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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14화 (981/2,000)

< 997. 별이 쏟아 지는-57- >

"…마유미, 오랜만이다?"

"응? 내 이름을 기억해?"

플라이 하이의 여선수가 유미를 노려보았다. 왠지 모를 적개심과 열등감으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너를 어떻게 잊겠어. 내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인데."

"…뭐라고?"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자 심판이 껴들며 중재했다.

"게임 중 잡담은 그만하고, 서브권은 동전 던지기 결정하겠습니다. 국성대 체교과팀? 앞 뒤 선택해주세요."

"그럼 뽑습니다."

심판이 주화를 공중으로 튕기더니 손바닥에 착지시켰다.

동전은 앞이었다.

"선공은 플라이 하이 팀부터. 기본적인 룰은 국제 비치발리볼 대회 규정에 따르고요, 시간상 15점 3세트 렐리포인트로 진행합니다. 이해하셨죠?"

"네."

"……."

활기차게 대답하는 유미와 달리 상대는 아직도 유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 양정미 선수?"

"예?"

"게임 시작하세요."

"네."

정신을 차린 정미가 심판에게 공을 받아들고 서브라인 뒤로 물러섰다. 선수의 이름을 들은 유미는 그제야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아! 생각났다. 삼양여중 라이트 양정미!"

***

유미는 발육이 남달랐다.

초등학교 때 키가 이미 170을 넘었으므로, 당시 배구부를 키우던 담당교사가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배구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키만 큰 것도 아니었다. 유독 성장이 빨랐던 그녀는 이미 3학년 때 어머니에게서 브래지어 착용을 권유받았을 정도로 성적으로 조숙했다.

중학교에 이르자 키가 175가 넘었다. 또래 남자들은 물론, 어지간한 성인 남자들도 그녀보다 작을 정도였다. 나이에 맞지 않는 빠른 성장은 그녀가 배구선수로 성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때론 본의 아니게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모처럼 사복을 입고 외출할 때면 대학생은 물론, 직장인 연배의 남자들까지 그녀에게 추파를 던져왔다. 어린 시절부터 얼굴이 예뻤고, 비율 또한 모델 같았기 때문이었다.

소위 엔터테이먼트 기획자라는 사람들에게 명함도 자주 받았다. 걸그룹, 모델, 영화배우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그녀의 이른 성장에 주시하고, 감탄하고, 유혹을 뻗쳤다.

하지만 유미는 배구가 너무 좋았다. 운동을 하면 흠뻑 땀 흘릴 때면 승부와 상관없이 커다란 만족감을 얻었다.

그런 그녀의 중3시절.

전국규모의 대회에서 그녀가 속한 중학교가 결승에 올랐다. 상대팀은 삼양여중이었다.

유미의 포지션은 주포라고 불리는 '레프트'. 그녀와 맞선 상대는 당시 대형 유망주로 꼽히던 오른손 공격수 양정미였다. 고교 감독들과 스카우터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유미와 정미의 대결이 펼쳐졌다.

확실히 중학교 대회라고 해도, 전국 결승에 오른 만큼 양팀을 치열했다. 유미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과 비슷한 신장의 선수를 만나 고전했다.

공격을 때리면 블록에 걸리기 일 수였다. 물론 승부욕이 강한 유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세트 듀스에서 충격적인 사고가 벌어진다.

속공을 펼치던 정미가 착지하면서 유미의 발등을 밟아버린 것이었다. 발등을 밟힌 유미도 다쳤지만, 큰 부상을 입고 그대로 구급차로 실려갔다. 승부는 유미가 속한 중학교의 신승으로 끝이 났다.

이후 고교에 진학한 유미는 부진했다.

끝없이 자랄 것 같던 키는 아슬아슬 180 언저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180이면 결코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주 공격수로 뛰기엔 살짝 아쉬웠다. 공격수 사이에서 10cm 차이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고2가 되자 초등학교 이후로 내주지 않았던 주포 자리도 후배에게 내주게 되었다. 수비실력도 좋으니 리베로 같은 포지션 변경 권유도 있었지만 자존심이 상한 유미는 그  길로 배구를 접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프로가 되지 못한 선수들은 진로는 너무 좁았다. 축구나 야구같은 메이저 종목이 아닌 배구에선 더욱 그랬다. 결국 유미는 고2 후반기부터 공부로 전향했고, 체육교사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대학에 온 유미는 다시 배구에 대한 열정을 되찾았다. 상처 난 자존심을 애써 다잡고, 키가 다소 작아도 공격수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연습했다.

속공, 페인트, 시간차. 높은 타점에서 내리 꽂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그렇게 유미는 다시 대학리그에서 주목받은 선수로 거듭났다.

유미가 이러한 곡절을 겪는 사이 정미 역시 결승 경기에서의 부상 이후 완전히 인생이 틀어지고 말았다. 발목이 돌아간 부상은 회복과 재활에만 1년 이상이 걸리는 심각한 경우였고, 많은 고등학교에서 그녀의 영입을 포기했다.

모든 운동선수들이 그렇지만, 자칫 학창시절의 심각한 부상은 선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만다.

정미는 예후가 좋지 못했다. 멘탈이 무너지면서 인내심을 필요로하는 재활도 소홀히 했고, 1년이 지나도 기량은 회복되지 못했다. 더욱이 유미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프로로 뛰기엔 성장이 일찍 끝나고 말았다. 중학교 때 자란 키가 전부라는 속설이 그대로 들어맞는 경우였다.

똑같이 운동을 중도 포기했지만, 유미가 제2의 길을 모색한 반면 정화는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인생의 절반을 걸었던 목표가 좌절된 순간, 그녀는 스스로를 놓아 버렸다.

약간의 폭력적 성향, 또래보다 월등한 피지컬. 그리고 삶이 자신에게 시련을 준다고 생각하는 이유 없는 분노까지 겹쳐진 그녀는 완전한 비행 청소년이 되고 말았다.

불량한 써클에 가입하고, 후배들을 괴롭혔다.

공부는 뒷전이고 남자들과 담배피고 술 마시고 노는 것에 열중했다. 문란하게 노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어느 날 남자친구도 아닌 양아치 한명과 잠자리를 갖은 정미는 새벽에 눈을 떴다. 자취방은 당장이라도 바퀴벌레가 튀어나올 것처럼 지저분했다. 잠결에 집어든 생수통을 들이켰더니 담배 필터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에이, 씨발!"

정미는 그 순간 폭발했다.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을까.

고등학생 신분에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와 술을 진탕 마시다 아무렇게 뒹구는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언제 한 번 상상이나 해봤단 말인가.

'마유미, 그 썅년 때문이야.'

정미는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주범으로 유미를 원망했다.

착지 순간 그녀의 발만 안 밟았어도. 그러면 발목이 돌아갈 일도 없었고, 배구로 유명한 명문고에 진학했을 것이다.

찰나의 사건이 앞선 모든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이제는 남은 자신의 삶까지 송두리째 잡아 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유미, 마유미! 그년만 안 만났어도!'

정미가 이를 바득 갈았다. 언젠가 유미를 만나게 된다면, 그 날의 복수를 꼭 하고 싶었다.

그런데 우연히 참가한 비치발리볼 대회에서 운명적으로 유미를 다시 만난 것이다. 자신의 이름조차 생경해하는 평생의 원수를.

'…마유미, 부셔버리겠어. 내 인생도 나처럼 되도록.'

***

상대팀 남자 선수가 서브를 날렸다.

생각보다 날카로운 서브였다.

'어우씨, 장난 아닌데?'

아마추어 대회라 방심했던 도훈이 겨우 공을 위로 띄웠다.

두 사람의 작전은 무조건 3타 공격이었다.

먼저 리시브를 한 사람이 공을 띄우고, 두 번째 사람이 알맞게 토스해주면 다시 처음 리비스한 사람이 공격을 때리는 것이다.

불안정하게 올라간 공이지만 유미가 여유 있게 네트 옆으로 붙였다. 도훈이 완벽한 점프 자세로 도약하며 강공을 꽂았다.

팡-!

도훈의 배구 실력은 유미의 배구 실력을 재능 모방했다.

초등시절부터 배구만 알고 살아온 유미의 재능은 비록 80%만 모사했을지언정 남들이 보기엔 감탄할만한 경지였다.

"우아! 방금 봤어 스파이크?"

"저 사람 얼굴만 잘 생긴게 아니잖아?"

"완전 바닥에 꽂아 버리네!"

유미의 배구 적성과 더불어 특유의 피지컬이 더해진 공격은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었다. 애초에 남자와 여자의 근력이 다른 만큼 점프에서의 타점도, 그리고 회초리처럼 후려치는 회전력도 월등했다.

플라이 하이팀 선수들은 감히 낙하지점을 따라가지도 못했다. 모래사장에 꽂힌 공이었지만, 원체 강타로 후려쳐 그런지 관중석까지 튕겨나갔다.

"1:0."

심판의 수신호에 간이 점수판에 점수가 올라갔다.

"오빠, 컨디션 좋은데요?"

"네가 잘 올렸어."

유미는 도훈의 실력에 매우 흡족해했다. 당연히 자신의 재능을 모방했으니 공격 타이밍이나, 자세도 거의 흡사했다.

'도훈 오빠는 정말 운동 천재인가? 후보라서 배구 연습은 별로 안했다고 들었는데 저 정도라고?'

하지만 유미는 운동의 세계에선 재능이 전부라는 것을 알고 있어?ㅆ다. 야잘잘 이란 말처럼, 배잘잘도 마찬가지다. 물론 기본 전제는 타고난 피지컬이지만.

'키가 딱 10cm만 컸어도 배구 선수로 대성했을 재목인데, 정말.'

유미도 그렇지만 도훈도 프로로 뛰기엔 아쉬운 키였다. 가장 단신인 리베로조차 180을 넘는 프로들 사이에서 빛을 발하기 아쉬운 재능이었다.

'그치만, 이런 지역 대회 정도는 껌이지.'

"국성대 체교과, 서브."

심판의 지시에 따라 도훈이 서브라인에 섰다.

자연스럽게 유미가 네트 앞에서 스크린 플레이를 펼쳤고, 상대팀의 정미 역시 네트를 사이에 두고 유미와 마주섰다.

"옷 꼴 좀 봐. 창피하지도 않니?"

막간을 이용해 정미가 시비를 걸었다. 지나치게 노출이 심한 유미의 수영복에 딴지를 거는 것이었다. 물론 유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자신 있으면 너도 이렇게 입어보지 그래?"

"흥,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기는."

"간만에 재회했는데 말이 말이 좀 심하지 않아?"

유미가 살짝 짜증을 내는데 도훈의 서브가 이어졌다.

도훈은 처음부터 스파이크 서브를 준비했다.

마치 공격을 하듯 점프 동작에서 내리꽂는 서브였다.

도훈이 서브라인 뒤에서 공을 띄우고 도약하자 지켜보던 관중들이 흥분했다.

"오오! 시작부터 강서브야?"

"모래바닥에선 쉽지 않을 텐데?"

배구는 실내 스포츠다. 단단한 나무바닥을 딛고, 미끄럼 방지가 되는 운동화를 신은 상태에서야 완벽한 점프가 가능하다. 모래사장에서 달리기를 하면 속도가 안나오 듯, 점프 역시 물에 잠긴 것처럼 위축되고 만다. 하지만 도훈은 말도 안되는 운동신경과 근력으로 스파이크 서브를 정확히 날렸다.

팡!

"서비스 에이스!"

"완전 대박인데?"

"프로 아냐? 프로?"

"프로하기엔 좀 작지."

서브 득점이 나오자 관중들이 또 다시 열광했다. 국성대 체교과팀은 외모나 피지컬 뿐만 아니라, 실력으로도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체교과면, 체육과랑은 다른 거지?"

"어, 체육교육과라는 소리잖아."

"그럼 사범대?"

"와, 전공 체육도 아닌데 저렇게 배구를 잘한다고? 정말 대단한데?"

지켜보던 많은 선수들은 두 사람이 혼성팀에 속한게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성 팀이나 여성 팀에 들어왔으면 막강한 라이벌이 되었을게 확실했다.

서브 득점을 성공시킨 도훈은 또 다시 스파이크 서브를 날렸다.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나거나 힘조절에 실패하면 그대로 범실이 될수도 있는 공격이었지만, 도훈은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득점을 성공시켰다.

스스로도 놀라 정도였다.

'와, 내가 이렇게까지 배구를 잘했었나? 전생의 도훈이 이 정도였어?'

[유미양의 재능 덕분이죠. 유미양이 평생 갈고닦은 재능에 주인님의 피지컬까지 더해졌으니까요.]

'그렇구만. 어쩌면 남녀라는 격차 때문에 지금은 내가 오리지널의 재능을 뛰어넘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마 그럴겁니다. 청출어람 청어람이랄까.]

'역시. 최고다, 재능약탈자.'

신이 난 도훈은 연거푸 서비스 에이스를 성공시켰다.

계속된 득점으로 점수는 이미 8:0까지 벌어졌다. 그때 상대팀에서 흐름을 끊기 위해 작전 타임을 요청했다.

"작전타임!"

심판의 사인에 유미가 서브라인 근처로 내려왔다.

"오빠, 적당히 해요."

"왜? 서브로 끝내버리는 게 낫지 않아? 쟤들 내 공 전혀 손도 못대는데?"

"상대팀이 공격에 비해 수비가 약해서 그래요. 근데 진짜 경쟁할 팀은 쟤들이 아니고 외국인 팀이고요."

유미가 점수판 근처에 서 있는 흑인여자를 가지켰다.

그들은 이어지는 경기가 있는지 경기장을 떠나지 않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첫 번째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도훈 역시 그들을 쳐다보다 흠칫 놀랐다.

감탄하는 다른 관람객들과 달리, 여전히 표정에 여유가 넘쳤던 것이다.

"봤죠? 쟤들 오빠 서브 별로 안 무서워해요. 충분히 받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고요."

"건방지군."

"어쨌든 그렇다면 우리도 슬슬 공격 수비를 맞춰봐야 해요. 오빠 서브로만 게임이 끝나버리면 손발을 맞출수가 없잖아요. 지금 땀도 안나는데."

"옷을 그렇게 조금 입었는데 땀이 날 수 있겠냐."

도훈이 유미의 깊숙한 골짜기를 보고 말했다.

유미는 당당히 가슴을 내밀었다.

"왜요? 여기 땀흘러서 축축해지면 꼴릴 것 같지 않으세요?"

"야, 경기중인데 갑자기..."

"흐흐, 오늘 이기면 제가 오빠한테 듬뿍 상 줄게요. 아셨죠?"

"됐고, 그럼 서브 받을 수 있게 주라고?"

"네. 저희도 연습해야죠. 서브 연습만 할 게 아니면."

"알았어. 조절해볼게."

작전 회의를 마치고 다시 도훈이 서브가 시작되었다.

< 997. 별이 쏟아지는-57-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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