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8. 기말 시즌-58- >
[아니, 자정이 다되어가는데 곧장 집으로 안 가시고요?]
‘아직 해야 할 공부가 남았잖아.’
[시험이 당장 내일도 아니고 굳이 무리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하루 전이면 오히려 무리 안 하지.’
[네?]
‘3일이 남았으니까 무리하는 거라고. 나는 정해진 분량은 어떻게든 끝내는 타입이라서.’
도훈은 말뿐이 아니라 정말로 도서관으로 돌아가 새벽 3시까지 못다 한 공부를 마무리했다. 시험 기간이다 보니 열람실은 24시간 개방이었다. 공부를 모두 마친 도훈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
그날 이후 시험공부는 늘 정음과 함께였다.
매일 정음을 공부시키고, 하루에 한 번은 정액으로 샤워(?)를 시켰다. 얼굴에 바를 때도 있었고, 먹일 때도 있었고, 때론 가슴에도 듬뿍듬뿍 발랐다. 그리고는 다시 새벽까지 이어지는 강행군. 도훈은 피로가 극에 달했지만, 정음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피곤함을
이겨냈다.
그렇게 장장 일주일간 시험을 끝내고 드디어 마지막 날.
도훈은 긴장된 표정으로 1학기 마지막 고사장에 들어갔다.
‘좋아. 지금까지 거의 완벽에 가까웠어. 이번 시험이 마지막이야.’
도훈은 피로가 극한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아무리 초인적인 체력을 가진 그라도 일주일을 넘게 이어진 강행군에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마지막 고사장에 도착해 기다리는 데 모자를 깊이 눌러쓴 여자 후배 한 명이 다가왔다.
"오빠도 이번 과목이 마지막이세요?"
1학년 수석 박서현이었다. 도훈만큼 퀭한 얼굴을 한 서현은 어찌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피부가 푸석푸석할 정도였다. 입술은 마르고 갈라지고, 눈가엔 다크써클이 가득했다.
"너도?"
"네. 오빠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너도 마찮가지구만 뭘."
"공부 엄청 열심히 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저처럼 학년 수석 노리시나 봐요?"
"누가 그래?"
"소문 다 났어요. 시험 일주일 전부터 빡공하신다고."
"그러는 너도 만만치 않던데? 사도에서 공부하는 거 다 봤어."
"나중엔 다른데로 옮기셨죠?"
"어. 아는 애들 너무 많아서 방해될까 봐."
"오빠도 정말 독하시네요."
"사돈남말하긴. 근데 무슨 일이야? 시험 기간 내내 말도 안 붙이더니."
"제가 정보 좀 드리려고요."
"뭐?"
"오빠 이 교수 시험 족보 본 적 있죠?"
"응. 학과에 한 번 돌았잖아."
"그거 너무 믿지 마세요. 우연히 다른 과 친구한테 들었는데 이번 기말시험 출제를 논술형으로 냈다는 소문이 있어요."
"논술이라고?"
도훈은 살짝 당황했다.
마지막 시험 과목은 3개년 족보가 돌았다. 이제까지 모두 객관식이었으므로, 당연히 올해도 객관식일 거라고 예상하고 그에 맞춰 준비했다. 그런데 서현은 전혀 다른 정보를 주고 있었다.
"네. 교수님이 자기 시험지 족보가 돈 걸 우연히 보고는 엄청 약이 오르셨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엔 골탕 먹이려고 다 논술로 싹 바꿨다고."
"그거 확실해? 그걸 왜 나한테 알려주는 건데?"
"정정당당히 붙어 보고 싶어서요, 오빠랑은."
"나랑?"
"네. 오빠한테 정정당당히 공부해서 이기고 싶거든요."
도훈은 서현이 달리 보였다. 시험 기간 중 아는 체도 안 하던 그녀였지만, 속으로는 계속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암튼 고마워 알려줘서."
"공짜로 알려드리는 거 아닌데요?"
"응?"
"오빠 과 수석 노리고 있죠? 과 수석에게만 주는 전액 장학금 말이에요."
"만일 그렇다면?"
"제가 오빠 이기게 되면 제 소원 하나만 들어줘요."
‘음. 역시 그런 속셈이었구만?’
서현의 소원이라고 해봐야 뻔했다. 도훈은 그녀가 왜 자신에게 중요한 시험 정보를 알려줬는지 깨달았다.
"오케이. 네가 이긴다면 그렇게 할게."
"절대 안 질 거라고 확신하나 봐요?"
"나도 공부 열심히 했거든. 너만큼."
"암튼, 잘 보세요. 그래도 오늘 시험만 끝나면 방학이네요."
"그래, 고맙다."
서현은 시험 감독이 들어오자 이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주인님, 큰일 아닙니까? 객관식으로만 공부하셨는데 갑자기 논술이라니요. 대비가 전혀 안 되어있는데.]
로시의 호들갑에 도훈이 씩 웃었다.
‘아니. 차라리 잘 됐어.’
[잘 됐다고요?]
‘어쩌면 이 과목이 성적을 가르는 분수령이 될지도.’
[저는 무슨 소린 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시험에서 변수가 생겼는데 천하태평이시니.]
‘로시. 나에게 그 아이템이 있다는 걸 잊었어?’
[아이템? 아! 혹시!]
‘그래. 만능 만년필. 머릿속에 있는 문장을 완벽하게 다듬어주는 아이템. 이것만 있다면 오히려 논술 시험은 식은 죽 먹기지.’
[제가 그 생각을 미처 못 했군요. 역시 주인님은 임기응변이 뛰어나십니다.]
감독관이 논술형 시험지는 나눠주자 시험장 곳곳에서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아!"
"뭐야 이게?"
"족보랑 완전히 다르잖아?"
"자자, 조용조용! 시험 시간에 누가 떠드나?"
도훈과 서현처럼 정보를 미리 입수하지 못한 대부분의 학생들이었다. 다들 어떻게든 머릿속의 지식을 짜깁기해 마구잡이로 써내는 한편, 도훈은 만능 만년필을 이용해 완벽에 가까운 논리적인 문장을 구성해냈다.
일필휘지로 갈겨지는 답안은 빠르게 전체를 가득 채웠고, 40명이 보는 시험장에서 가장 먼저 손을 들 수 있었다.
"교수님."
"뭔가?"
"다 쓴 사람 먼저 나가도 됩니까?"
도훈의 발언에 학생들이 동요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논술 시험에서 금메달을 따고 나간다는 건 대부분 시험 포기자들이 보이는 행동이었던 것. 그들은 도훈이 가장 먼저 시험을 포기한 것이고 여겼다.
"크흠. 앞에 제출하고 나가게."
"네."
도훈은 가장 먼저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갔다. 멀리서 서현이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았지만 도훈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서현은 아마도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아쉽게도 네 소원을 들어줄 일은 없겠다, 서현아.’
"으아! 드디어 해방이다!"
가장 먼저 시험장을 탈출한 도훈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학교에서 기말 시험의 끝은 방학의 시작이란 말과 일맥상통했다.
"아우! 진짜 2주간 고생한 거 생각하면!!"
담배를 연달아 피며 시험을 끝낸 해방감을 만끽한 도훈은 이내 피로가 급격히 몰려오는 걸 느꼈다. 내리 일주일을 하루 4시간 수면으로 일관했던 후유증이 긴장이 풀리자 몰아치는 것이었다.
‘어우, 일단 집에 가서 잠부터 자고 생각하자.’
도훈은 그 날 집에서 종일 잠만 잤다. 오후 3시부터 잠이 들기 시작해 잠을 깼을 때 새벽 5시가 넘어있었다.
***
새벽에 깬 도훈은 그간 쌓인 메시지를 확인했다.
-육정음 : 시험은 잘 치셨어요? 저도 막 끝냈어요.
-육정음 : 오빠 덕에 이번 시험은 태어나서 가장 잘 치른 것 같아요. 너무 고마워요 오빠.
-육정음 : 많이 피곤하실 테니 푹 쉬시고, 다음에 제가 감사의 의미로 밥 한번 살게요.
정음의 메시지를 본 도훈은 피식 웃었다.
아마도 정음은 B~B+ 정도를 받을 것이다. 벼락치기로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다만, 학고를 예상했던 그녀에게 평균 성적을 맞게 해준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결과였다.
‘게다가 사실 진짜 선물은 학점이 아니라 마법의 정액이지.’
정음은 이번 기말 시험 중 거의 매일 같이 도훈과 붙어 다니며 밤에는 정액을 뽑아냈다. 먹은 적도 있었고 얼굴에 바른 적도 있었고 가슴이나 몸에다 뿌린 적도 있었다.
그 결과, 당장은 모르겠지만 여름 방학 기간 중 정음은 지금보다 훨씬 예뻐질 예정이었다. 안 그래도 체육과 원탑으로 뽑이는 정음이 지금보다 더 예뻐지면 어느 정도가 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시험도 끝내셨으니 이제 밀려둔 미션을 마무리 하셔야겠죠?]
‘그래. 생각 난 김에 정리 좀 해보자.’
집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며 도훈이 남은 미션을 정리했다.
[현재 활성화 된 미션은 처녀보살을 공략하라입니다. 기억이 잘 안나실까봐 미션창을 활성화 시켜놓았습니다.]
‘오케이.’
도훈이 스마트워치를 들어 미션 내용을 재확인 했다.
-처녀 보살을 공략하라.
*신기가 있는 처녀 보살을 공략하는 미션입니다.
*성공 보상으로 '역학' 스킬이 주어집니다.
*제한 조건으로 미션 수행 장소가 ‘점집’으로 고정됩니다.
*제시된 시간을 초과하면 자동으로 미션이 소거됩니다.
*남은 시간 : 10 Day
3주 전에 활성화된 미션은 어느새 시간이 흘러가 10일 가량 남아 있었다.
‘10일이면 충분하겠지?’
[일전에 예약해 둔 날짜로는 접촉이 불가능합니다. 빨라야 5주 뒤라고 했으니까요.]
‘일단 아침에 바로 찾아가야지. 중간에 순서를 바꿔 치기 하는 수밖에 없겠어.’
대충 계획을 세운 도훈은 이른 아침부터 헬스장에 갔다.
시험 기간 중 만난 성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몸이 말랑카우가 됐어?
‘나보고 말랑카우라고? 하긴 운동을 하도 쉬긴 했지.’
20대 때는 어지간해선 근손실이 오지 않는다. 평소의 활동량과 영양섭취로도 근육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훈처럼 비대한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선 오랫동안 운동을 쉬다 보면 조금씩 근육이 빠지기 시작한다.
학교 생활에 치여 운동을 멈춘 지 3개월여간 흘렀기 때문에 도훈의 몸은 최상의 상태보다 살짝 근손실이 온 상태였다. 도훈은 그것을 다시 복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헬스장을 끊었다.
"한달만 빡세게 만들어 보려고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헬스장 1개월 권을 끊은 도훈은 쓸데없는 데 정신을 허비하지 않고 오로지 운동에 전념했다. 이른 시간이다 보니 대부분 출근하기 전에 몸을 풀러나온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여기도 엄청 오랜만인 것 같네.’
런닝 머신에서 예열을 마친 도훈은 기구들을 둘러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이곳에는 당시 PT트레이너였던 송미나와 정사를 벌였던 추억이 남아있었다.
‘어우, 저 위에서 말타기까지 했었는데 괜히 기분이 이상하네.’
도훈은 허튼 생각을 떨치고 코스를 돌며 운동에 매진했다. 오랜만에 근육을 쥐어 짜내자 기분 좋은 통증이 느껴졌다. 도훈이 한참 운동을 하고 있는데 안면이 있는 트레이너가 그를 반겼다.
"어? 다시 왔네?"
"네. 오늘부로 방학했거든요."
"아하, 대학생들 벌써 방학 기간이구나."
"네. 방학 때라도 열심히 몸 만들어 보려고요."
"잘 생각했어. 혹시 저번에 내가 했던 제안은 기억하지?"
"알바요?"
"어. 안 그래도 트레이너도 부족한데 운동하면서 용돈도 벌면 좋잖아."
남자 트레이너는 간만에 도훈을 보자마자 또 다시 알바자리를 제안했다. 하지만 도훈은 곧바로 거절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올 여름 방학 땐 이곳저곳 돌아 다닐 것 같아서요."
"그래? 아쉽네. 다음에라도 언제든 환영이니까 생각바뀌면 얘기하라고."
"네, 감사합니다."
도훈은 더 이상 알바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지난번 AV촬영으로 1억원을 현금으로 받게 된 이후로, 대학 생활 내내 놀고 먹어도 될 만큼 부자가 됐기 때문이었다.
‘이제 방학이니까 학교 다닐 때 못 했던 업적들도 하나씩 깨야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우선 처녀보살부터 공략하고.’
[각오는 되셨습니까?]
‘얼마든지.’
아침 운동을 마치고 나온 도훈은 개운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방학이라고 방탕한 생활을 하기보다 계획을 세워 차근히 과업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
"저 사람 어때?"
도훈에 차 안에 앉아 혼잣말을 했다.
그는 지금 지리산 처녀보살이 있는 점 집 앞에서 진을 친 상황. 차에서 마냥 죽치고 앉아 있으니 잠복수사를 한 형사가 된 기분이었다.
[점을 치러 온 손님일까요?]
‘낌새가 그래 보이지 않아?’
[일단 말을 걸어 보시죠.]
‘좋아.’
차에서 내린 도훈은 곧장 점집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 잠깐."
가게에 들어가려던 청년은 선글라스를 쓴 도훈이 다가오자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
"누구···?"
"혹시 처녀보살 만나러 가는 겁니까?"
청년은 20대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연배가 비슷하거나 살짝 어려보이는 도훈이 다짜고짜 말을 걸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근데요? 저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당신 거기 가면 급살 맞아."
"네?"
청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도훈은 어디서 준비했는지 부채를 꺼내 들더니 촥- 펼치며 부채질을 했다. 선글라스에 전통 부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기이한 느낌을 자아냈다. 점집 거리라 불리는 동네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속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살 맞는다고. 몰라요? 살?"
"아니 그게 무슨···."
"잠깐 나랑 얘기 좀 해요."
도훈이 청년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뭐야 이거?"
"어허. 잠깐이면 된다니까 그래."
"아니 왜 가는 사람을 붙잡는데?"
도훈의 무례한 행동에 청년도 언성이 높아졌다.
그때 도훈이 선글라스를 밑으로 살짝 내리더니 눈빛을 마주보며 중얼거렸다.
"···여자 문제로 궁금해서 가는 거 아니야?"
"어? 아, 아니 그걸 어떻게!"
"딱 보면 척이라니까 그래? 나랑 딱 5분만 얘기합시다. 그럼 보내줄게."
청년은 도훈이 곧바로 자신의 속마음을 읽자 당황하며 자기도 모르게 끌려갔다. 점집에서 한 참 떨어진 곳으로 청년을 인도한 도훈이 고개를 쯧쯧 가로 저으며 말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네."
"무, 무슨 소립니까 대체, 아까부터."
"내가 실은 청학동에서 공부하던 사람인데 관상을 좀 볼 줄 알거든."
"과, 관상요?"
"당신 저 보살한테 가면 횡액 맞을 상이야."
"네?! 횡액요?"
"내가 우연히 길가다보고 살려준 거라고."
"아, 아니···. 혹시 도사님이세요?"
"이제야 날 알아보는 군. 내가 바로 청학동 부채도사라네."
도훈이 다시 거드름을 피우며 부채를 살살 흔들었다.
< 858. 기말 시즌-5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