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976화 (943/2,000)

< 959. 별이 쏟아 지는-19- >

정음은 다리에 고리를 끼우더니 마치 여러 번 해본 사람처럼 단번에 샅바를 묶었다. 도훈을 눈으로 보면서도 쉽게 믿기질 않았다.

‘뭐야? 눈으로 한 번 봤다고 저걸 바로 따라 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기억력이 무지 좋은 게 아닐까요?]

‘정음이 빠간거 몰라?’

[아, 아니 그래도 사랑스런 정음양 보고 빠가라뇨···. 말이 좀 심하신데요.]

‘암튼 정음이 공부 못하는 건 하늘이 알고 땅도 알고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쟤 실기 만점 아니었음 우리과도 낙방이었다고.’

전생의 이정우는 인 서울 대학인 국성대조차 듣보잡 취급하던 학벌 숭배자였다. 그런 국성대 안에서도 낮은 편에 속하는 체육교육과에 간신히 붙을 수준이면, 공부에 재능이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하지만 보다시피 정음의 재능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마치 복제술사처럼 눈으로 한 번 보면, 순식간에 동작의 오의를 깨달아 버리는 놀라운 능력말이다.

"다 됐다. 선배, 이거 맞아요?"

정음이 제대로 샅바를 맸는지 패션쇼를 하는 것처럼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별 뜻 없이 한 행동이었지만, 제법 귀여운 동작에 남학생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오! 승리를 확신하는 세레모니인 건가!"

"육정음! 믿고 있었다고!"

"체육과 여왕의 포스를 보여줘!"

"얼굴값 하자!"

정음은 민망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얼굴값 하자"를 외친 태영을 쏘아보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야, 김태영. 죽을래?"

정음은 도훈 앞에서만 온순했지, 다른 남자들에겐 여전히 선머슴 같았다. 정음의 협박에 겁먹은 태영이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미, 미안. 농담이었어."

정음은 다시 도훈을 쳐다보며 헤벌쭉 웃었다.

도훈이 푼수 같은 정음을 보고 칭찬했다.

"잘 했다. 완벽하네."

"아, 다행이다. 선배 귀찮으실까 봐 계속 관찰했거든요."

한편 반대편에서 묵묵히 성수의 도움을 받고 있던 서현은 머릿속으로 작전을 세우는 중이었다.

‘저 괴물 같은 계집애를 실력으로 이길 순 없어. 반칙을 써서라도 이겨 보이겠어.’

8강전 마지막 경기에 뽑힌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서현이 약삭빠르고 교활하다면, 정음은 둔하고 푼수 같았다.

서현은 어떻게든 꼼수를 이용해 이길 생각을 했고, 정음은 정정당당히 실력으로 승부를 가릴 작정이었다.

"자, 선수 준비 다 되셨으면 가운데로."

경기가 많이 남은 우선이 빠른 진행을 했다.

"샅바 잡아, ···일어서. 준비."

서현과 정음이 나란히 몸을 일으켰다. 둘 다 늘씬하긴 했지만, 서현은 비쩍 마른 꼴이면 정음은 탄탄하면서도 건강미가 넘치는 스타일.

구경하던 도훈은 대결의 결과를 물었다.

‘로시. 누가 이길 거 같아?’

[당연히 육정음 양이겠죠. 운동 능력에서 정음양에 비견되는 사람은 체육과를 통 틀어도 없을걸요?]

‘뭐? 나는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성수는 또 어떻고?’

[그건 성별의 차이에 따른 피지컬 때문이죠. 동체급으로 가정하면 정음 양을 운동으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으음.’

도훈이 생각해보니 자신의 절반 겨우 넘는 몸무게와 한참 부족한 키로도 대등한 운동 능력을 보였던 정음이었다. 솔직히 템빨이나 스킬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조차도 버거울 상대임엔 분명했다.

‘하긴···. 정음이가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긴 하지.’

[방금 야한 생각 하셨죠?]

‘아니야. 옷도 저렇게 입고 온걸.’

정음은 검은 레쉬 가드를 입고 있어 몸매가 거의 부각 되지 않았다. 반면 서현은 티팬티까지 입으며 몸매를 과시하는 중이었다. 그 때문인지 서현의 뒤에 선 남학생들은 입도 뻥긋 않고 침만 꼴깍 삼켜댔다.

‘와, 씨. 이건 좀···.’

‘어휴. 아슬아슬하네. 팬티라인에 똥고 먹힌 거 봐.’

‘씨름 시합에 티팬티, 실화냐?’

다들 일심동체로 침묵한 이유는 괜히 엄한 말을 꺼냈다가 학내 성희롱으로 엮일 우려 때문이었다. 노출의 자유는 얼마든지 허락되지만, 그것을 성적으로 대상화할 땐 무거운 대가가 따르는 시대였다.

"시~작!"

우선의 외침과 동시에 정음이 빠르게 자세를 낮췄다. 도훈은 그녀의 수비자세를 보는 순간 방금 전 아영에게 알려준 스킬임을 깨달았다.

‘정말 엄청난 습득력이구나. 완벽하게 무게 중심을 낮췄어.’

정음을 상대하는 서현은 돌덩이를 마주친 기분이었다. 방어에 돌입한 정음은 붙박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흥, 하지만 내 사전에 정정당당이란 없다고.’

서현이 곧바로 반칙을 시도했다. 샅바를 잡고 있던 손을 풀어 정음의 엉덩이를 와락 꼬집은 것이었다.

"앗!"

놀란 정음이 심판을 쳐다보았지만, 너무나 빠르고 교묘한 동작이었는지 우선이 멀뚱히 어깨를 들썩였다.

"왜?"

"이야압!"

서현이 그 틈을 타 안다리를 걸었다. 어디서 본건 있었는지 제법 날카로운 공격. 하지만.

"어림없지."

정음이 빠르게 바깥쪽으로 돌아나가며 공격을 피해냈다. 이젠 균형이 무너진 서현의 위기. 하지만 서현은 한 번 더 손을 뻗어 이번엔 정음의 엉덩골 사이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흐읏!"

반격을 준비하던 정음은 난데없는 손길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우선이 또 반칙을 놓치자 정음이 억울한 마음에 따져 물었다.

"저, 심판 선배!"

"어, 어?"

"안 보여요?"

하지만 서현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뻔뻔하게 되물었다.

"뭐가?"

"아니 손이 자꾸 이상한 곳으로···."

"아, 미끄러졌어. 미안."

"······."

처음에는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봐도 고의였다. 특히 대련과 시합을 많이 뛰어 본 정음은 실수와 고의를 능히 구별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왔다 이거지?’

정음은 약이 바짝 올랐다. 서현이 남자였다면 경기고 뭐고 진즉에 죽빵을 날렸을 것이다.

다시 경기가 재개되자 이번엔 정음이 적극적으로 공격에 들었다. 오른 다리를 뻗어 상대의 무릎을 막아서고는 상체를 붙이며 그대로 들어 올렸다. 이번엔 도훈의 반대편에 서 있던 성수가 눈을 비볐다.

‘저, 저건 내가 쓴 들배기지 동작?’

성수가 놀란 이유는 당연했다. 들배지기도 여러 패턴과 변형이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음이 방금 보여준 동작은 자신과 꼭 닮아 있었다.

‘어우, 정음이 쟤는 국대 예비까지 갔었다더니 진짜 장난 없네. 나랑은 비교도 안 되는 자질이야.’

성수도 한 때는 유도 유망주인 때가 있었다.

학교폭력으로 연루되어 억울하게 징계만 받지 않았어도 전국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신은 결코 국대 근처에서 가지 못했을 거라는 걸.

비록 종목은 다르긴 해도, 진지하게 운동을 배웠던 사람으로서 성수는 정음을 높이 쳤다.

‘우리과에 있기는 아까운 재능인데···.’

정음의 완벽한 들배지기.

공중으로 들린 서현은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한 번에 고꾸라졌다.

쿵-!

"육정음, 승!"

"우오오오오! 역시 최강 우승 후보!"

"멋지다, 체육과 여신!"

"육정음, 육정음!"

정음의 보여준 빼어난 실력에 매료된 남학생이 정음의 이름을 연호했다. 부끄러움이 많은 정음이 수줍게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혀를 내밀었다.

도훈은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아이고. 저런 행동을 하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도 봐. 겸손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본능적으로 사랑스러운 행동을 하잖아. 저러니 남자들이 환장을 하는 거지.’

[정음 양이 혹시 주인님이 말한 그런 사람인가요? 예쁜데 착한.]

‘그렇지. 거기다 몸 천재.’

[여러모로 대단하군요.]

‘1학년 여학생들 쭉 보니까 알겠어. 다들 예쁜 것도 맞고, 몸매가 뛰어난 것도 맞아. 사범대 특정과에 이렇게 풍년이 난 것도 기적적인 일이지. 향후 30년간은 다시 못 올 황금 세대랄까.’

[무슨 말씀을 하려고 그렇게 설명을 장황하게 하십니까?]

‘정음이 원탑이라고. 비견될 사람이 없어. 군계일학이야.’

[정음 양을 너무 아끼시는 군요, 주인님은.]

‘하는 짓이 귀엽잖아.’

도훈은 자신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정음을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왠지 보고만 있어도 힘이 나는 사람이었다.

***

이후의 경기는 스피디하게 진행되었다.

4강에선 강경희가 연두를 물리치며 준결승에 올랐다. 연두도 악을 쓰며 분전했으나, 꿀벅지를 과시하는 경희의 하체힘에 끝내 당해내지 못했다.

남학생들 사이에선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인지 ‘용병’이라는 은어가 드문드문 터져나왔다.

"와, 경희 장난 아니네."

"쟤가 우리 학교 테니스 대표잖아."

"역시 용병빨 무시 못 하지."

두 번째 이어진 경기는 효민과 정음의 대결. 이 대결은 씨름에 한껏 자신감이 붙은 정음이 ‘1초컷’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끝이 났다.

이미 앞선 남자부 경기에서 성수와 도훈의 씨름 기술을 습득한 정음에겐 대적자가 없어보였다.

그리고 대망의 결승.

용병 경희와 몸 천재 정음이 나란히 상대를 향해 인사하자 지켜보던 체육과 학생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터뜨렸다.

"시작됐다! 1학년 괴수들의 대결!"

"이건 진짜 모르겠는데."

"뭘 몰라. 딱 봐도 경희가 한 체급 윈데."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확실히 체격에서 비교가 되었다.

165에 46킬로인 정음은 늘씬하고 아담한 체격이었다. 물론 천천히 살펴보면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몸인 걸 알 수 있지만, 타고난 골격이 큰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희는 소위 떡대(?)가 있는 편이었다.

테니스라는 경기 자체가 격렬한 체력을 요하기 때문인지 경희 역시 170에 육박한 키에 55킬로가 넘는 피지컬을 갖추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온몸이 다 컸다. 가슴도, 엉덩이도.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비키니를 입고 경기를 뛰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드러난 그녀의 튼실한 하체였다.

경희는 쉽게 말해 기술씨름 시대를 종결시킨 거인 선수같은 느낌이었다. 제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피지컬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것처럼, 나란히 선 정음과 경희 사이에는 상당한 격차가 존재했다.

"역시 널 만날 줄 알았어."

라이벌 의식이 강한 경희가 정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올라왔구나, 재밌게 해보자."

반면 정음은 경희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다.

늘 이기기만 했기 때문인지, 정음은 딱히 경희를 경계하지도 않았다. 그 무심함이 경희의 분노 게이지를 끌어 올렸다.

‘거, 건방진. 그래, 언제까지 여유부리나 보자.’

두 선수는 샅바 도우미에게 돌아갔다.

원형 경기장 맞은 편에 위치했기 때문인지, 어찌 보면 도훈가 성수가 코칭스텦 같아 보이기도 했다.

"자신있어?"

도훈이 정음에게 물었다.

"최선을 다할 거예요."

정음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 걱정없이 천진하게 짓는 미소가 너무나도 순수해 보였다.

[정음 양은 정말 매사 긍정적인 성격이군요.]

‘그러니 안 예뻐 할 수가 있나. 심성이 꼬인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경쟁의식도 없고, 몸매를 과시하거나 미모를 뽐내지도 않지. 하지만 그래서 가장 빛나보이는 걸지도.’

"그래, 이겨서 뭐하려고?"

"이겨서요?"

혼자 샅바를 매던 정음이 잠시 동작을 멈추더니 도훈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다른 애들이 오빠 못 데려가게 하려고요."

"···뭐?"

"그건 너무 속상할 것 같았어요."

기어들어 가듯 속삭인 정음이 다시 고개를 들더니 씩씩하게 말했다.

"그럼, 이기고 오겠습니다!"

정음이 큰소리로 외치자, 어느새 그녀의 팬클럽이 된 관중들이 화답했다.

"이겨라 정음!"

"태권소녀 파이팅!"

"체육과 1짱의 위엄을 보여줘!"

맞은 편에서도 응원이 터져 나왔다.

"눌러버려 강경희!"

"용병 파이팅!"

"경희야, 너도 할 수 있어!"

오후의 햇살도 점점 강해져,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주룩주룩 흐르는 날씨였다. 거기에 결승전이라는 분위기가 더해져 장외가 후끈 달아올랐다.

"앉아."

우선의 진행에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무릎 꿇었다.

"샅바 잡아."

서로를 옥죄는 단단한 결박.

상대방의 샅바를 감싸 뒨 두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일어서."

서로를 버팀목 삼아 일어선 두 여학생은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준비가 된 스프린터처럼 바짝 근육을 팽창시켰다. 옆에서 바라보던 우선도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와, 둘 다 기세가 장난 아닌데? 마치 부회장님과 도훈이 형의 승부가 재현되는 느낌이야.’

"준비~. 시이작!"

우선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서로가 공수를 펼쳤다.

파워에선 경희가, 테크닉에선 정음이 우위를 보이며 쉴 새 없는 공방전이 이어졌다.

"우오오, 시작부터 격렬하다!"

"확실히 결승은 다르구만!"

경희는 주로 힘으로 밀어붙이는 전술.

강한 지구력을 바탕으로 상대의 힘이 빠질 때까지 소모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반면 준결승 1초 컷을 보여준 정음은 경희의 힘에 밀려 끌려다니면서도 결정적인 한 방을 기다렸다.

‘이겨야 해. 이기고 말 거야. 도훈 오빠를 다른 애들한테 뺏길 수 없어.’

정음이 민첩성을 발휘해 경희의 기술을 무위를 돌리자 경희도 슬슬 조바심이 일었다.

‘정음이 네가 언제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 다른 건 몰라도 근력과 체력은 자신 있다고.’

그때, 경희가 정음의 빈틈을 노리고 기술을 걸어왔다.

< 959. 별이 쏟아 지는-19-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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