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 애자매-4- >
도훈이 고민하자 통화를 엿듣던 로시가 부추겼다.
[주인님, 수락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유는?’
[왠지 감이 좋아서요.]
‘감이라고?’
[아시다시피 위업이나 미션은 장소나 사람이 바뀌었을 때 등장할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대학 내에서 할 수 있는 미션은 거의 다 이룬 것 같으니 새롭게 분위기 전환을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호오···그렇단 말이지.’
"알겠습니다. 식사 정도면···."
-정말요?
민서라는 여비서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럼 언제쯤 시간 되세요? 회장님은 지금 현업에서 물러나셔서 한가하시거든요. 도훈씨 편하신 시간으로 말씀해 주실래요?"
"오늘은 피곤해서 좀 그렇고, 내일 수업 끝나고는 어떨까요? 한 5시쯤?"
-아, 학생이시구나. 실례지만 어느 대학이세요?
"국성 대학교요."
-그럼, 저희가 국성대로 모시러 갈게요. 수업 끝나는 시각에 맞춰 다시 연락드릴게요.
‘모시러 온다고? 그건 너무 부담스러운데.’
"굳이 안 그래도 괜···."
-그럼 내일 뵐게요!
뚝-
"여, 여보세요?"
민서는 자기 할 말만 마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어이없는 상황에 도훈은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거참 여자애, 성미하고는···.’
도훈은 민서라는 여비서가 몹시 급하고 저돌적인 성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파걸이라 불리는, 잘나가는 오피스 우먼들이 흔히 보이는 당찬 자신감이었다.
‘그래도 얼굴은 예쁠 것 같은데.’
통화를 마친 도훈은 집으로 돌아온 뒤 내리 잤다.
1박 2일 MT의 여독과 정음과의 무리한 섹스로 피곤했는지, 황금 같은 일요일 오후가 순삭되어 버렸다.
***
평소처럼 수업을 마친 도훈은 약속 시간 전까지 까페에 앉아 공모전에 낼 작품을 썼다. 그러나 육필로 원고를 쓰려니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워드 프로세서에 비해 쓰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또 잘못 쓸 때마다 지우개로 지우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지우개 가루를 날릴 때마다 까페 알바들은 대놓고 눈치를 줬다.
‘흠, 나도 노트북이나 살까.’
[괜찮은 생각입니다. 대학생이라면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까페를 둘러보니 노트북이나 테블릿을 든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생각난 김에 온라인 쇼핑몰에서 검색이나 해볼까?’
인터넷으로 쓸 만한 노트북을 검색하던 도훈은 생각보다 비싼 노트북 가격에 놀랐다. 어지간한 메이커 제품은 대부분 100만원을 호가했다. 가볍고 성능이 좋은 것은 그 두 배의 가격. 싸구려를 사느니 비싼 제품을 오래 쓰는 성격인 그로서는, 저렴한 제품들은 눈에 차지도 않았다.
도훈은 고민에 빠졌다.
‘흐음. 지난번 서윤이한테 받은 돈이 남아있긴 하지만, 한 번에 큰돈을 쓰자니 부담스러운데.’
이정우 시절에는 노트북 정도는 부담 없이 살 재력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된 지금, 100만원 넘는 물건을 선뜻 구매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당시는 꼬박꼬박 월급을 받던 시기였으니 항상 일정액의 수익이 들어왔지만, 지금은 모은 돈을 소모하고 나면 또다시 알바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더욱이 중고차도 구입할 계획을 가진 도훈이었기 때문에 돈을 쓰는 것이 더욱 고민이 되었다.
‘돈이 없으니 이런 불편함이 있구나. 그냥 그 비서 말대로 얼마정도 사례를 받을 걸 그랬나?’
도훈이 내심 후회하고 있는데,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 어제 통화한 정민서였다.
"여보세요?"
-네, 도훈씨. 수업 마쳤죠? 지금 정문 통과하는 중인데 캠퍼스가 생각보다 넓네요? 제가 어디로 가면 될까요?
"여기 인문대 근처에요. 도로로 나가 있을게요."
-네. 검은색 세단이에요, 3887.
도훈이 짐을 챙겨 차도로 나가자 잠시 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 세단 한 대가 다가왔다. 민서가 얘기한 차량 번호였다. 도훈이 손을 흔들자 운전석 차장이 내려오며 선글라스를 쓴 여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 이도훈 씨?"
"네. 접니다."
"반가워요. 드디어 뵙네요."
빵빵-
그때 민서 뒤에 바짝 따라붙던 차가 신경질적으로 클락션을 울렸다. 하나뿐인 차선에 멈추자 재촉한 것이었다. 민서가 당황해하며 도훈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차를 댈 곳이 없네요. 일단 타시겠어요?"
"네."
도훈이 재빨리 보조석 문을 열고 차에 오르자 민서가 차를 출발시켰다. 그녀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원래 기사분이 모시러 오기로 했는데, 사모님이 갑자기 외출하셨지 뭐에요? 급한 데로 제 차로 왔으니 조금 누추하셔도 이해해 주세요."
‘이 차가 누추하다고?’
도훈이 보기엔 지금 탄 차도 어지간한 직장인이 타기엔 부담스러워 보이는 대형세단이었다. 도훈이 속으로 놀라는데 민서가 선글라스를 벗고 도훈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초면인데 여기서 소개하게 돼서 민망하네요. 저는 정민서라고 해요. 최회장 님의 개인 비서 일을 맡고 있죠. 반가워요."
커다란 선글라스를 벗자 민서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또렷이 드러났다. 나이는 대충 27~8쯤?
커다란 쌍커풀에 오똑한 콧대가 무척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특히 검은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시스루 패션인지 검은색 속옷이 은은히 비치는 모습이 다소 도발적으로 느껴졌다. 성숙해 보이는 오피스 룩에 도훈이 흡족해하며 물었다.
"전 이도훈입니다. 그런데 회장님 이라구요?"
민서가 대학을 나서며 설명했다.
"잘 모르셨겠지만 도훈씨가 도움 주신 분은 일성 그룹 최현식 회장님이세요. 혹시 들어 본 적 있으세요?"
"일성 그룹이면 혹시 건설···."
"오, 아시네요? 대학생들은 잘 모르던데. 맞아요, 일성 건설의 일성 그룹."
도훈은 속으로 굉장히 놀랐다.
일성그룹.
국내 100대 기업 안에 들어가는 기업. 건설업을 주축으로 원자재 수입 및 인프라 코어 분야까지 명성을 떨치는 알짜배기 회사로 유명했다.
‘대박이군. 물론 고성민의 삼현 그룹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일반인 입장에선 1조 가진 부자나 1,000억 가진 부자나 범접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니.’
"···우연히 들었어요. 근데 저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아, 한남동 회장님 자택이요."
"한남동요?"
"네. 회장님께서 아직은 거동이 불편하셔서 외식이 힘들거든요. 괜찮으시죠?"
"네, 뭐. 좀 멀긴 하지만."
좀 먼 게 아니라 국성대에서 한남동까지는 자가로도 40분이 넘는 거리. 나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함이 몰려왔다. 도훈의 마음을 읽었는지 민서가 말했다
"물론 돌아가실 때도 태워드릴게요. 그땐 김 기사가 모셔다드릴 거예요."
"굳이 그럴 필요는···."
"도훈씨. 하나도 부담 안 가지셔도 돼요. 물론 이런 대접이 익숙한 사람은 없겠지만, 전혀 그럴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네?"
마침 정지 신호에 걸린 민서가 좌회전 깜빡이를 켜며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자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쩝, 예쁘긴 엄청 예쁘구나. 저러니까 대기업 회장 비서도 하는 거겠지만.’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사무적이던 민서의 목소리가 친근하게 바뀌었다. 도훈은 무슨 꿍꿍인지 몰라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요?"
"음, 너무 고깝게 듣진 마시구요. 도훈씨가 아직 대학생이고 제 동생뻘 같아 하는 말이니까요. 아셨죠?"
‘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 거지?’
"네."
"도훈씨는 로또 맞았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로또요? 제가요?"
"네. 어제 통화할 때도 말했지만, 회장님 성격상 생명의 은인을 만나면 기어코 보답하려 하실 거예요. 그땐 절대 사양 마세요. 이건 회장님 비서로서가 아니라 인생 선배로서 해주는 충고니까."
"흐음···."
민서의 눈빛이 진지해 도훈은 조금 놀랐다.
자길 언제 봤다고 이런 얘기까지 하는 걸까?
"물론 아직 학생이라 실감 안 되실 수도 있어요. 저라도 도훈씨 나이면 그랬을 거에요. 사람 도와주고 금전적인 보답을 받는다니 괜히 부담스럽고 쑥스럽고···. 맞죠?"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서가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그치만 회장님은 정말로 재산이 많으시거든요. 저희 같은 서민이 볼 땐 엄청나게 큰돈이지만, 그분에겐 하룻밤 술값도 안 된 달까요? 그니까 절대 부담 갖지 마요."
"흠."
"미안해요. 제가 너무 속물같이 말했나요? 근데 도훈씨가 나중에 후회할까 봐 미리 알려 드리는 거예요."
‘보기보다 훨씬 현실적인 여자군.’
도훈은 문득 눈앞의 민서라는 비서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로시. 정보창 쿨타임 이제 얼마나 걸리지?’
[이번 요르단의 반지로 인해 절반으로 줄어 현재는 3시간 조금 넘습니다.]
‘휘유, 3시간이면 하루에도 대여섯번 씩 쓸 수 있단 말이잖아? 이제 아낄 필요가 없구나. 정민서 정보창 열어.’
[네, 디스플레이에 띄우겠습니다.]
-----------------------------
성명 : 정민서 (비처녀, 일시 25세 5개월)
나이 : 29
호감도 : 60/100
개방성 : B+
성감대 : 옆구리, 클리토리스, 무릎.
*애무 포인트 : 그녀는 간지러움을 잘 타는 타입입니다. 특히 옆구리를 간지럽히면 강한 성욕을 느낍니다.
성욕지수 : 중간.
공략팁
*그녀는 당신에게 약간의 호감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그녀는 당신이 훌륭한 인성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녀는 현재 유부남과 불륜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 염증을 느끼며 그만두고 싶어 합니다.
-추천행동 : 그녀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해줄 상대를 찾고 있습니다. 그녀의 솔직한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
***
‘헐! 이게 뭐야?’
정보창의 공략 팁을 읽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민서가 유부남과 내연관계에 있는 불륜녀였다니.
[누구나 말 못할 비밀은 있는 법이라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 충격적인데? 속물 같은 게 아니라 완전 속물이잖아?’
어이가 없다. 무엇하나 아쉬울 거 없어 보이던 대기업의 회장 비서가 알고 보니 결혼한 남성과 위험한 사랑을 즐기는 상간녀였다니.
‘가만, 혹시 그 노인네랑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야?’
[누구요? 최회장 말입니까? 에이, 설마요.]
‘사람 일은 모르지. 원래 외모가 출중한 비서들은 그런 식으로 많이 엮이거든. 가만있자, 확인할 방법이 있을 텐데···.’
나는 싸이코 메트리 스킬을 떠올렸다. 강화된 싸이코 메트리 스킬은 상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물건을 판별해 주는 기능이 있었다.
[로시, 싸이코 메트리 켜.]
‘알겠습니다.’
싸이코메트리를 실행시키자 운전 중인 민서에게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바로 손에 차고 있는 명품 시계에서 였다.
‘흐음. 하필 왼손이라니···.’
싸이코메트리 스킬의 단점은 어떻게든 물건을 직접 접촉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보조석에 앉은 상태로 운전자의 왼손을 터치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차가 정차하면 시계를 보여달라고 해봐야겠군.’
차가 잠시 정지선에 멈추자 우연히 시계를 발견한 것처럼 민서에게 물었다.
"어? 혹시 그 손에 찬 시계?"
"네?"
"그거 맞죠? 스위스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들었다는···."
그러나 민서는 나의 호기심이 불편했던지 소매 속으로 시계를 안 보이게 집어넣었다.
"아니에요. 그냥 인터넷에서 산 싸구려에요."
확실히 뭔가를 숨기는 분위기. 그녀에게 있어 시계는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물건 같았다. 저럴 거면 왜 차고 다니는지 원.
나는 집요하게 물었다.
"정말요? 와, 완전 A급 짭이네요. 어디서 샀어요? 한 번만 보여주실 수 있어요?"
"지금 운전 중이라서 좀···."
주행 신호가 떨어지자 민서가 황급히 차량을 출발시켰다. 누가 봐도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한 번 오기가 생기자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나는 다음 정차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다시 물었다.
"제가 진짜로 시계를 좋아하거든요. 한 번만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좋아하는 메이커랑 너무 닮아가지고."
"아···."
"풀기 불편하시면 가까이 보여 주시기만 해도 돼요."
이번엔 정차구간이 길어 신호를 받고도 한 번에 통과하지 못했다. 대기가 길어지자 민서도 불편했는지 슬쩍 팔을 내밀어 시계를 보였다.
"자요."
그녀가 황급히 팔을 거두려는 찰나 내가 슬쩍 시계 겉을 더듬었다.
"우아, 진짜 똑같다."
"그냥 이미테이션이에요. 이제 됐죠?"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미 나의 머릿속으로 싸이코메트리로 얻은 영상정보가 재생되고 있었다.
***
고급스러워 보이는 의자엔 연로한 회장이 앉아있었다.
잠시 후 민서가 다가가 회장에게 말했다.
"회장님. 아드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최사장? 들어오라 해."
"네, 회장님."
회장실을 나간 민서가 쇼파에 앉아있던 중년의 남자를 향해 말했다.
"사장님, 들어오시랍니다."
"아버님 기분 오늘 어때?"
"좋아 보이세요."
값비싼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민서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손목을 어루만졌다. 그것은 애인에게나 보이는 친근한 행동이었다.
"내가 저번에 준 선물 잘 차고 있네?"
"사, 사장님···."
민서가 흠칫 놀라며 주변을 둘러 봤지만, 회장 비서실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오빠라고 부르라니까. 이번 주 일요일 시간 돼?"
"···네."
"마누라 그날 친구 만나러 간다니까 호텔 먼저 들어가 있어. 알았지?"
민서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우물쭈물하면서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의 남성은 씽긋 웃으며 민서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대범한 행동에 민서가 움찔 놀라는 사이 남성은 회장실로 들어갔다.
영상이 끝나자 도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그것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정민서의 내연남이 최회장의 아들이자 현재 실질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최사장이란 사실. 그리고 두 사람의 내연관계가 생각외로 깊다는 것.
‘···엉망진창이구만, 이 여자.’
도훈은 짜게 식은 표정으로 정민서를 쳐다보았다.
불륜.
그에게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단어였다.
< 304. 애자매-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