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4. 별이 쏟아 지는-34- >
"하, 군대."
"어디로 가세요?"
"언제가요?"
군대 이야기에 여학생들이 유독 관심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금녀의 영역이다 보니, 못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해병대 자원입대 했어. 여름 방학 끝날 때쯤."
우선이 동시에 두가지 대답을 했다.
또 다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자원입대가 뭐예요?"
"그럼 휴학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해병대는 신청한 사람만 갈 수 있거든. 휴학계는 이번 캠프 끝나고 내려고."
"신청이요?"
"그럼 군대 다녀오면 저희 후배 되시는 거예요?"
여학생들의 질문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우선은 예쁜 여자 후배들이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모습이 싫진 않았지만, 잘 보여야겠다는 부담감 때문에 횡설수설했다.
"아니 그러니까, 육군은 그냥 갈 수 있는데 해병은 그, 뭐냐 시험을 봐 가지고···. 복학하고 나면 너희들보다 1년 밀리겠지? 아닌가? 칼 복학이 안 되면 짝학기 되려나?"
여학생들은 이해를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문득 군필자인 도훈을 쳐다보았다.
"맞다, 도훈오빠는 군대 다녀오셨죠?"
"오빠가 대신 설명해 줘요. 하나도 모르겠어요."
도훈은 우선과 달리 차분하게 궁금한 부분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우선이 말은···."
군대는 본인이 자원을 해야만 가는 병과가 있다. 그리고 병과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나지만, 요새는 대부분 2년 안에 병역을 끝마치므로 복학하면 1년 정도 뒤처지는 것이다. 등등의 설명이었다.
"와, 역시 군필자는 다르구나."
"오빠는 그럼 어디로 다녀왔어요, 오빠도 해병대에요?"
여학생들의 관심은 이제 우선에서 도훈으로 쏠렸다.
도훈은 원주인의 군 생활을 얘기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의 20년전 군생활을 얘기해야 할지 고민했다.
"음, 나때는 말이야···."
도훈의 서두에 경희와 효민이 빵빵 터졌다.
"꺄하하, 오빠 웃겨요."
"저희랑 몇 살 차이 안 나시잖아요."
여자 후배들은 도훈을 3살 많은 오빠라고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훈은 실제로 그녀들보다 20살은 더 많았으므로, 당연히 세대가 다른 삶을 살았다.
‘거참, 사실대로 말해도 드립으로 알아듣네.’
[어쩔 수 없죠. 주인님의 겉모습은 영락없는 20대 초반 인싸 스타일이니까요.]
‘본질은 아재 맞잖아.’
[그 괴리가 웃음 포인트인가 보죠.]
도훈은 자신의 과거 군생활 이야기를 약간의 과장을 섞어 재밌게 썰을 풀어냈다. 여학생들은 금시초문인 이야기에 흥미진진 빠져들었고, 곧 이병(진)이 될 우선 역시 손에 땀을 쥐며 경청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즐겁지 못한 사람은 태영 뿐이었다.
그는 여학생들의 관심이 우선에서 자연스럽게 도훈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며 역시 연애는 잘생긴 놈이 잘한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근데 도훈이 형은 단순히 얼굴만 잘 생긴게 아니잖아?’
도훈은 물론 잘생겼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위 입도 잘 털었고, 운동능력 또한 발군이었다.
심지어 노래도 잘하고 잦이는 무진장 컸다.
갑자기 도훈과 자신을 비교한 태영은 심한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그래, 맞아. 생각해보니 완전 사기캐랑 함께 있었네. 그래서 내가 여자 꼬시기가 힘들었던 거야!’
태영은 갑자기 현자모드가 되어 작금의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이건 당연한 결과야. 모두가 좋아하는 남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누가 나같은 평범남에게 눈길을 돌리겠어?’
자신만 해도 예쁜 여자와 평범한 여자, 못생긴 여자가 같이 있으면 예쁜 여자에게 시선이 간다. 근데 그 예쁜 여자가 심지어 성격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능력도 뛰어나다면?
당연히 만인의 연인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체육과 여학생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넘치고 예쁜 여자들이 즐비해서 서로 지분을 나눠갖고 있지만, 도훈의 경우에는 남자의 파이를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생각해보면 그때 그 조모인 쌍둥이 때도 마찬가지야. 걔들 입장에선 나랑 도훈이형이 나란히 앉아 있는 거잖아.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도훈이형에게 호감이 더 갈 수밖에 없잖아?’
태영은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급속도로 두뇌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래! 애초에 방법이 잘 못 된 거였어! 이런 식의 경쟁에선 나에게 아무런 비교우위가 없다고! 도훈이 형이 옆에 있으면 내 존재감이 그냥 삭제되어 버리는 거야!’
태영은 무슨 진리를 깨우친 철학자처럼 벌떡 일어섰다.
"어? 뭐하냐?"
"형, 저 잠깐 화장실 좀요."
태영은 조에서 벗어나 학과 전체를 관망하기 시작했다.
노예팅이란 이름으로 짝을 맞춘 급조된 조끼리 삼삼오오 둘러 앉아 화기애애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태영은 레이더 감시병처럼 고개를 돌리며 빠르게 사람들을 스캔했다. 그가 주목하는 건 모임 속에서 누가 인싸인가 하는 점이었다. 어떤 사람이 모임의 핵이 되는지, 누구를 중심으로 그 모임이 돌아가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결론은 핵인싸야.’
태영이 단호하게 결론내렸다.
결국 주목받는 건 무리중에서도 가장 매력이 뛰어난 사람들 뿐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또 다른 장면을 목격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비교우위지.’
그가 지켜본 바로는 핵인싸에도 서열이 있었다.
즉,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떨어지는 그룹에서는 평범남, 평범녀도 인싸취급을 받았다. 또 객관적으로 봐도 우월한 인싸남, 인싸녀도 그룹 내에서 서열이 밀리면 가치가 절하되었다.
‘맞아! 이거야. 강력한 포식자가 있는 곳에선 누구든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어. 왜냐면 인싸 서열에서 밀릴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호랑이 없는 굴에선 여우가 왕노릇을 할 수 있다고.’
태영은 마치 엄청난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제껏 연애는 자기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 더 배려하고, 더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면 진심을 알아줄 거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존못남도 남자가 자기밖에 없는 세상에선 하램을 차리는 법이고, 누구나 인정하는 존잘남도 비슷한 부류가 많은 곳에선 여자 꿰차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호구남 태영이 마침내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럴수가. 그렇다면 내가 도훈이형 옆에 붙어 있는건 나에게 있어 엄청난 손해인 셈이잖아?’
끼리끼리란 말이 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비슷한 유형과 부류의 사람들끼리 교류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훈과 자신을 레벨이 달랐다.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다 가랑이가 찢어지다 못해 오체분시될 판이다. 그것도 모른 체 1학기 내내 도훈 옆에서 알짱거린 셈이다. 혹시나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줄 알고.
‘아니야! 그게 아니었어! 난 그저 도훈이형을 빛나게 해줄 들러리일 뿐이었다고!’
도훈은 물론 홀로 빛을 내는 존재다.
하지만 자신은 무려 어둠.
도훈을 더욱 또렷하게 보이게 만들뿐더러, 자신의 존재감은 완벽하게 사라진다.
‘세상에. 이제야 내가 연애를 못 한 이유를 깨달았다니!’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태영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연애는 스스로의 노력으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변의 상황이 받쳐줘야 할 수 있었다.
‘이제 알겠어. 나는 말도 안 되는 상대 옆에서 경쟁하고 있었던 거야.’
깨달음을 얻은 태영이 대오각성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뚜렷하게 정해졌다.
‘도훈이 형에게서 최대한 멀어져야 해. 그게 최우선이야. 그리고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여학생을 찾는 거지. 누구나 원하는 여자라면 값어치가 올라갈 수 밖에 없잖아? 그렇다면 나는 틈새시장을 공략한다.’
태영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처럼 체육과 여학생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며 대상을 물색했다.
‘아깝지만 8선녀는 재낀다. 경쟁이 심해서 상대적으로 내 승률이 떨어질 거야. 민주샘도 아쉽지만, 이번 캠프 때는 보류. 솔직히 그렇게 예쁜 연상녀가 나한테 관심을 보일 리 없잖아? 어떻게든 2박3일 안에 승부를 볼 수 있는 여자를 찾아야해.’
8선녀를 재끼고 나자 전에는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랐던 여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하거나, 살짝 살집이 있거나, 혹은 성격에 문제가 있어 다른 사람들과 교류가 적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눈을 낮추고 나자 갑자기 태영은 속이 쓰렸다.
‘아이씨···. 그래도 이건 아닌데. 감정이 생겨야 대쉬를 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태영은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새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제껏 짝사랑했던 여자들의 미모를 기준으로 봤을 때 그는 지나치게 눈이 높았다.
‘하아-. 이래선 답도 없잖아. 얼굴이 예쁜데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예쁜이가 어디 있···, 어?’
태영이 갑자기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녀는 8선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었다.
굉장히 예뻤고, 몸매 또한 늘씬해 이목을 잡아 끌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신기하리만큼 사람이 없어, 혼자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있다. 맞아, 8선녀에 꼽힐 만큼 예쁜데,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그녀는 바로 박아영이었다.
소위 자발적 아싸. 새터 이후론 학과행사에 거의 참여를 않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수영캠프에 지원서를 냈다.
아영은 동기지만, 마당발인 태영도 잘은 몰랐다.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 친구는 누군지, 혹은 부모님은 뭐하시는지.
‘그렇구나. 아영이가 있었어. 박아영. 이름부터 뭔가 음탕스러운데?’
태영이 야릇한 상상을 했다.
그녀의 상상속에서는 시크한 아영이 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박아줘영. 얼른 박아영!
‘하, 하악! 그래. 아영이다. 이번 캠프에서 가장 확률 높은 사람은 바로 아영이야!’
물론 태영은 아영의 주변에 남자가 없는, 또는 여자가 없는 이유를 잘 알았다. 아영은 지나치게 과묵했다.
대화를 걸면, 무표정하게 쳐다만 보기 일수였고 그마저나 겨우 단답식으로 응, 아니 정도로 대화를 단절했다. 처음에 사교성 좋은 동기들이 여럿 달라붙어 봤지만, 아영의 냉담한 태도에 모두 나가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소위 너아니면 얘기할 사람 없냐는 식의 밥맛 떨어지는 유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태영은 희망을 보았다.
그는 근성은 누구보다 강했다. 7번 차여도 8번을 고백하는 강백호같은 사나이였다. 아영의 굳게 닫힌 마음도 계속 두들기다 보면 끝내 열 수 있을거라 확신했다.
태영이 조심스럽게 아영에게 다가갔다.
구석에 혼자 앉아있던 아영이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오웃, 가까이서 보니까 더 이쁘잖아!’
아영은 인형같았다. 새하얀 피부에 오밀조밀한 눈코입이 인형처럼 귀여웠다. 다만 표정의 변화가 너무 없어 생기가 느껴지질 않았다.
"여기서 뭐해?"
태영이 붙임성있게 옆으로 가 앉았다. 물론 아영은 관심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대꾸하지 않았다.
"······."
‘캬, 이런 냉담한 반응이라니. 어지간한 사내들은 여기서 절반은 떨어져 나가겠군.’
하지만 태영은 이것이 하나의 시험임을 잘 알았다.
즉, 이 고비만 넘기면 반은 해결한 셈이다.
"난 태영이라고 해. 정태영. 1학년 과대."
"······."
아영은 어쩌라는 건지, 하는 표정으로 태영을 쳐다보았다.
태영이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넌 아영이지? 과 행사 참여는 오랜만이네?"
"···어."
아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태영은 뛸 듯이 기뻤다. 의외로 목소리가 너무 고와 말 한마디에 그동안 무시당한 설움이 일시에 씻겨나가는 듯 했다.
‘오우, 대박. 목소리 쩔어.’
"근데 왜 혼자 앉아 있어? 아까 편성된 조는 어디?"
"······."
아영은 태영의 질문에 고개만 슬쩍 한 쪽으로 돌렸다.
그곳엔 나연과 남학생 셋이서 술자리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 나연이 조였구나? 너도 같이 게임하지 않고?"
태영의 끈질긴 태도에 아영도 서서히 대답이 길어졌다.
"게임 안 좋아해서."
"아···. 게임 안 좋아하는 구나."
태영은 어디서 들은 게 있었다.
상대의 마지막 말을 똑같이 리바이벌함으로써 라포를 형성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어. 넌?"
"응?"
"넌 어디?"
"아, 난 경희랑···."
"테니스 친다는 강경희?"
"어, 어. 알아?"
"아니, 얼굴만."
태영이 자신의 조를 가리켰다.
그곳엔 경희와 효민, 그리고 우선과 도훈이 있었다.
도훈을 확인한 아영의 눈이 순간 이채를 띄었다.
물론 태영은 그 찰나를 보지 못했다.
"나도 그냥 답답해서 바람 좀 쐬러 나왔어."
"왜? 너도 별로 재미없어?"
"아니, 도훈이 형이 갑자기 군대 얘기 하는데 흥미가 없어서."
"···군대 얘기?"
"어. 난 별로 재미도 없는데 여자애들은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만 해도 막 까무러치는 거야. 진짜 어이가 없어서."
"음."
아영은 다시 도훈이 속한 그룹을 눈여겨 보았다.
조명 빛에 반사된 도훈의 얼굴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눈에 쏙 들어왔다.
‘···이도훈 선배.’
"왕따띠리, 술이나 한 잔 할래?"
태영은 앞에 놓인 맥주캔을 들더니 아영에게 건넸다.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호기롭게 던진 멘트였지만, 의외로 아영이 손쉽게 승낙했다.
"응. 따줘."
"따, 따줘?"
"어, 나 손가락에 힘이 약해서."
태영은 아영의 고운 목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박아영이 나보고 따주라고 했지 방금?’
갑자기 자신감이 급상승한 태영이 힘차게 맥주캔을 땄다.
< 974. 별이 쏟아 지는-3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