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8. 별이 쏟아 지는-78- >
"…늘 이런 식이었군요."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그러나 약간의 섬뜩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홧김에 내지른 도훈은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다. 번번이 자신의 주변을 알짱거리며 시비를 거는 아영의 태도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쯤 되면 그냥 들이 박는 수밖에. 어차피 아영이 실패한다고 미션이 깨지는 것도 아니라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똑바로 말해."
"여자애들을 늘 그런식으로 꼬셨냐고 묻잖아요."
"뭐?"
아영이 싸늘하게 웃었다.
약간의 조롱이 섞인 비웃음이었다.
"왜요? 한 번 하자 그러면 다들 쉽게 넘어갔나보죠?"
아영은 여유로운 태도로 도훈의 몸을 더듬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도훈이 흠칫 놀랐지만, 우선은 잠자코 지켜보았다.
"쌔끈한 몸뚱이를 앞세우고, 반반한 얼굴로 한마디 툭 던지면 다들 헤벌쭉해서 쉽게 몸을 허락했나 봐요?"
"……."
아영의 손이 도훈의 가슴을 터치하더니 단단한 복근을 어루만졌다. 정념이라던가, 매혹의 느낌보다 푸줏간에 걸린 고기의 품질을 따지는 듯한 냉랭한 손길이었다.
"오빤 여자가 늘 쉽죠?"
"그렇게 말한 적 없어."
"왜요? 나보고 방금 하고 싶냐면서요? 오빠가 하자고 하면 제가 대줄 거라고 생각한 거 아니예요?"
'와, 막말 쩐다. 원래부터 이런 캐릭턴가?'
[아영양이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긴 하죠.]
'어째 나를 간보는 듯한 느낌인데.'
[맞습니다. 주인님을 깔보고 있군요.]
'더 열 받네.'
도훈을 더듬거리던 아영이 한걸음 물러서면서 거리를 벌렸다. 그러더니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런 쉬운 애들하곤 달라."
도훈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저거 완전 또라이 아냐?'
[약간의 우월의식이 엿보이는데요?]
'그러게. 선민의식이라도 있는 건가? 자박꼼 한번 밑에 깔려 앵앵거릴 것 같은데 뭘 믿고 저렇게 까부는 거지?'
[지금이라도 마음의 소리를 한 번 들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이다. 스킬 준비해.'
아영이 계속 말했다.
"날 쉽게 보지 말라고요. 오빠 같은 사람이 유혹해도 털끝만큼도 반응 없으니까."
자신을 사정없이 깎아내리는데도 도훈은 여전히 여유 만만이었다. 어쩌면 아영의 저런 반항적인 태도가 반대로 상당한 욕망을 드러내고 믿었다.
'츤데레 같은 애군.'
[네?]
'속으론 좋아하면서 겉으로 싫은 티 팍팍내는 거.'
[아영양이요?]
'아영이는 자존심이 무척 센 아이야.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타고난 미모와 독립심이 강한 성격, 그리고 탁월한 지능이 뒤섞이면서 소위 말하는 괴팍한 성격이 만들어졌어.'
[그래서 결론이….]
'쉽게 말해 자뻑끼가 있다고. 중증 나르시스트랄까?'
[자기애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이제야 알겠군. 아영이는 나한테 본능적으로 끌리는 거야. 그걸 고고한 이성이 거부하는 거지. 나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 나는 쉬운 여자가 아니야. 도훈이 같은 바람둥이 쓰레기 따위에 조금도 끌리지 않아. 더럽고, 혐오스러워. 라고 아무리 자기세뇌를 해도 본능이 주체하질 못하는 거야. 그러나 계속 알짱거리면서 나에게 시비를 거는 형태로 나타나는 거야.'
[그렇다면….]
'아영이는 지금 나랑 하고 싶어 한다는 거지. 궁금해 죽을 지경일지라도.'
[오!]
'한번 떠보면 알겠지.
한걸음 물러선 아영을 향해 이번엔 도훈이 바짝 다가갔다. 개인 간 거리를 파괴하는 과감한 접근에 아영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진심이야?"
"뭐가요? 떠, 떨어져요. 부담스러우니까."
"왜? 너는 나한테 조금도 반응 없다며?"
도훈은 이제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가 불과 5cm도 되지 않는 초근접이었다.
"진짜로 1도 미동도 없다고? 그렇게 자신해?"
'로시, 지금 마음의 소리!'
[넵.]
<뭐, 뭐야. 갑자기 이렇게 들이대 버리면…. 그, 근데 내가 왜 이러지? 체취가 너무 끌리잖아?
아영의 속마음을 들은 도훈이 속으로 쾌좨를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아영은 뻔뻔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네. 조금도."
"이래도?"
이번엔 도훈이 좀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 팔로 아영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몸에 바짝 밀착시킨 것이었다. 단단한 손이 가냘픈 허리를 감싸며 잡아당기자 두 사람의 배가 맞닿았다. 배만 닿은 게 아니라, 도훈의 발기된 심벌이 은근이 아영의 아랫배를 짓누르고 있었다.
<어, 어뜩해. 이거 성추행 아냐? 신고해야 하나? 손발이 떨려서 옴짝달싹 할 수가 없어…. 내, 내가 왜 이러지?
"네, 털끝만큼도."
속마음과 달리 아영은 여전히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도훈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받아친 것이다. 이에 도훈은 확신했다.
'봤지? 겉과 속이 완전히 반응이 다른 거.'
[정말이군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죠?]
'타고난 포커페이스야. 절대로 남들 앞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야. 자신은 절대 바람둥이 이도훈 따위에게 끌리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거거든. 하지만 늘 그렇듯, 몸은 솔직하거든.'
[주인님의 분석이 맞았나보군요. 이제 어쩌실 겁니까?]
'일단 정보창 한 번 다시 보자. 추천 멘트나 행동을 살펴봐야 겠어.'
[넵. 야영양 정보창을 다시 띄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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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박아영 (비처녀, 18세 8개월)
나이 : 20 #아웃사이더 #염세적 #과묵
호감도 : 78/100
개방성 : A
성감대 : 클리토리스, 애널, 엉덩이
*애무 포인트 : 후장을 좋아해, 애널 주변 마사지를 즐깁니다.
성욕지수 : 높음 (임신확률 : 65%)
공략팁
*위 대상은 당신에게 상당한 호감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아싸 스타일 여대생입니다.
-무척 과묵한 편이며 주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약간 염세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욕이 왕성한 편이라, 이미 고등학교 때 후장을 뗐을 만큼 성적으로 과감한 시도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녀는 당신에게 본능적으로 끌리고 있습니다.
-수컷에게 굴종하기 싫은 고고한 성격 때문에 결코 인정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한 번 마음을 열게 되면 겉잡을 수 없이 빠져들 겁니다.
-추천멘트 : "어디다 박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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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창의 설명이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바뀐 호감도가 눈에 띄었다. 실상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데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아영의 틱틱거리는 태도와는 전혀 상반된 결과였다.
[어떻게 된 거죠? 호감도가….]
'봤지? 아영이가 나한테 시비를 거는 만큼, 더 나한테 끌리고 있다는 거야. 본인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참으로 기이한 성격이군요. 좋아할수록 더 싫은 티를 낸다니.]
'그래서 츤데레 같다고 그랬잖아. 아니 이건 메가데레라고 해야 하나?'
[더 좋아했다간 쌍욕 받겠는데요?]
'그러게. 왜 솔직하지 못한 거지?'
띠링!
그때였다.
정보창을 연지 얼마 안돼 알림음이 울렸다. 경험상 100% 돌발 미션이다.
[주인님!]
'나도 알아. 열어봐.'
[넵!]
★천상의 메시지★
-청개구리 신의 관심-
"청개구리 신이 현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마음과 반대로 행동하는 모든 이들은 청개구리 신의 관심을 자극합니다. 청개구리 신은 당신이 박아영을 암컷으로 굴종시킬 경우 5,000포인트와 더불어 '츤츤거리지맛!' 아이템을 증정키로 했습니다."
달성 조건 : 호감도를 90까지 끌어 올린 후 상대를 공략. 단 정신 조작류 스킬 일체 허용 불가.
보상 : 5000포인트, 츤츤거리지맛 아이템.
*츤츤거리지맛 : 통통 튕기는 상대에게 복종심을 부여합니다. 복종심이 부여된 상대는 무슨 일이 있어서도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실패 시 : 청개구리 신은 당신의 실패에 실망하며, 어장안의 모든 상대의 호감도를 일제히 하락시키빈다.(-10)
[아앗, 청개구리 신께서!]
'뭐야 이건 또? 양서류의 신도 있냐?'
[주인님. 신들의 진명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별칭이 그렇다는 거죠.]
'아하.'
[아무튼 괴상한 조건이군요. 호감도를 90가지 끌어 올린 뒤 공략이라니….]
'가만. 그럼 지금 당장 좆막음 하지 말라는 거야?
[네, 지금 78이니까요. 청개구리 신의 후원을 받기 위해선 참으셔야 합니다.]
'아오! 그냥 후딱 따버리고 싶은데.'
[자중하셔야 합니다. 페널티가 강력하니까요.]
'음….'
신들의 후원을 확인한 나는 허리를 감은 손을 떼고 물러섰다. 아영이 살짝 실망하는 눈치였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뭐예요? 오빠 저한테 쫄았어요?"
<뭐야? 왜 하다 마는데? 이 정도 배짱도 없는 남자였어?
아영의 속마음을 확인한 나는 그녀의 아이러니한 태도에 어처구니없어 하며 대답했다.
"쫄긴 누가 쫄았다고? 나 싫다는 사람하곤 안 한다는 거지."
"……."
"됐다. 더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겠네."
"지금 그게 무슨 뜻이예요?"
"넌 나 싫다면서? 그냥 계속 그렇게 싫어하라고. 난 신경 안 쓸 테니까."
"…후회하실 텐데요?"
아영이 미련이 남는지 나를 붙잡았다. 하지만 이미 츤데레끼를 확인한 나는 거침없이 지껄였다.
"왜? 학과에 소문이라도 내려고? 내가 바람둥이라고? 어디 맘대로 해."
"……."
"맘대로 하라고. 그걸 가지고 비겁하게 뒤에서 협박하지 말고 어디 하고 싶은대로 해봐."
"비, 비겁하다뇨?"
"왜? 내 말이 틀려? 자꾸 내 뒤나 캐고 다니면서,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 내가 우리과 여재애들 건드리고 다닌다고 소문내고 싶은 거 아냐?"
"오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저질이예요."
"남의 약점을 빌미로 협박하는 너만 할까?"
"이이!"
"그만하자. 박아영. 네 말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어. 사람이 사람 싫어하는 데 이유가 꼭 필요한 건 아니지. 너는 그냥 너대로 나를 싫어해. 나도 너한테 관심 안 가질 테니까."
마지막 선언은 충격이었는지 아영이 처음으로 동요했다.
[와, 방금 발언은 좀 센 거 아닙니까? 저러다 아영양이 영영 떨어져 나가거나 호감도가 하락하면 신들의 후원마저….]
'아니. 오히려 이 편이 나아.'
[낫다고요?]
'아영이는 자신에게 휘둘리거나 끌려가는 남자에게 매력을 못 느끼는 타입이야. 상대가 틱틱거리니 나도 똑같이 응대하는 수밖에.'
[아!]
'게다가 은근히 방금 기대했던 것 같은데 한 발 빼니까 오히려 속으로 더 안달이 났을 걸?'
[주인님의 생각이 맞으면 좋겠군요.]
'두고봐. 오히려 철저히 무시할수록 호감도는 반대로 올라갈테니까.'
[그러다 진짜로 아영양이 터뜨리면요?]
'못 해.'
[확신하십니까?]
'절대 못 해. 아영이는 말만 저렇게 하지 실제론 나를 좋아하니까.'
[호감도만 봐선 그렇지만….]
'좋아하는데 차마 인정할 수 없는 거야. 바람기 충만한 남자에게 끌리는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거지. 그게 저렇게 툴툴대는 태도로 나타난 거고. 장담하건데, 아영이 나를 곤란하게 만들 일은 없을 거야. 좋아하는 사람을 수렁으로 빠뜨리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대단한 자신감이시군요.]
'일단 이번 캠프에서는 아영이는 배제해야겠어. 호감도 90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무르익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
[아영양이 계속 훼방을 놓으면요?]
'자존심이 무척 센 아이라 방금 말로 상당히 충격을 받았을 거야. 일단은 캠프에서는 잠잠해지겠지.'
[그러다 진짜로 주인님에게 관심을 끊을까 걱정됩니다.]
'아니. 이미 아영이는 나한테 꽂혔어. 당장 자빠뜨렸어도 아무 말 못했을 걸.'
[역시 주인님의 자심감은….]
'하지만 방치한다. 무시할수록 혼자 달아오를 테니까.'
"할 말 끝났지? 난 간다."
"……."
마지막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아영이 두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보였다.
***
술자리로 복귀한 도훈이 다시 집행부 자리로 끼어들었다.
전직 현임 집행부들은 술을 사온 도훈을 향해 물었다.
"야! 너 내 차타고 나갔었냐?"
"네. 죄송해요. 말씀 드린다는 게 깜빡했어요."
"아니 뭐 고물차라 막 굴려도 상관은 없는데 키는 어디서 났어?"
"수정이가 아까 자기 술 먹고 안 갈 거라고 몰래 주던데요?"
도훈이 몰래 윙크를 하며 수정의 탓으로 떠넘겼다. 수정 또한 순발력을 발휘해 실실거리며 대답했다.
"헤헤, 오빠 미안요. 저도 마시고 싶었다고요."
"와! 요망한 거 보소? 너 그럼 첨부터 돌아갈 생각 없었다는 거잖아?"
"술도 많은데 그냥 마시고 내일 아침 일찍 가요."
"나 참."
자연스럽게 위기를 모면한 수정이 도훈을 찌릿 노려보았다.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긴 각오를 하라는 의미였다. 다시 술이 돌고 있을 때 성수가 말했다.
"아, 맞다. 도훈아."
"네?"
"너 여기만 앉아 있지 말고 같이 할 후배들도 좀 챙겨줘라. 그래도 1년간 함께할 집행분데 회장이 먼저 가서 술도 따르고 그래야지."
"아, 그런가요? 애들 어딨어요?"
"몰라. 흩어져 있겠지."
"듣고보니 그렇네요. 제가 부탁한 것도 있으니."
도훈이 술병과 빈 잔을 들고 왁자지껄한 술판을 둘러보았다. 자연스럽게 몸을 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 1018. 별이 쏟아지는-78-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언제 박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