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6. 중수의 자격-15- >
"경호팀. 자택 내 컴퓨터 수리기사 행방 제보 바람."
잠시 후 문수의 무전기로 대답이 들려왔다.
-치직- 현재 별채에서 본관동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수신."
무전을 끊은 문수가 급히 내려가려고 하자 은성이 그 앞을 막아섰다.
"왜, 왜 그러시죠? 그분이 뭘 잘못한 게 있나요?"
은성은 혹시라도 도훈이 잘못될까 걱정되었다. 자택에서 자신과 벌인 일이 발각된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문수가 이에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별일 아닙니다. 저택을 드나드는 외부인에게 이곳의 보안규정에 대해 일러주려고요."
"기사님은 지연씨가 부른 거예요. 신원 확인도 이미 된 사람이구요."
은성이 변호했지만 이미 의심을 시작한 문수는 제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꿈쩍도 안 할 기세였다.
"저는 규정에 따를 뿐입니다."
"제가 신경 안 쓴데도요?"
은성이 끝까지 물러서지 않자, 문수의 의혹이 더욱 깊어졌다.
‘아무래도 수상해. 안면도 없는 컴퓨터 수리기사에 왜 저렇게 신경 쓴담? 게다가 문밖에 있던 지연이는 그가 이곳을 떠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어. 분명 뭔가 숨기는 게 있어.’
"아가씨. 저는 회장님께 고용된 사람일 뿐입니다. 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 또한 고회장님 뿐이고요."
문수는 단호한 태도로 은성을 물리치며 저택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제 은성은 제발 도훈에게 별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신의 무리한 초대로 인해 도훈이 다친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오, 오빠··· 얼른 도망쳐요.’
***
쿵-
별채의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린 도훈은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잔디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크흑-."
아무리 튼튼한 몸이라고 해도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한 손에 노트북을 들고 있던 터라 낙법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콰직-
충격에 신음하는 데 손에 들린 노트북에서 뭔가 불길한 소리가 났다.
"얼레?"
도훈이 급히 노트북 덮개를 열자 모니터 액정에 선명하게 금이 가 있었다.
"헉, 깨졌잖아?"
[저런! 방금 구르면서 부딪혔나 봅니다.]
‘에이씨, 괜히 들고 나왔네. 멀쩡한 노트북이나 망가뜨리고···.’
그러나 여유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혹시나 저택 주변에 있던 문수에게 발각되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도훈은 액정 깨진 노트북을 들고 절뚝거리며 출구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 사방에 CCTV 카메라가 보였다. 도훈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정체불명의 모자를 꺼내 머리에 썼다. 그렇게 한참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도훈을 불렀다.
"어이, 거기."
도훈이 못 들은 척 걸음을 재촉하자 다시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부르는 소리 안 들리나?"
움찔 놀란 도훈이 돌아서서 대답했다.
"예? 저요?"
도훈을 돌려 세운 사람은 바로 문수였다.
그는 도훈이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저택에 들이닥쳤고, 도훈이 멀리 벗어나기도 전에 위치를 파악해 그를 뒤 쫓아온 것이었다. 그와 도훈은 일전에 서로 만난 적이 있었으나, 도훈이 쓴 아이템의 효과로 순간적으로 그를 알아채지 못했다.
"자네가 컴퓨터 수리기사지?"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문수가 도훈의 얼굴 생김새를 뚫어지게 노려 노았다. 어렴풋 누군가 떠오르긴 했지만 기억하는 인상과는 전혀 다른 사내였다. 하지만 문수는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손에 든 그건 뭐지?"
문수가 노트북을 향해 물었다.
"방금 수리 맡기신 노트북입니다. 액정이 나갔길래 교체해 드리려고 가지고 나왔습니다."
"액정이 나갔다고?"
"네. 맞습니다."
"이리 줘봐."
도훈이 순수히 노트북을 건넸다. 문수는 노트북을 열어보더니 가운데가 쩍 하고 갈라진 액정을 확인했다.
"이건 왜 깨졌지?"
"저야 모르죠. 고장 났다길래 가서 보니 깨져있더라고요. 이건 여기서 수리 못 합니다. 가져가서 패널을 교환하는 수밖에요."
"저택 안에 있던 물건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경호팀 허락 없이 외부로 반출이 불가능하네."
"그건 몰랐습니다. 수리해 달라고 요청해서 가지고 나온 것 뿐이구요."
도훈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자 문수도 슬슬 의심을 풀었다.
‘흐음, 하는 얘기만 봐선 딱히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근데 목소리가 왜 이렇게 익숙하지?’
문수는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일전에 경찰서에 우연히 도훈과 대화를 나눈 뒤로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상이 원체 다르니 도무지 연상을 못 시킬 뿐이었다.
"혹시 나랑 한 번 본 적 있지 않았나?"
"제가요?"
도훈은 문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 쩍 벌어진 어깨에 탄탄한 근육은 자신보다 훨씬 두터워 보였다. 특히 발달한 승모근이 목 위로 솟아 나와 입고 있던 정장을 작아 보이게 했다.
"···아니야. 아무튼 노트북은 보안 차원에서 다시 압수토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아가씨분에게 대신 전해주십시오. 저는 이만···."
겨우 위기를 넘긴 도훈이 뒤로 돌아서는데 문수가 다시 붙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은성이 그를 감싼 부분이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는 의심스러운건 꼭 확인하자는 주의였다.
"잠깐."
"···네?"
"그 모자 한 번 벗어보게."
"네?"
"신분증 사진하고 얼굴이 좀 다른 거 같아서 말이야."
과연 예리한 눈썰미였다. 이쯤 되자 도훈도 슬슬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모자를 벗어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아이템을 벗는 순간 그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사실이었다.
도훈이 난처해하면 우물쭈물거리자, 문수가 의심의 눈초리로 재촉했다.
"얼른 벗어보라니까?"
"저 그게···."
일촉즉발의 위기.
도훈이 주춤 물러서자 문수가 슬슬 가까이 다가왔다.
"굳이 내 손으로 벗겨야겠나?"
‘로, 로시 어쩌지? 비밀의 문고리 아직 못 쓰지?’
[네. 충전량이 부족합니다.]
‘그럼 어쩌지? 확 때려 눕히고 튈까?’
[도저히 주인님이 이길 상대가 아닌 것 같은 데요? 게다가 그를 따돌린다 해도 저택을 벗어날 방법은 없을 겁니다. 일만 더 복잡해 지겠죠.]
‘젠장,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흠, 모자를 벗어도 여전히 변장 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어설픈 변장 정도로 통할 상대가 아니야. 분명 나를 알아볼 거야.’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하필이면 이 넓은 저택에서 문수와 단둘이 맞닥뜨릴 줄이야.
"저, 모자는 좀···."
"말로 해선 안 될 친구 구만."
문수가 도훈의 모자챙을 잡아채는 순간, 뒤에서 카랑카랑한 지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팀장님!!"
배가 아프다던 지연이 허겁지겁 문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도훈이 문수에게 붙잡혀 있는 걸 목격하자 앞뒤 분간 없이 일단 끼어든 것이었다.
"뭐야? 의무실 바로 안 갔어?"
문수가 잡았던 모자챙을 놓고 지연에게 물었다.
"예, 다시 괜찮아지길래···. 한데 이 분은?"
"자네가 부른 컴퓨터 기사지?"
"네, 맞습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자택에서 모자를 쓰고 돌아다니더라고. 보안규정은 잘 알고 있지?"
"아···, 네."
"외부인의 경우 저택에 얼굴을 가리고 돌아다니는 게 불가하다는 거."
문수가 지연과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 도훈이 변장 아이템을 추가 구매했다. 그리곤 손바닥에 그것을 말아 쥐었다.
문수가 다시 도훈에게 물었다.
"자네도 들었지? 얼른 벗어보게."
"규정이 그렇다면야···."
도훈이 뒤에서부터 모자를 붙잡았다.
문수를 말리러 온 지연도 더는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문수가 도훈을 알아보는 순간, 모든 것이 파국에 이를 것이다. 그의 신분을 위조해 저택에 들인 자신은 물론, 이를 지시한 은성 또한 오빠에게 보고되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은 자명했다.
도훈이 모자를 벗는 모습에 지연이 꿀꺽 침을 삼켰다.
모자를 다 벗은 도훈은 불쑥 고개를 숙이더니 정수리를 내밀었다.
"보시다시피 일찍 머리가 벗겨 지는 바람에···."
"아니!"
고개를 푹 숙이는 도훈의 반응에 문수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가마가 있어야 할 자리가 주먹 하나 크기로 휑하니 뚫여 있었던 것이다.
‘머머리잖아!’
문수는 한창 어려 보이는 수리 기사의 치부를 억지로 들춘 꼴이 되어 몹시 민망해졌다.
‘저래서 모자를 쓰고 있었군!’
도훈이 텅 빈 정수리를 내비치며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자 미안해진 문수가 황급히 소리쳤다.
"아, 알겠네. 모자는 다시 쓰게."
"감사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머리 가발은 마켓에서 급히 구매한 변장 아이템이었다. 지연이 문수의 시선을 끄는 사이 도훈이 기지를 발휘해 재빨리 아이템을 구매해 손바닥에 숨기고 있다 모자를 벗는 척 하면서 정수리에 붙였던 것이다.
천상계의 가발은 귀찮게 머리에 맞춰 착용할 필요 없이, 머리에 붙이는 순간 스스로 적절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남들이 볼 땐 절대 가발인 걸 인식 못 하고 실제로 탈모가 일찍 온 청년처럼 보였던 것.
사정을 모르는 문수가 고압적인 자세를 풀고 도훈에게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닙니다. 규정이 그런 줄은 저도 몰랐으니까요."
‘흐음··· 젊은 친구가 안타깝게 됐구만···.’
같은 남자로서 문수가 도훈의 처지를 안타까이 여겼다. 지연은 모자를 쓴 도훈의 모습이 무척 생소해 보이는 게 의아했지만, 콧수염과 안경으로 변장을 하고 있던 터라 인상이 달리 보이는 걸로 착각했다. 무엇보다, 모자 속에 대머리 가발을 숨겨놓은 그의 착
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느 틈에 저걸 준비한 거지? 역시 난 녀석이야.’
"그럼 노트북은 다시 아가씨께 반납하고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저한테 주세요. 대신 전해 드릴게요."
지연이 대신 나서 노트북을 받았다. 도훈과 은성이 다시 만나게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전 그럼 이만···."
도훈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서는데 문수가 쯧쯧 혀를 찼다.
"거참, 젊은 친구 같은데 어쩌다···."
"안타깝게도 탈모가 일찍 온 것 같습니다."
"그러게. 여자들은 대머리 별로 안 좋아하지?"
"아무래도···."
"참고로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풍성하다네."
"···예?"
지연이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문수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도훈을 무사히 탈출시켰다는 것만으로 안도한 지연이었다.
***
"휴-. 진짜 이번엔 좆될 뻔."
[아쉽···. 아니 다행입니다.]
‘뭐야? 내가 걸리기라도 바랬다는 거야?’
[그러게 누가 득도 없는 짓에 모험을 걸랍니까? 대책 없이 행동하는 건 또 어쩌구요?]
‘누가 딱 걸릴 줄 알았나? 대머리 분장 아이템이 있길 망정이지.’
저택을 무사히 빠져나온 도훈은 주차해놓은 차량으로 돌아가며 로시와 한참 투닥였다.
[주인님도 이제 어엿한 중수입니다. 매사 행동에 조심을 기하셔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PK단이라도 만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알았어. 진짜 조심할게.’
[한데 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고은성양을 만난 이유가 대체 뭡니까?]
‘그냥 뭐···. 나도 재벌가 대물 사위 한번 해볼 수 있을 까 해서.’
[대물···뭐요?]
‘그냥 보험 같은 거란 말이지. 솔직히 은성이 정도면 한 번 먹고 버리긴 아까운 여자잖아. 너도 들었지? 이번에 고회장 타계하면 유산 물려받는 다는 거. 그 정도 재력을 갖춘 20대 여성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있을 것 같아?’
[흐음···. 주인님이 그렇게 돈에 연연하시는 줄은 몰랐는데요.]
‘그렇다고 완전 무관심한 것도 아니지. 어쨌든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도훈은 그럴싸한 핑계를 대며 회피하는 데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표시 제한 문구를 보는 순간 도훈은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군지 알아챘다.
-어디야?
"덕분에 밖으로 무사히 나왔어."
-주소 남겨놓을 테니 30분 뒤 거기로 봐.
뚝-
일방적으로 걸린 통화는 채 10초를 넘기지 않았다. 도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뒤이어 도착한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주소를 치고 한참 달려가자 서울 외곽의 한적한 라이브 까페가 나왔다. 도훈이 먼저 들어가 차를 시키고 기다리는데 5분 뒤 지연이 들어왔다.
"근무 중 아니었어? 어떻게 빠져나왔어?"
"아프다니까 하루 빼줬어. 생각해보니 은성 아가씨를 전담한 뒤로 하루도 휴가를 안 준 것 같다면서."
지연의 생리통이 마음에 걸렸던 문수가 쉬고 오라며 반 차를 허락한 것이었다.
"다행이네. 뒤따른 사람은 없지?"
"내가 누군 줄 아는 거야? 이 대머리 아저씨야."
"대머리라니! 위장이라고!"
도훈은 어느새 변장 아이템을 모두 제거한 상태였다. 복장도 AS 기사복에서 평범한 대학생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한적한 까페에 함께 있으니 왠지 데이트하는 기분에 지연은 들뜬 마음이 되었다. 그와 마음 편히 이렇게 만난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크크. 너 진짜 웃겼던 거 알아? 이렇게 머리 내밀면서."
"야. 대머리 까지 마라."
"푸흡. 나 아까 이빨 꽉 깨문 거 알아? 진짜 웃음 참느라 혼났다고."
"누군 곰탱이한테 걸려 죽을 뻔 했는데, 그게 웃겨?"
"곰탱이라니? 아, 김문수 팀장님?"
"그래. 어찌나 눈썰미가 예리한지···. 야. 너 그리고 밖에서 망본다더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2층에서 뛰어내리느라 발목 나갈 뻔 했네."
"나도 얼마나 당황했는데. 갑자기 들이닥쳐서. 그리고 나로선 최대한 시간 끈 거야."
지연은 그 얘기를 꺼내다 문득 도훈와 은성이 엉겨 붙어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갑자기 질투심이 솟구치며 도훈이 미워졌다.
"근데 왜 여기서 보자고 한 거야?"
"···너한테 할 말 있어서."
지연이 뭔가를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686. 중수의 자격-1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