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2. 아이돌 vs 돌아이-5- >
***
"네? 저요?"
하필 타이밍하고는!
성수가 곰 같은 손바닥으로 나를 떠밀자, 대물을 주무르던 린다가 황급히 손을 뗐다. 예기치 않게 호명되는 바람에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둘 사이의 은밀한 손짓이 다른 사람 눈에 안 띈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그래. 도훈이 너 노래 잘하잖아. 얘 완전 가수라니까?"
"맞다. 도훈이 형 노래 진짜 잘해요."
성수가 메기고, 우선이 받았다.
두 사람은 짠 것처럼 호흡을 맞추며 나를 무대 위로 끌어 올렸다.
"아니, 그래도 가수들 앞인데···."
"도훈 오빠 진짜 노래 잘해요?"
"와, 잘생긴 사람이 노래도 잘하다니!"
"한 곡 부탁드릴게요."
큐티의 걸그룹 맴버들이 하나같이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노래가 직업인 가수들 사이에서 노래한다는 게 여간 부담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앞서 열창을 했던 싱어송라이터 제희 바로 뒷무대라는 문제였다. 잘해야 본
전이 상황.
‘에이씨, 하여간 곰탱이같은 자식. 오늘 일도 도움 안 되네.’
점점 술이 들어간 성수가 얼굴이 뻘게진 채 나를 추켜세웠다.
"도훈이가 우리 과에서 제일 노래 잘해. 아니, 우리 단대에서도 거의 최고일걸?"
"와! 정말요?"
"들려줘요."
아이돌이라곤 해도 무대를 내려오면 평범한 대학생 또래일 뿐. 사적인 술자리니 만큼 평소의 가면을 내려놓고 다들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은 잘생긴 훈남 오빠의 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부푼 상태였다.
‘에라 모르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나도 가수다 한 번 가자.’
그때, 린다가 팔짱을 낀 채 나에게 물었다.
"도훈씨 혹시 랩도 좀 하세요?"
"네?"
"아까 힙합 좋아하신다면서요?"
생각해 보니 그녀는 국내 발라드 노래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즉, 그녀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선 어찌 됐건 힙합 음악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것.
[주, 주인님.]
‘완전 잦됐네. 뽕짝을 부르면 불렀지 힙합은 내 종목이 전혀 아닌데.’
"아, 제가 듣기는 좋아하는데 영어 랩은 연습을 전혀 안 해서···."
"한국 노래라도 상관없어요."
그녀는 집요하게 나에게 힙합을 요구했다.
더욱이 가수를 지명하기까지 했다.
"나 그 노래 듣고 싶어요, 다듀 꺼."
"네? 다두요?"
"형, 다이나믹 듀오 말하는 거 같은데요?"
"아아, 네."
유명한 그룹이니만큼 이름은 들어본 적은 있다.
문제는 내가 그들의 노래를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근데 애들아, 도훈 씨 최자 닮은 것 같지 않니?"
"최자?"
"어디가?"
"도훈 오빠가 훨씬 잘생겼는데?"
"최자 맞는데?"
린다가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가만 보니 나를 희롱하는 농담 같다.
‘설마 사최자 뭐 이런 뜻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여간 음탕한 계집애 같으니. 허벅지 멋대로 쓸어내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해.’
[근데 주인님 다이나믹 듀오인가 하는 가수 노래 잘 아십니까?]
‘아니? 모르는데?’
[‘오늘은 내가 가수’다 목캔디는 기존에 아는 노래일 경우에만 적용됩니다. 생전 첨 드는 노래를 부를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어쩐다?’
[일단 노래를 한 번이라도 들어보셔야 합니다. 한데 방법이 있으시겠습니까?]
목캔디는 아는 노래를 더 잘 부를 수 있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다. 가사까지 빠른 랩이라면 아무리 목캔디를 이용해도 음정 박자를 놓치기 십상이다.
로시는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린다를 보니 마치 나를 시험하는 분위기다. 이번 노래만 제대로 소화하면 오늘 밤 한 번 대줄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딱 한 번만 들어보면 된다는 거지?’
[그 한 번을 어떻게 들으시려고요?]
‘없으면 기회를 만들어야지.’
나는 노래방 기계 앞에 선 채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근데 다이나믹 듀오 총 두 명 아닌가? 최자가 있으면 개코도 있어야지. 우선이 나와."
"저, 저요?"
방심하고 있던 우선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래. 여기서 개코 할 사람 너밖에 더 있냐?"
"아, 전 진짜 노래 못하는데···."
"일단 나와. 혼자 하기 민망하니까."
나는 무리해서 우선을 끌어내려 했다.
우선은 말도 안 된다며 버텼다.
"혀, 형. 저 진짜 노래는 쥐약이라고요."
"인마. 제희씨 다음 무댄데 나만 혼자 죽으라고?"
옥신각신하는 사이 일부러 허벅지로 테이블을 세게 밀었다.
그 충격으로 맥주병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맥주가 반쯤 담겨있던 맥주병이 박살이 나며 술과 함께 파편이 튀었다.
"어, 어라?"
갑작스러운 사태에 다들 놀라고 말았다.
내가 급히 휴지를 뽑아 바닥을 닦는데, 누군가 호출했는지 문을 열고 직원이 뛰어왔다.
"삼촌, 여기 좀 치워주세요."
"오빠 그냥 둬요. 유리 조각에 손 다치면 어쩌려고."
"죄송합니다. 병을 떨어뜨려서."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놔두세요. 제가 치울게요."
"아으, 도훈이 기어이 사고쳤네."
"형, 저 손 좀 씻고 올게요. 손에 맥주가."
"그래."
나는 자연스럽게 룸밖으로 나왔다.
화장실로 뛰어가 핸드폰을 켜 다이나믹 듀오의 대표곡을 확인했다.
유튜브에 가장 먼저 뜬 노래는 "Go Back!"이라는 노래였다. 3분간 집중해 노래를 귀에 담았다.
다시 룸으로 돌아오자 맥주병 잔해는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오빠 괜찮아요? 어디 다친 건 아니죠?"
미소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 괜찮아. 갑분싸 시킨 사죄의 의미로 제가 다듀 노래 한 번 띄울게요."
"와! 남자다잉!"
"꺄악, 멋있어요!"
"형. 죄송해요. 저도 같이 부를게요."
우선은 자기가 튕기다 사달이 났다고 생각하고 죄수 같은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긴장했는지 굉장히 굳어있었다.
"형. 저 근데 랩 진짜 못하는데 무슨 노래 하실 거예요?"
"너 고백이라는 노래 알아?"
"네. 들어는 봤어요."
"너는 그냥 후렴 부분만 대충 해줘. 나머진 내가 다 할게."
"네."
노래가 시작되자 우선이 먼저 시작 부분을 맡았다.
그의 말대로 음정 박자가 무시된 음치의 전형이었다.
왜 그렇게 노래를 부르기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기대감이 다소 떨어진 가운데 목캔디를 먹은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마이크를 잡고 방금 전 화장실에서 들었던 노래를 시작했다.
"난 핸들이 고장 난 에이톤 트럭! 내 인생은 언제나 삐딱선!"
랩을 시작하는 순간,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 귀로 들어도 놀라울 만큼 원곡과 완전히 똑같았다.
마치 원곡 가수의 음악을 틀어놓고 립씽크를 하는 것 같았다.
가사 하나가 귀에 쏙쏙 박히며 특유의 라임을 살려내자, 특히 린다가 입을 크게 벌린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아!"
"대박!"
"랩 엄청 잘하잖아?"
노래가 계속되는 가운데 나는 쇼맨쉽 까지 발휘했다.
린다를 향해 윙크를 한 번 날린 후 성수 옆에 앉아 있던 제희에게 마이크를 넘기며 여가수 부분의 피쳐링을 맡긴 것이다. 제희는 노래를 잘하는 가수답게 갑자기 마이크를 받은 상태로도 완벽히 피쳐링을 소화했다.
노래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좌중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우아아아아!"
"완전 랩퍼네 랩퍼!"
"어쩜 그렇게 잘하세요?"
"아이고, 과찬을. 가수들 앞에서 재롱떨었더니 괜히 민망하네요."
"봐, 내가 쟤 노래 잘한다고 했지?"
나를 지목한 성수가 자기가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 어깨를 폈다.
나는 이번 노래를 부르며 두 가지 목적을 이루었다.
첫째, 린다에게 매력을 어필하며 그녀를 완전히 눌러 앉히는 것.
둘째, 제희를 끌어들이며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호감을 어필한 것이었다.
과연 노래가 끝나자 자연스레 옆에 앉은 제희가 잔을 건네며 관심을 드러냈다.
"도훈 씨 제 술 한 잔 받으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런 미인의 술을."
"진짜 노래 잘하시네요. 전 라이브로 이렇게 랩 잘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에이, 너무 띄워주시네요. 아까 보니 제희씨도 노래 엄청 잘하시던데요."
"혹시 가수 쪽 생각은 없으세요?"
전에도 목캔디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난 후 이런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아이템의 효과가 너무나 뛰어나, 가수가 들어도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인가 보다. 역시 천상계!
"아쉽게도 전 체육 선생님이 꿈이라서요."
"와, 아깝네요. 진짜 타고난 가수 체질인데."
"조도 도훈이 랩하는 건 처음 봤어요. 발라드만 잘 부르는 게 아니었네?"
성수가 또 옆에서 거들었다.
"발라드도 잘 부르세요?"
"네. 옛날에는 노래도 거의 안 불렀는데 군대 다녀오더니 완전 가수가 돼서 돌아 왔더라고요."
"군대에서도 노랠 부를 수 있어요?"
나는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네. 군대에도 노래방 기계가 있거든요. 거기서 매일 조금씩 연습했어요."
"와! 전 보컬 트레이닝이라도 받으신 줄···."
"연습이 곧 트레이닝이죠."
"대단해요."
제희는 노래를 잘 부르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노래를 부르기 전과 이후가 확연히 달랐다.
린다를 위한 노래를 받친 뒤 제희 옆에 앉은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예상대로 린다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며 잔을 들이 밀었다.
"에이, 재미없게 둘이서만 놀 거에요? 다 같이 한잔해요."
"네."
"언니 기분은 좀 풀렸어요?"
"왜요?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아, 사실 숙소에서 쉬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왔거든요."
"정말요?"
"아니 뭐, 그땐 컨디션이···. 근데 지금은 괜찮아요. 나오길 잘한 것 같아요."
"기왕 나온 김에 신나게 같이 놀아요. 데뷔하면 엄청 바쁠 거잖아요."
그나저나 린다가 23살로 나와 동갑인데, 제희가 그녈 보고 언니라고 하는 걸 보면 나보다 어린 모양이군.
나는 린다를 의식하며 제희의 호구조사를 했다.
"근데 제희씬 몇 살이에요?"
"저요? 전 스물둘요. 그러고 보니 저희 통성명도 제대로 안 했네요. 다들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해요."
제희의 주도로 서로의 나이와 이름을 공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남자애들이야 다 아는 처지니 생략하고 여자애들을 정리하니 다음과 같았다.
린다 스물 셋 동갑.
제희 스물 둘.
미소와 링링은 스물.
‘캬, 다들 탱글탱글한 나이네.’
[주인님이 이제껏 만난 여자들도 대부분 20대 초반이 많았는데요?]
‘그렇긴 한데···. 어쨌든 다들 한 외모 하니까 보기 좋잖아.’
[근데 이 중에 몇 명을 공략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린다는 좀만 꼬득이면 오늘 밤 바로 자빠뜨릴 수 있을 것 같아. 문제는 종현이 사촌 동생이라는 미소야.’
내 최우선 목표는 큐티의 센터인 미소다.
아이돌 가운데서도 군계일학인 그녀는 조금씩 어딘가 부족한 다른 맴버들에 비해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미모였다.
‘일단 노래방에서 매력 어필은 할 만큼 한 것 같아. 근데 이렇게 보는 눈이 많아서 과연 기회를 잡을 수나 있을지.’
[조급히 생각 마십시오.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지.’
로시 말대로다.
어차피 당일 홈런을 위한 모임은 아니다. 나에겐 업적을 달성할 수 있는 아이돌과의 끈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고, 현재까지는 무척 잘하고 있다. 하지만 기왕이면 오늘 중으로 한 두명은 자빠뜨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소개가 끝나고 술이 좀 더 돌고 나자 성수의 몸이 휘청거렸다. 평소보다 5배로 알콜 섭취가 되는 줄 모르고 페이스대로 마신 결과다.
"아···, 오늘 왜 이러지. 술이 좀 안 받네."
"형 괜찮으세요?"
"어, 괜찮아··· 아···. 저기 도훈아 잠깐 바람 좀 쐬고 오자."
"지금요?"
"어. 계속 앉아 있었더니 술이 확 올라오네."
성수가 드디어 맛이 갔다.
성수만 보내면 아무래도 여자들을 공략하기 훨씬 쉬워질 것이다. 나는 분위기를 타 성수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의 곰같은 몸이 비틀대는 모습을 보니 살짝 죄책감도 들었다.
"어으, 오늘따라 좀 취하네."
"형 진짜 괜찮아요?"
"아니 폭탄주 5잔밖에 안 셨는데 왜 이렇게 취하지?"
5잔이 아니라 5병을 때려 부었으니까 그러지. 그런데도 아직까지 맨정신으로 버티는 그가 대단해 보이긴 했다. 아이템이 없는 나라면 진작 기절해 버렸을 것이다.
성수와 나는 담배를 꼬나물고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근데 얘들 엄청 착하네요."
"그치?"
"네. 나름 아이돌인데 잰 척도 않고요."
"흐흐, 아직 신인이잖아. 나중에 잘나가면 또 모르지. 우리들 기억이나 할지."
"그럴까요?"
"어쨌든 종현이 녀석 덕에 아이돌이랑 술도 마셔보고, 오늘 기분 최고다."
"기분 좋아서 술이 잘 받았나 봐요."
"그러게. 아, 왜 이렇게 어지럽냐."
나는 비틀대는 성수를 부축하며 그를 꼬득였다.
"형. 피곤하면 먼저 들어가세요. 어차피 좀 있음 파장 분위긴데 애들한테 제가 잘 말할게요."
"그럴까? 아, 왜 이렇게 집에 가고 싶지."
드디어 성수의 주사가 나왔다.
술만 취하면 집에 가는 귀가본능.
나는 손을 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형. 택시 왔어요. 먼저 들어가세요."
"아냐, 아냐. 그래도 끝까지 남아야지. 아직 사인도 못 받았는데."
"사인은 제가 여러 장 받아 놓을게요. 형 취해서 안 되겠어요."
"아, 안 되는데···."
성수는 안 되는데 라고 말하면서도 이미 택시 뒷좌석에 몸을 밀어 넣는 중이었다. 술기운이 올라 정상적인 판단을 못 하는 것이다. 나는 성수의 동네 방향을 택시기사에게 말하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 2만원을 넣어 주었다.
"기사님. 좀 부탁드릴게요."
"도훈아. 싸인 꼭 받아라."
"네. 형. 먼저 들어가세요."
"어어."
성수는 그렇게 택시와 함께 사라졌다.
마침내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을 제거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때 누군가 내 등을 두드렸다.
"오빠. 저도 담배 한 대만 주실래요?"
< 612. 아이돌 vs 돌아이-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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