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5. 중수의 자격-34- >
도훈은 그제야 칼끝에 찔린 상처에서 피가 흘러 굳은 것을 깨달았다. 워낙 예리한 흉기에 베이다 보니 상처가 난 것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건···. 그러니까 며, 면도하다가 베였어."
"면도요?"
정음을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도훈이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둘러댔다.
"응. 면도칼을 자주 안 쓰다 보니···."
도훈의 그럴듯한 변명에도 정음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상처를 쳐다보았다.
"많이 아프셨겠다. 가만있어 봐요. 제가 피라도 닦아 드릴게요."
"괜찮아."
"그래도요."
정음이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그녀는 핏자국이 묻은 상처 부위를 조심스레 닦아내며 울상을 지었다.
"어쩜 좋아···. 깊이도 베였네요."
"피만 조금 낫지 괞찮아. 하나도 안 아파."
"제가 밴드라도 사다 드릴까요?"
"밴드? 지금?"
정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말하더니 쪼르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교수가 정음의 뒷모습을 보고 쯧쯧 혀를 찼다.
"거참, 요즘 학생들이란. 허락을 구하는 건지 통보를 하는 건지···."
도훈은 괜히 자기 때문에 애꿎은 정음만 찍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업보다도 자신의 상처를 먼저 걱정하는 정음의 마음씨에 감동했다.
‘역시 내 걱정하는 사람은 정음이 밖에 없다니까.’
[과연 주인님의 조강지처답습니다.]
잠시 후 편의점에 밴드를 사온 정음이 강의실로 다시 들어와 도훈의 상처에 밴드를 붙여주었다.
"고마워, 정음아."
"뭘요. 오빠, 그리고 그 면도칼 위험하니까 이제 쓰지 마세요. 제가 전기면도기 좋은 걸로 하나 사드릴게요."
"무슨 선물까지 또···."
"괜찮아요. 저 이번 달 알바비 받았거든요."
정음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맨날 정음에게 받기만 하는 도훈은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면서도 괜히 부끄러워졌다.
‘정음이는 뭐든 나한테 퍼주는 구나. 나는 변변찮은 선물 하나 해준 적도 없는데.’
[그러게요. 정음양은 너무 헌신적인 것 같습니다.]
‘안 되겠어. 나도 이번 기회에 비싼 선물 하나 사줘야지.’
[진작 그러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게 내가 정신이 없으니까 제일 아끼는 정음이를 못 챙겼네.’
도훈은 목에 붙인 밴드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
"혀, 형님!"
"괜찮으십니까?"
"이게 무슨···."
민수는 도훈의 발차기를 막아냈던 팔이 계속 부어오르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X레이를 찍어보고 한쪽 팔에 금이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급한 데로 깁스를 두르고 나타나자 걱정스러운 마음에 부하들이 달려든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떤 새끼들인지 몰라도 확 담가버리겠습니다, 형님!"
부하들은 민수가 상대 조직에게 습격이라도 당한 줄 알고 길길이 날뛰었다. 설마하니 천하의 1:1로 싸우다가 다쳤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민수는 창피함을 느끼고 부하들에게 말했다.
"별일 아니니까 신경 꺼. 그나저나 큰 형님은 어디 계시지?"
"골프 연습장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럼 거기로 안내해."
"네, 형님."
골프 연습장에 도착하자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석산파의 행동대장 태주가 아이언을 들고 드라이버 연습을 하고 있었다.
호쾌한 스윙으로 장타를 날리던 태주에게 깁스를 한 민수가 다가갔다.
"형님."
"어? 팔이 와 그라노?"
태주의 주변에는 늘 그의 보디가드들이 양복을 입고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민수가 눈치를 보고 머뭇거렸다. 태주는 민수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부하들을 물리쳤다.
"너희들은 밑으로 내려가 있어."
"네, 형님!"
2층 연습장 전체를 홀로 전세 낸 태주가 민수와 홀로 남아 독대했다.
"어떻게 된 기가?"
"일이 좀 있었습니다."
"싸게 말해 본나."
"예."
민수는 도훈과 있었던 일을 소상히 밝혔다.
그를 뒤쫓던 일부터, 공사장에서 1:1로 겨룬 일. 그리고 제임스에게 받은 부탁이 실패했다는 얘기까지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그는 조직에 충성하는 타입이었고, 가족처럼 모시는 태주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도저히 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민수의 말을 들은 태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도 굉장한 떡대를 자랑하는 태주는 흔히 얘기하는 근육돼지. 마동석과 팔씨름을 해도 꿀리지 않을 것 같은 곰같은 체격의 소유자로 싸움이라면 누구에도 져본 적이 없는 괴물 같은 사내였다.
석산파 실질적인 2인자인 그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후배가 바로 민수였다. 그런데 그 민수가 1:1로 싸워서 지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민수를 재꼈다고? 저 독종을 1:1로?’
이미 제임스가 부탁한 것엔 안중에도 없는 태주였다.
그보다는 평범한 대학생이라는 도훈의 정체가 더 궁금했다.
"니가 볼 땐 어떻드노?"
"네?"
"그 도훈이라는 아 말이다."
"천잽니다."
"천재라꼬?"
"네. 도저히 믿기 힘든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형님, 이번 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민수의 비장한 목소리에 태주가 물었다.
"무슨 책임을 진다케쌌노?"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에게 한 번 빚을 졌습니다. 실패에 대한 책임은 달게 받겠으니···."
"됐다. 치아라. 니는 내가 그 뽕쟁이 눈치라도 본단 말이 가?"
태주가 역정을 냈다.
"···예?"
"제임스고 나발이고 신경 안 쓴단 말이다. 그딴 호구 새끼 없어도 그만이라꼬. 확마 조져쁠라. 괜히 니만 상해서 왔다 아이가."
"혀, 형님."
"팔은 괘안나."
"금이 좀 갔지만 일주일이면 풀 수 있습니다."
"그래. 몸조리 잘하고. 네 말대로 그 건은 이제 치아쁘라. 생각해보면 그런 일을 니한테 시킨 내 잘못인기라."
"형님···."
"참, 나중에 팔 다 나으믄 그 놈아 얼굴 좀 함 보자."
"네?"
"그 도훈이라는 아. 니말 맹키로 진짜 싸움의 천재믄 그냥 둬서 되긋 나?"
민수가 태주의 곧 말뜻을 이해했다. 태주가 도훈을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은, 그의 실력을 높이 산다는 의미였다.
"우리 일이라는 게 사람이 젤 중하다 안 카나? 니가 인정할 만한 놈이믄, 보통 놈은 아닐끼다. 함 내 앞에 대려와 본나."
"알겠습니다 형님."
"고생했다. 가 쉬라."
"넵."
민수가 물러서자 아이언을 들고 있던 태주가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접힌 귀에 두껍고 짧은 목이 유난히 인상적인 사내였다.
"···싸움의 천재라꼬? 오랜만에 제대로 된 물건 하나 건진 건가?"
태주는 임무가 실패했다는 말에도 기분이 좋은 듯 힘차게 아이언을 휘둘렀다.
***
오후 수업이 끝나고 도훈이 정음에게 물었다.
"정음아. 오늘 시간 되니?"
"시간요?"
"응. 저녁 사주고 싶어서."
"아···. 오후반 수업이 있긴 한데···."
정음은 태권도 도장에서 사범 일을 맡고 있었다. 그간 배운 태권도 경력을 살려 아르바이트 겸 돕는 것이었다.
"음, 6시까지는 괜찮을 것 같아요."
"6시라."
도훈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4시가 채 못된 시간이었으므로 저녁을 먹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한바탕 벌이기엔 빠듯했다.
‘어쩌지? 저녁도 먹고 회포도 풀기엔 2시간은 너무 짧은데.’
[문고리 충전을 먼저 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음···. 그건 정음이에게 너무 미안해서.’
도훈은 다른 여자들과 달리 정음을 유별나게 아꼈다. 단순히 섹스를 하기 위해 만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녀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오늘은 그냥 밥이나 먹어야겠다.’
[네? 그럼 충전은요?]
‘어차피 여자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정음일 그런 용도로 쓰는 것은 내가 마음이 불편해.’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저는 오빠가 좋아하는 거면 뭐든 좋아요."
"그래도 내가 사주는 거잖아. 부담 없이 말해봐. 나 용돈 받았거든."
"정말요?"
정음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럼 파스타요."
"파스타?"
"네. 저 파스타 좋아해요."
도훈은 값비싼 음식이라도 상관없었지만 정음은 도훈에게 얻어먹는 것이 불편했다.
‘오빠 용돈인데 아껴써야지. 괜히 비싼 거 사달라고 하면 부담될 거야.’
"그래. 그럼 파스타 먹으러 가자."
두 사람은 학교 후문에 위치한 파스타 가게에 도착했다. 아직 저녁을 먹긴 이른 시간이었으므로 빈자리가 많이 보였다.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골라도 돼."
"정말요?"
정음은 굳이 가장 값이 싼 알리오올리오를 골랐다.
"왜, 더 맛있는 것도 많은데···."
"전 이게 제일 맛있어요."
"나 참···. 맛있는 거 사준다니까."
"전 오빠랑 먹으면 뭐든 맛있는걸요?"
정음은 대답도 예쁘게 했다.
도훈은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역시 정음이가 가장 개념이 박혔단 말이지.’
그러면서 그녀가 들고 있던 허름한 가방에 눈이 갔다.
가죽끈이 다소 낡아 보이는 가방은 이리저리 가죽이 해져있었다.
‘여자들은 가방을 좋아하겠지?’
[왜요? 가방이라도 사주시게요?]
‘응. 맨날 정음이한테 받기만 했잖아.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은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오빠 수업에 늦으셔서 걱정 많이 했어요."
"왜?"
"혼자 사시니까 어디 아픈 건 아닌가 하구요. 저번에도 한 번 아파서 결석하셨다면서요."
"아···. 아니야. 괜찮아."
"부모님도 미국에 계신다면서요. 아프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제가 보살펴 드릴게요."
"누가 누굴 보살핀다고 그래. 하하."
"전 오빠가 아픈 거 싫어요."
‘하. 진짜 정음이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주인님 같은 난봉꾼에겐 정말 안 어울리는 여잡니다.]
‘암튼, 이번에 큰 맘먹고 명품백이라도 하나 질러야 겠어. 돈은 충분하니까 말이야.’
[명품백이요? 아까셔 투자한다지 않으셨나요?]
‘정음이에게 쓰는 건 하나도 안 아까워.’
[역시···. 사람은 돈이 많고 볼 일 이군요.]
"도장 아르바이트는 할 만해?"
"네. 저도 겸사겸사 운동도 되고 좋아요."
"너 이번에 또 알바 하나 맡았다면서?"
"네? 제가요?"
"응. 오전에 학과실 갔다가 조교선생님한테 들었어. 이번 년도 신입생 모집 포스터 모델 하기로 했다고."
"아···."
정음이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그게···. 지도교수님께서 부탁을 하셔서요."
"교수님이?"
"네. 저는 안한다고 했는데 자꾸 저보고 적임자라면서···."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사람 눈은 다 똑같지. 교수 눈에도 정음이 체육과에서 가장 예뻐보였을 테니까.’
"상대 모델은 구했데?"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전화와서 한다고만 했거든요."
"상대 모델이 누가 됐음 좋겠어?"
"그, 글쎄요. 그냥 사진 한번만 찍으면 된다고 하셔서···."
"기왕이면 잘생긴 남자면 좋지 않아?"
"신경 안써요. 그런건."
"키도 크면 더 좋고."
"관심 하나도 없는데."
"그래? 그래도 사진 같이 찍으면 커플처럼 보이지 않을까?"
"네?"
도훈의 말에 정음도 걱정이 들었다.
신입생 유치를 위한 대학 표지 모델에 남녀가 나란히 사진을 찍으면 커플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퍼뜩 깨달은 것이다.
정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하지 말까요?"
"응? 뭘?"
"그 표지 모델 알바요. 저 사실 근로 장학생 뽑아주셔서 일주일에 한 번씩 교수님 방 청소해 드리고 있거든요. 그래서 교수님 부탁이라 거절 못하고 했는데 오빠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냥 안 한다고 말씀드리려고요."
"왜 내 눈치를 봐?"
"오빠가 신경쓰는 거 같으니까. 전 안해도 상관없어요."
"상대 모델이 누군 줄 알고?"
"네?"
도훈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제안 받았거든."
"오빠가요?"
"응. 학과실 들렀는데 교수님이 그러더라도. 나보고 해보라면서."
"아!"
"사실 나도 별로 생각없었는데 파트너라 너라는 말에 솔깃하지 뭐야. 너랑 같이 모델로 사진 찍으면 왠지 커플처럼 보일 것도 같고."
"오, 오빠···."
"그럼 같이 하는 거다?"
"네! 좋아요!"
정음이 해맑게 웃었다.
도훈은 그녀와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을거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먹고 나자 어느덧 정음의 아르바이트 시간이 되었다.
"진짜 지하철 타고 가도 돼요."
"아니야. 해봐야 얼마나 멀다고 바래다 줄게."
"저 때문에 괜히 귀찮을 텐데···."
"정음아."
"네?"
"나한테 조금도 미안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도훈의 말에 정음이 감동한 듯 말했다.
"정말 감사해요 오빠."
"뭘 이런걸 가지고."
정음을 도장까지 바래다준 도훈은 차가 갈 때까지 열심히 손을 흔드는 정음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착한 아이라니까?’
[그건 그렇고 아직 문고리 충전을 다 못했는데 어쩌실 작정입니까? 아침까지만 해도 한지연양 때문에 굉장히 곤란해 하셨던 것 같은데···.]
‘음, 그것도 얼른 해결해야지. 가만 있자 누굴 부른다.’
도훈은 잠시 차를 정차해 놓고 고민하던 중 대쉬보드에 넣어둔 지갑이 떠올랐다.
‘아! 그렇지. 그 여순경.’
[여순경이요?]
‘어. 왕빛난가 왕가슴인가 하는 여자 경찰 있었잖아. 지갑 찾아준다고 연락해 볼까?’
[오호, 설마 이 와중에 업적까지 도전하시는 겁니까?]
‘기왕이면 도랑치고 가재 잡자는 거지.’
도훈이 빛나의 지갑을 꺼내들었다.
< 705. 중수의 자격-3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