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2. 교생 실습-36- >
***
도훈이 일본에서 귀국하기 하루 전.
대낮부터 딸을 치다 엄마에게 걸리는 바람에 등짝 스메슁을 얻어맞은 태영은 홀로 PC방에 처박혔다.
거기서 그는 도훈이 대물 배트맨임을 확인하는 증거들을 수집하게 된다.
그때,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를 매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바로 PC방 사장.
‘저 학생 수상한데···. 겜하다 말고 왜 구석 자리로 옮기는 걸까?’
태영이 앉은 구석 자리는 에어컨 바람이 잘 들지 않아, 손님들에게도 별 인기가 없는 위치였다. 그런 곳을 굳이 자리 옮김까지 해서 이동하는 태영의 모습이 의아했던 사장은 조심스럽게 좌석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켰다.
‘요새 하도 사건 사고가 잦아서 말이지. 괜히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기라도 되면 우리 가게만 피 본단 말씀이야.’
예전 한 번은 누군가 PC방에서 금융 기관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바람에 경찰서에 가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일전의 일로 교훈을 얻은 사장은 태영의 컴퓨터에 뜬 작업 목록을 유의 주시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동영상 플레이어라···. 흠. 뭘 보는 거지?’
사장은 태영이 앉은 좌석 PC를 더블클릭했다. 상세 정보를 보면 현재 그가 무슨 싸이트에서 접속했는지까지 알 수 있었다.
‘도쿄···핫? 이게 뭐지?’
곰곰이 머리를 굴리던 사장은 그것이 익숙한 BGM과 함께 야동 첫 장면에 등장하던 성인 레이블의 타이틀임을 깨달았다.
‘와, PC방에까지 와서 야동 싸이트를?’
사장의 예상과 달리 태영이 외진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이유는 야동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여간 젊은 녀석들이란···. 그 혈기마저 부럽구먼!’
사장은 므흣한 마음으로 태영에 대한 감시를 그만두었다. 동시에 자동으로 리셋되도록 잡혀 있는 하드 설정을 태영의 컴퓨터만 해제시켰다.
‘음음, 나중에 한산해지면 가서 다운 받아야지.’
사장이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옆구리를 푹 찔렀다.
"대장, 뭐하쇼?"
"아이, 깜짝이야!"
"왜 그렇게 놀래요? 야동보다 들킨 고딩도 아니고."
"아, 아니 갑자기 뒤에서 훅 들어오니까 놀랄 수밖에! 너 내가 카운터 함부로 드나들지 말랬지? 엉? 니가 우리 알바냐? 너 손님이야 인마."
"거참, 되게 틱틱거리시네. 지난주에 로또 사러 간다고 나한테 가게 좀 봐 달라 한 건 까맣게 잊었죠?"
"그, 그건 그때고."
사장이 조심스럽게 모니터 화면을 몸으로 가리자 뭔가를 눈치 챈 창범이 갑자기 딴소리를 했다.
"참, 나 라면 하나만 끓여줘요."
"손 없냐? 니가 끓여 쳐드세요."
"아까는 손님이라면서요?"
창범이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장이 필사적으로 스크린 플레이를 펼쳤다.
"아깐 맞고, 지금은 틀려!"
"왜 자꾸 말 바꿔요? 그리고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죠?"
"수, 숨기긴 뭘?"
"에이,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귀신 잡아 본 적은 있고?"
"그거야 퇴마 능력자들이 하는 일이죠. 자꾸 이러면 간파 능력 사용합니다?"
그 순간 창범의 동공이 파랗게 빛이 났다. 그 모습을 본 사장이 대경실색하며 목소리를 깔았다.
"눈깔 똑바로 안 뜨냐? 너 내가 사람들 앞에서 능력 쓰면 어떻게 되는지 말 안했어?"
사장이 갑자기 진지해지자 창범이 다시 피식 웃으며 힘을 풀었다.
"그러니까 그냥 보여주면 되잖아요. 지금 모니터 뒤에 뭘 숨긴 거 아니에요?"
"안 숨겼다니까?"
"저기 계산요."
그때 고등학생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더니 카운터 앞에 섰다. 사장이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에이씨, 하필 이때···.’
"뭐해요? 계산해 달라잖아요."
"아, 알았으니까 넌 저리 가라고."
"라면 끓여 먹을라고 있는 건데?"
"이게 진짜···."
"아저씨 계산 좀요."
"아, 알았어."
결국 사장은 계산을 위해 모니터 화면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깐족거리던 창범은 화면에 뜬 내용이 별 다를 게 없자 김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별것도 없구만, 괜히 사람 궁금하게."
"그래서 내가 뭐 없댔잖아. 몇 번 좌석이었지?"
"51번부터 55번까지요. 한 번에 다 계산해 주세요."
"12,000원 나왔다."
"여기요."
그때 창범은 화면에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금액만 찍혀 있는 다른 좌석과 달리 한 좌석이 클로즈업된 체 가동 중인 프로그램 목록이 떠 있었던것이다.
"근데 대장, 이건 뭐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인마."
"안녕히 계세요."
"어, 다음에 또 와라."
어수선한 카운터 분위기에 정신이 없는 사이 창범이 미간을 찌푸리며 모니터링 화면에 뜬 프로그램 목록을 확인했다.
"대물남의 일본 원정기 3부? 지금 영상 프로그램 제목이 저거에요? 허! PC방 와서 야동 트는 미친놈이 다 있네."
"야! 너 조용히 안 해?"
"설마 대장, 손님이 뭐 보고 있는지 감시하고 있던 거에요?"
"콱! 조용히 하래도?"
사장이 창범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볍게 말아 쥔 것 같은데도 팔목이 으스러질 것 같은 악력이 느껴졌다.
‘미, 미친! 내 손목을 아작 낼 셈인가?’
"대, 대장 말로 해요, 말로."
"말로 하면 안 들으니까 그렇지."
"그렇다고 같은 팀끼리 팀킬 하기 있습니까? 역발산기개세를 여기서 펼쳐요?"
"내가 너 경고했어. 한 번만 더 큰 소리 냈다간 두어달 깁스 찰 줄 알아."
사장이 으름장을 놓으며 손목을 놓아주자, 창범이 식겁한 얼굴로 손목을 돌려 이상 유무를 확인했다.
"휴, 손목 아작나는 줄 알았네."
"그러게 왜 까불어, 까불긴?"
"아니 그거야 대장이 찔리는 게 있으니까···."
"야!"
"아니에요. 근데 누군데요? PC방까지 와서 그런 거 보는 손사람이?"
사장이 조심스럽게 구석 자리를 가리켰다. 창범은 고개를 내밀어 태영의 뒤통수를 확인하더니 피식 웃었다.
"나 참, 대가리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내가 가서 확 조지고 올까요?"
"놔둬. 쟤 대학생이야."
"대학생이요?"
"어. 몇 번 친구들하고 게임 하러 온 적 있거든. 안면이 있어."
"아니 왜 대학생이나 되는 녀석이 PC방 와서 그딴 걸 본데요? 집구석에서 딸이나 치지. 혹시 변탠가?"
"인마. 저 나이 땐 느닷없이 피가 끓기도 하는 거야. 사내라면 이해해 줘야 한다."
"얼씨구. 아재 꼬추는 서고 하는 말이죠?"
"이게 진짜 뒤질라고."
사장이 다시 주먹을 말아쥐자 창범이 놀란 표정으로 뒤로 도망쳤다.
"거참 오늘따라 폭력적이시네. 욕구 불만이세요?"
"니가 폭력을 부르는고 있네, 아주."
"됐고. 난 라면이나 끓여 먹을 랍니다."
"계산 달아 놓는다. 외상 끊을 생각 마라."
"뉘에뉘에."
"이 새끼가 진짜."
창범이 혀를 날름 내밀고 조리실로 들어가자 사장이 혀를 끌끌 찼다.
"하여간 저 새끼, 싸가지 하고는···."
그때 태영이 컴퓨터를 끄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까부터 태영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사장은 카운터를 지나 바로 출입문으로 나가는 태영을 불러 세웠다.
"어이 학생. 계산은 하고 가야지."
"저 선불로 냈는데요."
모니터를 확인하자 요금이 선불로 찍혀있었다.
"아, 미안하군. 알바가 전달을 안해서."
"아니에요. 안녕히 계세요."
태영이 나가자 걸레를 들고 일어선 사장이 태영의 자리를 치우며 몰래 컴퓨터에 USB를 꽂았다.
‘흐흐. 창범이 녀석 야간 근무 나가면 몰래 봐야지.’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헉!"
사장의 뒤에선 컵라면을 들고 라면을 후르륵 하고 있던 창범이 음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 뭐, 뭐야. 라면 끓이러 간 거 아니었어?"
"귀찮아서 컵라면 먹는데요? 근데 USB는 왜 챙겼데요?"
"아, 아니··· 자료 백업할 게···."
"뻔히 다 들켰는데 왜 그러실까? 방금 그 학생이 받은 거 빼 낼려고 그러죠?"
"흠흠!"
사장이 민망한 듯 머릴 긁적였다.
"아니 제목이 재밌어 보이길래···."
"풉. 그래도 아직 꼬추는 서는 가 보네."
"라면 먹다가 맞아 죽은 사람 있다는 얘기 아직 못 들어봤지?"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 거 아시죠?"
"설마 네가 개보다 위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꾸 이러면 미호한테 다 일러요?"
"야야, 그건 아니지."
사장이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뭐가 아닌데요?"
"남자들 사이엔 지켜야 할 룰이 있는 거야."
"그러게 왜 자꾸 사람을 협박해요?"
"알았어. 그 컵라면 공짜로 줄게."
"웬 열? 수전노 대장이?"
"그러니까 미호한텐 비밀이다."
"미호가 그렇게 신경 쓰여요?"
"걔는 좀 이상하잖아. 특히 이런 쪽으로는."
"크크. 컵라면 받고, 저도 공유하는 조건으로."
"이 자식···. 콜."
두 사람이 씨익 웃었다.
***
다음날 대장은 팀원을 긴급 소집했다. 아침 일찍부터 내려온 소집 명령에 철야 근무를 하고 온 창범이 피곤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요 대체? 본부에서 명령 하달됐어요?
"봤냐?"
"뭘 봐요? 난 테블릿도 없구만."
"아씨, 어제 준 USB 말이야."
"USB요? 아, 이거? 야간 잔업 뛰느라 아직 못 봤죠. 난 집에 가서 볼라 그랬지."
창범이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미호가 물었다.
"그건 뭐에요?"
"아, 아··· 이, 이게 그러니까."
"흐음? 두 사람 설마 나 빼고 자료 공유 하는 거?"
미호가 눈을 가늘 게 뜨며 대장과 창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가 눈웃음을 치는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미호, 사실은···."
"사장님이 야동 담아 준거야."
"야동?"
"아, 아니 그러니까 이건 내가 받은 게 아니고···."
"어머, 대장 그런 쪽 관심 있었어요?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요."
미호가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꼬아 앉았다. 그 모습에 창범이 쳇- 콧방귀를 꼈고, 대장은 민망해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영상 한 번 보라고."
"대장,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셋이 같이서요? 흐음, 쓰리썸은 오랜만인데···."
"미쳤어? 누가 너랑 한데?"
"그럼 넌 관전만 해."
"그게 아니라니까 그래!"
대장이 언성을 높이자 말장난을 하던 두 사람이 급진지해졌다. 대장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단순한 야동이 아니야."
"그럼 노몹니까?"
"아이씨, 장난치지 말라고. 내가 설마 아침부터 미쳐 가지고 니들 소집했겠어?"
"근데 야동을 왜 셋이 보자는 건데요?"
"실은 어제 혼자 새벽에 이걸 봤는데."
"어머, 대장님 화끈하시다. 손님들도 있었을 텐데···."
미호의 지적에 대장이 벗겨진 뒤통수를 긁적였다.
"으, 음. 이건 미호씨가 이해해 줘. 남자들은 가끔 그럴 때가 있거든."
"알죠. 잘 알다마다. 남자에 대한 거라면 나만큼 아는 여자가 있을까?"
"어련하시겠어, 몇 백살 묵은 할망군데."
"너 혼나볼래?"
"잠깐, 잠깐 이 얘기 하려던 게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등장한 사내 말이야. 일반인이 아닌 거 같아서 그래."
"설마 플레이어?"
"아니 아직은 무엇도 단정할 수 없어. 그래서 너희들하고 같이 의논해 보자고 부른 거고."
"와, 밤새 조뺑이 치고 왔더니 야동이나 같이 감상하자고 부른 거라니···."
"일단 보고나 말해. 그럼 내가 무슨 말 한 건지 알 테니까."
대장은 구석진 자리 컴퓨터를 켠 뒤 USB를 삽입시켰다. 곧 태영이 받아놓고 휴지통에 넣고 간 파일이 세 사람 앞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가면을 쓴 대물 배트맨이 바지를 벗는 씬에 이르자, 창범이 졸린 눈을 비비며 소리쳤다.
"이야, 고놈 엄청 실한데?"
미호 역시 혀를 날름거렸다.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네요."
"아니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일단 계속 보라고."
"아, 저 근데 여자랑 이런 거 같이 보긴 처음인데···."
"어머, 내가 여자로 보이니?"
"아, 맞지. 생기 빨아 먹는 구미호였지? 간빼먹는 괴물."
"흥!"
다시 영상을 보던 세 사람은 왠지 모를 어색함 속에 계속 엄한 소리만 쏟아냈다.
"으음. 저기서 저걸···."
"캬! 진짜 난 놈일세."
"하아, 나 어째 좀 흥분되는 거 같은데?"
그때였다. 도훈이 스킬을 발휘하는 시점에 이르자 대장이 갑자기 스페이스 바를 누르며 영상을 정지시켰다.
"아씨, 왜 끊어요? 한참 좋았는데."
"봤어?"
"응. 좀 이상하네요? 다시 돌려봐요."
전혀 눈치를 못 챈 창범과 달리 두 사람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영상을 뒤로 돌려 다시 도훈이 스킬을 사용하는 장면이 반복되었다. 보통 사람은 알아차릴 수 없지만, 플레이어 킬러인 이들에겐 도훈의 행동이 절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수상하지?"
"뭐가 수상한 건데요?"
"저거 플레이어 맞는 거 같은데."
"엥?"
창범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대장과 미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제 두 사람은 창범을 사이에 두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이 영상, 혹시 본부랑 공유했어요?"
"아직은. 긴가민가해서. 근데 미호씨 말 들어보니 확신이 드네."
"아니 대체 뭔 얘길 하는 건데요?"
"아직 공유하지 마요."
"왜?"
"본부에서 알게 되면 관할 구역을 핑계로 다른 팀에게 임무를 넘길지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플레이어일지도 모르는데 보고부터 해야 하지 않겠어?"
"아니요. 저 친구, 내가 꼭 잡고 싶거든요."
미호가 정지된 영상의 도훈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 492. 교생 실습-3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