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909화 (876/2,000)

< 892. 단기 알바-2- >

‘설마 남자친구? 나한테 남자친구를 소개해 줄 정도의 사이는 아니지 않나?’

도훈은 예림이 남자를 대동하게 나온 걸 수상하게 여겼다.

‘설마 재벌 집 막내아들이라도 되는 건가?’

도훈은 혹시나 고의적인 망신주기가 아닐까 의심했다. 전 남친 앞에 자신보다 잘난 남자를 데려와 열등감을 유발하는 유치한 도발.

‘그렇다 보기엔 남자가 너무 평범한데. 설사 저 얼굴에 의사라던가 최연소 사시패스라고 해도 별 감흥도 없을 것 같고. 아니지, 일단 예림이랑 내가 사귀었던 사이도 아니잖아?’

"듣던 대로 인물이 훤칠하네요. 훌륭해요."

"···네?"

예림이 소개를 마치기도 전에 남자가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도훈은 첫 만남에서 외모를 품평해대는 남자의 태도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이 새낀 뭔데 첨보는 사람 얼굴 보고 훌륭하다 마다야?’

"몸이 근육질이긴 하지만, 워낙 핏이 좋으시니 컨셉만 잘 잡으면야 뭐···."

"뭐라고요?"

도훈의 언성에 살짝 노기가 실릴 때쯤.

남자가 뒤늦게 자기소개를 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남자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도훈에게 건넸다.

<포토그래퍼, 차명우

명함은 심플 했다. 흰색의 명함 위에 직업과 이름, 핸드폰 번호만 적혀 있었다.

"포토그래퍼?"

"하하. 사진삽니다. 이번에 예림 씨와 같이 일하게 된."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일단 다들 앉아봐. 내가 정식으로 소개할게."

도훈은 뜬금없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우선 자리에 착석했다. 예림이 양쪽을 번갈아 소개했다.

"실은 내가 이번에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기로 했거든."

"인터넷 쇼핑몰이라니?"

"학교도 휴학했는데 복학은 하긴 싫고 계속 놀고먹을 수도 없잖아. 집에도 눈치 보이고. 여성복 피팅은 내가 직접 하면 되는데, 남자 모델 구하기가 마땅치 않더라고. 몇 명 면접 봤는데 딱히 마음에 들지도 않고."

"예림 씨 지인 중에 괜찮은 모델분이 있다고 하더군요. 저도 궁금해서 같이 따라 나와 봤는데 정말 핏이 훌륭하시네요. 혹시 키는 어떻게 되시죠?"

도훈은 다짜고짜 전개되는 상황 앞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잠시만요. 저 예림이랑 얘기 좀 할게요."

"아, 네. 그러시죠."

"너 잠깐 나 좀 보자."

도훈이 벌떡 일어서더니 흡연실로 향했다.

예림이 따라나섰다.

"뭐야? 갑자기 사람 불러놓고 뜬금없는 면접 분위기라니?"

"미안. 아까 통화하면서 자세히 설명해 주려고 했는데, 이상한 여자가 전화를 받는 바람에···."

"인터넷 쇼핑몰? 피팅 모델? 나보고 지금 그걸 하라는 소리야?"

"응.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돼? 나 이번일 진짜 잘하고 싶단 말이야."

"안 돼. 나 바쁜 거 알잖아."

"알바비는 두둑하게 챙겨줄게."

"지금 알바비가 문제야? 그리고 학교는 어쩌고 갑자기 장사를 하겠다는 거야?"

"어차피 똥통 같은 대학 안 나와도 그만이야. 그리고 내가 학교 휴학한 게 누구 때문인데?"

"그게 왜 나 때문이야. 김기춘이 때문이지."

"야! 그 새끼 얘긴 꺼내지도 마!"

예림이 질색하자 도훈도 조금 과했다 싶었는지 말을 돌렸다.

"아무튼, 웬 생뚱맞은 쇼핑몰인데? 너 장사할 줄은 알아?"

"장사를 태어나면서부터 잘하는 사람도 있니? 하면서 배우는 거지. 솔직히 내가 옷 보는 센스는 좀 있잖아. 어려서부터 옷 잘 입는다는 소리 자주 들었거든."

"그래서?"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한번 해봤지. 어차피 지금 대학이야 나와도 그만 안 나와도 그만인데, 이번 기회에 인터넷 쇼핑몰이나 해볼까 하고. 친한 친구 언니가 이걸로 대박 나신 분 있어. 얼핏 들었는데 잘만 하면 완전 대박이라는 거야!"

"망하면 쪽박이란 말은 않던?"

"야! 이게 시작부터 초를 치고 있어!"

"아무튼, 뭐라도 해보려는 마음은 가상한데 너무 뜬금없는 결정 같아 걱정이다."

"아니야. 나 휴학하면서 이것저것 공부 많이 했어. 사업자 등록은 진즉 끝냈고, 도매상도 뚫어놓고, 사이트 개설도 거의 완공단계야. 이제 남자 피팅 모델만 구하면 끝이라고."

예림의 설명에 비판적이던 도훈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흠. 나름 열심히 준비하긴 한 것 같은데···.’

[열정이 대단해 보이네요. 20대 초반에 젊은 CEO라. 응원해 주시지 않고요.]

‘열정 같은 소리 하네!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가 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성공의 달콤함 뒤엔 얼마나 많은 실패의 쓰라림이 있는데?’

[그래도 예림 양은 잘 할 것 같은데요? 무엇보다 적성에도 잘 맞는 것 같고.]

‘흠. 하기야 저 머리로 공부로 성공하는 것보다야 특기를 살리는 게 낫긴 하겠다만.’

도훈은 예림의 대학을 들었을 때부터 학벌로 뭔가를 이루기엔 가망이 없다고 여겼다. 심지어 자신이 다니는 대학도 듣보잡으로 취급하던 도훈에게 있어, 이름 없는 예림의 대학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저 사진사는 뭔데?"

"명우씨? 여기 업계에선 엄청 유명한 사람이야. 운 좋게 스케줄 잡았어."

"아니 왜 근데 너랑 같이 있냐고."

"아, 오후에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다 왔거든. 가만, 도훈이 너 설마 질투하는 거니? 어머 웬일이래?"

"지, 질투는 무슨!"

도훈이 당황함에 말을 더듬자 예림이 깔깔거리며 놀렸다.

"맞네. 풉-. 웃긴다 너. 나 눈 높은 거 알지? 무슨 엮어도 저런 사람이랑···."

"아니라고!"

"그래도 나 많이 예뻐지긴 했지? 거의 원상복구 했어. 살찌기 전으로."

예림이 웨이브 진 갈색 머리를 찰랑거리더니 모델 포즈를 지어 보였다. 워낙에 잘빠진 몸매에 얼굴까지 예쁘다 보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예인 지망생이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흐음. 진짜 싹 다 복구했네. 섹다이어트 시킨 보람이 있구만.’

"야. 다 내 덕인 줄 알아."

"찐 것도 네 탓이긴 했지."

"말 받아치는 거 봐. 어떻게 한마디를 안 지냐?"

"너도 똑같거든?"

"참나."

도훈이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를 끼는데 예림이 갑자기 도훈의 팔짱을 와락 껴안았다. 뭉클한 가슴이 느껴지자 도훈이 당황하며 밖을 둘러보았다. 흡연실 내부는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밖에서도 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왜 이래?"

"한 번만 나 도와줘. 나 진심이란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너만 한 모델이 없더라고."

"일단 놓고 말해."

"흥. 부끄러워하긴. 우리 사이에."

예림이 새침하게 물러났다.

"우리 사이가 뭐? 그냥 친구 사이지."

"친구라면서 이런 부탁 하나 못 들어주냐?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데."

"도와주기 싫은 게 아니라 진짜로 스케줄이 바빠서 그래."

"방학 중인 대학생이 뭐가 그렇게 바빠서?"

"아무튼, 바빠. 오늘도 차로 300Km 넘게 뛰고 왔어."

"왜?"

"그럴 일이 있었어. 아, 그리고 중간에 해외여행도 가야 하고."

"피팅모델은 생각보다 여유로워.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시즌 옷 촬영 이래 봐야 하루 이틀 만에 끝나거든."

"하루 이틀?"

"응. 나 오늘 오후에 촬영한 거로 벌써 절반 끝냈어."

"그래?"

"쉽게 말하면 단기 알바야. 바짝 찍고 푹 쉬었다가 시즌 변경되면 또 한 번 찍고. 그 정도면 괜찮지 않아?"

도훈이 생각했다.

‘흐음. 듣고 보기 그렇게 시간 뺏길 일은 없을 것 같네.’

[눈 딱 감고 한 번 도와주시죠. 예림 양에게 마음의 빚도 있지 않습니까?]

‘야. 그건 진작에 갚았거든? 몸매도 원상복구 시켜줬잖아?’

[운세에서도 대길이 나왔지 않습니까?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아, 맞다. 대길이랬지?’

도훈은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귀기묘묘스킬을 통해 뽑은 운세에서 큰 행운이 있음을 암시했던 것.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피팅 모델을 하는 것과 운빨 사이에 뭔가 상관관계를 찾기 어려웠다.

‘어떻게 운이 좋다는 거야? 예림이 따먹는 거야 그냥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인데···.’

예림은 지난번 걸어둔 상식 개변으로 인해 섹파로 지내도 부담 없게 만들어 두었다. 그렇다면 대길이라는 게 여자와 관련된 것은 아닐 것으로 추정되었다.

"일당 세게 쳐줄게. 어차피 해외 나가려면 비행기 삯 벌어야 하잖아. 그 정도는 줄 수 있어. 근데 누구랑 나가?"

도훈은 계속 생각했다.

‘설마 여자랑 관련이 없으면 횡재수를 말하는 걸까?’

[횡재수라뇨?]

‘왜, 보통 운 좋다고 할 때 주로 목돈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잖아.’

[오, 그럴듯한데요?]

‘혹시 나예림이 이거 쇼핑몰 대박 나는 거 아냐?’

[그럴 가능성도 있겠죠.]

‘다시 보니까 예림이가 쇼핑몰 하기엔 최적화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요?]

‘보통 대박 난 쇼핑몰 보면 사장이 직접 피팅해서 유명해 진 게 많거든. 대체로 얼굴 몸매 다 되는 애들이지. 근데 예림이가 딱 그쪽 과란 말이야.’

예림은 도훈이 처음 봤을 때부터 미인이라고 느낀 부류였다. 특유의 오만하고 도도한 표정도 그렇지만, 부잣집 딸래미라는 티가 팍팍 나는 부티가 느껴졌다. 즉, 여자들이 봤을 때 워너비하고 싶어지는 쿨한 도시 여성 이미지였다.

‘그렇지. 그거였네. 어쩌면 이거 진짜로 대박 날지도 모르겠어.’

도훈은 합리적 추론 끝에 대길의 의미가 횡재수라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비행깃값만 벌고 끝날 게 아니었다.

"뭐야? 누구랑 나가냐니까?"

"그냥 친구. 아니 근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생각해보니까 돈이 좀 필요하긴 하겠다. 내가 해주면 얼마나 줄 수 있는데?"

"도훈이 너라면 시즌촬영 당 이백은 맞춰줄게."

"이백? 이백만 원 말하는 거야?"

"응. 대신 나중에 입고되는 상품에 대해서도 추가 촬영을 전제하는 조건이야. 이거 절대 적은 돈 아니야. 나도 많이 생각해서 챙겨주는 거야. 솔직히 막 사업을 시작하는 처지에선 상당히 부담스러운 금액이라고."

도훈이 머리를 굴렸다.

‘이백이 당장은 큰돈처럼 보이지만, 나한테 지금 필요한 돈은 아니지.’

"너 사업자금 얼마나 들고 있는데?"

"부모님께 겨우 사정해서 오천 빌렸어."

"오천? 무슨 대학생한테 오천씩이나?"

예림의 집이 어느 정도 산다는 것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큰 금액에 도훈도 살짝 놀랐다.

"몰라. 울 아빠가 진짜 없는 돈이라고 생각하고 빌려준 데. 이거 까먹으면 다신 장사한다는 얘긴 꺼내지도 말라고."

"그래도 지원은 빵빵하네. 인터넷 쇼핑몰 시작하는데 충분한 돈 아니야?"

"나도 매장이 딱히 필요 없으니 그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돈 들어갈 곳이 많더라고. 매장은 없어도 창고는 있어야 하고, 홈페이지 관리해야지 사진 찍는 덴 뭔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지···. 아, 몰라 몰라. 기왕 시작했으니 제대로 해 볼 거야."

도훈이 예림의 푸념을 듣고 있다가 생각했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자."

"어떻게?"

"이백만 원은 안 줘도 돼."

"진짜? 설마 몸으로 때우라는 건 아니지?"

"뭐래? 미친."

"농담 한 번 한 거야. 크크."

"대신 내가 받을 이백을 지분으로 쳐줘."

"지분? 무슨 소리야?"

‘역시 빠가라서 주식 개념은 전혀 없구나. 놀라운 백치미야.’

"쉽게 설명하면, 너의 초기 자본금 5,000에서 200만큼의 지분을 달라는 거야. 그러니까 4% 정도?"

"응?"

"내가 너한테 받을 임금으로 너희 회사에 투자하겠다고."

"아아, 투자! 진짜? 알바비 안 받아도 괜찮겠어?"

"사업 초기니까 자금 회전이 중요할 거 아냐. 그렇게 펑펑 쓰고 나면 나중에 또 부모님께 손 벌릴 거야?"

"그건 못하지. 나도 자존심이 있어. 이 돈도 나중에 다 갚을 거야."

"그러니까. 그럴 바에야 나한테 주지 말고 그거 사업자금으로 써. 대신 네 회사 지분 4%는 내 것이라고. 알겠어?"

"무슨 소린지 잘은 모르지만, 네가 받을 돈으로 투자하겠다는 거잖아."

"응. 사업자 등록했으면 세금 신고할 때 연 매출이나 순익도 나올 거 아니야. 그중 4%를 달라는 소리야."

"정말? 나야 그래 주면 고맙지."

‘누가 고마울지 나중에 두고 볼 일이지.’

[근데 고작 4% 가지고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은 작아 보여도 이거 적은 돈 절대 아냐. 몇 년 뒤에 쇼핑몰 대박 나서 수십억대 매출 올리면 몇천만 원은 될걸?’

[오호. 정말 그렇게 될까요?]

‘예림이 능력보다는 대길이라는 내 운을 믿는 거야. 어차피 내가 이백 없어서 비행기 못 탈 것도 아니잖아. 수중에 억은 있는데.’

[아참, 주인님도 부자시죠?]

"역시 도훈이 네가 최고야! 너라면 날 꼭 도와줄 줄 알았어!"

예림이 기쁨에 도훈을 와락 껴안았다.

도훈은 여전히 통유리인 흡연 부스의 상태에 난처함을 느끼고 예림을 밀어냈다.

"야야, 쪽팔리게 진짜."

"왜? 나 싫어?"

"남들 보잖아."

"흥! 오래간만에 봤으면서 스킨쉽도 거부하고."

예림이 삐친 표정으로 물러나자 도훈이 말했다.

"너 근데 진짜 살 많이 뺐구나?"

"그치? 내가 직접 피팅모델 해야 하니까, 더 열심히 빼게 되더라고. 목표가 생기니까 다이어트도 잘 되는 것 같고."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확실히 줄었다고."

도훈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밑가슴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육덕 시절에 글래머 같아 좋았는데."

"뭐, 뭐라고! 이게 확 씨 죽을 라고!"

예림이 간만에 성깔을 드러냈다. 도훈은 호되게 등짝 스매싱을 당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흥, 살 빠진 데는 내 덕도 있을걸. 그나저나 마법의 정액 효과가 이 정도구나.’

< 892. 단기 알바-2-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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