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3. 여름 방학-25- >
***
"아까워 죽겠네. 어떻게 3억을 거기 두고 와?"
미쓰리는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 한 목소리였다.
하긴 현금 3억이 눈앞에 깔려 있는데, 그걸 홀랑 놔두고 왔으니 오죽 눈에 밟혔을까? 더구나 돈 때문에 화류계 밑바닥인 다방 레지까지 전전하는 처지라면야.
"뭐든 과하게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야."
"그래도 오빠가 정당하게 딴 돈이잖아. 아니야?"
"···정당하게?"
"속임수 같은 것도 전혀 안 썼잖아. 이거 안에 담아 오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구만. 이럴 거면 나한테 왜 가져 오라고 했데?"
밤거리를 걷던 미쓰리가 잠시 멈춰서더니 가랑이 사이에서 화투장을 뽑아냈다. 화투 스무 장이 엄청 큰 사이즈는 아니었만, 그곳을 호주머니처럼 쓰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내가 닳고 닳았길 망정이지, 처녀였으면 어쩔 뻔?"
"근데 내가 정말 속임수를 안 썼다고 생각해?"
"어?"
"한번 세어 봐. 몇 장 남아있는지."
"지, 진짜?"
미쓰리가 놀란 표정으로 화투장을 헤아렸다.
"···열여덟, 열아홉. 어? 한 장이 어디 갔지? 설마 흘렸나?"
"잘 보면 장미 한 장 빌걸?"
"헐! 대박! 진짜로 꺼냈다고? 여기서? 난 느낌도 없었는데?"
"타짜 사이에는 그런 말이 있어. 손은 눈보다 빠르다."
"오빠 진짜로 전문가구나! 난 그런 줄 전혀 몰랐어!"
미쓰리가 화투장을 길바닥에 내던지며 와락 팔짱을 꼈다. 나는 들러붙은 그녀를 밀어내며 대답했다.
"돈을 따는 것도 좋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는 게 더 중요해. 원한이 많아질수록 밤길 다니기 무서워지거든."
"아···."
"아마 12억을 모두 챙기려 욕심냈으면 분명 사달이 났을 거야. 전 재산을 탕진하면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아."
"그래도 절반은 챙겼어야지. 3억이 뭐야, 3억이."
"나머지 절반은 이미 받았어."
"그 조카? 오빠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지?"
미쓰리가 맹한 표정과 달리 예리하게 핵심을 찔러왔다. 닳고 닳은 여자라 그런지 눈치가 보통은 넘었다.
"굳이 너에게 대답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치. 그래도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랑 나는 딱 여기까지야. 비즈니스로 만난 사이는 비즈니스로 끝내야지."
미쓰리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그럼 나 얼마 챙겨 줄 거야? 어쨌든 하룻밤에 3억이나 번 건 사실이잖아."
"계산은 똑바로 해야지. 1억은 원래부터 내 돈이었어. 맞지?"
"으, 음. 그런가."
"정확히 2억가량 딴 셈인데, 공사 견적 내느라 투입된 자금도 있으니 사실 그렇게 많이 번 건 아니야."
"견적이라니?"
"내가 정말 부동산에서 가게 알아보다가 우연히 도박판에 끼어들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 그 견적 말이구나."
"이리저리 공사비 제하고 나면 나도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는 아니었어."
"그래서 얼마나 줄 건데. 나 진짜 오빠 때문에 거기서 빤스까지 홀랑 벗은 거 까먹으면 섭섭해."
미쓰리가 굳이 제 자랑을 했다.
"그러는 넌 얼마 받고 싶은데?"
"솔직히 나 얼굴 다 팔려서 여기서 더 장사도 못 해. 그 영감탱이가 나한테 해코지할지도 모르잖아."
"해코지해라고 해. 내가 절대 그냥 안 둘 테니. 이걸로 그친것도 많이 봐준 거야."
"암튼. 이 동네는 더 못 있을 거야."
"그래서 얼마나 달라고?"
미쓰리가 고심하더니 말했다.
"가게 언니한테 진 빚만 갚아줘. 오천."
"오천? 오백을 제시했는데 오천을 불러?"
"아까 분명 더 챙겨준다고 했잖아. 거짓말이었어?"
‘하-. 이건 진짜 날강도 심보군. 누가 다방 년 아니랄까 봐···.’
[그냥 줘 버리시죠. 그래도 주인님은 2억 넘게 남는 장산데요. 돈이 딱히 필요한 상황도 아니잖습니까. 맘먹으면 얼마든지 벌 수도 있고요,]
‘그래도 상도덕이란 게 있지, 10배는 아니지. 일이천이면 모를까. 이건 과욕이야.’
내가 고심하는데 미쓰리가 갑자기 다른 제안을 했다.
"그게 아니면···."
"아니면?"
"약속대로 500만 받을 테니까 내 부탁 하나 들어주던가."
"부탁이라니?"
미쓰리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평소에는 늘 헤헤 거리다가, 표정을 달리하니 어딘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들어줄 수 있어?"
"무슨 부탁인 줄은 알아야 들어주지."
"나 진짜 오빠 믿으니까 이거 말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내 몫이나 챙겨줘. 그냥 없던 일로 하고."
‘대체 무슨 부탁이길래 저럴까?’
[글쎄요. 아무튼 미쓰리에게서 저런 진지한 표정은 처음이군요. 항상 실없이 웃기만 하더니···.]
‘모르긴 몰라도 최소 4,500만원짜리 의뢰인 셈이군. 어쩌면 처음부터 이걸 노렸을지도 모르겠어.’
[노렸다뇨?]
‘미쓰리가 처음부터 큰 금액을 제시한 게 저 부탁을 말하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돈을 주기 싫으면, 부탁을 들어주길 바라면서 세게 나간 거지.’
[생각보다 약은 구석이 있군요. 그럼 어쩌실 겁니까?]
‘일단 내용 들어보고.’
[내용을 들으면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는데요?]
‘스킬이 있잖아. 난 어차피 둘 다 선택 가능해.’
[아! 이지선다.]
‘그렇지. 아니다 싶으면 반대로 결정하면 그만이야.’
[역시 주인님은 천재십니다.]
나는 스킬을 이용해 그녀의 부탁 내용을 먼저 들어보았다.
"말해봐. 들어줄게."
"실은···."
미쓰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할 수 있겠어?"
스킬로 미리 의뢰 내용을 들은 도훈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해줄게."
"정말이야?"
"그래. 하지만 이건 절대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야. 네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너무 괘씸해서 그런 거야."
"···고마워. 왠지 오빠라면 들어줄 것 같았어."
미쓰리가 감동했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도훈에게 안겼다.
도훈은 이번만큼은 미쓰리를 밀어내지 않았다.
‘이런 닳고 닳은 여자에게도 아직 눈물이 남아있군.’
[사람에게 너무 편견을 갖지 마십시요. 누군들 사연 있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래. 내 생각이 짧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도훈이 번호를 확인하니 흥신소 최번개에서 온 연락이었다.
-형님, 그 변호사가 방금 차에서 여자랑 접선했습니다. 그 유부녀요. 곧 모텔로 입성할 분위긴데요?
"그래? 어딘데 거기가? ···알았어.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그쪽으로 갈 테니까."
통화를 끝내자 도훈에게 안겨있던 미쓰리가 물었다.
"바로 가야 해?"
"어.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거든."
"바쁘구나, 오빠는."
"아무튼, 네 부탁은 꼭 들어줄게. 물론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나 믿고 기다려 줄 수 있어?"
"응. 믿고 기다릴게."
"근데 나 같은 사기꾼을 무슨 근거로 믿는다는 거야? 내가 돈 주기 싫어서 거짓말 하는 거면 어쩌려고?"
"···바보. 진짜로 사기 칠 생각이면 그런 말도 안 했겠지."
"참나. 알았어. 암튼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도훈은 가방에서 돈 뭉텅이를 꺼냈다.
한 묶음에 500만원짜리 다발이 무려 네 개였다.
"왜, 왜 이렇게 많이 줘? 부탁도 들어주겠다면서. 아니었어?"
"받아 그냥. 나머진 내가 뽀찌로 주는 거야."
"아···. 진짜···. 사람 감동하게."
"나 이제 진자로 가봐야 하니까 다음에 봐. 준비되는 대로 연락할게."
"으, 응. 오빠. 다음엔 오늘처럼 그냥 안 보낼 거야."
"안 보내다니?"
"물 빼고 보낸다고."
도훈은 피식 웃더니 차를 타고 출발했다.
백미러 사이로 미쓰리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네비에 목적지를 입력한 도훈이 차창 문을 열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나저나 저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네.’
[사람은 원래 겉만 보고 모르는 법이니까요.]
목적지를 향해 가던 도훈은 아까 미쓰리에게 들었던 부탁을 떠올렸다.
-나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
-복수라고?
-나 이과 나왔다는 거 농담 아니야. 원래 대학도 합격했었어. 하지만 그놈 때문에 집이 풍비박산 나면서···.
미쓰리는 본래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어려서부터 발랑 까진 룸망주가 아니라 공부도 곧 잘하는, 아나운서를 꿈꾸던 밝고 명랑한.
하지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그의 아버지가 회사의 부도를 막기 위해 사채를 끌어썼고, 급기야 스트레스성 심혈관 질환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빚쟁이에 지쳐갈 때쯤. 놈들은 고3을 막 졸업하던 미쓰리를 향해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나에게 그러더라고. 지금 사는 집을 팔아도 어차피 빚 다 못 갚을 텐데, 병실에 계신 아버지라도 살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때부터 시작한 거야, 이쪽 일.
한 마디로 미쓰리는 집안의 빚을 자신의 몸으로 대신 갚은 셈이었다. 어리고 예뻤던 미쓰리는 고가에 팔려나갔고, 그것으로 집안의 빚은 모두 청산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
-끝이 아니었다고?
-시간이 지나보니 이제는 내가 빚더미에 앉아있더라고. 아무리 갚아도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서 빚은 줄지가 않았어. 그 와중에 간병에 지친 엄마는 집은 도망쳐버렸고, 아버지는 끝내 돌아가셨지. 내가 몸 팔아서도 살리려고 했던 아버지가···.
-흠.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창녀라는 직업과,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더미뿐이야. 정말로 악날한 놈들이야. 어렸을 땐 룸싸롱으로 보냈어. 나이가 좀 드니까 OP에 집어넣더라? 이제는 다방까지 밀려난 신세야. 아마 몇 년 후면 어딘가 섬으로 팔려가겠지. 놈들은 절
대로 날 놓아주지 않아. 목줄을 쥐고 죽을 때까지 괴롭힐 거야.
-그래서 그 사채업자 놈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그럴 거면 차라리 해결사를 고용하는 쪽이 낫지 않아?
-물론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야. 하지만 놈은 목숨보다 돈 잃는 걸 더 무서워 하거든. 돈에 미친 작자니까.
-흠.
-놈이 도박이라면 환장한다고 들었어. 그래서 오빠의 실력을 본 순간 그 생각이 팍 들더라고. 잘하면···. 나는 이미 망가진 인생이지만, 그래도 아버지 복수정돈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니까 그 사채업자 놈을 나에게 작업해 달라는 거지? 내가 타짜라?
-응. 너무 염치없는 부탁일까?
"하필 그 타이밍에 알림 메시지가 뜰 건 뭐람?"
도훈이 꽁초만 남은 담배를 차창 밖으로 집어 던졌다.
[복수의 신이 딱한 사연을 듣고 분노합니다. 상대의 의뢰를 들어주면 스킬 강화 특전을 제공합니다, 라고 했던가요?]
‘어. 깜짝 놀랐잖아. 하다 하다 이젠 복수의 신이라니. 도전과제가 정확히 뭐였지?’
[의뢰인의 복수를 완성하고, 상대의 가장 소중한 여자를 빼앗은 것이었습니다.]
‘역시 신들의 도전과제에서 여자는 절대 빠지지 않는구나. 최고의 복수는 Ntr이라는 건가?’
[아무튼, 주인님에겐 오히려 잘 된 것 아닙니까?]
‘그렇지. 미쓰리에게 줄 돈도 굳고, 신들의 과제도 해결하고, 무엇보다 인간 쓰레기 하나를 청소할 수 있는 거니까.’
[주인님도 결코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더 나쁜 놈은 무지하게 싫어하시는군요.]
‘내가 원래 천성이 그래. 그리고 듣고 보니 딱하더라고. 사실 허벌이라 싫어했는데, 기구한 사연이 있는 거였다니. 한 사람의 인생을 낭떠러지로 내밀었으면, 호외게 빨래질 당할 각오쯤 하고 있어야지.’
[아무튼 시일은 충분하니 이번 건은 차차 해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거 급조한 별명치곤 대짜의 전설이 오래 남겠는데요?]
‘그러게. 이럴 거면 좀 더 폼나게 지을 걸 그랬나.’
로시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도훈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변두리에 있는 모텔 주차장에 차를 대자, 도훈을 알아본 최번개가 헤드라이트 불빛을 두 번 깜빡였다.
도훈이 내리자 번개와 그의 수하 두명이 함께 차에서 내렸다.
"오셨습니까, 형님. 미리 방 번호까지 다 따놨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다."
"무척 조심성이 많은 놈입니다. 3일 만에 겨우 현장을 잡았으니까요. 저희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
김변은 오늘 기분이 무척 좋았다.
노태윤에게 타짜 대호를 연결시켜 준 수고비로 천만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평소 섹파로 지내던 유부녀에게 오늘 시간이 빈다고 연락이 왔다. 남편이 지방 출장을 갔다나?
"흐흐흐. 세상은 말이야, 머리 좋은 게 최고인 것 같아."
"자기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어?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네?"
김변은 한때 자신의 의뢰인이었던 홍정원의 젖가슴을 주물렀다.
"그럴 일이 좀 있어. 근데 남편 출장 간 거 확실하지?"
김변은 늘 조심성이 철저했다.
본인이 이혼소송 건을 담당하기도 했던 만큼, 이혼의 귀책 사유가 될만한 증거들을 최대한 남기지 않는 편이었다.
"그렇다니까. 아까도 물었잖아. 블랙박스 전원도 차단했고, 보지도 않을 영화 티켓도 미리 끊어 놨어. 근데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 만날 때마다 성가셔 죽겠네."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소리야. 범죄는 큰 건으로 걸리는 게 아니야. 자기도 모르게 사소하게 흘리는 단서 때문에 덜미를 잡히는 거지."
"가끔 보면 자긴 변호산지 범죄잔지 모르겠더라?"
"흐흐. 크리미널 마인드를 가진 변호사라고 해둬. 내 덕에 유류분청구 소송 승소해서 큰 돈 받은 건 다 잊었나 봐?"
정원이 새침하게 째려보며 말했다.
"잊긴 뭘 잊어? 소송 끝나고 고맙다고 술 사주니까, 취한 나를 홀랑 덮친 사람이 누군데? 확 그냥 그때 강간으로 신고해 버렸어야 했는데···."
< 933. 여름 방학-2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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