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1 별이 쏟아 지는-61- >
준결승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결승 경기가 이어진다는 말에 성수가 주최 측에 따졌다.
"잠시만요, 방금 막 경기 끝났는데 휴식시간은 주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한 팀이 부전승 처리되는 바람에, 반대쪽에서 올라온 팀이 한참 기다렸거든요."
"아니 그래도…. 이건 형형성이 안 맞는 것 같은데요."
"다른 조 경기도 기다리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대진운도 게임의 일부고요."
"아니…."
성수가 계속 따지려들자 도훈이 말렸다.
"형, 괜찮아요. 바로 할 수 있어요."
"그래도 이건 불공평하잖아."
불만 가득한 성수를 겨우 떼놓은 도훈이 말했다.
"심판도 그렇잖아요. 대진운도 게임의 일부라고. 상대팀도 계속 기다렸으니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연이어서 하는 게 꼭 불리한 것도 아니에요. 상대는 몸이 식었고, 저희는 완전히 풀려 있으니까."
도훈의 대답에 성수가 허탈하게 웃었다.
"원 참, 역시 넌 천재네."
"천재요?"
"천하의 재수 없는 새끼라고. 얼굴도 잘생긴 게 성격까지 관대하냐? 다른 애들은 어쩌라고."
"별 말을 다하시네."
"오빠, 애들 응원 좀 자제시켜 주세요."
잠시 물을 마시고 온 유미가 성수에게 부탁했다. 흐르는 땀을 닦았는지, 목에 스포츠 타올을 걸치고 있었는데 타올 깃이 가슴골 안으로 파고 들어가 바라보기 심히 민망했다.
성수가 부끄러움에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으, 응. 조용히 하라는데도 극성이다야. 근데 유미 오늘 의상이…."
"왜요? 색상이 별로예요?"
"아니, 그냥…."
성수는 보수적인 사내였으므로, 유미의 과한 비키니에 정신이 아찔해 지는 것 같았다. 평소 과회장 때 부회장의 자격으로 자주 봐서 그런지, 비키니를 입은 유미가 어색했다.
'어휴, 유미도 여자는 여자구나. 몸매 좋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수영복 입은 모습 보니 장난이 아니네. 남자들이 왜 열광하는지 알겠어.'
게임을 구경하는 관중들은 정확히 두 패로 갈려있었다.
여자들은 모두 도훈을 응원하고, 남자들은 모두 유미를 응원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형. 유미가 첫 경기 때 발목이 좀 다쳤어요."
"부상이라고?"
"네. 그래서 지금 저 혼자 수비랑 공격 거의 다 보고 있어요."
"어쩐지…. 유미가 안 때리더라니. 난 또 전력을 숨기는가 했네. 근데 쟤들 좀 쌔 보이지 않냐?"
성수가 네트 반대편에서 몸을 풀기 시작한 외국인 혼성조를 쓰윽 쳐다보았다. 2미터에 육박하는 거구의 남성과, 엄청난 근육질의 흑인 여성 2인조였다.
남자는 유럽 남성 특유의 각진 얼굴과 금발의 스포츠 머리였는데 딱 보아도 운동을 잘하게 보였다.
"피지컬 보소. 블록 뜨면 완전 벽이겠는데."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여자분도 꽤 하더라고요."
유미는 흑인 여성에 주목했다. 특유의 탄력성과 파워를 겸비한 종특 때문에 겉만 여자고 실제론 남자보다 뛰어난 운동능력이 예상되었다.
성수가 절래절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승이 쉽지 않겠는데…. 유미도 제 컨디션이 아니고. 이길 수 있겠냐?"
"어떻게든 해 봐야죠."
성수가 진지하게 말했다.
"후배들 다 지켜보고 있다. 우리 과 명예를 걸고 열심히 해라.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았어요."
"도훈 오빠가 잘 할 거예요. 특히 백어택이 일품이라."
"백어택?"
유미가 또 쓸데없는 드립을 날리자 도훈이 적당히 끊었다.
"형 그럼 곧 경기 시작할 거 같으니까 저희도 이제 몸 좀 풀게요."
"그래. 파이팅."
성수가 관중석으로 돌아가자 도훈이 유미를 보고 말했다.
"아까부터 왜 자꾸 백어택이래?"
"사실이잖아요. 오빠 뒤치기 좋아하는 거."
"야! 게임 중에…."
"흐흐. 암튼 오빠만 믿을게요. 오늘 우승하면 제가 나중에 서비스 듬뿍 해드릴게요."
"그런 소리 마."
"진짠데? 질싸 가능."
"야아. 게임에나 집중하라고."
"긴장되니까 성욕이 폭발할 것 같아서 그래요."
자신만만하던 유미도 살짝 긴장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0프로 전력으로 붙어도 비등비등한 상대를, 하필 부상을 입은 채 만났기 때문이었다. 도훈이 알겠다면서 유미에게 잠시 물을 먹고 온다고 말했다.
"나 물 좀 마시고 올게."
생수병을 찾아 이동한 도훈은 몰래 주머니에서 캡슐에 싸인 알약을 꺼냈다.
'로시. 이거지? 점프점프 알야.'
[네. 맞습니다. 복용 후 1시간동안 중력이 0.8배로 적용됩니다.]
[0.8배면…. 그러니까 평소보다 20~30프로 더 가벼워진단 소리지?'
[그렇습니다. 서전트 점프가 1M인 선수가 복용시 1.25M를 도약할 수 있게 됩니다.]
'오호라. 그렇다면….'
도훈이 몰래 약물을 복용하며 생각했다.
'그 정도면 15cm의 키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거야. 도핑이라고 폄훼 당해도 상관없어. 내가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플레이어가 템빨 쓰는 게 뭐가 대수라고.'
도훈이 특유의 합리화를 시작했다. 초능력자가 초능력을 쓰는 게 어째서 반칙이냐는 항변이었다.
약효가 돌기 시작하자 확실히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중력이 얼마나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와, 몸이 깃털처럼 가벼운데?'
[당연하지요. 주인님의 근력은 그대로인데, 체중이 20% 감소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도훈은 한결 가벼워진 몸에 의욕을 불태웠다.
'이긴다. 게르만 전사. 한국인의 매운맛을 보여주마.'
"그럼 남녀 혼성 결승, 시작합니다."
"와아아아아!"
결승이다 보니 관중으로 평소의 배로 늘었다. 체육교육과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온 덕에, 구경거리가 있는 줄 알고 바닷가에 놀러온 시민들이 합류하기 시작했고 특유의 군중심리가 발동되면서 경기장 주변을 가득 메울 만큼 인파가 집중되었다.
"와, 무슨 이벤트인가?"
"비치발리볼 대회래."
"그거 비키니 입고 배구하는 거지? 재밌겠다."
관중이 구름같이 몰리자 행사를 개최한 주최측도 매우 만족했다. 결국 이런 행사는 지역 홍보차원으로 열린 것이니 만큼, 피서객들에게 즐길거리를 제공한 점에서 성공적인 개최라고 할 수 있었다.
1세트는 외국 혼성팀에서 먼저 서브를 넣었다. 도훈은 바짝 긴장한 체 리시브를 준비했다. 강력한 상대니 만큼 위력적인 공이 날아올 것 같았다.
곧 게르만 전사가 서브를 날렸다.
머리위로 손을 휘둘러 치는 단순한 오버 서브인데도 어마어마한 강서브가 날아왔다.
'무, 무회전?'
무회전 서브.
축구의 무회전 프리킥과 마찬가지로 공에 스핀을 먹이지 않기 때문에 낙하지점에 심하게 흔들리는 특성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궤적에 도훈은 겨우 팔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잘못 받은 공은 유미가 받지 못할 곳으로 튕겨 나가버렸다.
"1:0"
심판이 무미건조하게 득점을 알렸다.
상대팀의 굉장한 실력에 국성대 학생들도 덩달아 긴장했다.
"봤어? 공 끝 흔들리는 거?"
"도훈이 형이 제대로 받지도 못하는데?"
"아마추어 맞아? 용병 데려오는 거 반칙 아니냐?"
"뭔 소리야, 애초에 출전자 국적 제한도 없는데."
관중들이 동요하는 사이 도훈이 이를 꽉 깨물었다.
'제길. 시작부터 쪽팔리게.'
[주인님. 상대가 예상보다 강한 것 같습니다.]
'알아. 아는데, 갑자기 짜증나네.'
도훈이 심기일전하며 두 번째 수비를 준비했다.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그의 동체시력이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니었다. 유미가 도훈을 격려했다.
"오빠. 차분하게, 공 끝까지 봐요."
"OK!"
다시 이어지는 무중력 서브.
공의 궤적은 종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하짐만 도훈은 학습능력이 빨랐다.
'속도가 빠른 건 아냐. 충분히 따라갈 수 있어.'
도훈이 예측을 하며 팔을 갖다 댔다. 불안정 하긴 하지만 공이 위로 띄워졌다. 기다리고 있던 유미가 아픈 발을 이끌고 정확하게 공중으로 올려보냈다.
도훈이 도약자세를 갖추고 힘차게 날아올랐다.
중력이 줄어든 도훈은 평소보다 훨씬 높게 떠올랐다. 그 때문에 오히려 살짝 엇박자가 나고 말았다.
'아차!'
중력 조건이 변한만큼 그에 맞춰 도약을 했어야 하는데, 연습 없이 바로 적용하는 바람에 타이밍이 엇갈린 것이었다. 제대로 타점을 맞추지 못한 공이 날아가자 게르만 전사가 득달같이 달려와 블록으로 막아섰다.
팡, 팡!
때리자 마자 튕겨나온 공이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2:0
블록을 성공시킨 게르만 전사가 특유의 웃음을 짓자 태양빛에 누런 금니가 번뜩였ㄷ. 조롱하는듯한 표정에 도훈이 분기탱천했다.
'이 독일 소시지 같은 새끼가 진짜!'
[진정하십시오. 이제 게임 시작입니다.]
도훈이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자 경기 경험이 많은 유미가 침착하게 도훈을 타일렀다.
"오빠. 괜찮아요. 금방 따라잡을 수 있어요."
"미안. 타이밍이 조금 안맞았어."
"점프가 더 높아진 거 같은데, 더 위로 띄울까요?"
"어. 그렇게 해줘."
도훈이 고전하는 모습에 성수가 학생들을 독려했다.
"야! 뭐해 니들! 응원 안하냐?"
"심판이 응원 자제하라고…."
"됐다! 그래! 내가 퇴장 당할 거니까, 가열차게 시작해라! 연두, 나연!"
"네!"
호명을 받은 연두와 나연이 벌떡 일어섰다. 평소에도 체육과 배구 게임에서 치어리딩을 자처하던 이들이었다.
"빡시게 응원 부탁한다."
"넵, 맡겨 주세ㅛㅇ!"
"아자아자 체교과 파이팅!"
도훈에 대한 집착으로 다소 소원해진 두 사람이었지만, 응원전에 들어가자 어느새 의기투합해 체육과 응원을 이끌었다. 지켜보던 심판은 관중이 구름떼처럼 몰린 상황에서 특별히 제지할 생각이 없었다.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있는데, 쥐죽은 듯 조용한 것보다 응원전이 벌어지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더욱이 한국에서 주최한 대회에서 외국인이 우승하는 것보다 한국인 우승을 더 바라는 애국심도 한몫했다.
"이도훈! 이도훈!"
"형 할 수 있어요!"
힘찬 응원과 함께 도훈이 더욱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아씨, 여기서 지면 진짜 개쪽이다. 후배들이 저렇게 응원까지 하는데 이젠 자존심 싸움이야.'
[할 수 있습니다 주인님.]
한편 정음과 함께 경기를 지켜보던 아영은 도훈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 이도훈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까?'
"걱정이네. 상대팀이 생각보다 너무 잘하는데."
"사실 키 차이부터 뭐…."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 게임을 무조건 키로 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 도훈 선배는 긴 쪽일까 그럼?"
"응?"
"아니야, 아무것도."
아영은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독일 사람이 클까, 이도훈이 클까?'
아영은 눈에 보이는 키 차이보다, 보이지 않는 다른 것이 차이에 주목했다.
'후후. 정말 길고 짧은지 궁금하긴 하네, 나도.'
다시 이어지는 게르만 전사의 서브. 서비스에이스에 이어 블록까지 성공시킨 게르만 전사는 자신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후후. 열등한 코리안들 같으니. 우승 상금 거저 먹고 갑니다.'
또 다시 시작된 무중력 서브.
하지만 어느새 서브에 적응한 도훈은 안정적으로 공을 받아냈다. 유미는 멋지게 파고들며 공을 위로 높이 띄웠다.
'좋아. 달라진 신체 조건에 맞춰서….'
점프력이 올라간 것은 장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밸런스가 깨진 만큼 적응이 필요했다.
하지만 도훈은 순식간에 변화에 적응해냈다.
또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라 때리는 강타.
완벽하게 손바닥에 채인 공이 빠르게 네트위를 가르고 날아갔다. 게르만 전사가 급하게 막아보려 했지만, 그의 블록 사이를 뚫고 간 공이 흑누나의 수비에 걸렸다.
팡!
하지만 겨우 손을 가져다 댔을 뿐 공끝이 워낙 매서웠으므로, 곧바로 경기장 밖으로 튕겨나가버렸다.
"우아!"
"역시 도훈 선배!"
"멋져요!"
점수가 2:1이 되자 경기가 팽팽해졌다.
관중들도 점점 들떠 올랐다.
"잘 쳤어요, 오빠."
"공이 좋았어. 유미 네 서브지?"
"네. 제가 수비 봐도 되니까 블록 좀 잡아주세요."
"알았어."
유미가 평범한 서브를 날리자 상대방도 곧바로 반격을 준비했다. 특히 흑누나의 안정적인 포지셔닝은 전문 리베로에 비견될 정도였다. 수비만 놓고 보면 대회에 참가한 어느 누구보다 빼어난 실력이었다. 공이 적절히 떠오르자 게르만 전사가 속공에 들어갔다.
'흥, 감히 우릴 상대로 점수를 뽑아?'
게르만 전사는 방금 전 도훈의 공격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100번 때리다 보면 한번 얻어걸리는 정타가 마침 들어간 것이라고.
'공격은 이렇게 하는 거…. 엉?'
네트 앞에 서있던 도훈이 두 팔을 들고 붕 떠올랐다. 당연히 키 차이 때문에 막지 못할 것 같았지만, 점프력이 엄청나 자신의 공을 완전히 막아서고 말았다.
'뭐, 뭐야? 이 미친 점프력은!'
블록에 걸린 공을 흑누나가 몸을 날려 잡았다. 과연 기가 막힌 반사신경이었다. 게르만 전사는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 번 강타를 준비했다.
'어디 한번 또 막아봐라!'
전력을 다해 휘두른 공격.
커다란 키만큼 긴 리치에서 휘둘러지는 팔이 회초리처럼 배구공을 강타했다. 하지만 도훈은 어림없다는 듯이 한 번더 뛰어오르더니 공을 완벽히 막아냈다.
두 차례의 선방에 결국 외국팀이 무너졌다.
"2:2"
"우아아아아아!"
"봤어? 방금 봤어? 도훈이형 블록 뜨는거?"
"점프 장난 아니네! 흑인 보는 줄 알았잖아!"
NBA경기에서 흑인 농구선수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서전트 점프를 도훈이 해보인 것이었다. 도훈의 엄청난 능력에 성수마저 혀를 내둘렀다.
'저 새끼 한계는 대체 어디까지야?'
< 1001. 별이 쏟아지는-6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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