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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992화 (959/2,000)

< 975. 별이 쏟아 지는-35- >

푸식-

캔을 딴 태영이 아영에게 맥주캔을 건넸다.

동시에 자신도 한 캔 따더니 캔을 앞으로 내밀었다.

"짠할까?"

"응."

사실 태영은 탈수 증세로 인해 술을 입에 대지 않으려 했지만, 여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또 신기하게 아영과 단둘이 얘기를 나누자 축 처져 있던 기운이 다시 샘솟으며 활력 넘쳤다.

‘여자가 요물이긴 하구나.’

태영은 주변에 여자가 있을수록 힘이 나는 타입이었다. 특히 그 여자가 솔로에 미인이면 더욱 더 힘을 받았다. 확률을 계산해 가능성을 타진하기보다 일단 대쉬해볼 수 있다는 미약한 가능성만으로도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된 남자였다.

좋게 말하면 열정이 넘치고, 나쁘게 말하면 그래서 호구였다.

"캬-. 좋다."

맥주를 한 껏 들이킨 태영이 맥주 광고에 흔히 나오는 유명 배우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분명 똑같은 행동이었지만, 전혀 다른 느낌.

아영은 태영을 보고 생각했다.

‘아까 보니 도훈 오빠랑 제법 친해 보이던데···. 얘를 통하면 오빠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태영의 기대와는 반대로 아영이 태영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도훈에 대한 정보였다. 목적이 다른 두 남녀가 대화를 이어갔다.

"밤에는 의외로 날씨가 선선하네."

"그치? 바닷바람이라 짠 내가 살짝 나긴 해도, 확실히 도시라는 온도가 다르단 말씀이야. 아영이 너도 캠프 오길 잘했어. 진작 다른 행사도 오지 그랬어?"

"······."

아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맥주만 홀짝거렸다. 의외로 술을 잘 마시는 그녀는, 혼자 집에 있을 때도 가끔 프로야구 경기를 틀어놓고 맥주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이제부터라도 학과 행사 자주 참여해. 우리과가 은근히 동기들끼리 단합이 잘 되는 편이거든."

"그래?"

"응. 몰랐구나? 단합력만 놓고 보면 단대에서 제일 뛰어날걸? 은근히 선남선녀도 많은 편이고."

태영은 아영을 의식해 일부러 마지막 말을 던졌다.

하지만 아영은 선녀라는 말보다 선남이라는 말에 더 꽂혔다.

‘그러게. 도훈 선배같은 사람도 있고.’

아영은 맥주를 마실 때마다 은근슬쩍 도훈이 앉은 그룹을 힐끔거렸다. 도훈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주변에 여자 후배들을 배를 잡고 깔깔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있어?"

"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태영이 하는 질문을 놓친 아영이 다시 물었다.

"방금 뭐랬어?"

"어, 아니 사귀는 사람은 있냐고."

"···사귀는?"

이렇게 대놓고 훅 들어 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아영도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있어?"

"아니."

"없어?"

"어, 지금은."

아영의 말에서 모쏠이 아니란 걸 깨달은 태영이 살짝 아쉬움을 느꼈다.

‘설마 비처녀란 말인가?’

하긴 생각해보면 아무리 자발적 아싸 타입이라고 해도, 저 정도 미모의 여자를 주변에서 가만둘 리 없었다.

‘아니지. 사귀었다고 다 섹스하는 게 어딨어? 짧게 사귀고 헤어졌을 수도 있으니까.’

태영이 찜찜한 마음에 다시 물었다.

"혹시 얼마나 사귄 거야?"

"······."

아영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태영을 쳐다보았다.

‘···무례하잖아?’

아영이 느낀 감정은 불편함과 모욕감이었다. 오늘 처음 보는 거나 마찬가지인 태영은 너무나 사적인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그저 같은 과 동기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이쯤에서 불쾌감을 드러냈겠지만, 오히려 아영은 태영의 그런 무모한 태도에서 약간의 호승심이 발동했다. 어디까지 까부나 한번 지켜보자는 심산이었다.

"2년."

"2년? 대학교 오기 전부터?"

"어."

"가만있어봐 그럼 고등학교 때 사귀었단 말이야?"

"어."

"와. 역시 예쁜 애들은 어려서부터···."

태영은 넙죽넙죽 받아주는 아영의 태도에 자신이 무슨 실수를 벌이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2년이면 음···. 이미 할 거 다 했겠는데? 아니지. 그래도 고등학교 때 사귀었으면 의외로 순수하게···.’

태영이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려보았지만, 부정적인 생각만 계속 맴돌았다.

‘야. 정태영. 너라면 고딩이건 대딩이건 저런 여자를 2년간 가만 놔뒀겠냐? 어? 그것도 성욕 폭발하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태영이 자꾸 무리한 질문을 하자 이번엔 아영이 물었다.

"근데 그런 건 왜 갑자기 물어?"

"어? 아니 그냥 궁금해서."

"내가 궁금해?"

아영이 태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감정을 알 수 없는 커다란 검은 동자가 어렴풋이 떠오른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태영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에 압도당해 질식할 것 같았다.

‘허, 허헉! 정면으로 보니까 존나 예쁘잖아. 대답을 못 하겠어.’

"말해봐. 나에 대해서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데?"

"아, 아니 나는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나랑?"

"어."

"친해지고 싶은데 내 연애사는 왜?"

태영은 아영의 차가운 말투에 바짝 쫄고 말았다.

‘뭐, 뭐야? 실컷 잘 대답하다가 갑자기 정색하는 건? 역시 여자들은 변덕이 심하단 말이지.’

상황이 꼬이자 태영은 갑자기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 씨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질러버리자. 내가 뭐 죄진  거 있어? 여기 여자가 아영이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궁금할 수도 있잖아? 안 그래?"

"뭐?"

"아니, 애인이 있는지 물어볼 수도 있는 거잖아. 알아야 나중에 대쉬를 하던, 마음을 접던 할 거 아니야."

"······."

태영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확 내질렀다.

속은 후련했지만, 동시에 후회가 밀려왔다.

‘씨바, 좆됐다. 그냥 닥치고 사과나 할걸. 정태영, 넌 이러니까 안 되는 거야. 어휴.’

태영이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싹싹 빌까 하는데 무표정하게 있던 아영이 처음으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풉-."

"어?"

"너 진짜 웃기는 애구나."

"내가?"

"어. 너처럼 직설적인 애는 처음 봤어."

아영이 웃었다. 생기 없던 마네킹같은 표정에 미소가 피어나자 태영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와아···. 웃으니까 천사가 따로 없네. 뭐, 뭐가 저렇게 예쁘지?’

태영은 말문을 잃을 정도였다.

‘다시 보니 선녀네, 완전. 웃으니까 완전 다른 사람 같아.’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술이나 먹자."

이번엔 아영이 먼저 맥주잔을 내밀었다. 태영은 얼떨떨해하면서도 뭔가 잘 되어가는 기분에 힘차게 캔을 부딪쳤다.

***

"오빤 어쩜 그렇게 말도 재밌게 해요?"

"내가?"

"네, 군대 썰 웃겨 죽는 줄 알았잖아요."

"진짜 완전 재밌으셔."

경희와 효민이 도훈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둘 다 도훈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함께 있던 우선은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다. 하지만 우선은 누구처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좋아, 잘 되고 있어. 잘하면 둘 중 한 명이랑 도훈이 형이랑 오늘 밤 엮을 수도 있겠는데?’

우선의 머릿속엔 어떻게 해서든 도훈에게 먼저 여자친구를 만들어줘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 직후에야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것 같았다.

‘군대 가서 손편지라도 한 통 받으려면 어떻게든···.’

이제 입대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

그는 절박했고, 그렇기에 필사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경희랑 효민이는 남친 있어?"

우선이 은근히 운을 띄웠다.

"네?"

"갑자기 그건 왜요?"

"아니, 그냥."

"음, 어떨 거 같은데요?"

효민은 대답은 우선에게 하면서도 시선은 도훈에게 향해 있었다. 마치 도훈보고 맞춰보라고 하는 모양새였다.

"글쎄, 없을 거 같아."

"왜요?"

효민이 살짝 발끈했다.

자신이 없게 생겼다는 말처럼 들렸다.

"있는 애들은 그렇게 안 묻더라고."

"아···."

"우선 오빠는 모쏠이죠?"

이번엔 경희가 우선에게 물었다.

"응. 어떻게 알았어?"

"그래 보여서요."

"어?"

경희에게 한 방 먹은 우선이 똥씹은 표정을 지었다. 효민은 조용하면서도 새침한 반면, 경희는 털털하면서도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그래도 우선의 희생으로 주제가 연애로 넘어갔다.

"도훈 오빠는요?"

"나?"

"오빠 솔로라고 하던데 정말이에요?"

효민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도훈은 경희를 의식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효민이는 기억을 잊었으니까 그렇다쳐도, 경희는 나랑 썸씽이 있는데···.’

[괜찮을 겁니다. 설마하니 주인님과 관계했다고 소문이라도 낼까봐서요.]

"어, 사귀는 사람은 없어."

도훈의 애매 모호한 대답에 효민이 의문을 제기했다.

"사귀는 사람은 없는데 만나는 사람은 있다는 뜻?"

"설마 썸?"

경희도 은근슬쩍 죽을 맞추며 도훈을 압박했다.

"아니. 만나는 사람도 없어."

"에이, 우리한테만 솔직히 말해봐요."

"맞아. 진짜로 한 명도 없어요?"

경희의 마지막 질문은 약간은 노림수가 있었다.

자신을 두 번이나 따먹지 않았느냐, 그럼 나는 뭐냐 하는 불만의 표현이었다.

도훈이 이를 눈치채고 재치있게 넘겼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정식으로 사귀는 여자친구는 없다는 말이지. 그거 물어보는 거 아니었어?"

"음, 맞아요."

"아, 여자친구는 없으시구나."

경희도 그쯤에서 그쳤다.

‘그래 뭐. 나랑 몇 번 하긴 했지만 내가 여자친구인 건 아니니까.’

분위기가 살짝 달아오르자 우선이 계속 몰아갔다.

"솔직히 도훈이형 애인없는 건 체육교육과 미스테리 중 하나에요."

"미스테리라니?"

"아니, 막말로 형이 키가 작길 해, 얼굴이 못났어, 아님 돈이 없어요?"

"야야, 그만 해."

"안 그러냐 애들아?"

우선은 적당히 그치라는 도훈의 만류에도 후배들을 끌어들이며 열을 올렸다.

"맞아요."

"인정."

"애들도 그렇다잖아요. 형도 이제 슬슬 여친 만들 때 되지 않았어요?"

"아니 뭐, 자연스럽게 생기겠지, 그게 무슨···."

"오빤 그럼 이상형이 누구에요?"

"어?"

술이 들어간 효민이 당돌하게 물었다.

도훈이 어떤 타입을 좋아하는 지 알아야 자신이 승산이 있을지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단, 이런 단도직입적인 방식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라는 간접고백과도 같은 행동이었기에 옆에 있던 경희도 조금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뭐야? 효민이 이 계집애 도훈오빠한테 관심있나?’

"이상형이라니···. 갑자기 물으면."

"왜, 누구나 있지 않아요? 가령 피부가 하얀 여자를 좋아한다던가."

효민의 말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는데, 상대적으로 피부가 까무잡잡한 경희를 배재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를 알아챈 경희가 속으로 발끈했다.

‘요 계집애가 진짜 보자보자하니까?’

"아니."

도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외모는 딱히 보질 않아서."

"정말요? 막 뚱뚱하거나 그래도요?"

"그런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해요? 오빤 여자 볼 때 뭘 보는데요?"

도훈의 대답에 안도감을 느낀 경희가 속으로 생각했다.

‘당연히 가슴이지.’

경희는 골격이 큰 만큼 발육도 남달랐다. 물론 체육과에 C컵이 제법 있었지만, 컵 사이즈를 떠나 둘레로만 치면 마유미와 자신이 거의 1,2순위를 다툰다고 할 수 있었다.

컵 사이즈란 젖꼭지와 밑가슴둘레 차이를 기준하기 때문에 마른 몸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애초에 몸집이 큰 여자의 C컵과 비쩍 마른 여자의 C컵은 그 볼륨에서 현격한 차이가 났다.

경희는 전형적인 큰 C컵으로서 가슴만 놓고 치면, 체육교육과 1학년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빠가 내 가슴에 대고 젖치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경희가 은근히 도훈의 대답을 기대하는데, 도훈은 전혀 엉뚱한 소리를 했다.

"글쎄···. 성격이겠지, 아무래도? 오래오래 사귀려면 성격이 서로 잘 맞아야 되니까."

"역시, 오빠다운 대답이네요."

경희는 도훈의 가식적인 대답에 ‘거짓말쟁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MT 가서는 응급처치를 해준다는 핑계로 날름 따먹고, 테니스장에 놀러 와서는 지저분한 테니스부 창고에서 자신을 강간하듯 따먹어 놓은 주제에···.

"아, 예, 성격···."

경희는 어이가 없어 자기도 모르게 비아냥대고 말았다. 우선이 이를 보더니 경희에게 되무렀다.

"뭐냐, 강경희? 그 반응은?"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우선은 성격이 고지식했기 때문에 아무리 여자 후배라고 하더라도 선배 앞에서 싸가지없게 구는 걸 참지 못했다. 특히 애교를 살살 부리면서 은근슬쩍 말을 놓는 여자 후배를 보면 늘 따끔하게 주의를 주는 편이었다.

우선이 정색하자 경희가 급히 둘러댔다.

"아니, 제 말은 남자들은 다 성격 본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엔 예쁜 여자 찾잖아요. 우선 오빠도 그렇지 않아요?"

"음···."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우선도 말을 잃었다.

사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훈이 형이 좀 무리수를 던지긴 했네. 솔직히 성격만 보는 남자가 어딨다고. 그러니 경희가 저렇게 나오지.’

경희가 내친김에 다시 도훈에게 물었다.

"오빠. 솔직히 대답해봐요."

"뭘? 방금 말했잖아."

"아니, 성격은 누구나 당연히 보는 거잖아요. 그럼 똑같이 성격 좋은 여자가 있으면 그땐 누굴 고르실 거에요?"

"똑같은?"

"네. 그냥 둘 다 착하고, 오빠랑 잘 맞고, 성격 좋다고 하면요. 그 다음으론 뭘 보시냐고요."

경희가 그 말을 하며 은근슬쩍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속에 검은색 끈 나시를 입고 겉에는 한 쪽 어깨가 훤히 드러난 루즈핏 티를 입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육감적인 몸매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흐흐, 색마 오빠. 솔직히 대답해. 오빠 가슴 큰 여자 좋아하는 거 내가 다 아는데.’

경희의 도발적인 질문에 효민도 우선도 도훈의 입만 쳐다보았다.

< 975. 별이 쏟아 지는-35-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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