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626화 (599/2,000)

< 608. 아이돌 vs 돌아이-1- >

약속을 잡은 도훈은 통화를 끊고 생각했다.

‘가만? 군대 가면 어차피 졸업 때까진 안 볼 사이 아닌가?’

요새 아이들은 빠르면 1학년, 늦어도 2학년이면 대부분 군대에 간다. 미필이 많은 2학년들은 올해 안으로 대부분 정리가 될 것이다.

‘아니다. 안 볼 사람이라고 쌩까는 것도 정 없이 보이긴 하겠네. 게다가 우선이 말마따나 다른 사람들 눈치도 있으니.’

도훈은 대외적인 이미지를 신경 쓰기로 했다.

그러잖아도 여자 후배들만 챙긴다는 루머가 도는 상황에서,  같이 수업 듣는 남학생이 군대 가는 데 얼굴도 안 비쳤다는 얘기가 돌았다간 분명 바람둥이로 굳어질 것을 우려했다.

수업이 끝나고 참석한 군대 송별회는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체육과 남학생들 여덟이서 값싼 대패삼겹살을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그것도 고기라도 학생들은 우걱우걱 잘도 먹었다.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들이 먼저 돌아가면서 조언했다.

"종현아. 군대 가면 PX에서 총알 사는 거 까먹지 마라."

"총알을요?"

"어. 거기서 탄약 재정비 안 하면 선임이 졸라 갈굴거다."

"네, 형."

시덥지 않은 농담에 벌써부터 군기가 바짝 든 종현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필에게 군대란 무척이나 무섭고 신기한 곳이다. 왠지 잘못하면 구타나 폭언을 당할 것 같고, 관심병사로 낙인찍혀 인생 조질 것 같은 두려움이 드는 곳이다.

"도훈이도 한 마디 해줘라. 가장 최근에 전역했잖아."

3학년 선배 하나가 도훈에게 물었다.

조용히 고기를 싸 먹고 있던 도훈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

"네?"

"어차피 가야 할 군대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오라고. 몸 건강히 다치지 않게."

"아···. 네, 형. 고마워요."

그때 종현의 동기 한명이 서글픈 얘기를 했다.

"아, 종현이 아다도 못 때고 군대 가는 구나."

"엥?"

"너 총각이야?"

"종현이 여친 한 번도 못 사겼잖아요."

"뭐했냐, 2학년 1학기 동안."

"우리가 돈 모아서 보내줄까?"

"그러자."

술 취한 분위기에서 별별 얘기들이 다 오가는데 모임에서 가장 어른격인 성수가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야. 교사될 사람들이 무슨 성매매야 인마. 농담으로도 하지마."

"아, 예 부회장님."

"농담이었어요. 보내줄 돈도 없어요."

"아니 그래도 군대 가는데 여자 동기들 하나 배웅 안나와서 섭섭할까봐요."

"야. 현미랑 자영이는 안 오는 게 돕는 거지."

"하여간 우리 학년은 저주받은 학년이라니까."

체육과 2학년은 지독한 남초였다. 꽃밭이라 불리는 1학년과 대비하면 극단적으로 비교되는 구성이었다.

종현도 그다지 숫기가 있는 편은 아니라, 같은 과내에서 여자를 못 만나다 보니 군입대할 때까지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본 강제 숫총각 신세가 되었다.

그 흔한 남중-남고-체대-군대 트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폰이 부르르 떨렸다.

"야, 전화 온다."

"종현이 니껀데?"

누군가 대신 폰을 집어 들더니 발신자에 적힌 이름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오옷! 여자 이름이다."

"누군데? 누군데?"

"설마 입대 전 고백 뭐 이런거?"

"오빠앙, 오늘 밤 한 번 대줄 게용~"

짖궂은 친구들은 숫총각 종현을 놀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종현은 민망함에 폰을 빼앗듯 낚아채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다시 먹고 죽자 분위기가 이어지는데 성수가 도훈을 보고 눈짓했다.

"야, 담배나 빨러 나가자."

"네, 형."

가게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담뱃불을 붙이고 얘기를 나누었다.

"너 잘됐다면서?"

"뭐가요?"

"에이, 여친한테 다 들었어. 수지가 너 엄청 맘에 들어 했다는데?"

"그랬어요?"

"모른 체 한다. 벌써 두 번 만났다며?"

"아닌데?"

도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어젯밤 까페에서 예림과 3자 대면한 기억을 떠올렸다.

‘설마 그것도 만난걸로 치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는.’

성수가 두터운 어깨로 도훈을 밀치며 씨익 웃었다.

"짜식, 축하한다. 잘되면 밥 한 번 쏴."

"아직 그정도까진 아니에요. 그냥 뭐···."

"인마. 원래 썸 탈 때가 제일 좋은 거야. 그럴 땐 손만 잡아도 막 두근두근 하잖아."

도훈은 손 잡기는 커녕 이미 홀랑 따먹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다행히 수지가 입이 가벼운 편은 아니었는지, 성수는 진도가 얼마나 나갔는지에 대해선 까맣게 모르는 눈치였다.

두 사람이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구석에서 통화하고 있던 종현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온다고? 지금?"

성수와 도훈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묵묵히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

"안 돼. 오늘은 학과 남자들끼리 송별회 자리야. ···아니 네 스케쥴이 그런 거야 나랑 무슨 상관인데? 야, 야!"

통화를 엿듣던 성수가 도훈에게 조용히 물었다.

"여잔가 본데?"

"그러게요."

"여자친군가?"

"여자친구 없다지 않았어요?"

"아니 그냥 썸타는 친구든지."

"근데 스케쥴이 무슨 뜻일까요?"

종현은 통화로 한창 씩씩 거리다가 신경질을 내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그제야 뒤에 두 사람이 자신의 통화를 엿들었다는 걸 깨닫고 황망해 했다.

"앗, 부회장님. 도훈이 형."

"누구야? 여자 맞지?"

"여자는 맞는데 친한 사촌 동생이에요."

"아···."

성수가 김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웬일로 여잔가 했더니 친척이라는 말에 흥미가 떨어진 것 같았다.

도훈은 통화내용중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스케줄 어쩌고 하던데 사촌 동생이 많이 바빠?"

"아···."

종현이 난처해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도훈은 뭔가를 직감하면서 다시 물었다.

"혹시···."

"네, 얘가 걸그룹 데뷔 준비중이라···."

"거, 걸그룹?"

물어본 도훈보다 성수가 더 흥분했다.

"걸그룹 누구? 와, 대박. 너 사촌 동생 중에 가수 있었어?"

흥분하는 성수를 진정시키며 종현이 대답했다.

"선배, 아니 막 엄청 유명한 건 아니고요."

"아니, 그래도 명색이 걸그룹이라며? 엄청 예쁘겠는데?"

"전 어렸을 때부터 봐서 잘 모르겠어요."

"암튼 그럼 걔가 여기 오겠데?"

"네. 저기 입대날까지 계속 스케쥴이 바빠서 오늘 밖에 시간이 없다네요."

"당장 불러!"

"아, 근데 괜히 전 분위기만 어색해 질까봐."

"미친! 야. 너 내가 군생활 꿀팁하나 줄 테니까 잘 들어."

의병제대를 한 성수가 오우거같은 팔뚝으로 종현을 어깨동무 하며 말했다.

"딱 자대 배치 받으면 앞에 관물대라고 일인당 하나씩 준단 말이야. 거기다가 네 사촌 동생 있지, 걔 증명 사진이나 독사진을 떡 하니 붙여놔."

"네."

"그러면 선임들이 졸라 궁금해 하면서 물어볼 거란 말이야. 쟤 누구냐, 여친이냐, 연얘인 사진이냐."

"네."

"그럼 그때 넌지시 흘리라고. 네 동생이라. 모쏠이라고. 면회 자주 온다고."

"아··· 근데 친동생도 아니고 면회는···."

"야, 새끼야! 그냥 딱 그 말만 하란 말이야. 그럼 너 군생활 있지? 이등병부터 그냥 비단길 펼쳐지는 거야. 경계근무 열외, 불침번 열외, 작업은 제일 쉬운 걸로. 행군이며 유격이며, 훈련이란 훈련 모두 특혜를 받을 수 있다고!"

"아···."

성수의 열변에 도훈이 피식하면서 생각했다.

‘성수가 저렇게 열정적인 모습이 있구나. 누가보면 만기 병장 제대한 줄.’

[그러게 말입니다.]

‘근데 신기하다. 사촌 동생이 걸그룹 데뷔 준비하다니.’

[주인님. 왠지 오늘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그지? 나도 딱 그 생각했어.’

도훈에겐 장기 프로젝트 업적이 남아 있었다.

바로 ‘특수 직종이 더 맛있어.’

왁싱 전문가, 여경, 여의사, 치어리더, 아이돌을 순서에 상관없이 공략하는 직업 여성(?) 공략 미션으로 현재 도훈은 왁싱 전문가 한 명만 공략해 둔 상태였다.

여경이나 여의사는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데 반해 마지막의 치어리더와 아이돌은 연이 닿지 않으면 쉽게 어울리기 힘든 직종이었다.

따라서 이번 종현의 사촌 여동생이라는 걸그룹 준비생과의 만남은 굉장히 보기드문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아, 잠깐. 근데 아직 준비생이라고 했으면 데뷔는 못 한 거잖아.’

[그렇겠죠?]

‘그럼 직종으로 구분이 안 되는 거 아니야? 가령 여자애가 경찰시험 준비한다고 여경이라고 할 순 없는 것처럼.’

[그것도 그렇군요. 한번 확인해 보셔야 겠는데요?]

도훈이 종현에게 물었다.

"근데 아직 지망생인거야? 정식 데뷔는 안하고?"

"아···. 그게··· 혹시 프로듀스 69라는 프로그램 아세요?"

평소 TV를 전혀 보지 않는 도훈으로는 금시초문인 이름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근육 돼지 성수가 곧바로 아는 척을 했다.

"알지! 프로듀스 식스티 나인! 나 그거 광팬이었잖아."

"네. 아이돌 지망생 69명을 모아 놓고 최종 6명을 뽑아서 데뷔시켜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억! 설마 마지막 후보 안에 들었다고? 누구지? 화연? 세미? 크리스? 보라?"

흥분한 성수가 주저리주저리 아이돌 이름을 읊어대는데 종현이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아뇨. 그 전단계인 9명 후보에서 탈락했어요."

"아! 그래도 대단한데?"

"그럼 떨어졌는데 계속 준비하는 거야?"

"음, 정확히는요. 6명은 프로젝트 그룹으로 바로 결성되는 거고 그때 20위권 안에 들었던 멤버를 모아서 또 다른 그룹을 만들었거든요. 사촌 동생은 운 좋게 거기 들어갔나 보더라고요. 아마 다음 주인가? 그때 신곡 낸다고 엄청 빡세게 연습하고 있데요. 그래

서 오늘밖에 시간이 안난다고···."

종현의 설명을 들은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그럼 데뷔는 거의 확정인 거잖아?’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어쨌든 종현이 사촌 여동생을 꼬시든, 이번 기회에 친해져서 다른 아이돌을 만날 다리를 놓든 간에 무조건 만나봐야겠는데?’

[넵,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크크.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기대도 않던 군대 송별회에서 아이돌이 얻어 걸리다니.’

"그럼 지금 온데?"

종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제가 오지 말라고 했어요. 오늘은 학과 선배 동기들이랑···."

"뭐!"

"미쳤어?"

걸그룹 광팬인 성수와 업적 성애자인 도훈이 동시에 일갈했다.

"네, 네?"

나름 학과 사람들을 배려해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던 종현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도 동생이 나중에 배웅 못 할 까봐 시간 내서 온다는 데 그걸 마다하는 사촌 오빠가 어딨어?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구만 정말."

"그래, 종현아. 아까 성수형도 그랬잖아. 민증사진 이라도 한 장 받아놓으면 그게 네 군생활, 꽃길 열어줄 수도 있는 거거든. 기왕이면 둘이 같이 찍은 인증샷이면 더 좋고."

"아··· 그, 그런가요?"

종현이 떨떠름해 하자 성수와 도훈이 집요하게 설득했다.

"불러 그냥. 혹시 가능하면 다른 멤버들도 같이 오면 더 좋고. 가만있자, 20위 권에 들었던 애들도 된게 괜찮은 애들 많았는데···."

"음, 그냥 뭐. 1차땐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그러면 2차 쯤 옮길 때 적당히 줄면 불러도 괜찮을 것 같아."

"전 근데 괜히 사촌 동생 불렀다간 분위기만 이상해 질까봐서···."

"괜찮아, 괜찮아. 뭐 어때? 설마 우리가 막 부끄럽고 그래? 사인해 달라고 할 까봐?"

"아, 아뇨. 저는 그냥 남자들끼리 편하게 있는 게···."

도훈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아오. 이 눈치 없는 새끼. 이러니 입대할 때 까지 모쏠이었군.’

결국 두 사람의 계속되는 협박(?)과 회유에 설득당한 종현이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어··· 미소야. 음, 정말 오늘 밖에 시간이 안된다고?"

귀를 쫑긋 기울이며 통화를 듣고 있던 성수가 갑자기 자기 이마빡을 빡! 소리나게 때렸다.

"형, 왜 그래요?"

"미소! 와, 미소가 종현이 사촌 동생이었다니!!!"

"미소가 누군데요?"

"스마일 걸 미소 몰라? 완전 졸 귀! 걔가 인기투표 7등이었거든. 와 식스티나인에서 7등한 아이돌이라니!"

성수가 폰을 꺼내더니 핸드폰으로 미소의 사진을 띄워주었다.

그것은 한 편은 동영상이었는데, 5명이 한조가 되어 댄스 경연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여기 센터 보이지."

"가운데 얘요?"

"어. 얘가 미소라는 얘거든. 남성팬 팬덤 수로는 거의 탑 쓰리였어. 엄청 귀엽고 이쁘거든. 특히 이 사과머리 단발. 진짜 대박 귀여웠는데."

도훈은 영상에 조그맣게 나오는 단발머리 여자애를 눈여겨 보았다. 과연 아이돌 지망생답게 비주얼부터 압도적이었다. 늘씬한 팔다리를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춤을 추는데도, 웃는 얼굴을 한 번도 찡그리지 않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와···. 이번 상대는 정말 장난이 아니겠는데요? 확실히 아이돌은 뭔가 달라도 다르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아이돌은 거기 금테 둘렀다든? 눕혀 놓고 박아 버리면 다 똑같지.’

도훈은 미소의 외모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녀만한 미인을 처음 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제법 담담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금테 둘렀다 하니까 갑자기 고은성이 생각나네?’

비슷한 또래로 굉장한 미인이던 재벌가의 막내 손녀 고은성.

도훈은 문득 최근에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뒤론 영 잠잠하네. 한지연한테도 별 말이 없고.’

도훈이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통화를 마친 종현이 난처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형."

"어, 어떻게 됐어?"

"온 데?"

"오긴 온다는데···."

"뭐야? 확실히 말해봐."

"오는데 얼굴만 보고 갈거래?"

"저기···. 다음 주 데뷔하면 자기들도 맘껏 못 놀 거 같다고 다른 멤버들하고 같이 온다는 데 혹시 괜찮으시겠어요?"

도훈이 흥분한 채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대답했다.

"오브 코스!"

< 608. 아이돌 vs 돌아이-1-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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