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7. 중수의 자격-16- >
***
예감이 불길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
바로 이렇게.
"···너한테 나는 뭐야?"
"뭐?"
"나는 너한테 어떤 의미냐고."
이럴 땐 뭐라 대답해야 할까?
가만 보니 표정이 심상치 않다.
속마음을 읽지 않아도 잔뜩 화가 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게 궁금해서 다시 보자고 한 거야?"
"그래."
지연은 시킨 음료에 입도 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먼저 도착해 커피를 반쯤 마신 내 목만 타들어 갔다.
‘왜 저러는 거지?’
[몰라서 물으십니까?]
‘대충 짐작은 가는데···. 난 또 아까 하던 거 마저 하자고 보자는 줄 알았지.’
[주인님은 어째 생각이 그렇게 일차원적이십니까?]
‘내가 뭘?’
[정말이지···. 여자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분 같군요.]
‘뭐야? 왜 갑자기 사람처럼 굴어?’
[인공지능도 지능이니까요! 고도로 발달 된 과학은 마치···.]
‘마법처럼 보인다고? 알아, 전에도 들었어. 아무튼 난 이런 분위기 별론데.’
[해명 하셔야 합니다. 그게 주인님을 믿고 직장까지 걸었던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요?]
음. 로시의 말이 양심을 쿡쿡 찌른다.
이런 분위긴 정말 불편하다. 마치 취조를 당하는 기분이랄까?
"대답하기 전 나도 하나만 물을 게."
나는 역으로 질문했다.
"너 나 좋아해?"
"······."
지연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쯤되면 대답을 굳이 들을 필요도 없겠다.
"왜?"
"···왜냐니?"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왜 날 좋아하는데?"
"내가 널 좋아하면 안 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지연은 한동안 내 뒷조사를 했다.
그러다 들통나서 나에게 병원에서 따먹히기까지 했다.
반차를 내고 뒤쫓아 온 것으로 봐선, 은성과의 관계 역시 의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그녀는 내 진실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이다.
여자란 여자는 다 건드리고 다니는 희대의 난봉꾼.
여자를 멋대로 따먹고 버리는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아."
"그래도 좋아?"
지연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다른 여자들이 나에게 호감을 갖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들 앞에선 바람둥이티를 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연의 경우엔 다르다. 나로선 그녀가 나에게 진지한 마음을 품는 상황 자체가 불가해한 일이다.
"나도 내가 제정신이 아닌 줄 알고 있어."
"흠."
"솔직히 너 문란한 남자인 거 다 알아. 학과 선후배도 건드리고, 대학 조교 선생님도 건드리고···. 그뿐인가? 오늘은 아가씨까지 건드렸지."
"봤어?"
"그렇게 크게 소릴 내는 데 못 들을까 봐서?"
거짓말이군.
그녀가 들었을 리가 없다.
방음 패치 덕분에 집안에선 개미 소리 하나 세어나가지 못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직접 목격한 것이다.
[허! 거참···. 조심 좀 하시지.]
‘설마 문 열고 들어왔을 줄이야. 근데 왜 충돌경보가 울리지 않았지?’
[이미 근거리에 위치한 것을 인지한 상태였으니까요. 문 하나를 넘나 드나드는 것까지 감지할 만큼 어플이 예민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작정하고 나왔구나.’
난감한 상황이었다. 분명 은성을 보러 갈 때는 본인 때문에 가는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것이 들통난 이상 지연은 몹시 실망했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딱 하나.
‘정신개조를 해야겠군.’
굳이 쉬운 길을 놔두고 가시밭길을 갈 필요는 없다.
어쨌든 차후에라도 은성과 접선하기 위해선 그녀의 도움이 절대적이니까 말이다.
쉽게 말해 그녀는 오작교다. 고은성과 한지연은 늘 세트로 묶여있어야 한다. 양심에 찔리지만 어쩔 수 없다.
"저기 지연아, 내 상식에 따르면···."
띠링-
그때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말을 멈추고 디스플레이를 확인했다.
[주인님! 미션입니다!]
‘젠장, 하필 이 타이밍에.’
미션을 내용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위대한 떡정-
*떡정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미션입니다.
*일체의 스킬을 배제한 순수 개인의 능력만으로 상대의 의지를 분쇄해야 합니다.
*성공 보상으로 ‘스킬북(랜덤)’이 제공됩니다.
*제한 조건으로 미션 대상이 지정된 순간 일체의 스킬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제한 조건으로 미션 대상이 지정된 순간 일체의 아이템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제한 시간 : 3시간.
‘아니, 이게 뭐야?’
[설명대로입니다. 질투에 눈먼 지연 양을 떡정으로 굴복시키는 미션이랄까요?]
‘그래서 위대한 떡정인가? 근데 일체 스킬 및 아이템 금지는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주인님도 이제 어엿한 중수입니다. 당연히 미션 수행에 패널티가 들어갈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보상도 훨씬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스킬북 말이지? 근데 이건 고수부터 열리는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마켓에서 자유로운 구매가 가능한 것이 고수레벨부터란 뜻이지 획득한다면 사용은 중수부터 가능합니다.]
‘오호. 랜덤이긴 하지만 그래도 스킬북을 제공하는 미션이라니···. 무척 탐나는 걸?’
[제한시간이 촉박합니다.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까지 1분 12초 남았습니다.]
‘두말하면 입 아프지. 간다.’
말을 꺼내다 말고 스마트 워치를 보고 멍때리자 지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상식이 뭐?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음, 그러니까···."
이 순간부터 내가 가진 일체의 모든 능력이 제한된다.
정보창 등의 스킬부터, 몸에 좋은 크림같은 아이템까지.
상식 개변을 사용하는 순간 미션은 소거될 것이다.
그럴 순 없지.
"아니 상식적으로··· 이중창이 방음효과가 그렇게 떨어지진 않는 걸로 아는데?"
"뭐라고?"
"정말 들은 거 맞아?"
"내가 지금 거짓말하고 있다는 거야?"
"아니, 말이 안 되잖아. 현관문에 이중창까지 설치된 구조···."
끝내 지연이 폭발했다.
"다 봤어!"
"엉?"
"너랑 아가씨랑 소파에서 뒹굴고 있는 거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이래도 계속 발뺌할 거야?"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나는 연기자를 했어야 했다.
"봐, 봤다고? 그걸?"
"···그래."
지연의 표정이 무척 씁쓸했다.
나는 여전히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떨떠름하게 말했다.
"봤구나···. 다 봐 버렸어."
"흥. 거짓말쟁이 자식."
"나?"
"그래. 넌 분명히 나한테 그랬지. 아가씨가 아니라 날 보러 오는 거라고. 아가씨랑은 그저 안면만 있는 사이라고. 근데 둘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참아왔던 지연이 봇물 터지듯 폭발했다.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본다.
"미안해."
일단 화가 난 지연을 달래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 변명해 봤자 오히려 화만 돋굴 게 뻔하다.
"···정말로 미안해."
"됐어, 이 나쁜 자식아. 너가 그러는 게 하루 이틀이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넌 정말 저질이야. 차라리 날 보러 온다는 말을 하지나 말지."
지연은 여전히 성난 얼굴로 씩씩거렸다.
한바탕 쏟아냈으니 어느 정도 분은 풀렸을 것이다.
슬슬 항변을 시작할 타이밍이군.
"그건 진심이었어."
"진심은 개뿔? 내가 직접 봤다니까?"
"그건···."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사연이 있는 얼굴로.
"···그래. 그 장면을 본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믿겠지. 그냥 내가 나쁜 놈이야."
"흥!"
"내가 어떻게든 말렸어야 했는데···."
혼자 중얼대는 말에 지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리다니? 무슨 뜻이야?"
"아니야, 아무것도."
"똑바로 말해. 뭘 말렸다는 건데?"
속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건 생각보다 큰 패널티다.
하지만 나도 어느 정도 눈치가 있으니 지연이 내게 듣고 싶은 게 뭔 줄은 알고 있다.
지금은 그걸 들려줘야 한다.
"흠···.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지연이 등받이에 기대더니 팔짱을 끼우며 말했다.
여전히 방어적인 모습이지만, 씩씩거릴 때보다는 설득하기 쉬워진 태도다.
"말해봐. 여긴 감청장비도 없으니까."
"아냐. 너가 안 믿을 거 같아."
"그냥 말하라고! 믿고 안 믿고는 나중에 판단할 거니까."
"휴-. 야외 테이블로 옮겨도 돼?"
"왜?"
"담배를 안 피우고선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금단 증세가 온 것처럼 손을 떨었다.
지연은 어처구니없어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의 야외 테라스로 자릴 옮겼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별장에 놀러 갔을 때 일이었어."
"양평 별장?"
"응. 고성민의 초대로 갔던."
나는 대충의 골격은 유지한 체 디테일을 살짝살짝 바꾸었다. 애초에 없던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니만큼 내용에 힘이 실리고 리얼리티가 가미되었다.
"거기에 커다란 노천 온천이 있잖아."
"그래. 가 본 적 있어. 양평 별장은 회장님이 가장 아끼셨던 장소였어."
"온천물이 너무 좋아서 밤에 혼자 나와 씻고 있었단 말이지."
"흐음."
"근데 우연히 은성이가···. 은성이가 내 알몸을 봐버린 거야."
"알몸을? 설마 아가씨도?"
"아니. 그때 은성이는 옷을 입고 있었어. 내 동생이랑 함께 온 외국 친구들과 사귀느라 밤늦게까지 놀고 있었거든."
"아무튼 그래서?"
"근데 그게 굉장히 뇌리에 남았었나 봐. 너도 알다시피···."
나는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숙여 사타구니 쪽을 쳐다보았다.
지연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너 지금 자랑하니?"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내게 좀 유별나잖아."
"흥. 결국 자랑맞네. 그래서 뭐?"
"그때부터 은성이가 나한테 유독 관심을 보였어."
"아가씨가?"
지연을 보니 왠지 납득한다는 표정이었다. 자신도 대물을 처음 봤을 때 놀랬으니만큼, 은성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맞어, 확실해. 분명 그때부터 였을거야. 은성이가 나한테 호감을 표시한 게···."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지연이 버럭 화를 냈다.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나는 괴로운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지자, 지연이 고개를 돌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후우-. 그래. 나도 사실 믿기지 않았어. 그렇게 귀엽고 순진한 아가씨가 대물 성애자라는 사실이. 어쩌면 오랜 외국 유학 생활이 은성이를 그런 취향으로 만들었나 싶기도 하고···."
"······."
"오늘도 그러는 거야. 은성이가 단둘이 남자마자 나에게 찰싹 달라붙더라고."
"아가씨가 정말로 그랬다고?"
지연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은성이 평소 태도를 봐선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정말이야. 나도 오랜만에 얼굴 보니 반갑긴 했는데, 솔직히 그 정도로 적극적일지는 몰랐거든."
"흠···."
"솔직히 네가 아니었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야."
"너 지금 내 핑계 대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컴퓨터 수리하다가 자극이 좀 됐었잖아."
"아···."
"한번 자극을 받은 상태라 그런지 은성이가 조금 도발했을 뿐인데 대물이 끝까지 커져 버린 거야."
"······."
"은성이가 그걸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불쑥 대물을 바지 위로 콱 잡더라고."
"자, 잡다니?"
"이렇게."
나는 방심하고 있던 지연의 손을 잡아 채 대물을 손에 쥐어 주었다. 지연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커피숍에서 공개적으로 대물을 잡자 깜짝 놀라며 손을 뺐다.
"미, 미쳤어?"
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연결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미친 줄 알았잖아. 생각해봐. 지가 아무리 부잣집 딸이라도 그렇지, 느닷없이 남의 물건을 콱-. 움켜쥐는 게 말이 돼?"
"······."
지연이 긴가민가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겠지.
당연하다.
이건 사실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사실의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지연에겐 납득할 수 있는 변명이 필요하다.
내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고, 은성과의 섹스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래야 스스로 덜 상처받을 테니까.
물론 거기까지 가는 길은 쉬운 일은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내가 아는 은성 아가씨는 그런 사람이 아냐."
"안 믿을 줄 알았어."
"난 은성 아가씨를 가까이서 수행했어. 은성 아가씨는 제 오빠하곤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이야. 얼마나 착하고···."
"착하면 섹스 안 해?"
"아, 아니 얼마나 예의 바르고."
"예의 바르면 섹스 안 해?"
"어찌나 상냥한···."
"상냥하면 섹스 안."
"그만 좀 해!"
"너가 정말 은성이의 모든 걸 안다고 자부할 수 있어?"
"······."
"그래 좋아.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은성은 나무랄 때 없는 사람이지. 짧은 시간 겪긴 했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었어. 근데···."
"근데?"
"남자랑 단둘이 있을 때 은성의 모습에 대해서도 네가 장담할 수 있을까?"
"······."
지연의 반박이 눈에 띄게 줄었다.
눈동자는 흔들리고, 입술을 자꾸 오므렸다.
은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좀 더 밀이 붙였다.
"한지연."
"왜?"
"너도 평소엔 훌륭한 보디가드잖아. 지금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래. 깔끔하고, 절도 넘치고. 실수라곤 절대 안할 것처럼 빈틈하나 없지."
"대체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야?"
"···내 앞에서 젖을 때 보면 전혀 아니라는 말씀이야."
"핫!"
지연의 얼굴이 새빨게졌다.
"일할 때의 한지연하고 나와 사랑을 나눌 때의 한지연은 전혀 다른 사람일까?"
"······."
"이처럼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거야. 네가 그렇듯이 은성이도 충분히."
"아!"
됐다.
이쯤 되면 거의 넘어왔다.
나는 여기서 결정타를 날렸다.
"아까 소파에서 다 봤다고 했지? 어땠어? 은성이의 표정은? 좋아하는 모습 아니었어?"
나는 천천히 지연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밀착했다.
< 687. 중수의 자격-1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