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4. 거자필반-24- >
[너무 섣불리 단정하시는 거 아닌가요?]
‘왜?’
로시가 신중론을 펼쳤다.
[우연히 옷이 같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괜히 넘겨짚었다가 엄한 사람이면 어쩌시게요?]
도훈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타이즈로 된 요가복은 특별한 개성이 없는 디자인이다. 그것만 가지고 확신하기엔 근거가 부족했다. 어쩌면 설수지의 접근에 고의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부터가 억측일지도 몰랐다.
‘일단 다른 단서가 더 있는지 살펴봐야겠는데.’
섹스타 SSG의 사진첩을 신중히 훔쳐보던 도훈은 살짝 꼴리는 걸 느꼈다.
지금껏 수많은 여자를 만나고, 그만큼 변녀도 많이 봤지만 이토록 지독한 노출광은 처음이었다. 스마트폰의 발달과 SNS에 힘입은 현대판 ‘바바리 걸’인 셈이다.
‘와···. 근데 이 정도면 일상생활 불가능한 수준 아니냐?’
사진을 둘러보던 도훈은 혀를 내둘렀다. 사진 속의 그녀는 늘 유두가 바짝 서 있거나, 팬티가 젖어 있었다. 업로드된 날짜가 해당일에 찍은 날짜라고 가정한다면, 1년 365일 음탕한 생각으로 가득 찬 여자라는 의미였다.
‘나도 이 정도까진 아닌 것 같은데···.’
욕구불만.
SSG의 심리상태를 분석한 도훈의 결론은 그것이었다.
그녀는 강박적이다시피 노출 사진을 계속 올렸는데, 팔로워들이 댓글로 과격한 말을 내뱉을 때마다 점점 수위가 올라가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시작은 속옷을 입은 상태로 찍어 올린다. ‘새로 산 속옷 착샷이에요.’ 라는 제목의 글에 블라우스가 좌우로 벌어진 채 야한 브라를 착용한 사진이 올라온다. 그 순간 실시간으로 댓글이 달리기 시작한다.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댓글들은, 한 줄로 엮으면 그대로 야설이 될 만큼 굉장하다. 거의 댓글 강간 수준이랄까?
놀라운 것은 SSG의 반응이다.
그녀는 노여워하거나 기분 나쁜 기색이라곤 전혀 없다.
모욕을 받을수록 흥분하는 마조처럼, 이어 올라오는 사진은 점점 수위가 높아진다.
‘님들 때문에 팬티 다 젖어 버렸잖아요!’ 이런 제목의 두 번째 사진엔 푹 젖은 팬티와 함께 깔끔하게 제모 된 사타구니가 훤히 드러난다.
엉덩이 뒤에서 팔을 뻗어 손가락 두 개로 교묘하게 가운데를 가린 사진은 역대급이다. 그녀는 모든 걸 드러낸 노출보다, 살짝살짝 가리는 것이 훨씬 남자를 흥분시킨다는 걸 알고 있는 여자처럼 보였다.
‘자위도 제법 즐겨 하는 모양이군.’
절제를 잘하는 SSG라도, 가끔 폭주하는 경향을 보였다.
사람들의 댓글이 폭발할 때 나오는 반응.
그럴 때면 그녀는 주변의 도구를 모두 사용해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틀어막았다.
애액이 잔뜩 묻은 볼펜을 혀끝으로 핥는 사진을 보며, 도훈이 끝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와-. 미쳤네. 진짜 정상 아니야. 만약 이게 진짜로 설수지 인스타 계정이라면, 이번 주 소개팅할 여자는 사상 최강의 변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어.’
[아직은 무엇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허점이 많은 추측이니까요.]
도훈이 눈알을 굴렸다.
‘한가지 실험을 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실험요?]
도훈은 한시간 전 올라온 사진을 보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해당 사진은 여자 화장실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였는데, 입고 있던 옷을 목까지 들추느라 상의가 함께 찍혀 있었다. 독특한 패턴을 가진 티셔츠였다.
‘이건 대충 1시간 전쯤 올라온 사진이야. 아까 태영이를 흥분시켰던 사진이 아마도 이 사진인 것 같아.’
[그런데요?]
‘만약 이 사진이 실시간으로 촬영한 사진이라면 어떨까?’
[아! 교내 어딘가에서 설수지 양이 위 사진에 나온 티셔츠를 입고 있겠군요.]
‘빙고! 그땐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공교로운 상황이 되는 거지. 빼도 박도 못할 물증인 셈이야.’
[근데 어떻게 확인하시려고요?]
‘깨톡으로 사진을 유도해 봐야지. 어제 보니 사진 같은 건 재깍재깍 보내더라고.’
벤치에 앉아있던 도훈은 카메라를 실행시켜 셀카로 사진을 찍었다. 아무렇게나 찍었는데도, 전생의 인생 샷보다 훨씬 잘 나온 사진을 보며 살짝 우울해졌다.
‘원판 불변의 법칙은 여지 없구나. 그냥 대충 찍어도 멋있네.’
[미남이십니다, 주인님.]
‘진짜 내 얼굴도 아닌데, 뭐. 원주인도 참 억울하겠어. 이렇게 잘생긴 얼굴로 일찍 갔으니.’
도훈은 미인박명이란 생각을 떠올리며 SSG에게 사진을 보냈다.
-이도훈 : 오늘 날씨 엄청 덥네요. 여기 어딘지 아시겠어요?
일부러 뒷배경이 찍히게 답변을 유도한 질문에 수지가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설수지 : 대학 본부 건물 아니에요? 날씨가 덥긴 하네요.
-이도훈 : 수지씨는 혹시 어디에요? 혹시 강의실?
-설수지 : 전 학교 아니에요. 법대 뒷길로 점심 먹으러 나왔어요.
답장을 본 도훈이 낭패감에 빠졌다.
‘아, 젠장. 하필 밖이라니. 학교 안이면 자연스럽게 찾아보려고 했는데.
그러나 도훈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포기란 배추를 세는 단위일 뿐이었다.
-이도훈 : 점심은 뭐 드시는데요?
-설수지 : 잠시만요.
잠시 후 수지가 사진을 보내왔다.
예쁜 접시에 담긴 크림 파스타 사진.
도훈은 음식이 나온 사진을 뚫어지게 보더니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네?]
‘SSG가 설수지라는 증거 말이야.’
[음식 사진만 가지고요? 이건 너무···.]
‘아니. 음식 사진 말고. 옆에 숟가락 보이지?’
파스타 주변엔 식전 빵과 함께 양송이 스프가 놓여 있었고, 스프 옆에는 거꾸로 엎어놓은 스푼이 있었다.
[네.]
‘스푼 곡면에 뭐가 비치는지 한 번 보라고.’
[아, 아앗!]
‘맞지? 아까 인스타에서 본 그 옷.’
놀랍게도 도훈은 스푼에 반사된 수지의 모습을 보고 입고 있던 옷을 밝혀낸 것이었다.
[오옷! 소름 돋는 관찰력! 혹시 지금 현자세요? 어떻게 저걸?]
‘지난번 깨톡 앨범서도 그랬잖아. 욕조 손잡이로 비추던 거 기억나?’
[아하, 그때 그 방법을 응용한 것이군요.]
‘맞아. 이걸로 확실해졌어. 유명 섹스타인 SSG가 설수지 본인이고, 우연히 태영이랑 접촉했다는 사실을. 아니지. 이쯤 되면 태영과도 우연인지 고의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겠군.’
도훈이 벤치에 앉아 자신의 추리력에 흡족해하는 데 누군가 뒤에서 몰래 다가와 그의 눈을 가렸다.
"나 누구게?"
갑작스러운 접근에 도훈이 당황했다.
설수지의 인스타 계정을 찾는데 정신이 팔려 누가 다가오는지 몰랐던 것이다.
‘뭐야? 누군데 이런 유치한 장난을!’
[오수정 양입니다.]
‘수정이?’
로시의 도움으로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도훈은 일부러 딴소리를 했다.
"후배면 장난치지 마라. 혼난다."
"와, 잘하면 한 대 치겠는 걸?"
수정이 손을 떼며 고개를 내밀었다.
"찐따같이 혼자서 뭐하니?"
"오수정."
편한 츄리닝 복장에 야구 모자를 눌러 쓴 수정이 해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도훈아."
***
"아가씨. 운동가실 시간입니다."
고급스러운 저택 안.
나비넥타이를 찬 늙은 집사가 은성에게 일정을 알렸다.
"오늘은 피곤한데 좀 쉬면 안 될까요?"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하셔야죠. 트레이너 분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휴-. 알겠어요."
은성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감옥도 아니고.’
귀국한 지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오빠인 성민이 그녀를 자택에 감금시킨 지도 보름째였다.
명목은 병세가 완연한 할아버지의 간병을 위해.
하지만, 은성은 그것이 핑계일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국내 최고 의사진이 집에 24시간 상주하는 데 간병은 무슨.’
할아버지가 쇠약해지긴 했지만, 오늘내일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저 성민은 자신을 손아귀에 가둬두려는 것뿐이다.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은성이 오빠의 말을 고분고분 따른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성민의 뜻을 거스르고 괜히 도훈에게 접근했다가, 그가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웠던 것. 자신의 오빠가 능히 그럴 인물이라는 걸 아는 이상, 은성이 몸을 사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지금은 보고 싶어도 참아야 해. 괜히 도훈 오빠가 곤란해질 일이 생기면 내가 너무 미안하니까.’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은성은 저택에 있는 개인 헬스장으로 이동했다. 말이 개인 헬스장이지, 각종 기구만 해도 10개가 넘어 여느 피트니스 센터와 견줘도 꿀리지 않았다.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트레이너 또한, 연예인들도 줄 서서 기다린다는 유명한 PT강사라고 했다.
"오셨어요, 아가씨? 가볍게 런닝부터 하고 시작할까요?"
강사는 나이가 훨씬 많았음에도 은성에게 깍듯했다. 일주일에 두 번 출장을 오는 것만으로 대기업 직장인만큼 강사비를 지급하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런닝머신 위에 올라 달리기를 시작하는데, 그녀의 개인 비서가 서류철을 들고 다가왔다. 은성의 주변엔 온통 여자들뿐이었는데, 이는 성민의 바람이기도 했지만, 그녀 스스로도 여자가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
"운동 끝나시고, 이어서 경영 수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오늘도요?"
은성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그녀의 비서가 말했다.
"아가씨.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대주주로서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꿰고 있으셔야 합니다. 나중에 주주 총회도 참석하셔야 하니까요."
"알겠어요."
재벌 3세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돈을 버는 일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지만, 타고난 핏줄은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참, 그리고 비서실에서 새로운 경호원을 보내왔습니다."
"경호원을요? 전 요청한 적 없는데···."
"지금 경호팀과 업무 협조를 위해 전출된 인력으로 보입니다. 결국엔 국내 경호팀과 지휘체계를 일원 시켜야 하니까요."
"누군데요?"
"프로필엔 육사 출신으로 무술 유단자이자 굉장히 스마트한 재원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물론 사정상 외출을 못 하시는 상황이니 당장은 모르셔도 상관은 없지만요."
살짝 땀이 난 은성이 스포츠 타올로 이마를 훔치며 런닝머신의 가동을 중지시켰다.
"데려와 보세요. 그래도 내 사람인데 서로 인사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비서가 검은 정장을 입은 여성을 데리고 들어왔다.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단정히 묶은 미인이었다.
"인사드리세요. 은성 아가씨입니다."
비서의 소개에, 새 경호원 한지연이 폴더처럼 넙죽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다. 한지연입니다."
은성은 지연을 보며 생각했다.
‘예쁘게 생겼구나. 내 또래일까? 말벗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네,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넵."
"이제 가보세요."
비서는 은성의 운동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지연을 헬스장에서 내보냈다. 지연은 깍듯이 인사하며 은성의 몸을 훑었다.
‘소문대로 엄청 미인이구나. 하긴 고성민 그 새끼도 성격이 개차반일 뿐 얼굴은 제 엄마 닮아서 꽤 미남이지. 역시 씨도둑질은 못 한다더니···.’
지금은 작고한 성민, 은성 남매의 모친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다. 특히 성형 미녀가 득시글대는 요즘이 아니라 자연미인이었으므로, 그녀의 혈육인 두 남매 또한 어지가한한 아이돌 못지않은 미남 미녀로 자라났다.
특히 어머니를 거의 빼다 박은 것처럼 예쁘게 생긴 은성은 감히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가 나는 것 같았다. 재벌가의 3세라는 배경적 후광도 일정 부분 작용하겠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미모만으로 압도당하는 수준이었다.
나름 예쁜 얼굴로 육사 생도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지연이지만, 은성의 앞에서만큼은 꿀리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에요. 좀 더 얘기나 하다가요. 혼자 운동하기 심심했는데···."
"아가씨?"
"선생님, 같이 있어도 괜찮죠?"
"물론입니다."
지연을 곧바로 내보내려는 비서와 달리 은성은 친절하게도 은성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연은 그 모습마저 살짝 짜증이 났다.
‘쳇. 돈 많고 예쁜 애가 착하기까지 하니까 더 재수 없네. 도훈이가 관심 보일만 하구나.’
도훈에 대한 질투심으로 은성을 고깝게 보는 지연이었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은성에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
수정은 벤치에 바짝 붙어 앉았다.
"왠 모자?"
"머리 안감았거든."
"윽. 아무리 공부가 중요하다지만 머리는 감고 다녀야지."
"왜? 냄새나?"
수정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목 뒤에 솜털이 여성미를 한껏 드러냈다. 가녀린 목선과 은은하게 풍겨오는 냄새가 향그럽기 까지 했다.
"뭐야. 치워."
"오랜만에 보는데 그러기야?"
"여기 학교잖아."
나는 벤치에서 살짝 엉덩이를 떼어 옆으로 이동하며 말했다. 수정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글치? 나랑 친하게 보이면 연애사업 방해되니까."
수정은 쿨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나에게 욕심을 안 부리는 점이 좋았다.
"공부하러 가는 길이야?"
"응. 어제 늦게까지 공부하고 도서관 출근."
"수업은?"
"4학년은 몇 학점 안 돼. 커리큘럼이 임용에 최적화되어 있달까? 나도 2학년때 실습 나갈 때 짜증났는데, 다른 학교처럼 4학년 때 오래 안 나가는 게 어찌보면 더 좋은 것 같기도 해."
"그렇군."
"넌 수업?"
"어. 2학년 전공수업 기다리고 있어."
"실습은 잘 다녀왔고?"
"그냥저냥."
"또 여자 꼬셨지?"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발정난 사람인 줄 알아?"
수정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니었어? 근데 어쩌니? 내가 발정 났는데."
수정의 손이 교묘히 허벅지 사이로 파고 들었다.
< 564. 거자필반-2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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