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2. 기말 시즌-22- >
"정란이가 츤데레라니? 너 어디 다친 거 아니었어?"
"이거요? 그냥 살짝 넘어진 거예요. 암튼,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정란이 하는 짓이 참 여우 같네요."
‘그냥 네가 미련한 곰이 아닐까 싶은데···.’
도훈은 태영을 한심하게 여겼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태영이 혼자 착각하는 게 안쓰러워 한마디 건넸다.
"태영아. 여자한테 너무 맞춰 줄 필요 없어. 여자들은 너무 잘해주면 오히려 고마운 줄 모른다더라고."
"일부러 맞춰 주는 건 아닌데 은근히 성격이 잘 맞는 것 같아서요."
"···그래?"
"암튼, 오늘 뭔가 통했어요. 조금만 더 친해지면 고백해 보려고요."
태영은 어느새 정신승리를 하고 있었다.
감정에 매몰되어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질 못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인 호구 취급이었지만 스스로는 정란과 죽이 맞고 있다고 생각했다.
‘캬, 진짜 줄 듯 말 듯 줄 타는 솜씨가 예술이란 말이지? 거기서 니킥이라니···. 크크, 이건 진짜 예상도 못 했잖아.’
태영은 정란이 부끄러움이 많아 그런 거라고 자위했다.
그래서 키스하기 직전에 마음이 돌변한 거라면서. 도저히 답이 없는 착각이었다.
"참, 형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정희랑 얘기 좀 하는 거 같던데."
"그냥 뭐. 아직은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정희는 다 좋은데 말수가 너무 없는 거 같아요. 연애 못 해본 티가 팍팍 난달까? 이런 상대일수록 형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여야 해요."
누가 누구를 훈수하는 건지.
도훈은 태영의 오지랖이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순수한 충정을 생각해 별말 하지 않았다.
"그래. 기억해 둘게."
"어, 얘들 저기 횡단보도 앞에 있네요."
쌍둥이 자매가 멀리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너 왜 혼자 먼저 갔어?"
"남이사?"
정란은 뒤쫓아온 언니 정희에게 차갑게 대꾸했다. 아무리 서로 도훈을 두고 경쟁 중이라곤 하지만 지나치게 쌀쌀맞은 태도였다.
"말 계속 그런 식으로 할 거야?"
"왜? 재미 좋으셨나 봐? 도훈 오빠한테 찰싹 붙어서는."
"아니 그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됐거든? 언니가 그럴 줄은 몰랐네."
"내가 뭘?"
"내가 분명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도훈 오빠. 그런데 그렇게 뺏어가기 있어?"
"내가 뭘 또 뺐었다고 그래?"
"그럼 양보할 거야?"
정란은 아예 생떼를 쓰고 있었다. 처음엔 꼬실 수 있으면 꼬셔보라고 호언장담을 해놓고, 정희와 도훈 사이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부쩍 조바심을 느끼는 중이었다.
급하게 술을 마시다 화장실에서 토하질 않나, 눈치도 없는 태영이 스토커처럼 찝쩍대지 않나 오늘은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정희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자 점점 희망이 사라져가는 느낌이었다.
정란의 물음에 정희가 당황하며 말했다.
"양보라니?"
"왜? 어차피 언니 사실 남자한테 별로 관심 없잖아. 내가 시비 걸어서 그런 거라면 지금이라도 사과할게. 미안."
"······."
"그러니까 그냥 오빠 나한테 양보해줘."
정희는 자매로서의 의리와 호감 가는 남자 사이에서 갈등했다. 자존심 강한 정란이 이렇게 빨리 꼬리를 내릴 줄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정란이가 진짜 도훈 오빠를 좋아하나 보구나.’
처음부터 정란이 고개를 숙이고 도와달라 했으면, 자신도 동생 편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도 도훈에게 강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방금 전 손을 잡을 때 밑이 저릿저릿해진 이후로는 자신의 감정이 보다 명확해졌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그치만 나도 이젠···.’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사람은 양보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설마 언니···."
"미안하지만 나도 도훈 오빠한테 관심 있어. 그러니 방금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할게."
"아니, 어떻게 언니가!"
정란은 진심으로 경악했다.
그동안 남자 좀 사귀어 보라며 등 떠밀어도 마다했던 정희다. 한번은 일부러 사귀던 남자 친구에게 부탁해 우연을 가장한 자리까지 주선했지만 정색했던 적도 있었다.
평소 같으면 정희가 마침내 남자에 관심을 가진 것을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겠지만, 하필 그게 도훈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왜? 언제는 나보고 남자 한번 사귀어 보라면서?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아무것도 아니라던 사람이 누군데 그래?"
"왜 하필 그게 도훈 오빤데?"
"내가 누굴 좋아하고 사귈지 너한테 허락 맡아야 하니 그럼?"
정희가 당당히 나오자 정란도 말문이 막혔다.
그러면서 슬슬 오기가 생겨났다.
‘공부도 잘하고 착한 딸이기까지 하면서 이젠 남자까지 나한테 뺏어가겠다고?’
동생인 정란은 늘 살면서 언니와 비교당하고 살아왔다.
얼굴이 똑같이 생긴 일란성 쌍둥이라는 점도 있지만 늘 예의 바르고 모범생이었던 정희를, 정란은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체육 시간에 달리기를 해도 미묘하게 정희가 더 빨랐고, 학교에서 시험을 볼 때도 정란이 한 개 틀려서 좋아하면 정희는 올백을 맞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차이가 정희와 정란의 격차를 만들었다.
부모님은 언니인 정희를 칭찬하면서도, 동생인 정란에게는 늘 언니를 본받으라며 질타했다. 무엇을 해도 우월한 언니를 이길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그 뒤로 정란은 삐뚤어졌다.
언니와 비교되지 않으려면, 언니와 다른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정희가 모범생으로 인정받으면, 자신은 일진으로서 잘나가면 그만이었다. 정희가 남자에게 한 눈 팔지 않고 묵묵히 봉사활동을 하고 다니면, 자신은 남자들을 실컷 만나면서 클럽을 다녔다.
나는 언니와 다르다고.
똑같이 생겼지만, 언니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갈 거라고.
정희가 열심히 공부해 좋은 곳에 취직하면, 자신은 실컷 남자를 만나고 다니다가 능력 있는 남자 만나서 시집 잘 가면 그만이라면서.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정희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것은 달리 말해 열등감.
뛰어난 언니를 둔 동생의 열등감이, 하필 쌍둥이라는 특이성 때문에 엉뚱하게 폭발한 케이스였다.
‘이제는 나한테서 남자까지 뺏어가 보겠다?’
정란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정란이 볼 때 정희는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났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학업 성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주변의 기댓값부터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 정란이 정희에게서 유일하게 앞선다고 자부하는 것이 바로 남자였다.
똑같이 생겼지만, 동생인 자신이 훨씬 인기가 많다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도훈이란 존재의 등장으로 처음으로 그 자존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란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이제껏 언니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점까지 밀리게 되면 자신은 평생 언니라는 그림자 속에서 살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정란이 거울처럼 똑같이 생긴 정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진짜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지?"
"그럼 내가 장난치는 거 같니?"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내가 그렇게 만만히 보여?"
"뭘 또 만만히 봤다고 그래?"
"참고로 난 내가 지금껏 찍은 남자들은 모두 꼬셨어. 단 한 병도 예외없이."
"도훈 오빠는 그런 사람 아냐."
"흥, 공부만 했던 언니가 남자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뭐?"
"난 분명히 경고했다. 나중에 나 원망하지만 마."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니?"
그때 멀리서 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어, 횡단 보도에서 우리 기다리고 있던 거야?"
니킥을 맞고도 정신을 못차린 태영이 정란을 보고 방긋 웃어 보였다. 정희와 언쟁을 벌이고 있던 정란은 두 사람이 다가오자, 안색을 싹 바꾸며 정희에게 말했다.
"언니가 선택한 거야. 이젠 돌이킬 수 없어."
"······."
도훈은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찮은 것을 느꼈다.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냉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흐음. 나 때문에 괜히 의좋은 자매 사이가 틀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네.’
[그럼 미션을 포기하셔야죠.]
‘단순한 미션도 아니고 신들의 후원이잖아. 이걸 포기하면 좆병신 되는건데?’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나중에라도 둘 사이를 회복시켜줘야지. 각각 따먹을 때는 일단 이대로 지켜보는 수밖에.’
"여기 있었구나."
"건널목만 지나면 금방이에요. 저희집은 저기 골목 사이로 들어가면 돼요."
"그래?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괜히 늦게 들어가면 눈치 보이니까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희의 말에 도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늘은 예열을 시킨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먹으려다간 체할 수 있었다.
"그럼 여기서 작별 인사 해야겠네. 조심히 들어가. 정란이도 잘 가고."
도훈은 일부러 정란을 챙겼다. 정희를 공략한 이후는 정란의 차례. 두 사람 다 소홀할 순 없었다. 정란 역시 도훈에게 밝게 인사했다.
"네, 오빠. 내일 봐요."
"잘 가."
태영도 정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정란은 한 번 쓱 쳐다보더니 특별한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 신호 바뀌었다. 그럼 저희 가볼게요."
두 사람이 건널목을 건너며 골목으로 사라질 때까지 태영은 아쉬운 눈길로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도훈이 태영을 향해 말했다.
"인마. 눈 빠지겠다."
"정란이는 어쩜 저렇게 뒤태마저 고울까요?"
"얼씨구.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형. 원래 남자는 이상형을 만나면 1시간이라도 반할 수 있는 존재라고요."
"정란이가 진짜 이상형이야?"
도훈과 태영은 걸어온 길을 되짚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네. 완벽해요. 저랑 그렇게 잘 맞는 여자는 처음 봐요."
"뭐가 그렇게 잘 맞다는 건데? 너 저번에는 다른 여자 좋다지 않았어?"
"누구요?"
"그··· 누군지. 교환학생 있잖아."
"료쿄요? 에이, 그거야 단순한 호기심이었죠."
"호기심?"
"그냥. 외국 여자는 어떨까 하는 거요. 왜 남자들 로망에 그런거 있잖아요. 백마도 타보고 흑마도 타보고."
이미 백마를 탄 경험이 있는 도훈이 물었다.
"백마는 그렇다 쳐도 흑마는 좀···."
"와, 이 형이 또 순진하시네. 형. 흑 누나들 나오는 야동 못봤죠?"
"애초에 야동을 그렇게 자주 안 봐."
‘야동을 찍으면 모를까.’
야동 이야기가 나오자 태영이 오랜만에 열변을 토했다.
"제가 장담하는데 흑누나들 한 번 맛보면 헤어날 수 없을 걸요? 왜, 흑형에게 간 여자들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흑누나도 비슷해요."
"그건 네 생각인 거지?"
"네."
"하하. 근데 뭐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흑인을 만나겠어?"
"왜요? 그 어학당 있잖아요. 거기 자주 보이던데?"
"응?"
"외국인들요. 어학당 모르세요? 저번에 료코한테 들었는데 교환학생으로 오거나 한국으로 유학 온 학생들이 한국어학당 많이 다니고 있다더라고요."
"그래? 어학당 쪽으론 가볼 일이 없어서."
"사범대는 토익을 안치니까요. 저희 연극 동아리 선배들은 3,4학년 때 자주 다니나 보더라고요. 스펙 쌓으려고. 어학당 건물에 영어 센터도 같이 운영하거든요."
"그렇구나."
"형도 심심하면 한 번 가봐요. 외국인 친구들 사귀기 좋데요."
"그래 뭐 시간 나면."
‘태영이 좋은 정보를 물어다 주는데?’
[백마타고 흑마타고 업적도 끝내시려고요?]
‘기회 되면. 중수 2호봉 얼른 가야지.’
[전 주인님이 중수되고 승급 욕심은 버린 줄 알았습니다.]
‘아니야. 사정이 그래서 못 했을 뿐.’
"잘 자라고 톡이나 남겨볼까."
"톡? 누구한테?"
"정란이한테요."
"번호 받았어?"
"아뇨. 근데 단톡방에 있잖아요. 거기서 친구추가 하면 되죠."
"그런 방법이 있구나."
"형도 정희한테 톡 남겨요."
"아니 난 괜찮아."
태영이 폰을 들고 정란에게 톡을 보내자 심심해진 도훈도 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미 톡이 도착해 있었다.
‘누구지?’
폰을 확인하는데 방금 전 헤어진 정희였다.
차정희 : 오빠, 바래다줘서 고마웠어요. 덕분에 집에 잘 도착했어요.
도훈이 씩 웃으며 답신을 보내려는데, 이번엔 동생인 정란의 톡이 도착했다.
차정란 : 오빠. 저 정란이요. 조심히 들어가시라고요.
‘응? 자매 둘이서 동시에 연락이 오는데?’
[저럴 거면 단톡방에 보내지 왜 개인적으로 보냈을까요?]
‘둘이 나를 두고 경쟁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그때 톡을 보내고 있던 태영이 말했다.
"···안 읽네요."
"응?"
"정란이요. 톡을 3개나 보냈는데 대답이 없네요. 벌써 제사 준비하는 걸까나?"
‘아이고, 태영아···.’
방금 전 정란에게서 톡을 받은 도훈은 정란이 의도적으로 태영의 문자를 씹고 있다는 걸 알았다. 태영은 한참 숫자가 지워지지 않는 톡을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나중에 연락하겠지. 하하."
"그래. 근데 너무 서두르진 마. 조급하면 될것도 안 되니까."
"형이 몰라서 그래요. 저흰 이미 통했다니까요."
‘대체 뭐가 통했다는 걸까?’
[태영 군도 은근 허당인 것 같습니다. 이미 정란 양은 주인님께 마음이 넘어간 것 같은데요.]
‘그러게 말이야. 이걸 말해 줄 수도 없고···.’
[태영군도 좀 챙겨 주시지말입니다. 이제 불쌍하기까지 하는 군요.]
‘안 그래도 이번 미션 끝나면 트레이닝이라도 시켜야 겠어. 이 자식이 너무 눈만 높고, 눈치는 쥐뿔도 없어서 저러다 군대 갈 때까지 여친 한 번 못 사귈 것 같아.’
[왜요? 누구 분양이라도 하시게요?]
‘분양은 무슨? 내가 한 번 닦은 여잘주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냥 새로운 여자 꼬시게 도와줘야지.’
[그러다 또 이번처럼 뺏으시려고?]
‘안 뺏어 인마. 내가 그렇게 상도덕도 없는 줄 아나.’
[글쎄요. 다른 건 몰라도 여자를 양보한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아서요.]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뭐. 두고 볼 일이지만.’
< 822. 기말 시즌-2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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