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562화 (535/2,000)

< 544. 거자필반-4- >

‘소개팅에서 바로 원나잇이라고? 무슨 황혼에서 새벽까지 패러디도 아니고.’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은 정확하네요. 소개팅 시작부터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공략을 성공시켜야 하니까요.]

‘요새 애들 빠르다 빠르다 얘긴 들어봤지만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물고 빠는 건 좀 짐승 같지 않냐?’

[웬일입니까? 침대 위의 폭군께서?]

‘내가 뭐 치마만 두르면 환장하는 색골인 줄 알아? 왜 이래 이거? 나도 상도덕은 있는 사람이야.’

미션의 내용은 별 것 없다. 어쩌면 중수까지 두어개 업적만 남겨둔 지금의 나로선 우습게 느껴질 정도다.

‘보상 아이템은 뭐지? 망부석이 되지 마오? 인공지능 시스템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

[평소 주인님의 문자 사용이나, 말투 분석한 가상 인격이 주인님을 대신해 어장을 관리하는 의밉니다. 지속적인 연락을 통해 호감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유지해주는 것이죠.]

‘그게 가능하다고? 인공지능이 사람 흉내를 낼 수 있다는 소리야?’

[주인님은 제가 어떤 존재였는지 까먹으신 모양이군요.]

아, 그렇군.

천상계 과학력의 결정체가 바로 내 손목에 있었다.

가끔 로시랑 대화하고 있으면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니까.

미션도 수월하고 보상 역시 화끈했다.

다만 먹튀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린다.

본디 소개팅이라 주선자의 면이 걸린 공식적인 만남이다. 나의 과오와 실책은 고스란히 주선자에게 되돌아간다.

따라서 사귀지도 않을 사람을, 그날 실컷 따먹고 모른 체하였다간 본인도 그렇지만 주선자에게도 엄청난 민폐를 끼치게 되는 일이다.

특히 학과 내의 든든한 우군이라 할 수 있는 성수와 의절할지도 모른다는 점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이래서는 여자가 아무리 예뻐도···

"어, 사진 왔다. 봐봐."

성수가 여친이 보내준 사진을 핸드폰 화면에 띄웠다.

"오, 대박! 듣던 대로구나."

"진짜요?"

힐끔 봤는데도 상당히 예쁘장한 여자애였다. 조명 좋은 까페에서 셀카로 찍은 사진엔, 연예인의 일상 화보로 착각할 만큼 대단한 미인이었다.

화장이 옅고 옷 입는 스타일은 수수했지만, 살짝 밑으로 처진 눈이 순종적이면서 묘하게 색기가 흘러나오는 백치미가 흘렀다.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지만, 분명 몸에 좋고 맛도 좋을 게 확실했다.

"얘가 진짜 법대생이라고요?"

"어. 전혀 안 그렇게 생겼지?"

"혹시 얼굴 고친 거 아니에요?"

"아냐. 여친 동창이랬잖아. 고딩 때 별명이 부천 김태희였데."

"김태희요?"

"왜, 서울대 출신 연기자. 공부도 잘하고 예뻐서 어려서부터 엄청 인기가 많았다는 거야. 집안도 엄청 빵빵할걸?"

"집안은 어떤데요?"

아무리 집안이 좋아도 재벌 3세 고은성만 할까?

"유명한 법조인 집안이래. 할아버지는 판사 출신에, 아버지는 대형 로펌 변호사. 삼촌은 현직 지검장이라던가?"

헐, 혈통부터 대단한 집안이군.

한 가문에서 법조인이 3명이나 나오다니.

돈으로야 고은성에게 비비지 못하겠지만(하긴 그런 여자는 대한민국에서도 손으로 꼽아야 할지도), 어디 내놔도 꿀릴 집안은 아닌 건 확실하다.

"아···, 그래서 법대를?"

"어. 벌써부터 로스쿨 준비한다더라고."

로스쿨이 꼭 법학 전공자만 요구하는 건 아니지만, 법대 출신이면 유리하긴 하겠군.

그나저나 다시 봐도 예쁜 얼굴이긴 하다. 이렇게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나를 찍었다는 사실에 절로 자존감이 올라갔다. 나도 어느덧 이 정도 레벨인 건가?

"어때? 이 정도면 퀸카 아니냐? 생각 있어?"

성수가 선택을 재촉했다.

"잠시만요. 고민 좀 해보고요."

"고민은 무슨. 사진까지 받아먹고 먹튀 하면 예의 아니다."

사진 먹튀가 아니라, 따먹튀 할까 봐 그러는 건데···.

사실 주선자가 성수만 아니었더라도 대번에 승낙했을 법한 미모였다. 사진빨+조명빨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면 우리과 8선녀 이상의 레벨이다.

아, 정음이.

불쑥 그런 걱정이 들었다.

내가 다른 과 여자애랑 소개팅 한다는 사실을 알면 후배들이 질투하지 않을까? 단순 질투에 그친다면야 상관없지만, 괜스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을까 우려된다.

최근 들어 밖으로 나도느라 좆막음도 제대로 못했는데, 자칫 소개팅으로 뇌관을 건드리게 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것이다. 줄줄이 연쇄 폭탄으로.

"저 근데 괜히 소문났다간···."

"무슨 소문? 아, 소개팅하는 거? 얀마. 형이 몸만 무거운 줄 알아? 당연히 비밀이지. 안되면 쪽팔리니까."

성수의 호언장담으로 보아 입단속은 철저히 해줄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먹튀로 인해 성수와 그의 여친이 곤란해지는 상황인데···.

머리를 굴려보았다.

업적 정보창의 설명에 따르면 정신조작을 이용한 꼼수는 금지. 하지만 업적 이후에 대해선 가타부타 설명이 없다.

그렇다면···.

"형 체면도 있고하니 한 번 해볼까요?"

"얼씨구. 사진 보고 혹한 건 아니고? 너 은근히 눈 높은 거 내가 알거든?"

"얼굴만 가지곤 알 수 없죠. 대화를 해봐야지."

"아무튼 한다는 거지? 그럼 약속 잡는다?"

성수가 들뜬 표정으로 답장을 보냈다.

[주인님. 정말 도전하시게요?]

‘응, 왜? 중수까지 업적이 얼마 안남았잖아.’

[조금 전까지 상도덕 운운하시길래···.]

‘매물이 잘 빠졌잖어. 게다가 수습만 잘하면 뒷탈 없을 것 같고.’

법대생에, 법조인 집안이라는 역시 마음에 든다.

3심이 아직 남은 아내의 판결에 대해 정보를 얻기도 한결 수월할 것 같다. 내가 뭐 법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지.

한참 폰으로 깨톡를 주고받던 성수가 나에게 말했다.

"너 다음주 중 시간 되냐?"

"딱히 약속은 없어요."

"그럼 내가 연락처 달라고 할 테니, 둘이 약속 잡아."

"같이 안 가시고요?"

"무슨 쌍팔년도 얘기를 하고 있어? 요즘 소개팅에 주선자가 왜 따라가니? 나중에 잘 되면 커플끼리 놀러나 가는 거지. 연락처 받았다고 쪼르르 연락하지 말고 내일 쯤 연락해봐."

"아무튼 고마워요. 저 챙겨주는 건 역시 형밖에 없네요."

"그니까 잘해라. 형이 너를 이렇게 아낀다."

성수는 참으로 고마운 녀석이다.

다음에 한 번 몸보신이나 시켜줘야지.

***

"으···. 간만에 너무 마셨나."

남자들끼리 회식이라 그런지 주구장창 술을 마신 도훈은 몸에 취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3차로 간 호프집에서 소맥을 연거푸 들이킨 게 화근이었다. 사내들끼리 자존심을 세우느라 소주 비율을 높였는데, 나중에는 거의 소주반 맥주반이었다.

[그러게 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가끔 착각한단 말이야. 이런 허우대 멀쩡하게 생긴 놈이 술이 약점이라니···.'

슈퍼맨에게 크립토나이트가 있다면, 이도훈은 술이 쥐약이다.

알콜 분해 능력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몸뚱이는, 새터 때부터 그 기미를 보였다.

‘으으, 그때 사발주 마시고 뻗은 것만 생각하면···.’

특히 술만 먹으면 천근만근 졸음이 쏟아진다는 점이 문제였다. 모두 집으로 뿔뿔이 흩어진 시각, 도훈은 술을 깨기 위해 편의점에 들러 숙취 해소 음료수 구입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먹어 두는 편이 낫겠지?’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는 중에도 점점 눈꺼풀이 감겨왔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졸음을 쫓아 보았지만, 잠시 뿐이었다.

[주인님, 정신 차리십시오.]

‘잠깐 눈 좀 붙였다 갈까?’

[어디서요?]

‘공원 벤치라도. 요샌 밖에서 자도 얼어 죽진 않을 날씨잖아.’

[그냥 택시 타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집까진 너무 멀어. 택시에서 잠들었다간 기사가 메타기 켜고 뺑뺑이 돌려버릴 것 같단 말이지.’

편의점을 나선 도훈은 담배로 졸음을 쫓으며 밤거리를 서성였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술집이 즐비한 거리는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붐볐다. 역대급 취업란이라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았지만, 이곳에 모인 청년들에겐 그런 우려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도훈에게 양복을 차려입은 멀끔한 청년이 다가왔다.

"혹시 아가씨 찾으시나요?"

"네?"

"노래방, 룸, 마사지. 원하는데로 모셔드릴께요."

"저 그런데 안 갑니다."

‘삐낀가?’

[무시하십시오.]

"형님, 거짓말 않고 오늘 진짜 물 좋거든요. 후회 안 하실 거에요."

"별로 관심 없다고요."

술 취한 가운데도 정색하며 거부하자 삐끼도 뻘쭘했는지 명함만 한 장 건네고는 사라졌다.

"혹시 생각 바뀌심 약도 보고 오세요. 진짜 잘해드릴게요."

도훈은 무심결에 삐끼가 주고 간 명함을 확인했다.

[24시간 수면실 완비, 천궁 타이 마사지.]

‘수면실이라고?’

다른 것보다 자고 갈 수 있다는 데 마음이 혹했다. 도훈은 길거리에 서서 가만히 명함에 그려진 약도를 대조했다.

"신안은행 건물이 여기니까···."

공교롭게도 마사지숍은 도훈이 서 있던 바로 옆 건물이었다.

고개를 들자, 간판에도 떡하니 [24시간 수면실 완비]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도훈은 갈등했다.

‘마사지 받고 한숨 자다 갈까?’

할증이 붙은 택시비는 대략 4만원.

명함에 기재된 마사지 비용은 39,900원이었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서 자나, 마사지를 받고 첫 전철을 타고가나 비용상의 차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고 보니 어깨가 좀 찌뿌둥한 것 같기도···.’

[정말 가시려고요?]

‘계산해 봤는데 금액적으론 차이가 없더라고. 그리고 난 당장 눈 좀 붙이고 싶거든.’

[주인님 맘이니 알아서 하십시오.]

결심을 굳힌 도훈은 지갑에 현금을 확인하고는 마사지숍을 들어갔다. 문을 열자 앞에 걸린 장식에서 땡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주인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오셨어요?"

카운터에 앉은 주인은 40대로 보이는 중년이었다. 그는 도훈 앞에 메뉴판처럼 생긴 책자를 펼치더니 가격표를 제시했다.

"타이는 한시간 부터구요, 아로마는 이쪽."

도훈은 마사지 비용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함에는 분명 39,900원이라 적혀 있었는데 막상 메뉴에 적힌 가격이 전혀 달랐던것이다.

가장 싼 타이 마사지도 1시간 7만원부터 시작이었고, 황제아로마 마사지는 무려 20만원 짜리였다.

도훈이 술김에 어이가 없어 따졌다.

"가격이 이거 맞아요? 밖에서 받은 명함엔···."

"아, 손님 그건 주간요금이에요."

"주간요금요?"

‘무슨 택시냐? 마사지에 할증이 붙게?’

"네.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진 그 요금으로 받구요, 지금은 정상요금으로 받습니다."

알고 보니 사람을 현혹하기 위한 낚시였다.

도훈이 혹시나 싶어 명함을 자세히 보니 잘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글씨로 할인 요금이 적용되는 시간대가 적혀 있었다.

‘아 놔, 낚였네. 나가야겠다.’

도훈이 짜증을 내며 나가려는데 마침 안쪽에서 여자가 걸어 나왔다. 핫팬츠에 끈 나시를 걸친 젊은 마사지사였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것으로 보아 동남아 쪽 외국인처럼 보였으나, 몸매가 늘씬한 것이 제법 봐줄만 했다. 특히 몇 시간을 사내놈들이랑 부대꼈더니, 평소보다 여자가 고픈 상태였다.

‘음. 다시 나가긴 창피하니 그냥 할까?’

[주인님. 너무 속 보입니다.]

‘생각해보니 조만간 오카모토가 거금을 주기로 했잖아. 이 정도는 써도 괜찮을 것 같은데?’

도훈이 다시 메뉴에 적힌 서비스를 보며 물었다.

"요 두 개는 차이가 뭐에요?"

"타이는 말 그대로 태국식 마사지구요, 아로마는 오일 발라서 해드리구요."

"오일요?"

"네. 전체 탈의하시고."

‘저, 전체탈의라고?’

도훈은 거기서부터 뭔가 퇴폐의 느낌을 받았지만, 술기운에 따른 본능으로 점점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그래. 기왕이면 값이 나가더라도 좀 더 비싼 아로마를···.’

"아로마 한 시간 반 이걸로요."

"현금 하시면 10% 빼드릴 게요."

‘이 새끼가 어디서 탈세를!’

"···당연히 현금 드려야죠."

속으로만 분노하는 도훈이었다.

계산을 마치자 주인이 카운터 뒤 수납장에서 찜질방복 같은 반팔과 반바지, 그리고 비닐에 담긴 물건을 건넸다.

"이건 뭐에요?"

"1회용 팬티요. 들어가셔서 갈아입으세요."

"네."

주인의 안내에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싸구려 독서실처럼 복도 좌우로 붙은 방들이 보였다. 붉은 조명 빛이 괜스레 음란하게 느껴졌다.

[왠지 불건전 업소 같은데요?]

‘입구에 커플 환영이라고 써있던 걸?’

[그런 업소가 호객행위를 그리 했을까요? 다 위장이죠.]

‘뭐, 아무렴 어때? 어차피 마사지만 받다 한숨 자고 나올 건데.’

[흠···.]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가자 조그만 공간 안에 메트리스가 깔려있었다. 외투를 걸 수 있는 나무 옷장과, 샤워시설이 전부인 단촐한 방이었다. 조명은 유난히 어두웠고, 향초를 피웠는지 은은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잠시만 씻고 기다리심 돼요. 좀 있다 아가씨 넣어 드릴게요."

"아, 네."

주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도훈은 오랜만에 초조해졌다.

‘흠, 몸 바뀌고 이런 데는 처음인데···.’

이도훈으로 바뀐 뒤 도훈은 여자가 궁한 날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여자들을 자빠뜨렸고, 하루에 두 서너명 동시에 여러명과 관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들여 꼬시는 것만 반복하다 보니 조금은 지치는 것도 사실이었다. 때론 알아서 해주는 여자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흐흐, 오랜만이라 긴장되는데?’

도훈이 탈의를 하고 샤워실에서 몸을 씻었다. 찬물이 몸에 닿자 취기로 인한 졸음도 함께 사라졌다.

몸을 닦고 1회용 팬티와 반팔과 반바지를 걸치고 누워있으니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렸다.

< 544. 거자필반-4-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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