긴 삼촌한테 빌린 차에 기름값 대는 것도 빠듯했을 테니.’
도훈이 괜찮다는 듯 말했다.
"아, 괜찮아요. 삼촌 집에 다행히 예비키가 있다고 해서. 그냥 여기 세워두고 내일 다시 와서 찾아가려고요."
소영은 순간 도훈에게 돈을 빌려 줄까하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뭔가 기발한 생각이 든 것이었다.
‘이렇게 공교로운 우연이 있나. 안 그래도 그냥 보내서 아쉬웠는데…. 병원만 아닌 곳이라면 상관없는 거잖아?’
소영이 빠르게 머릴 굴렸다. 곤경에 처한 도훈을 신세지게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댓가 없는 호의는 절대 아니지만.
"그것 참 곤란하게 됐네요. 혹시 도훈 학생 집이 어느 쪽이에요?"
"네?"
"차 키 잃어버려서 속상할 텐데 집까지 바래도 주려고요."
도훈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그냥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그리고 내일 삼촌한테 예비키 받아서 복제하면 그리 큰 손해도 아니고요. 말씀 감사합니다."
"사양말아요. 혹시 제가 무서워서 그런거에요?"
"아, 아니요. 제가 왜 선생님을…."
"호호. 그럼 맘 바뀌기 전에 어른 타요. 다리도 아프다는 사람이 언제 또 계단을 오르내리려고요. 그러다 더 안좋아져요."
"아…."
소영이 다리 아픈 구실을 만들어 주자 도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가 나가는 길에 경비실에 일러둘게요. 제가 아는 지인인데 여기 하루만 주차해놓고 간다고. 안 그럼 내일 주차비 왕창 물을걸요? 여기 주차장 되게 비싸요."
"아… 주차비!"
소영이 이번엔 돈으로 압박하자 도훈도 점점 납득이 되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궁핍한 것으로 압박하면 통할 수 밖에 없는 게 인지상징이었다.
"저, 그럼 실례가 안되면 국성대 근처까지만…."
"국성대요? 알았어요. 타요."
소영의 차는 외국산 대형 세단이었다. 여성이 몰기에는 다소 큰 감이 있었다. 고급 세단에 오른 도훈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차, 차가 되게 좋으시네요."
도훈의 순진한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소영이 웃으며 말했다.
"훗-. 도훈 학생은 참 순진한 것 같아요."
"네?"
소영은 알듯 모를 듯 미소만 짓고는 나가는 길에 경비를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소속 병원 의사의 부탁이었기 때문에 경비도 흔쾌히 허락했다.
"아유, 사촌 동생 분 사정이 딱하게 됐네요. 그렇게 하세요."
"편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치고 다시 차를 타고 나가는데 도훈이 소영을 향해 고맙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 때문에 괜히 거짓말까지."
"뭘 이런걸 가지고."
"그래도…. 저한테 너무 큰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후후. 괜찮다니까 그래요."
물론 소연은 공짜로 호의를 베푼 게 아니었다.
그녀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흐흐. 순진한 짜식. 이대로 집으로 바로 데려가 버릴까나?’
소영은 순진한 도훈을 멋대로 요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물론 도훈은 도훈대로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재밌는 여자네. 생각대로 딱 움직이잖아?’
[안소영양이 주인님이 쏙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당연하지. 대물을 직접 만져봤으니 얼마나 하고 싶었겠어. 난 솔직히 거기서 끝까지 참을 줄은 몰랐어. 의지가 대단한 여자야.’
[그래서 함정을 두 개 판 거 아닙니까?]
‘후후. 플랜비는 늘 있어야지.’
도훈은 처음부터 병원에서 가능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차키를 잃어버리는 작전을 취한 것이었다.
도훈에게 속은 줄 모르는 소영이 넌지시 물었다.
"도훈 학생, 근데 저녁은 먹었어요?"
"저녁요? 아, 아직…. 오늘 소장님께 말씀 드리고 먼저 나왔거든요. 왜 그러세요?"
"배 고프면 가는 길에 우리집 잠깐 들러서 식사나 하고 가라고요."
"서, 선생님 댁에요?"
"뭘 그렇게 놀래요? 실은 나도 혼자 살아서 집에 가봐야 쓸쓸하게 혼자 밥먹거든요."
"아…. 혼자 사시는 구나."
"네, 귀국한 지 1년 됐어요. 부모님은 계속 미국에 계시고."
"미국에요?"
"음 그러니까, 내가 중3때 아버지 회사 파견으로 미국에 건너 갔는데…."
소영이 난데없이 집안 사정을 설명했다.
거두절미하고 요약하면, 현재 다른 가족은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자기 혼자만 넓은 집에 혼자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후에 파견기관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곳에 아예 터를 잡고 다른 가족들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셨구나…"
"그러니까 같이 저녁 먹는 거죠? 맨날 혼자 먹으니까 너무 외로워서 그래요."
"아…. 네, 네 그러면."
도훈이 얼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소영이 씩 웃었다.
‘뭐가 이렇게 쉽담? 후후. 오늘 아주 기둥뿌리까지 뽑아버려야지.’
소영은 음흉한 속셈을 품고 도훈을 집에 초대했다. 소영의 아파트는 서울에서도 집값이 높기로 유명한 동네에 있었다. 도훈은 그녀가 의사가 되지 않았어도 먹고 사는 걱정은 전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하네. 본인은 젊은 나이에 성공한 이사인데, 집안도 빵빵하기까지.’
[여기가 그렇게 비싼 동네인가요?]
‘말도 마. 내가 사는 원룸 전세금으로 여기 현관문 자리도 못 살걸.’
[히엑!]
‘의사가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이렇게 으리으리한 집을 여자 혼자 사는 집으로 덜컥 살 정도는 아니지. 그냥 타고난 금수저인거야. 아버지도 아마 대기업 간부급인거 같고.’
[오…. 그런 여자가 왜 주인님을?]
‘흐흐. 잘난 여자라고 욕망이 없는 건 아니거든. 대물을 실제로 만져봤으니 마음이 동했겠지. 이제 나는 찐따처럼 굴면서 업적만 달성하면 그만이야.’
[오늘은 운이 잘 풀리는 군요.]
"자, 다 왔어. 여기가 우리집이야."
소영이 현관문 비벚을 열고 도훈을 초대했다.
< 1099. 그해, 여름-14-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1100화 이벤트를 뭘해야 할지 고민중입니다.
아이디어 부탁드립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