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04화 (1,071/2,000)

< 1087. 그해, 여름-2- >

***

정원은 침대에 걸터 앉아있었다. 옆에는 종이가방이 놓여 있었는데, 첫눈에 보기에도 그것이 마저주기로 한 잔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랜만이요, 누님."

나는 일부러 걸걸한 목소리를 내며 꾸벅 인사했다. 최대한 건들거리면서 건달 흉내를 내고자 했지만, 정원은 더는 나의 외모에 겁 먹은 눈치가 아니었다. 몇 번 살을 섞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진 탓이다. 이런건 섹스의 부작용 이랄까.

"아까 얘기하던 거 자세히 말해줘 볼래? 김변 그 새끼가 정황히 어떻게 됐는지 말이야."

나는 정원의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최대한 소상하게 설명했다. 어쨌든 명목상 그녀는 나의 의뢰인이었고, 잔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결과를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김변 그 새끼한테 내가 공사를 쳤단 말이지."

중간중간 쓸데없는 얘기는 생략.

특히 조소연과 떡 친 이야기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던 정원은 마지막에 김변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에 통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됐네. 나쁜 새끼. 아주 감옥에서 푹 썩어버렸으면 좋겠어."

"근데 구속까지는 어려울지도…."

"뭐야? 방금 구속되었다지 않았어?"

"정확히는 구속 수사 중이지."

"그게 그거 아냐?"

"좀 달라.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 때문에 잡아놓고 조사하는 것 뿐이니까. 아무튼 법정 다툼여부에 따라 최종 형량이 정해질 거고 최종으론 집행유예가 뜰지도 모르니까."

"집행유예라니?"

"죄는 인정되지만, 사정을 참작해 형의 집행을 미루는 거. 놈의 직업이 변호사기도 하고 또 초범이다 보니 구속까진 안 갈지도 모른다는 거지."

"아니, 그런 법이 어딨어? 체포에도 불응하고, 또 뭐야 폰에서 이상한 동영상도 발견되었다면서?"

"본래 공무집행 방해로 구속까지 이르긴 쉽지 않거든. 게다가 몰카 영상을 걸렸다 한들 그것을 이용해 협박을 하거나 외부로 유포한 정황이 발견되지 않으면 여죄를 묻기도 어렵고. 단순 소지에 불과하니까."

"하-. 그럼 이제껏 뻘짓한 거네?"

"꼭 그렇진 않을 거요. 어쨌든 현행법을 어겼으니 변호사 자격은 박탈될테니. 그것만 해도 재정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지. 변호사가 되가지고 변호사 업무 못 보면 사실상 끝난 거니까."

"흠…. 그래도 왠지 아쉬운데."

정원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표정이었다. 여자의 복수심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는 바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원이 살짝 무섭게 느껴졌다.

'아주 죽어라고 저주를 하는구나. 구속을 면해도 사실상 좆된건 마찬가진데 저렇게 아쉬워할 일인가?'

[김변에 대한 증오심이 그만큼 뿌리 깊었을까요?]

'김변이 나쁜 놈은 확실하지만, 본인도 딱히 잘한 것도 없잖아? 시작이야 어찌 됐건 2년간 정부처럼 지내와 놓고 이제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저렇게 태도를 싹 바꾸다니. 참으로 무서운 여자군.'

[그렇다면 주인님도 위험한 거 아닙니까?]

'왜?'

[정원이 김변을 증오하는 건, 그가 자신을 속이고 다른 여자를 만나서지 않습니까?]

'그렇지.'

[근데 주인님도 나중에 배신을 들키게 되면 김변 꼴이 안 난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이죠.]

'…듣고 보니 섬뜩한데?'

로시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정원과 호감도 100을 찍는 것이 과연 현명한 판단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한때 자신과 불륜 상태였던 상대를 다른 사람을 시켜 거리낌 없이 패가망신시키는 인성이라면, 그건 나한테 똑같이 적용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사람은 원래 쉽게 변하지 않으므로.

'생각할수록 찝찝한데.'

[역시 그렇죠.]

'남편 몰래 바람 피우는 여자가 인성이 좋을 거라는 생각도 안 했지만 이건 좀….'

확실히 정원은 겉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언뜻 보면 부잣집 사모에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여자처럼 보이지만, 자신을 배신하면 가차 없이 응징하는 차가운 면모또한 가지고 있었다.

내 편일 땐 좋아도, 적이 되면 골치 아픈 타입이랄까? 찝찝한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데 갑자기 정원이 돈 가방을 꺼냈다.

"아, 그리고 잔금 말인데…."

정원이 건넨 종이가방을 받아보니 예상외로 가벼웠다. 안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는 중 정원이 말했다.

"조금 빌 거야."

"비다니?"

"최대한 챙겼는데 살짝 모자라더라고."

"얼마나?"

"오천"

살짝이 아니었다.

총액 3억 중 2억을 선수금으로 먼저 받고 남은 1억을 받기로 했는데 그중 절반이나 빈다는 소리였다.

"잠깐,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분명 다 준비되었다지 않았어?"

정원이 변명했다.

"준비는 했지. 근데 평소 관심도 없던 남편이 불쑥 통장 잔고를 확인한다지 뭐야? 부랴부랴 도로 넣느라 그렇게 됐어. 이해 해줘."

얼토당토않은 변명이었다.

속았다는 생각에 분노가 들끓었다. 믿었던 정원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그게 무슨!"

"에이, 왜 이래? 고작 오천 가지고. 다음에 또 만나서 주면 되지. 내가 설마 자기 속일까봐 그래?"

정원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이상하군요. 정원은 주인님에게 상당한 호감이 있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 호감 때문인 것 같군.'

[호감 때문에 돈을 덜 지급한다고요? 앞뒤가 안 맞는데요?]

'정원이 나를 돈으로 옭아매고 싶은 거야.'

[옭아매다뇨?]

'차라리 비즈니스적인 관계였다면 정원은 오늘 잔금을 모두 지급했을걸.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더는 내가 자신을 안 만나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한 것 같아.'

[설마 그럼.]

'그렇지. 잔금을 일부러 남겨둔 상태로 앞으로 만날 여지를 남겨 둔 거지. 아마 다음에도 다 가지고 오지 않고 찔끔찔끔 남길거고.'

[정원이 주인님을 돈으로 길들이려는 수작이군요.]

'나참, 이런 약아빠진 년을 봤나.'

정원의 속셈이 괘씸했지만, 굳이 티를 내지 않았다.

그냥 그녀의 변명을 믿어주는 척했다.

"하긴…. 현금으로 2억이나 먼저 땡겼으니 쉽진 않았겠네."

"맞아.그거 마련하는 것도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그 돈 아까워서 안 줄 사람도 아니잖아?"

정원이 갑자기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 딴에는 얕은 꾀로 나를 구슬렸다 생각했겠지만,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정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호감도를 100까지 끌어올려 업적을 마무리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정원이라는 사람 자체에 흥미가 팍 식었다. 김변에 대해 180도 태도를 바꾼 것도 또한 마음에 안 들었다. 한 번 누군가를 배신한 여자라면 내 등에 칼을 꽂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갈아탈 말만 생기면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여자였다. 돈 많고 욕정 넘치는 사모의 종마로 부려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따. 젊고 예쁜애도 차고 넘치는 판에 내가 뭐가 아쉽다고?

나는 잔금이 든 종이가방을 챙기며 정원을 뿌리쳤다.

아무래도 그녀와는 작별해야 할 시간인 것 같았다.

"알겠수다. 그럼 뭐 다음에 받는 걸로 치고."

"어? 벌써 가?"

정원이 예상치 못했다는 것처럼 깜짝 놀라 물었다. 모텔까지 들어와 놓고 그냥 간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내가 스케줄이 좀 바빠서 말이지."

"뭐? 나도 일부러 시간 내서 온 건데!"

정원이 씩씩거렸다. 의뢰에 대한 성공보수긴 했지만 그녀는 오늘 현금 오천을 건네 주는 입장.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나에게 무엇을 기대했을지 안봐도 훤했다.

"그러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소?"

"아니 고작 30분도 시간을 못 낸다고?"

빠르게 한 번만 하고 가자는 정원을 과감하게 뿌리쳤다.

이미 결심은 선 상태였다.

"미안, 진짜로 바빠서."

"정말 나한테 이럴거야?"

[주인님. 이대로 가면 오히려 호감도가 많이 감소할 텐데요.]

'떨어지라지. 어차피 손절 할 생각이야.'

[손절이요? 설마 이제와서 업적을 포기하신다고요?]

'하는 짓 보니 오만 정 떨어져서 더는 못 해먹겠어. 누구 앞에서 감히 머릴 굴려? 주는대로 받아 먹어도 감지덕지할 판에.'

[주인님. 지금 좀 흥분하신 것 같은데, 냉정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정원은 바람바람바람 업적을 해치우기 최적의 상대입니다. 호감도 달성도 얼마 안 남았고요.]

'아니. 이젠 내가 싫어. 업적이야 다른 걸로 도전하면 그만이야. 로시 네가 그랬잖아. 미션은 일회성이지만, 업적은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다고. 이 업적을 굳이 정원을 통해 풀고 싶지 않을 뿐이야. 처음부터 업적 때문에 공들인 것도 아니고.'

[아니, 아무리 정원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갑자기 이렇게까지….]

'솔직히 말하면 애초에 이 업적 자체가 찝찝했어.'

나는 과거 상간남에게 살해당한 기억이 있다.

바람 피운 족속을 혐오하는 마당에 내 스스로가 똑같은 짓을 한다는 것이 사실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그 상대에 대한 매력까지 감소한 상황에서 업적을 무리하게 진행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업적과 미션을 중요시 한다고 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참을만큼 간절한 것은 아니었다.

"암튼, 난 이만."

"자, 잠깐! 혹시 돈을 덜 줘서 그래? 내가 당장이라도 송금해서…"

나는 정원의 말을 더 이상 듣지도 않고 모텔방을 빠져나왔다.

[주인님. 이대로 물러나면 오히려 정원이 악감정을 품게 될 텐데요.]

'뭘 그런걸 걱정해? 그러라고 쓰는 아이템이 있는데.'

[아이템요?]

'가위 꺼내. 잘라 버리게. 내가 말하는 손절은 진자로 인연을 끊는다는 소리였어.'

[아….]

간만에 인연의 붉은 실 가위를 꺼냈다.

가위를 손에 쥐자 모텔방까지 길에 연결된 인연의 끈이 보였다. 나는 미련없이 가위로 중간을 싹둑 잘라냈다.

혹시나 싶어 밖에서 기다리는데 정원이 허둥대며 모텔방을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나와 관계된 기억이 모두 소멸되었기 때문에 현 상황이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녀는 나와 얼굴이 마주쳤지만 오히려 시선을 피하며 빠르게 도망쳤다. 눈치를 보니 나를 전혀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녀의 기억속에서 이제 나는 김변의 의뢰를 맡겼던 흥신소 직원 정도로 추억될 것이다. 어쩌면 그마저도 깡그리 소멸 될지도.

정원이 떠나고 나 역시 차에 올랐다.

홧김에 손절하긴 했지만, 미련이 남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어쨌든 최근들어 업적 진행이 지지부진 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업적 하나를 성사 직전에 날리신 셈인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주인님 쪽에서 먼저 업적을 포기한 것은 처음 봅니다.]

'네 말마따나 뒷일이 감당 안될까 봐 그랬어. 정원 같은 여자를 등 뒤에 두는 건 폭탄을 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 지금 아쉽지만 손절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거야.'

[뭐…. 주인님 판단이시니 더 이상 이 건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어쩔 생각입니까?]

'돈을 받았으니 남은 약속을 지켜야지.'

[조소연 양 말이군요.]

'지금쯤 조사받고 풀려나지 않았을까 싶은데.'

나는 차량 대쉬보드에 숨겨둔 대포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에 소연의 번호가 남아 있었다. 시간을 보니 어제 걸려온 전화였다. 나는 곧바로 회신했다.

"여보세요?"

-와, 이제 연락되네? 난 또 먹튀 하신 줄?

"먹튀라니. 일이 좀 바빠서 그런 거야. 잘 있었어?"

-제가 유치장에서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요?

"유치장에 있었다고?"

대충 내용을 들어보니 성매매로 조사를 받느라 이틀간 유치장에 붙잡혀 있었다 했다. 아무래도 현행법을 어긴 셈이다 보니 당일 풀려나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상대가 현장구속까지 됐으니.

-아직 끝난 건 아니래요. 나중에 재판까지 받을 수도 있다면서.

소연이 투정하듯 말했다.

"그랬구나. 어쨌든 지금 어디야?"

-집이요. 머리 아파서 그냥 어디 안나가고 있어요.

"전해줄 게 있는데 내가 그쪽으로 갈까?"

집으로 간다는 소리에 소연이 화들짝 놀랐다.

-아, 아뇨! 우리 집은 왜요? 동네에서 떨어진 곳에서 봐요. 형사들이 감시할지도 모르잖아요.

"감시는 무슨 감시?"

-그래도요. 괜히 찝찝하니까.

"그래. 그럼 1시간 뒤에…."

소연과 약속을 잡은 후 장소로 이동했다. 아직 역용 마스크 효과가 남은 상태였기 때문에 딱히 걸릴만한 것은 없었다.

***

고수부지에서 만난 소연은 최대한 절제한 차림에 모자까지 푹 눌러쓴 상태였다. 나는 그녀를 발견하고 옆으로 다가갔다.

"일단 걸을까?"

"네."

날이 유난히 습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는 없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언제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불안해 보이는 날씨였다.

"갑자기 먹구름이 끼네."

"뉴스 보니까 조만간 장마라던데요?"

"장마?"

생각해보니 늘 이맘 때쯤 장마가 오곤 했던 것 같다.

"자, 이거 먹어."

나는 손에서 들고 있던 흰 봉지를 소연에게 건넸다.

소연이 뭔가 하고 안을 들여다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파안대소 했다.

"푸하하, 이게 뭐야 진짜."

봉지에 든 것은 두부였다.

"유치장 있었다며? 기분이나 내라고."

"진짜 이러니까 제가 범죄자 된 것 같잖아요."

"범죄자 맞는데?"

"네?"

소연이 두부를 한입 베어 물다 말고 다시 내려놓았다.

"아니, 어쨌든 성매매로 걸렸으니까."

"아…. 깜짝이야. 조사한 경찰 언니가 말해줬는데, 초범에 나이가 어려서 잘하면 기소 유예 나올수도 있다고 했어요."

"기소 유예?"

"네. 정확히 뭔 소린 줄은 모르겠는데, 어쨌든 전과 안 남을수도 있다던데요?"

< 1087. 그해, 여름-2-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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