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1. 조각모음-9- >
옛말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퇴라 했다.
남자들끼리 합석하는 1차는 아군의 팀웍을 다지는 시기기도 하지만 언제든 돌아설지 모르는 적군을 파악하는 시기다.
나는 예정된 시간보다 15분 먼저 도착해 동태를 살폈다.
조각 멤버는 나를 포함 모두 여섯.
채팅방에서 공개한 프로필만 보면 화려하기 짝이 없다.
방장인 클럽 매냐는 호빠 선수 뺨치는 외모의 소유자.
수많은 조각과 원나잇 경험으로 무장한 진정한 ‘꾼’이다.
전설의 대물남 본업은 헬스 트레이너다.
자기말로는 보디빌딩 대회에서 입상한 적도 있다 했다.
벗겨봐야 아는 거지만 본인 입으로는 대물이라나 뭐래나?
가장 연장자인 홈런만 친다는 셀러리맨이다.
제법 돈을 버는지 값비싼 외제차를 몬다.
스물아홉에 외제차면 아마 연봉이 센 기업을 다니는 것 같다.
닉네임부터 음탕한 섹스피스톨은 따지고 보면 내 후배다.
정문의 독특한 구조물 덕에 ‘샤’대라고도 불리는 한국대 생명공학부 출신. 내가 까마득한 선배라는 걸 알면 얼마나 놀랄까?
마지막으로 막내인 보픈각은 B-Boy 출신의 대학생이다.
스테이지에 오를 기회가 온다면 가장 경계해야 할 1순위.
의외로 다크호스 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여기서 얼굴을 아는 멤버라곤 방장 뿐이라는 거다. 나는 술집 부근에서 담배를 태우며 가게로 들어가는 손님들을 주시했다.
담배가 줄 담배로 이어질 무렵, 갓길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BMW다. 혹시 홈런만 친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짙은 색 양복을 빼입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만 봐선 도저히 20대로 보이지 않았다.
‘분명 스물아홉이라지 않았냐?’
[서른아홉이래도 믿겠는데요?]
‘진짜 20대라면 엄청난 노안인데.’
다가가서 인사를 할까 하는데, 나보다 먼저 후드티를 입은 꼬맹이가 쭈뼛쭈뼛 다가갔다.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 홈런님?"
"누구?"
"저 보픈이요."
"아! 그 춤춘다는?"
"네, 말 놓으세요. 저보다 훨씬 형님이신데."
"그럴까?"
‘뭐야? 저 찐따 새끼는?’
춤추는 애들 중에 살찐 애를 찾아보기 어렵다지만 보픈각은 너무나 마른 체형이었다. 나름 멋을 낸다고 배기팬츠에 7부 후드티를 입고 나왔는데, 드러난 팔뚝이 계집애처럼 가늘었다. 게다가 키는 또 어찌나 작은지···.
‘170도 안 돼 보이는데?’
[작긴 작군요. 하지만 키가 크다는 말은 안했으니까.]
‘그래도 무슨 와꾸가···.’
갑자기 자신감이 솟았다.
홈런만 친다는 엄청난 노안에, 춤꾼인 보픈각은 피죽도 못 얻어먹을 것처럼 빈티나는 말라깽이다. 이런 녀석들이 당장이라도 원나잇 할 것처럼 유세를 떨었다니···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들리는 대화 역시 가관이었다.
"우아, 진짜 차 좋네요. 이거 비싼 차죠?"
"아니, 중고야. 20만 키로 넘게 탄."
"그래요? 전 차를 잘 몰라서 그냥 좋아 보이는데."
큭. 돈 좀 있는 척 유세를 떨던 홈런만 친다는, 20만 킬로 넘은 중고 BMW를 모는 허세남이었다. 자세히 보니 디자인도 상당히 구식이다. 저 연식에 킬로수까지 감안하면, 어지간한 국산 중형차만도 못할 것이다.
‘뭐야? 내가 이런 것들 때문에 긴장했단 말이야? 그냥 존나 병신들이잖아?’
[이제 겨우 두 명입니다. 아직 방심 마시죠.]
‘안 봐도 비디오지. 이것들이 죄다 입만 살아가지고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사이버 세상이라지만, 쳇방에서 보여준 패기와 자신감은 다 뭐였단 말인가?
두 사람이 술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또 다른 한명이 합류했다. 둘에 비하면 비교적 멀쩡히 생긴 청년이었다.
"나이트 조각 오신 분들 맞죠?"
"네."
"차보니까 딱 알겠더라고요. 전 피스톨입니다."
"오 섹스님!"
"···아니 사람들 있는데서 닉넴 크게 말하진 말고요."
샤대생이라고 학벌 자랑을 늘어놓은 섹스피스톨은 그나마 셋 중 외모가 가장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도 쟤가 제일 낫네. 키도 적당하고 옷 입는 센스도 좋은 것 같고.’
[제 말이 맞죠? 어디나 진국이 있는 법이죠.]
‘일단 좀 더 지켜보자고.’
나는 담배를 비벼 끄고 세 사람이 모인 곳으로 합류했다.
"안녕하세요. 불기둥입니다."
"아, 불기둥님!"
"와, 기둥님 키 되게 크시네."
"미남이시네요."
"별 말씀을···, 감사합니다."
나의 등장에 다들 긴장하는 눈빛이었다.
짜식들.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알면 더 놀랄걸?
"톡방 보니까 방장님이랑 대물남님은 먼저 들어가 있다고 하네요."
"그래요?"
"우리도 들어가죠."
호프집에 입성하자 단박에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테이블 두 개를 연달아 붙인 구석 자리에 호리호리한 미남 한명과 덩치 큰 떡 대 하나가 앉아 있었다.
[방장은 사진 그대로군요.]
‘그러게. 근데 보디빌더는 어디가고 웬 마동석이 앉아 있냐? 근육이 아니라 그냥 비계 덩어리아냐?’
[흠흠, 확실히 보여준 사진하곤 거리가 머네요.]
‘멀다고? 저건 먼 정도가 아니지. 어디서 남의 사진 도용해서 구라를 쳐? 어쩐지 얼굴 안보여줄 때부터 수상하더라니만···.’
"다들 일찍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클럽 매냡니다."
"안녕하세요."
"이야, 역시 우리 에이스!"
방장이 일어서서 우릴 반겼다.
동시에 놈의 시선이 빠르게 좌우를 스캔했다. 놈은 쭉정이들을 대충 지나치다 나에 이르러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빠르게 감정을 숨기며 이내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다들 훤칠하시네요."
놈의 목소리에서 가식이 뚝뚝 느껴진다. 분명 실망했을 텐데 마음에 없는 소릴 하면서 표정 변화조차 없다.
‘타고난 포커페이스 일까?’
[네?]
‘방장 말이야. 지금 가면 쓰고 있잖아.’
[확실히 부자연스런 미소군요. 눈매와 입술이 따로 놀고 있습니다.]
‘마음의 소리 쿨 타임이 얼마랬지?’
[현 레벨 기준 약 8시간입니다.]
‘3분밖에 못쓰니 아껴 써야겠군.’
"저 방장님만 믿고 왔잖아요."
노안인 홈런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엔 그토록 자랑하던 BMW 키홀더가 걸려 있었다.
‘키홀더 과시하는 것은 습관인가? 이걸로 확실해. 저 놈은 진짜 별 볼일 없는 놈이라는 거.’
[우선 노안이라는 데서 글러 먹었습니다. 실제 주인님이랑도 호형호제 하게 생겼는데요?]
‘전설의 대물남 또한 뻥쟁이야. 저 몸에 보디빌더라니 지나가던 소가 웃겠어.’
[음메에~]
‘하지 마, 병신아.’
나는 일부러 비곗덩어리를 향해 물었다.
"혹시 현직 트레이너시라는 전설의···."
"네, 제가 대물남입니다. 요샌 비시즌이라 벌크업 중이에요. 이거 싹 다 걷어내면 안에 죄다 근육이거든요. 촤하하."
‘벌크업 좋아하시네, 살크업이겠지 이 돼지 새키.’
우선 다섯 중 셋은 나가리다.
BMW는 허세남.
춤꾼은 그냥 찐따.
트레이너는 비만돼지다.
이건 뭐 묻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내가 멱살 잡고 캐리해야 할 상황이다. 그리고 그건 나만 그렇게 생각한건 아니었나 보다. 방장이 말했다.
"일단 생맥 500씩 시켰어요. 목 좀 축이고 워밍업만 하죠. 그나저나 다들 모이셨으니 슬슬 팀을 짜야 하는데···."
클럽 매냐가 말꼬리를 흐리며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어떻게 해도 견적이 안 나오지?
조각 경험이 많다는 놈의 결정이 궁금해진다.
"···역시 이런 건 랜덤덤으로?"
"네?"
"랜덤요?"
"포지션 따라 나누는 거 아니었어요?"
갑자기 말을 바꾼 방장의 제안에 다들 벙찐 모습이었다. 방장은 빠르게 수습했다.
"아니, 원래 그럴까 생각했는데 막상 모여 보니 다들 출중하신 것 같아서요. 제가 말씀 안 드렸던가요?"
"뭐요?"
"훌륭한 팀웍보다 승률 높은 것은, 에이스 세 명 조합이라고. 이 정도면 와꾸면 굳이 포지션을 가를 필요 없이 각개 전투해도 충분하거든요."
풋, 거짓말이다.
놀라운 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다. 놈의 감언이설에 고갤 끄덕이는 걸 보니, 이것들은 생각이라는 걸 딸딸이 치다 다 빼버린 거 같다.
‘팀원들이 너무 잘날까봐 문제였는데, 오히려 너무 못나니까 더 답 없어 보이는군.’
[어쨌든 주인님이 더욱 돋보이니 좋은 것 아닌가요?]
‘아니 내 말은··· 나하나 믿고 여자들이 계속 자리에 붙어 있을까 하는 거지. 팀 잘못 걸리면 그대로 파토 나겠어.’
"우선 통성명부터 할까요?"
"실명으로요?"
"가명이든 뭐든요. 부를 이름을 있어야죠. 참 우리 나이가 서로 달라서 입 좀 맞춰놔야 돼요. 나이트 갈려고 조각했다고 할 순 없으니."
"직장 회식으로?"
"학생이 많으니 그건 말이 안 되고."
"그냥 대학 선후배 사이는 어때요?"
"여자들 대학생은 돈 없다고 얕잡아 봐요."
"그럼 뭐가 좋을까요?"
"같이 운동하는 동호회 사람들로 하죠. 배드민턴이 무난하네요."
"배드민턴?"
"괜찮네. 나이대도 다양하고, 나이트 올만큼 적당히 친한 사이인걸로."
"오케이, 그럼 그걸로 갑시다."
그때 대화를 이끌어 가던 방장이 테이블 밑으로 몰래 내 발등을 툭툭 쳤다.
‘응? 뭐지?’
"전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말씀들 나누고 계세요."
"그래요."
"어, 맥주 나왔다."
일어서는 방장이 눈을 마주치며 사인을 보냈다. 따라오라는 소린가?
"저도 화장실 좀."
나와 방장 모두 화장실로 향했다.
문을 닫자마자 방장이 말했다.
"불기둥 씨 맞죠?"
"네."
"완전 좆됐어요, 우리."
"네?"
"방금 와꾸 못 봤어요? 저 멤버론 절대 홈런은 무리라고요. 씨발, 입은 존나 털더니 다들 개털이네."
"아···."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는 방장 앞에서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새낀 대체 무슨 소릴 하려고 나를 따로 부른 걸까?
"대학생이랬던가?"
"네."
"내가 형이니까 말 편하게 해도 되지?"
"그러세요."
"솔직히 나도 폭탄 한 두 명까진 예상 했거든? 근데 어떻게 하나같이 지지리 궁상들 뿐이냐. 허-. 너 빼곤 인물이 없다."
방장은 인물이 없다 말하며 내 어깨를 친근하게 툭툭 쳤다.
이 새끼가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전 조각을 별로 안 해봐가지고···."
"해보고 말고가 어딨어? 쟤네 데리고 들어갔다간 여자들 죄다 자동 스프링이야. 앉기도 전에 다 도망갈걸?"
"근데 접땐 에이스 한명만 있어도 된다지 않았어요?"
나는 그가 채팅방에서 자신 있게 던진 말을 상기시켰다. 에이스 한명이면 충분하다는 그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방장의 본심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글쎄, 이건 답 없다니까? 다 같이 죽는 시나리오야. 여자들 한 두명이서 오는 경우는 없어. 여자들도 나름 팀플이야."
그의 설명은 이랬다. 여자들은 은근 의리를 따진다. 그중에 몇은 손해를 감수하며 친구를 밀어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지금 멤버로는 그조차도 어렵다는 거다.
"너라면 쟤들하고 엮이고 싶겠냐? 어휴-. 아주 내상 지대로 입었네."
"그러면 어쩌실 건데요?"
"그나마 샤대생인가 하는 얘가 낫더라. 걔 빼곤 다 버리자."
역시 사람 보는 눈은 모두 똑같구나.
"내가 제비 뽑는 척 하면서 담배 필터에 표시를 할 거야. 그때 무조건 맨 왼쪽 걸로 뽑아. 너부터 고르게 할 테니까."
요는 팀을 가르는 데 조작을 하겠다는 소리.
"굳이 그럴 필요까지···. 그냥 핑계대서 쫑내고 나중에 다시 모이는 게 깔끔하지 않아요?"
"인마. 쟤들은 물주야 물주."
"네?"
"나이트 무조건 엔빵이라고 했잖아. 쟤들이 보태줘야 우리 돈이 굳는 거라고. 넌 그냥 형이 시키는 데로만 따라와. 오늘 홈런 치게 해 줄 테니까."
캬-.
그야말로 쌩 양아치 새끼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았다.
이제야 놈이 조각을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놈이 진짜 팀을 모은 이유는, 순전히 돈을 아끼려는 속셈이었다. 어중이떠중이를 현혹해 룸비를 분담시키고, 결과가 어쨌건 자신은 가장 가능성 높은 조합으로 원나잇을 성사하는 거다. 이러니
타율이 높을 수 밖에. 돈은 돈대로 아끼고.
그야말로 표리부동한 인간의 전형이다. 가만 보니 잘생기긴 했는데, 어딘가 기생오라비 같은 얍삽함이 느껴진다.
"형, 말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
[주인님, 어떡하시겠습니까?]
‘넌 저 말을 믿냐?’
[아뇨. 신뢰감이 뚝 떨어지는데요?]
‘나도 마찬가지야. 저렇게 뻔뻔하게 뒤통수치는 놈이라면 언제든 후두부를 강타할 준비가 되어 있단 소리야. 야비한 놈 같으니.’
[그냥 파기 하시지요. 지금도 새 멤버를 구할 시간을 충분합니다. 오늘은 불금이잖습니까?]
‘아니. 일단 받아들인다.’
[···네?]
‘평생 남을 기만하던 놈에게 본 때를 보여줘야 겠어.’
[아니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왜···.]
‘그냥. 왠지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어.’
[주인님은 뭐든 쉽게 가는 법이 없군요.]
‘그래서, 별로야?’
[아닙니다. 그게 주인님의 매력이니까요.]
"기둥이 어쩔래?"
"···네 뭐. 좋은 생각인 것 같네요."
"그지? 역시 셈이 빠르구나. 어차피 저치들 오늘 보고 말 사람들이야. 의리 따윈 지킬 필요 없다고. 나 먼저 나갈게. 같이 나가면 의심하니까 시간 좀 끌다가 나와. 너 똥 싸는 중이라고 둘러댈게."
"알겠어요."
나는 화장실을 나서는 클럽 매냐의 뒤통수를 보며 생각했다.
‘너랑 나도 오늘 보고 말 사이니까 의리 지킬 필요 없겠지. 약삭빠른 새끼 같으니, 너 임자 제대로 만났다고 복창해라. 오늘 아주 제대로 물먹게 해줄게.’
< 371. 조각모음-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