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7. 교생 실습-31- >
***
체육 선생의 개입엔 명백한 의도가 느껴졌다.
나와 현아가 단둘이 있는 장면이 상상조차 싫은 거다.
[거참, 유부남 주제에 왜 저러는 걸까요?]
‘그러게. 추하다 추해. 연애를 즐기고 싶었음, 결혼이나 하지 말던가? 연애의 자유분방함과 결혼의 안정감은 양립할 수 없는 건데 말이야.’
[주인님처럼요?]
‘그래. 나도 솔직히 사귀고 싶은 사람 있어도 꾹 참잖아.’
[혹시 육정음양 말씀인가요?]
‘흐음, 후보가 한 명이라는 말은 안 했는데···.’
[대체 욕심이 어디까지 신 겁니까?]
‘하나밖에 고를 수 없는 게 너무나 아쉽단 소리야.’
도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지금껏 수많은 여자를 만났다.
첫 번째 미션 대상이었던 편의점 알바부터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유난히 가슴이 컸던 편의점 모녀.
그리고 대학에서 만난 후배와 선배들. 어디 학생들 뿐인가?
조교에 교수에, 생각해 보니 배다른 이복 여동생에 금발의 백마도 있었다.
필라테스 강사로 전향한 송미나나, 성방 BJ에서 어엿한 9급 공무원이 된 하서윤도 가끔 생각난다.
하나같이 매력터지는 여성들을 두고 딱 하나만 고르는 것은 고문이 아닐 수 없다.
아, 우리나라는 왜 일부일처제인 걸까?
"현아샘, 내가 도훈이 태워 주고 갈 테니 걱정말고 들어가."
이 정도면 눈치가 없는 게 아니다.
이건 눈치가 빠르다고 봐야한다.
체육 선생 김봉두는 현아의 묘한 눈빛에서 나에 대한 호감을 읽은 게 틀림없다.
‘젠장. 우습게 보다가 큰코다쳤군. 볼링공에 소시지까지 박아서 예열시켜 놨더니 개봉도 못 해보게 생겼네.’
하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 시선도 있는데, 굳이 처녀 선생의 차를 얻어 타는 모습은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일단은 일보 후퇴다.
"감사합니다, 체육 선생님."
현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 그래요 뭐···. 체육 선생님 댁이 가는 길이라니까···. 그럼 내일 보자 도훈아."
"네."
현아가 물러나자 체육 선생은 한참동안 그녀의 달라붙은 청바지를 훔쳐보았다. 아재요, 그런다고 안 뚫립니다.
"크흠, 그럼 우리도 가볼까?"
"넵."
물론 이대로 물러설 내가 아니다. 나는 핸드폰을 보는 척하며 현아의 폰 번호를 재빨리 외웠다. 첫 대면 당시 담임 연락처라고 받아놓은 것이다.
그리고는 주차장에 구석에 폰을 숨겼다. 누군가 주워가면 곤란하므로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자리였다. 체육 선생의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그가 넌지시 물었다.
"도훈이는 고향이 어디야?"
"서울이요."
"근데 자취를 해? 집이 학교에서 먼 가?"
"부모님이 여동생 유학 뒷바라지 한다고 외국에 같이 나가셨거든요."
"아하, 그런 사정이 있었고만? 한국에 가족도 없이 혼자 있으니 많이 외롭겠어."
"처음엔 힘들었는데 이젠 혼자 지내는 게 익숙해서 괜찮아요."
"혹시 아프면 돌봐줄 사람은 있고?"
"글쎄요,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얼른 여자친구 사귀어야겠네."
"그런가요?"
"그렇지. 건강할 땐 잘 몰라. 근데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얼마나 서럽다고? 여자친구라도 있어야 옆에서 병간호라도 해줄거 아냐."
"그건 생각 못 했네요."
"이번에 실습생들 괜찮은 아가씨 많던데 진짜 마음에 드는 사람 한명도 없어? 내가 진짜 적극적으로 밀어줄게. 같은 체육인이잖아. 하하. 그리고 원래 옆에서 바람 잡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될 것도 되는 법이거든."
속이 훤히 보였다.
겉으로는 나를 도와주는 척하며 현아에게서 떼어 놓기 위한 얄팍한 수작에 불과하다.
아저씨, 이러면 와이프한테 안 미안 하쇼?
나는 속으로 그 말을 꾹 삼키며 대충 둘러댔다.
"실은 군대 갔다 이번 학기 복학한 거거든요. 이제 서너 달 지났는데 적응하기에도 정신없고···."
"그랬었어? 그럼 딱 여자친구 만날 시기 됐네."
김봉두는 포기를 모르는 집념의 사나이였다.
이런다고 현아가 자신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텐데···.
더 다퉈봐야 계속 설득하려 들것 같아 적당히 받아주기로 했다.
"안 그래도 조금은 생각 중이에요."
"오, 누군데? 역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었구만? 하여간 젊은 사람들은 가까이 붙여 놓으면 저절로 스파크가 튄단 말이지. 하하!"
"딱히 정한 사람이 있는 건 아니구요."
김봉두는 불안했던지 슬슬 범위를 좁혀갔다.
"내가 사겨 보니 여자는 2~3살 어린 게 좋더라. 남자들 정신 연령이 살짝 어리잖아. 대화를 해보면 딱 코드가 맞거든."
"그래요?"
"도훈이 너도 막 군대 전역했으면, 1,2학년 정도가 젤 어울릴 거야. 뭐니 뭐니해도 여자는 어린 게 최고잖아? 안 그래?"
아주 현아한테 눈독 못 들이게 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다.
사실 현아는 처음부터 공략대상이 아니라 별 마음이 없었으나, 지레 겁먹고 훼방을 놓는 체육 선생의 존재가 나의 도전 정신에 불을 당겼다.
게다가 유부남이란 작자가 처녀 선생에 정신이 팔려있다는 사실도 괘씸했다.
‘도저히 눈뜨고 못 봐 주겠군. 이젠 하지 말래도 현아샘 따먹고 만다.’
[주인님을 자극하다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셈이군요.]
‘맞어. 나 사자. 짐승 중에 짐승이지.’
"앗. 저기에요. 저쪽 승강장 근처에 세워 주심 돼요."
"집이 가깝네? 10분도 안 걸린 것 같은데."
"그래서 원래 택시 타려고 했는데···."
"아니야. 그 돈 아껴서 나중에 여자친구 생기면 맛있는 거 많이 사줘."
정차한 차에서 내리며 체육 선생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생님."
"선생님은 무슨. 사석에선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네, 형! 감사합니다!"
"어. 내일 보자."
체육 선생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급하게 공중전화를 찾았다. 최근에는 공중전화 부스가 많이 사라져, 찾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아직 현아가 가는 길이어야 할 텐데···.’
***
대기 신호에 걸려있던 현아가 신경질적으로 폰을 집어 던졌다. 폰은 보조석 쿠션을 맞고 통통 튀어 올랐다.
"에이씨, 눈치라곤 쥐뿔도 없는 양반 같으니."
그녀가 홧김에 폰을 던진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도훈을 그대로 떠나 보내고 열 받아 있던 찰나에 체육 선생이 조심히 들어가라며 안부 문자를 보낸 것이다.
"짜증 나. 지는 결혼했으면서 왜 남의 청춘사업을 방해하느냐고!"
기대가 실망으로 변했을 때의 좌절감이 그녀를 분노케 했다. 그녀는 지금이라도 차를 돌려 나이트라도 들를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하아···. 진짜 오늘은 그냥은 못 잘 것 같은데···.’
볼링장 화장실에서 느낀 오르가즘은 그녀를 더욱 안달나게 만들었다. 자위만 해도 이렇게 좋은 날, 사내의 묵직한 것이 들어 온다면 얼마나 기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냥 확 대놓고 도훈이한테 들이대버려?’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괜한 짓을 했다간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너무 뒤가 없잖아 그건. 거절당하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어.’
현아는 도훈의 폰 번호를 알고 있지만, 차마 먼저 연락할 수 없었다. 오늘 밤 너무 뜨거우니 나 좀 식혀달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다.
결국 그녀의 모든 원망은 마지막에 초를 친 체육 선생에게로 돌렸다.
"하여간 그 양반은 인생에 도움이 안 되요 도움이. 맨날 시비나 걸고."
띠리링-
그때 전화가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엄만가?’
그녀는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에 사시는 부모님이 가끔 안부 전화를 거는 편이었다. 무심결에 전화기를 들어 확인하자 이상한 번호가 떠올라 있었다.
‘응? 스팸인가?’
전화를 무시하려던 현아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혹시 정현아 선생님 핸드폰 맞나요?
"누구세···. 혹시 도훈이?"
그녀의 목소리가 들뜨기 시작했다.
-네, 네. 밤늦게 죄송해요.
"아니야. 무슨 일인데? 목소리는 왜 그렇게 다급해? 이 번호는 또 뭐고?"
-제가 실수로 폰을 흘렸나 봐요. 분명 들고나온 것 같았는데 집에 도착하니 없더라고요.
"정말? 혹시 김 선생님 차 안에 흘린 건 아니고?"
-모르겠어요. 우선 생각나는 번호가 선생님밖에 없어서 전화 드리게 됐어요. 죄송한데 체육 선생님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현아가 빠르게 머릴 굴렸다.
‘잠깐, 이거 잘하면···.’
"도훈아. 일단 체육 선생님에겐 내가 연락해 볼게. 근데 볼링장에 두고 왔을 수도 있으니 거기도 들러야 하지 않겠니? 영업 종료하면 못 찾을 텐데."
-네. 그래서 바로 택시 타고 가려고요.
그녀는 좌회전 신호가 바뀌기 직전 급하게 U턴을 시도했다. 어쩌면 도훈이 폰을 잃어버린 사실이, 자신에게 엄청난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훈아. 일단 다른 곳에 흘렸을 수도 있으니까 선생님도 볼링장쪽으로 차 돌릴게. 누군가 전화를 해줘야 찾기 쉬울 거 아니야."
-아, 아니에요. 그건 너무 죄송한데···.
"괜찮아. 우리 반 교생인데 이게 뭐라고. 마침 신호가 많이 걸려서 별로 안 멀어. 10분 안에 도착할 거야."
-고마워요 선생님. 저도 금방 택시 타고 출발할게요.
"응. 그래. 주차장에서 보자."
전화를 끊은 현아는 주먹을 움켜쥐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이쓰! 이게 웬 횡재람? 체육 선생 때문에 오늘은 물 건너간 줄 알았더니!"
모든 것이 도훈이 꾸민 덫이였지만, 그런 생각은 꿈에도 못하는 현아였다.
볼링장 주차장엔 현아가 먼저 도착했다.
잠시 후 도훈도 택시에서 내렸다.
"도훈아, 이쪽."
"아, 선생님!"
도훈이 당황한 표정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체육 선생님께선 뭐래요?"
"응, 아까 톡 보냈는데 아직 답이 없네."
물론 거짓말이었다.
당장은 거짓말이지만, 내일 아침쯤엔 진실로 만들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김봉두 그 인간에게 지금 전화했다간 또 훼방 놓으려고 할 게 뻔해. 일단 모른 척 있다가 내일 아침에 문자만 남겨야지. 그럼 알리바이 성공이니까.’
"음, 일단 볼링장부터 찾아볼래?
"아니에요. 분명 거기선 들고나온 기억이 나거든요.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 답장도 보냈었고요."
"그래? 그럼 어디서 잃어 버렸을까?"
"어쩌면··· 여기 주자창에서 체육 선생님 차 타기 전에 흘렸을 수도 있어요."
"혹시 무음으로 안 되어 있으면 내가 전화걸어 줄까?"
"그래 주시겠어요?"
도훈의 간절한 표정에 현아가 기뻐했다.
‘히히, 이렇게라도 신세를 지게 해서 미안한 마음 들게 해야지.’
현아가 전화를 거는 사이 도훈이 주차장 사이를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주차장 구석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저, 저기!"
도훈이 재빨리 달려가더니 어두컴컴한 곳에서 핸드폰을 주어왔다.
"찾았어?"
"네! 담배 피우다 흘렸었나 봐요.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아니었음 폰 잃어버릴 뻔했네요."
도훈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현아에게 감사를 표했다.
"에이,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래도 찾아서 다행이다."
"전역하고 바로 산 거라 아직 할부도 남아있었거든요."
"그랬구나. 근데 너 내 번호는 어떻게 알고 전화한 거야?"
현아의 물음에 도훈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담인 선생님 폰 번호라 그냥 외웠어요. 제가 원래 중요한 번호는 외우는 버릇이 있어서···."
[순 거짓말쟁이시군요. 주인님 번호 같은 거 잘 못 외우잖습니까?]
‘아니야 인마. 옛날엔 진짜 한 번 본 번호는 까먹지도 않았어. 도훈이 이놈이 빡대가리가 그게 안되는 거지.’
[어쨌든요.]
도훈의 거짓말에 현아가 감격한 표정이 되었다.
‘어머나! 내가 도훈이한테 그토록 중요한 사람이었다니···. 혹시 여자로서는 아니겠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얘. 폰 찾았으니 집에 가자. 내가 데려다 줄 게."
도훈이 한사코 사양했다.
"아니에요. 저 때문에 집에도 못 가시고 다시 돌아오셨잖아요. 오히려 제가 모셔다 드려야죠."
"넌 차 없잖아."
"선생님 차 타고 배웅해 드리고 갈게요. 그냥 가면 제가 너무 죄송해서···."
현아는 자신의 계산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들뜬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자 도훈이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잡아 먹히는 건지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있군. 현아도 은근 순진하단 말이야.’
[그러게요. 주인님을 키워서 잡아먹는다니···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모르지 않습니까?]
‘후후. 어쨌든 착각은 자유지. 오늘은 한 번 잡아 먹히는 시늉이나 내 봐야겠다.’
"아님, 제가 대리라도 해드릴까요?"
"너 운전도 할 줄 알아?"
"네. 군대 있을 때 운전병이었어요."
[언제는 취사병이라지 않았나요?]
‘그냥 군대는 전가의 보도야 인마.’
[아하!]
현아는 대리 기사를 자청하는 도훈의 제안을 거절했다.
"괜찮아. 술 먹은 것도 아닌데 뭘."
"그래도···."
"그래. 일단 집으로 가자. 더 끌다간 택시비 할증 붙겠다."
"네."
도훈을 차에 태운 현아는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착착 맞아 떨어지는 것이 오늘은 왠지 재수가 좋은 것 같았다.
‘아이참, 키워서 잡아먹을 계획이었는데 잡아먹고 키우게 생겼네?’
도훈 또한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요망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군. 그래 어디 계속 착각해봐. 누가 상위 포식자인지는 붙어 보면 알게 될 테니까.’
도훈이 순진한 표정으로 현아에게 물었다.
"와, 차에서 좋은 냄새 나네요. 아까 체육 선생님 차는 안 그랬는데."
< 487. 교생 실습-3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