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3. 별이 쏟아 지는-63- >
'음? 손목에 찬 저건 뭐지?'
아영은 평소 첨단 기기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도훈이 손목에 찬 물건에 주목했다. 헬스 밴드 같기도 하고, 전자시계 같기도 한 그것은 생전 처음 보는 디자인이었다.
'아무리 봐도 브랜드 제품은 아닌 것 같은데….'
아영은 은근슬쩍 도훈에게 다가가 그가 찬 밴드를 자세히 살폈다. 이음새가 전혀 보이지 않는 구조였고, 마치 수갑이 장착된 것처럼 손목에 완전히 체결되어 있었다.
'뭐지 저게?'
축하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는 도훈에게 아영이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오빠 축하드려요. 근데 지금 몇시예요?"
"응? 지금?"
사방에서 도훈에게 말을 걸었으므로 도훈은 누가 물어오는지도 모르고 대답했다.
"내가 폰을 가방에 두고 와서…."
"손목에 찬 그거 시계 아니예요?"
"응?"
도훈은 그제야 자신에게 시간을 물은 사람이 아영이란 걸 깨닫고 긴장했다.
'뭐야 얘는? 언제 또 온거야?'
"으, 응. 시계 맞아."
도훈이 화면을 터치하자 까맣던 스크린에 시간이 표시되었다. 천상계의 특수 기술인 이중 필터를 이용해, 플레이어가 아닌 사람이 보면 스마트 워치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었다.
아영은 시간을 확인하는 척 물끄러미보다가 갑자기 손목을 덮썩 잡았다.
"근데 이거 어디 제품이에요? 예쁘다. 처음보는 디자인이네?"
"어? 아, 아니 아빠가 외국에서 선물해 주신거라 브랜드는 잘 몰라."
"아…. 그러시구나. 고마워요."
아영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볼일을 다봤다는 듯 아영이 곧바로 물러서자 도훈은 찜찜함을 느꼈다.
'뭐야 대체? 갑자기 왜 스마트 워치에 관심을 보이지?'
[저도 의문입니다. 대관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도훈은 스킬을 이용해 야영의 생각을 읽어보려 했지만, 곧이어 달려든 1학년 여학생들의 난입으로 실패했다.
"오빠! 저희 응원 보셨어요?"
"진짜 발에 땀나게 응원했는데!"
내내 치어리딩을 했던 나연과 연두였다. 두 사람이 앞길을 막는 사이 아영은 또 다시 유유히 사라져다.
"으, 응. 고마워, 큰 힘이 됐어."
"오빠 근데 배구 실력 더 느신 거 같아요."
"맞아요, 저번에 연습게임 할 때보다 훨씬 잘히시던데요?"
나연과 연두가 달라붙어 재잘거리는 통에 도훈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사이 아영은 멀찌감치 사라져버렸다. 도훈의 스마트 워치를 확인하고 온 아영은 의문을 더 해갔다.
'정말 특이한 재질이었어. 금속처럼 보이는데, 너무 가볍고 매끈하달까? 우주에서 온 광석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그녀는 의문이 점점 더해갔다.
'확실히 이상해. 경기를 뛸 때면 거추장스러워서라도 시계를 푸는 게 정상 아닌가?'
아영이 기억을 떠올리자, 도훈은 어느 한 순간도 시계를 푼 적이 없었다. 수영을 가르칠 때도, 씨름을 할 때도, 심지어 배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마치 도훈의 몸에 일부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영이 구석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열심히 기록했다.
'이상한 스마트 워치. 용도는 알 수 없음.'
아영이 기록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아영아."
아영이 고개를 돌리자 태영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왜?"
"그, 어제 일 말인데…."
아영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대답했다.
"어제 뭐?"
그녀의 쌀쌀맞은 태도에 태영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지만 겨우 용기를 냈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가슴에 짐덩이처럼 안고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어제 도훈이 형에 관련된 이야기는 사실 내가 지어낸 말이었어. 그러니까 혹시라도 소문을 내거나…."
"무슨 소리야 뜬금없어?"
"아니, 그러니까 픽업 아티…."
"난 관심 없어."
"응?"
"그런 소문 신경 안쓴다고. 그러니까 누구한테 말하거나 발설하지도 않을 거야. 됐지?"
"아, 아…. 고, 고마워."
생각보다 쿨한 대답에 태영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하루종일 그것 때문에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히 아영은 지나가는 말처럼 여겼던 모양이었다. 혹은 평소에도 왕따처럼 지내왔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런 얘기를 전할 사람이 없는지도 몰랐다.
"…근데 왜 갑자기 그 얘기를 해?"
아영이 불쑥 따지듯 물었다.
"응?"
"설마 내가 주변에 떠들고 다닐까봐 그래?"
"아, 아니. 괜히 나 때문에 도훈이 형이 곤란해지면 안되니까…."
"흐음. 그렇단 말이지?"
아영이 씩 웃었다. 태영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알았어. 소문 안 낼게."
"그, 그래. 어차피 사실도 아니니까…."
"근데 너 그거 알아?"
"뭐, 뭐?"
"네가 그렇게 사정하니까 더 이상해 보인다는 거."
태영이 난감해하면서 대답했다.
"아니. 그래도 내가 지어낸 유언비어 때문에 도훈이 형이 곤란해지면 미안하니까…."
"알았어. 할 애기 끝났으면 그만 가봐. 너랑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아영이 차갑게 선을 그었다. 그 단호함에 태영이 바짝 기가 죽었다. 어젯밤에 술 취했을때만 해도 쉬워 보였던 그녀가, 이렇게 어렵게 느껴질 줄 몰랐다. 완전히 철옹성이었다.
'흐윽, 이렇게 인간관계를 칼같이 끊는 애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해버린 거야, 나는. 그래, 다 내 업보다. 어쨌든 결자해지는 하고 가야겠지.'
태영은 시원섭섭한 마음에 한 마디 덧붙였다.
"어차피 나 군대 갈 테니 앞으로 얼굴 볼일 별로 없을 거야."
"……."
"어쨌든 미안했다. 여러모로."
"군대는 왜?"
아영이 반응을 보였다.
"그냥. 이대론 도무지 변할 게 없을 것 같아서. 도훈이 형도 군대를 다녀와서 사람이 엄청 바뀌었다고 들었거든."
"…도훈 선배?"
아영은 도훈의 이름이 언급되자 다시 관심을 드러냈다.
"어. 그래서 나도 형을 롤 모델로…."
아영이 급하게 말을 끊었다.
"도훈 선배가 군대 다녀와서 변했다고? 누가 그래?"
아영의 레이더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과거까지 모조리 캐낼 기세였다. 그녀는 한곳에 천착하면 지독하고 물고늘어지는 특성이 있었다. 지금 그녀의 모든 관심사는 도훈에게 쏠려 있었다.
"자세히 말해봐. 무슨 내용인지."
쌀쌀맞은 아영이 반을을 보이자 태영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막상 군대 간다니까 불쌍해 보였나 보다. 어차피 전역하고 또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기왕이면 끝은 기분좋게 헤어져야겠지?'
"아, 그게 도훈이 형이 직접 얘기해 준 건데…."
태영이 또다시 촉새처럼 떠들었다.
물론 이번에는 뒷담화가 아니었고, 오히려 칭찬에 가까웠기 때문에 양심의 거리낌도 없었다. 어제의 실수를 만회한다는 각오로 태영은 도훈에 대해 아는대로 떠들었다.
아영은 태영이 전해준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게다는 듯 집중해 전해 들었다.
***
"자, 오늘은 저녁 전까지 자유시간이다. 식사 준비팀은 한 시간 전에 미리 올 수도 있도록."
"와!!!"
"부회장님 멋져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라."
성수가 학생들에게 자유시간을 부여했다. 어차피 오전 훈련도 모두 끝났고, 비치 발리볼 응원가지 소화한 마당에 다시 훈련을 시작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게다가 여름휴가 기간에 해변에 놀러 왔으니, 마음에 맞는 동기들끼리 자유시간을 갖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이들을 해산시킨 성수는 옆에 서 있던 도훈과 유미를 보고 말했다.
"두 사람은 나랑 시원하게 아아 한잔 하러 갈래?"
"아이스 아메리카노?"
"지금요?"
"어. 상의할 내용도 있고. 시간 되지?"
"네. 그럼 씻고 옷 갈아입고 올게요."
"도훈이 너도?"
"아뇨. 전 그냥 웃옷만 걸치면 돼요. 어차피 또 씻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 그럼 유미만 후딱 다녀와."
유미가 짐을 챙겨 샤워장으로 사라지자 성수가 말했다.
"우린 담배나 한 대 빨고 있자."
"네, 형."
두 사람은 흡연구역으로 이동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내리쬐는 햇볕은 무덥긴 했지만, 바닷바람이 불어 청량감이 드는 오후였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성수가 말했다.
"짜식, 오늘 수고했다."
"뭘요. 운이 좋았죠."
"혹시 배구도 군대 가시 늘었냐?"
"네?"
"아니야 어쨌든 이겼다는 게 중요하지. 오늘 아주 잘해줬어."
"형 덕분이죠. 형 때문에 상금도 탔네요."
"맞다. 상금 진짜로 다 쏠거야? 조금만 찬조해도 되는데."
"괜찮아요. 유미도 전액 보태는데 동의했어요."
"그래도 100만원이 적은 돈도 아니고…. 너 돈 많냐?"
"저요?"
"어. 겨울방학 때 벌어놨던 알바비 슬슬 떨어질 때 된 거 아냐? 요샌 알바도 안하는데 돈도 팔팔 쓰는 것 같고."
"그냥 용돈이 좀 늘었어요. 이번 작품이 잘 되시나봐요. 용돈 늘려주신거 보면."
도훈은 미국에 계신 소설가 아버지 핑계를 댔다. 유명한 소설가다 보니 성수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도훈이 대충 얼버무리자 성수가 물었다.
"맞다. 미국에 계신 부모님은 무탈하시고?"
"네."
"여동생은 올해 대학가나? 이름이…."
"혜은이요?"
"어. 음악 한다고 미국 유학갔었지?"
"네, 뭐 올해 가겠죠."
도훈의 무신경한 반응에 성수가 열을 올렸다.
"얀마. 아무리 현실 남매사이라도 동생한테 너무 무관심한 거 아니야? 그래도 하나뿐이 혈육인데."
"그런가?"
'혈육은 무슨, 배다른 이복남매더만.'
[그러보보니 매번 귀찮게 연락하던 혜은양이 미국 돌아간 이후로 도통 소식이 없군요.]
'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혼란스러울테지. 놔둬.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니까.'
[성수군 말대로 너무 매정하신 거 아닙니까?]
'아니. 어쨌든 본인이 정리해야 할 문제란 말이지. 이제 스무살이고 어엿한 성인이니 알아서 하겠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뜻이야.'
[그래도 부모님께 가끔 안부도 묻도 연락도 해보십시오. 죽은 원주인이 섭섭해 하시겠습니다.]
'그런가. 내가 좀 무심하긴 했네. 아무래도 내 부모가 아니고, 직접 만난 것도 아니다 보니까, 남같이 느껴져서.'
"맞다. 그나저나 좀있다 유미 오면 말하려고 했는데, 너도 알고 있어라."
"뭐요?"
"오늘 체육과 학회장 이취임식 할 거라고."
"오늘요?"
"왜? 설마 아직도 결정 못했어?"
"아니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발표 몇 시간전에 통보하는 게 설마 상의는 아니죠?"
도훈이 열을 올리자 성수가 저자세로 돌변했다.
"도훈아."
"왜요?"
"우리가 알고 지낸 지 몇 년이냐? 형 재수하고 들어왔을 때 1학년 때 너랑 나랑 얼마나 재밌게 보냈냐?"
"갑자기 그때 얘길 왜 해요?"
"너 군대가고, 나도 군대가고 도원결의한 의형제처럼 2년 뒤에 다시 만나자고 했었잖아 그때. 낸들 허리 다치고 1년 먼저 의병제대 할 줄 알았냐. 그렇게 먼저 돌아와서 부회장 하고 있는데, 네가 돌아와서 얼마나 기뻤는 줄 모른다."
"무슨 신파극 찍는 것도 아니고. 본론이나 말해요."
"이제 네 차례다. 너밖에 없어."
"아니. 근데 이건 당사자 의사가 더 중요한 거잖아요."
"왜? 진짜로 싫어? 싫으면 강요 안 할게."
성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곰같은 덩치의 사내가 풀죽은 모습이 그렇게 꼴보기 싫을 수 없었다.
"아씨, 젠장. 일단 유미오면 얘기해요."
유보적인 반응에 성수의 표정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순전 연기였던 것이다.
"그래! 긍정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자고!"
***
해변이 바라보이는 까페.
현직 체육과 회장인 유미와, 부회장 성수, 그리고 차기 회장으로 거론되는 도훈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집단 지도 체제?"
"아니, 그냥 비유가 그렇다고요. 제가 회장을 받아들이는 단 하나의 조건이에요."
성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래도 이제까지 관행이라는 게 있는데…. 부회장도 없이 집행부를 꾸려가는 게…."
그러나 유미는 훨씬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것도 괜찮겠다."
"유미야."
"오빠. 생각해 봐요.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지금 2학년 애들 중에 도훈오빠 도와서 부회장할 사람 있어요?"
"원래 우선이가…."
"우선이 군대 간다면서요. 입대한다는 애를 붙잡을 거에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도훈 오빠도 그게 걱정되는 거잖아요. 저 솔직히 말씀드리면 회장으로서 잘한 건 하나도 없어요. 맨난 경기 나간다고 빠지고, 훈련간다고 빠지고. 단대 학회장 회의도 성수 오빠가 매번 대리출석했잖아요."
"그건 네가 우리 대학 대표 선수니까."
"그러니까요. 저한테 오빠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잖아요. 제가 얼굴마담만 해줘도 실무는 오빠가 다 해결해 줬으니까 가능했던 거죠."
"뭐 꼭,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근데 도훈 오빠는요? 옆에 아무도 없잖아요. 3학년 올라갈 애들 완전 개인플레이 하는거 잘 아시잖아요. 그렇다고 2학년 막 올라간 애들한테 부회장을 덜컥 맡긴다고 학과가 잘 돌아갈 것 같지도 않고요. 그래서 저는 도훈 오빠 아이디어가 괜찮다는 거예요."
팔짱을 끼고 있던 성수가 커피를 들이 마시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좋아. 그럼 도훈이 네 말처럼 따로 부회장을 두지 않고, 2학년 애들을 여러명에게 임무를 나누겠다는 거지?"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훈이 대답했다.
"네. 성수 형은 혼자서 해냈지만, 지금 1학년 애들이 그런 일을 하기엔 무리에요.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나누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혹시 생각해둔 애들 있어? 과를 이끌어갈만큼 열정적인 애들 말이야."
"네."
도훈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 1003. 별이 쏟아지는-6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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