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0. 별이 쏟아 지는-20- >
하지만 이는 정음이 노리던 바였다.
‘지금이다!’
씨름은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게임이다.
발을 걸거나, 몸으로 밀거나, 상대를 들어 올림으로써 불균형을 시도한다. 하지만 상대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자신 또한 균형이 무너진다. 따라서 복싱의 카운터펀치와 같은 되치기가 굉장히 비중 있게 중용된다.
피지컬을 앞세운 경희가 큼지막한 기술을 들어오는 순간, 정음의 몸이 순간적으로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이것이 바로 0.1초의 차이.
축구에서 골게터가 수비수보다 반 박자 빠르게 움직이는 속도.
농구에서 링을 맞고 튀어나온 공의 낙하지점을 센터가 판단하는 순간.
야구에서 홈런 타자가 흔히 공을 잡아놓고 친다고 알려진 극히 짧은 타이밍.
남보다 훌륭한 프로 선수들은 이처럼 고작 0.1초 먼저 반응한다. 하지만 그 사소한 차이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선수와 평생 2군만 전전하다 쓸쓸히 은퇴할 선수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정음에겐 놀랍게도 그게 있었다.
바로 0.1초의 차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어간 되치기에 경희의 몸은 완벽하게 균형을 뺏기고 말았다.
"어, 어!"
정말 어어 하는 사이였다.
경희가 벌러덩 나동그라진 건.
쿵!
"오오! 여자부 우승자, 육정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완벽한 응수였다. 특히 체육교육과 학생들 대두수가 이런저런 운동을 오랜 기간 배웠던 사람들이었으므로 방금 정음이 보여준 0.1초의 차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야! 봤어? 밭다리 들어가자마자 되치기 거는 거?"
"저런게 재능이구나! 진짜 대단하다!"
"얼굴도 예쁘고 운동도 잘해! 못하는 게 없네!"
"육정음, 육정음!"
도훈은 정음이 인정받는 모습에 자신이 더 뿌듯했다.
‘대단하군. 저게 정녕 오늘 샅바를 처음 메본 사람의 기술이란 말이야? 저게 본능적으로 된다고?’
[정말 역대급 재능입니다, 육정음 양은.]
‘몸 천재가 괜히 몸 천재가 아니네. 저 미모에 저런 운동신경이라니. 프로로 데뷔만 했어도 연하나 연지만큼 국민적 인기를 끌었을 텐데.’
연하와 연지는 각기 피겨와 리듬체조에서 두각을 나타낸 젊은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었다. 뛰어난 실력과 미모를 겸비하여 한때 CF 시장을 휩쓸며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다.
도훈은 정음이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정상적으로 국대 선발전에 나갔을 것이고, 혹여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이라도 목에 걸었다면 앞선 두 사람 못지않은 대단한 여성 스포츠 스타가 되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아쉽긴 합니다. 저런 재능을 가지고도 나중에 학교 선생님에서 그쳐야하다니.]
‘정음인 아직 어리잖아. 사람 일 모르는 거야.’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주인님만 곤란해지는 거 아닙니까?]
‘내가 왜?’
[주인님만 바라보던 순수한 여대생에서 잘 나가는 스포츠 스타가 되고 나면요. 그 인기를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정음이가 언제 그런 거 따지고 날 좋아했을까 봐? 다른 여자애들은 몰라도 정음인 날 절대 배신 안 해.’
[대단한 믿음이군요. 하지만 방금 전 주인님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드리죠.]
‘뭐?’
[사람일 모르는 거라고요.]
‘···쳇. 한 방 먹었네.’
도훈은 애써 쿨한 척했지만, 로시의 말을 듣고 나니 살짝 조바심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체육과 8선녀의 원탑으로, 혹은 좀 더 오버해서 사범대 최고 퀸카로 알려진 정음이었는데 방금 경기 결과로 인해 더 주가가 올라가 버린 셈이었다. 확실히 미녀 스포츠 스타는 어디에나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정음아! 정말 멋있었다!"
"남자부 대결 못지않은 최고의 경기였어."
"정음아,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도훈은 정음에게 관심을 보이는 체육과 남학생들의 노골적인 추파에 배알이 꼴렸다. 비키니 안 입고 왔다고 무시할 땐 언제고, 이제와서 친한 척이라니.
다행히 정음은 우승하고도 도훈을 향해 눈인사를 건넴으로써 그의 토라진 마음을 풀어주었다.
‘다행이에요, 오빠. 다른 애들이 오빠 못 고르게 돼서.’
대놓고 티 내진 못했지만, 정음은 도훈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
1차 게임이 종료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해변에서 씨름대결이 의외의 흥행을 보인 탓에, 사회를 맡았던 우선은 굉장히 흥분된 상태였다.
"제 진행 괜찮았죠?"
"어, 생각보다 잘하더라."
"심판 보느라 고생했어."
성수와 도훈이 막간을 이용해 담배도 태울 겸 우선과 함께 구석에 옹기종기 모였다. 성수가 성황리에 끝난 씨름 결과를 보며 물었다.
"정음이가 이길 거라곤 예상했는데, 과연 오늘 밤 노예팅에서 누굴 고를지가 더 궁금하군."
"정음이 남자친구 없어요?"
우선이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평소에 1학년과 교류가 적어서 그런지 우선은 소식이 느린 편이었다.
"몰랐냐? 정음이 모태 솔로일 걸?"
"정말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예쁜 애가···."
우선은 정음의 인기가 많다는 걸 익히 들었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쯤 남자친구를 사귀었을 거라고 예단한 것이었다. 성수가 도훈을 보며 물었다.
"맞지? 정음이 남친 없는 거."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인마. 그래도 니가 1학년들이랑 제일 친하잖아. 교양수업도 같이 듣고."
"뭐, 있다는 소식은 못 들어 본 것 같긴 해요."
도훈은 애써 정음과의 관계를 숨겼다. 굳이 티를 냈다간 자신보다 정음이 더 불편할 것 같았다. 어차피 미션과 위업 때문에 사귀지도 못할 상황에서 괜히 좋아한다는 소문이라도 났다간 입장이 난처해 질 건 불 보듯 뻔했다.
"아마 눈이 엄청 높아서 그렇겠죠?"
"누가? 정음이가?"
"네. 딱 봐도 얼굴도 예쁜 데다 운동 능력까지 발군이잖아요. 인성도 되게 착해보인던데."
"선배한테나 깍듯하지 동기들 사이에서 완전 깡패야. 아까 봤잖아, 태영이 한마디 했다가 꼼짝도 못 하는 거."
"친하니까 그렇겠죠. 아무튼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정음이가 오늘 밤 누굴 찍을지."
도훈은 괜히 두 사람이 몰아가는 느낌에 급히 화제를 돌렸다.
"참, 근데 노예팅 진짜로 하는 거야?"
"당연하죠. 여기까지 왔는데 술만 퍼먹다 잘 수 없잖아요."
듣고 있던 성수가 대신 설명했다.
"사실 말이 노예팅이지 그냥 인기 투표 같은 거야."
"인기투표요?"
"어쨌든 남자가 여자보다 두 배 더 많잖아. 남자가 여자를 골랐다간 경쟁이 과열될 게 뻔하니, 여자쪽에서 남자들을 픽업한다는 의미지. 말만 노예팅이지, 실제론 조 짜서 놀기 위한 작업이지."
"조를 짠다는 게 뭔 소리에요?"
이번엔 우선이 설명했다.
"수영캠프 인원이 너무 많잖아요. 거의 한 40명 되나? 암튼 작년에도 이만큼 와서 빙 둘러앉아 술 먹은 적 있거든요?"
"근데?"
"그러니까 나중에 완전 개판 되더라고요. 무슨 술래잡기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성수형이 의견을 낸 거예요. 이번엔 소수 팀으로 쪼개 놀자고.""맨날 분과별로 나누니까, 자기 분과 아니면 선후배끼리도 서로 잘 모르고 데면데면하잖아. 그래서 이번엔 아주 막 섞기로 했어. 팀을 고르는 방식이 여자들이 남자를 뽑아가는 노예팅이고."
"아아, 난 또."
도훈이 이해했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노예팅은 재미로 붙인 이름일 뿐이었다.
‘하긴 요즘 같은 시국에 노예팅은 무슨.’
"정음이가 여자씨름대회 우승했으니 어쨌든 1픽이지."
"근데 남자부 우승자는 뭐 없어요?"
도훈이 은근슬쩍 성수를 자극했다. 패배한 성수는 또다시 쓰라린 기억이 떠오르는지, 도훈을 향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인마. 여자가 남자를 고르는 거라니까 뭔···."
"그래도 형평성이란 게 있어야죠. 똑같이 우승했는데 남자는 아무것도 없고."
"알았어, 알았어. 그럼 이거라도 줄게."
성수가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뭔데요?"
성수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뻑큐였다.
"엿이나 드세요, 새끼야."
"아니 무슨!"
"하나 주면 섭섭하니 하나 더 먹어라, 새끼야!"
성수가 양손으로 더블 엿을 날렸다. 안 그런척했지만, 도훈에게 진 것이 은근히 자존심 상한 모양이었다.
‘성수도 유치하네. 저런 소심한 복수라니.’
[그래도 악의는 없지 않습니까?]
‘악의는 무슨. 그냥 동네 바보 형 같구만. 사실 나이는 내가 훨씬 많지만.’
"저 형님들, 이럴 게 아니라 슬슬 다음 게임 준비 하셔야 됩니다. 남자애들 사실 아까부터 그것만 기대하고 있거든요."
일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성수는 오후엔 수영 강습 대신 미니게임 두 가지를 하겠다 공표한 상태였다.
씨름대결이란 말에 시큰둥하던 남학우들은, 두 번째 게임은 수중 기마전이라는 사실과 기수는 무조건 여자만 할 수 있다는 경기방식에 공중제비를 돌며 기뻐했다.
"다들 엄청 기대하고 있어요."
"하여간 변태 놈들 같으니."
"이거 형이 기획한 거 아니에요?"
"기획은 강사들이랑 다 같이 했지. 아, 저쪽에 오네."
수영부 강사를 맡은 승완이었다.
"형. 모자 걷어 왔어요."
"어, 수고했다."
승완은 한 손에 캡모자 10여 개를 겹쳐 들고 있었다. 대부분이 메이저리그 팀이 새겨진 모자였다.
"웬 모자?"
"어, 기수용이야."
"기마전에서 뺏을 게 있어야지."
"아, 모자 뺏기에요?"
"그나저나 팀을 어떻게 가르지?"
"일단 아까 계획대로 승완이 팀이랑 도훈이 팀으로 나눠야지."
"남자들을요?"
"아니 여자들도."
집행부에서 머리를 맞댔지만 별다른 대안이 떠오르질 않았다.
결국 부회장 성수가 쉬운 길을 선택했다.
"그냥 다음 게임 한다고 4열 종대로 집합시킨 다음에 반 딱 가르자. 왼쪽은 승완이팀 오른쪽은 도훈이팀."
"좋아요."
"우선이 너도 이번에 참여해. 나는 심판 볼테니."
"형도 하시지 그래요."
"씨름했으면 됐지, 3학년이 무슨 후배들하고 같이 놀겠냐."
"에이, 바닷가서 물놀이하는 데 선후배가 어딨어요?"
"아니야. 어차피 한 명은 심판 봐야지. 우선이도 하고 싶은 눈치니까 내가 볼게."
"그래요.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하죠."
성수가 집행부 일원을 데리고 해변 한가운데로 집합시켰다.
"다들 집합!"
성수의 한 마디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체육과 일원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보통의 학과완 달리 체육인 특유의 군기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빠르게 정렬한 후배들을 향해 성수가 맨 앞줄의 한 명을 지목했다.
"기준."
"기준!"
"남자들만 4열 종대로 해쳐 모여."
"해쳐 모여!"
성수의 한마디에 서른 명에 가까운 장정들이 일사불란하게 오열을 맞추었다. 지나가던 피서객들은 군대에서 훈련을 나온 줄 알고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여학생들도 두 줄로 서봐."
줄을 모두 세운 성수가 선언하듯 말했다.
"자 지금부터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학생끼리 한 팀이다."
"네? 무슨 팀이요?"
"수중 기마전 말이야."
"아아!"
"앗, 바꾸면 안돼요?"
"연정아! 같은 팀 해야 하는데!"
갑자기 팀이 나뉘는 바람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지만, 성수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어쭈? 동작 봐라? 부회장 말이 말같지 않지?"
"아닙니다!"
"왼쪽에 있는 팀의 대장은 남자부 대표 강사 승완이가 맡는다."
"넵."
"오른쪽 팀은 여자부 대표 강사 도훈이가 맡는다."
"네."
주장이 정해지자 도훈과 한팀에 속하게 된 여학생들이 눈에 띄게 기뻐했다. 도훈은 여학생 중에 정음이 있는지 살폈으나, 아쉽게도 상대 팀이었다. 정음 역시 도훈을 쳐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수가 이어서 설명했다.
"수중 기마전은 다른 거 필요 없고 대장조 기수의 모자를 뺏는 팀이 승리한다. 알겠지?"
"부회장님! 기마전도 이기면 뭐 있습니까?"
"당연히 있다."
"오, 상금있나요?"
"아니. 이긴 팀 전원에게 저녁 설거지 면제권!"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기가 걸리자 반으로 나뉜 팀끼리 갑자기 의기투합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아싸, 설거지 면제다!"
"웃기고 있네. 누가 져 준데?"
"딱 보니까 멤버가 우리가 낫네."
"우리팀에 정음이 있거든?"
"우리팀에도 도훈이 형 있어!"
잠시 소란스러워지자 성수가 제재했다.
"자자, 그만 떠들고. 숙련된 조교가 기마전 요령에 대해 시범을 보일 테니 다들 숙지하길 바란다. 조교 앞으로."
성수가 말했지만, 사전에 협의가 없던 터라 앞에 도열한 강사진도 멀뚱히 서로만 쳐다보았다.
"야, 니들이 나오라고."
성수가 강사진을 다그치자 도훈과 승완, 그리고 찬호가 마지못해 나왔다. 성수는 세 사람을 향해 설명했다.
"우선 가운데 목마를 태울 사람을 뽑아야 해. 되도록 가장 덩치가 좋은 사람이 맡는다. 도훈이가 가운데 서."
"네."
"그리고 양옆에서 지탱해줄 사람. 승완이랑 찬호 서봐."
성수의 설명에 따라 세 학생이 나란히 섰다.
"우선 기본은 기수가 타기 전에 발걸이를 만드는 거야. 팔을 이런 모양으로 해가지고···."
승완과 찬호가 발걸이를 완성하자 성수가 계속 말했다.
"그런 다른 기수가 오를 수 있게 셋다 무릎 꿇고 앉는 거야."
"잠깐, 형 왜 오는데요?"
"왜? 내가 기순데?"
성수가 도훈의 어깨에 목마를 타려고 하자 도훈이 기겁했다.
"아니 누구 목 빠질일 있어요? 무슨 수로 형 무게를 견뎌요?"
성수가 농담이었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봤지? 그래서 무거운 사람이 오르면 안 돼. 이번 경기에선 무조건 여학생이 기수에 오른다."
"오오!"
"아, 아니···."
성수의 선언에 남녀의 온도차가 뚜렷하게 갈렸다.
< 960. 별이 쏟아 지는-20-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