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877화 (845/2,000)

< 859. 처녀 보살-1- >

"처, 청학동 부채 도사!"

[아니 이름이 그게 뭡니까? 배추 도사 무 도사도 아니고.]

‘왜? 그럴듯해 보이잖아. 그나저나 이 부채 효과 정말 좋네.’

도훈이 손에 쥔 부채는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신비감의 부채라는 것으로 펼쳐 흔들면 카리스마를 +5 상향시켜주는 아이템이었다.

5 올려주는 게 무슨 대수냐고 할 수 있지만, 통상 카리스마가 만점인 100을 기준으로 일반인이 50, 군대의 원스타급이 70,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배우나 가수가 80 정도였다. 이를 감안할 때 범인으로서는 상당한 능력의 상승이라고 볼 수 있었다.

카리스마 수치가 적용되면 상대가 이유 모르게 주눅이 들게 하고, 자연스럽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도훈은 평소에도 외모나 자신감으로 카리스마 수치가 평균을 상회 했기 때문에, 현재는 알 수 없는 신비감을 풍기는 수준에 이르렀다.

도훈이 부채를 부칠수록 상대는 점점 도훈의 말에 빠져들었다.

"네. 혹시 못 들어 봤어요?"

"아, 제가 견식이 짧아서. 지리산 처녀 보살님도 지인 추천으로 겨우 이름만 아는 형편이거든요. 한데 아까 제가 살을 맞는다는 건 무슨 말씀이신지?"

도훈이 선글라스를 한 번 쓱 내렸다.

선글라스 역시 아이템으로 착용 시 상대의 감정을 오라의 형태로 보여주는 능력이 숨어 있었다.

평상시에는 녹색. 분노한 상태에는 붉은 색, 놀라거나 당황하면 노란색의 오라가 발출되는데 현재 상대의 몸 주위에선 진한 노란 오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많이 당황했나 보구나. 이러면 현혹되기 딱 좋은 상태지. 그럼 어디 거짓말을 지어내 볼까?’

도훈이 주머니에서 ‘오빠 믿지’ 립밤을 꺼내 발랐다. 신뢰도를 올려주는 해당 아이템은 호감도가 높을경우 무슨 거짓말을 해도 곧이곧대로 믿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사기를 칠 때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아이템이었다.

"엣헴. 제가 아까 관상을 본다 그랬죠?"

"예, 예."

도사행사를 하는 도훈의 연기에 깜빡 속은 청년은 어느새 저자세로 변해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고 있었다.

"사람마다 상극이라는 게 있습니다. 지리산 처녀보살은 훌륭한 점술가지만 당신처럼 화기가 강한 상대를 잡아먹는 상이지요."

"제가 화기가 강하다고요?"

"그렇죠. 눈썹이 짙고 광대가 발달한 것은 평소에 몸 안에 불기운이 성하다는 뜻이니까요. 가끔 이유 없이 화 날 때가 있지 않아요?"

도훈은 어느새 살짝 말을 놓으며 헛소리를 늘어 놓았다.

"이, 이유 없이···. 네, 그럴 때가 있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응당 그렇지만, 도훈에게 홀딱 속아 넘어간 청년은 그에게 정말로 신기(神技)가 있다고 착각했다.

"그게 바로 화깁니다. 지리산 처녀보살은 음기가 강해 전형적으로 수기운이 강하거든. 불이 물을 만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꺼지죠."

"네 말이 그렇다니까? 상극인 기운끼린 되도록 얽히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말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 분명 누군에게 탈이 나는 법."

"아하! 그, 그렇군요! 근데 저 예약을 하고 왔는데."

"당연히 전화로 예약했죠?"

"네. 한 달에 예약해서 겨우 날짜를 잡았습니다."

"거봐. 그러니까 그렇지. 전화로 관상을 볼 수도 없고 말이야. 내가 오늘 우연히 지나가다 관상을 보니 당신이 살을 맞게 생겼더라고. 왜 그런고 하니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아아! 도사님 아니었으면 정말로 큰일 날 뻔했군요. 감사합니다. 근데 오늘 꼭 보살님을 만나 뵈어야 하는데."

"여자 문제 때문에?"

"아, 네···."

청년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도훈은 마음의 소리를 통해 청년의 속마음을 읽어냈다. 독심술이나 다름없는 그의 스킬은 그를 더욱 영험하게 만들었다.

‘어랍쇼? 상담할 내용이 장난이 아니네?’

청년의 속마음을 읽은 도훈은 내용의 황당함에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에끼, 그러면 큰일 나!"

"네, 네?"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둬!"

"그, 그게···."

"지금 유부녀랑 놀아나고 있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청학동 부채도사라니까. 그 유부녀가 이혼하고 당신한테 간다고 했어?"

"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저도 양심에 찔려서···."

"그러면 안 돼."

"아, 안 됩니까?"

"당연히 안되지. 그 길을 택하면 당신 인생은 필시 구렁텅이로 빠질거요. 그 여잔 늪이야 늪. 남자를 빨아 당기는 지독한 늪."

"아, 아···. 그치만."

"속으론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나? 양심이 가르키는 길을 가세요. 관상을 보니 인생에 아직 3번의 여인이 남아있구만."

"3번씩이나요?"

"그 여자랑 헤어져도 금세 또 다른 여자를 만날 겁니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에 만난 여인이랑 결혼할 운명이고. 그러니 흘려보내세요. 이 또한 지나 갑니다. 그게 최선이에요."

"아아···. 그럴 수 가."

사실 뒷이야기는 도훈이 멋대로 지어낸 것이었다. 청년의 고민이 유부녀와의 불륜에 있다는 것을 파악한 뒤 소설을 써 본 것이다.

하지만 점을 보러 올 때부터 고민이 많던 청년은 도훈이 멋대로 씨부린 말을 금과옥조나 되는 것마냥 떠받들었다.

"제가 하는 말 잘 알겠죠?"

"네네. 감사합니다, 도사님. 안 그래도 이 문제 때문에 몇 달째 고민만 하고 있는데 명쾌하게 결론을 내려주시니 저도 마침내 결심을 굳혔습니다. 도사님께 점궤를 받았으니 이제 처녀 보살은 안 만나도 되겠군요."

"그렇지. 어차피 상극이니."

"저 근데···. 복채는."

"혹시 이름이 뭡니까?"

"네? 저요? 정명훈입니다."

"그래요, 명훈씨.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게 아닙니다. 아마 전생에 나와 연이 닿아서 이렇게 만나게 된 거겠지. 그러니 복채는 됐습니다. 돈 받으려고 봐준 것도 아닌데."

"아아, 그래도 제가 그러면 너무 죄송스러워서."

"에잇, 부정타게. 훠이! 썩 물럿거라!"

도훈이 갑자기 성을 내며 부채를 휙 휘저었다.

뜬금없이 화를 내는 모습이 조울증 걸린 환자 같았지만, 높아진 카리스마로 인해 그마저도 신기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마치 영험한 무당이 불쑥 신내림을 받는 듯 했다.

"가, 감사합니다 도사님 그럼 이만."

명훈이라 불리는 청년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더니 혹시나 부정탈까 두려워 쏜살같이 사라졌다. 도훈은 그 모습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어때? 내 연기 괜찮았어?’

[완전 사기꾼 아닙니까 이 정도면? 당장 점집을 차려도 되겠군요. 역법 스킬도 필요 없겠는데요?]

‘그건 아니지. 이건 완전 사기고, 역법 스킬은 진짜로 능력이니까 말이야.’

[아무튼, 이제 어쩌실 계획입니까?]

도훈이 점집 앞에 서며 준비한 모자를 눌러 썼다.

‘아까 그 남자로 위장해야지. 내가 정명훈인 것처럼.’

도훈은 일전에 최마담과 함께 무당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얼굴이 빻아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만나도 못 알아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훈이 대문의 문을 열였다.

***

"서현아 너 시험 잘 봤다며?"

"누가 그래?"

방학이 시작되고 까페에 둘러 앉은 1학년 여학생들은 헤어지기 전 마지막 모임을 하고 있었다. 소위 8선녀라 불리는 미녀군단과 희주를 비롯한 체육과 1학년 여학생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너 우리과 수석으로 들어왔잖아. 전장 받은 거 모를 줄 알고?"

경희가 서현을 띄웠다. 실은 경희가 서현을 추켜세우는 건 다름이 아니었다. 서현의 옆에서 빨대로 쉐이크를 마시고 있는 정음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흐흐. 정음이는 멍청해서 당연히 바닥 깔았겠지? 쟤는 운동만 잘하지 공부머리는 영 부족하니까.’

"그냥 뭐 열심히 봤지 뭐."

사실 경희가 서현에게 질문을 던진 건 다음 포석을 위해서였다. 어제 끝난 시험을 화제로 든 경희가 이번엔 옆에 앉은 정음에게 물었다.

"정음이 너는 어땠어?"

"추르릅! 아, 맛있다. 뭐라고 경희야?"

"기말 잘 쳤냐고. 정음이 너."

"아, 뭐 응. 그냥 그럭저럭 본 거 같아."

"후후. 공부는 담 쌓은 것 같더니 은근히 공부 좀 했나보다? 학점 기대해봐도 돼?"

경희는 평소에도 정음에게 라이벌 의식이 강했다.

체육과 1티어의 운동신경을 가진 테니스부 경희에게 정음은 늘 넘지 못할 산이었다.

그러나 경희는 정음과 달리 운동은 물론 공부도 곧 잘했으므로 이런 식으로라도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경희의 못된 의도를 파악한 서현이 곧바로 경희를 나무랐다.

"넌 시험도 끝났는데 뭘 그런걸 물어보니? 정음이가 평소에 수업도 얼마나 열심히 듣는데?"

"그래? 너랑 뭐 듣는데?"

"종교미술의 이해."

"그거 도훈 오빠랑 태영이도 듣는 거지?"

"응."

"뭐, 그건 열심히 했나보네. 히히."

"무슨 소리야?"

정음은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평소에 동기들 앞에서도 공부를 포기한 모습을 자주 보였기에 자신에 대해 편견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치. 나도 도훈 오빠랑 매일 붙어서 공부했는데 이걸 말할 수도 없고. 아무튼 성적 나오면 두고보자.’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맞은편에 나란히 앉아 있던 연두가 화제를 바꾸었다.

"야야, 혹시 2주 뒤에 수영 캠프 가는 사람?"

"나!"

"너도?"

"듣기론 도훈 오빠가 조교라는 데 엄청 재밌을 것 같지 않니?"

"꺄아, 도훈 오빠 수영도 잘해?"

"그 오빤 진짜 못 하는 게 뭐니? 슈퍼맨인가?"

다들 도훈의 훌륭한 몸매를 떠올리며 상상에 빠져들었다.

1학년 여학생들에게 있어 도훈은 일종의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공공연히 도훈을 우상시 하는 것이 일종의 밈처럼 자연스러웠다.

"아 그나저나 2주간 열심히 다이어트해야 겠네."

"나 어제 시험 끝나자 마자 요가 끊었잖아."

"요가? 그걸로 살이 빠져?"

"핫요가야 핫. 완전 땀 많이나."

"난 헬스."

"난 그냥 집 근처에서 조깅하기로 했어."

여학생들은 무엇이 그리 신이 나는지 서로 운동 정보를 공유하며 2주 뒤에 있을 여름 수영 캠프에 대한 대비로 열을 올렸다. 아무래도 겨울에 있는 스키캠프와는 달리 해수욕장에서 진행되는 데다 비키니같은 노출이 과한 의상을 입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로

를 의식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특히 체육과는 남자들도 대부분 몸이 건장하고 근육질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면 모델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희주 넌 좋겠다. 몸매 하나는 타고 나서."

나연이 갑자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희주를 들먹였다.

희주는 1학년 여학생, 아니 체육과 전체를 통틀어서도 몸매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도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핫팬츠나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그녀의 훌륭한 몸매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희주는 갑자기 자신이 화제에 오르자 움찔 놀랐다.

"에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다들 늘씬하면서."

"다들 마르기야 했지. 아무래도 운동하는 과니까. 그래도 희주 너는 축복받았잖니. 솔직히 인정해. 그 바디는 아무리 봐도 유전자의 축복이야."

"근데 희주 너 요새 화장 바꿨니? 얼굴도 엄청 예뻐졌어."

"맞아 맞아. 희주 너 완전 물올랐구나? 연애하는 건 아니지?"

"꺄르르르!"

서로를 장난스럽게 놀리기도 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편이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다들 2주 뒤의 수영캠프에 대비해 꿀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혹독한 다이어트와의 전쟁이 될 터였다.

밀크쉐이크를 바닥까지 빨고 있는 정음만 빼고.

‘음, 이거 진짜 맛있네. 하나만 더 시킬까?’

정음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

"계십니까?"

도훈이 주택처럼 생긴 처녀보살의 집으로 들어가 물었다.

"들어오세요."

안방으로 보이는 곳에서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 잠시 만났던 처녀 보살이었다.

‘드디어 만나는 구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

도훈은 그녀가 혹시나 자신처럼 플레이어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의심을 하고 있었다. 플레이어는 서로의 정체를 공개해선 안된다는 룰이 있지만,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경우는 해당이 없었다.

‘정말로 플레이어라면 다른 업적도 달성할 수 있고 말이야.’

일석이조를 노리는 도훈이 안방의 문을 열었다.

방 곳곳에 부적과 달마도, 그리고 오방색의 끈들이 장식되어 있고, 가운데는 향초를 피운 촛대와 좌식 테이블, 한자가 빼곡이 적힌 서적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의 맞은편에 흰소복을 입은 단저한 머리의 여인이 눈을 감고 정좌해 있었다.

"앉으세요."

처녀보살이 눈을 뜨며 도훈에게 말했다.

모자를 눌러 쓴 도훈은 정체를 들키지 않은 것에 흡족해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예약자님 성함이?"

"정명훈입니다."

"정명훈 씨. 네, 오늘 10시에 예약하셨군요. 모자를 좀 벗어 주시겠습니까?"

"모자를요?"

"네, 제가 관상도 보거든요. 사주를 정확히 알기 위해선 관상이나 손금도 겸하는 게 좋습니다."

도훈은 모자를 벗게 되면 혹시나 정체가 탄로날까 두려웠다.

‘분명 신기가 있어 보이는데, 괜히 내 정체만 들키는 거 아닌가 몰라? 로시 혹시 상대가 플레이어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지?’

[정보창을 열어 보시면 됩니다.]

‘정보창?’

[네. 플레이어끼리는 서로의 정보창을 읽을 수가 없거든요.]

‘아하, 그런 방법이!’

< 859. 처녀 보살-1-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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