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좋은x, 나쁜x, 이상한x.-29- >
몸이 쑤신다던 지희가 느닷없이 기지개를 켰다. 의자 등받이 등을 기댄 채 허리를 활짝 뒤로 젖히자, 아이보리색 스웨터 사이로 커다란 가슴이 봉긋 솟아올랐다.
스웨터를 뚫고 나올 것처럼 튀어나온 지희의 가슴에,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눈이 따라갔다. 그 시선을 의식한 지희가 깍지를 끼더니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밑단이 짧은 스웨터의 허리가 들리면서 늘씬한 허리 라인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자연스레 몸매를 드러내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세련된 수법.
도훈은 속으로 감탄했다.
‘대단하군. 한순간에 사내의 방심을 흔드는 스킬이라니···. 과거를 모르고 만났다면 방금 동작에 홀딱 반해버렸겠어.’
기지개를 마친 지희가 일어서면서 의자에 걸어둔 겉옷을 걸쳤다. 봄 저녁 입기 적절한 황갈색 바바리코트였다. 코트 깃을 세워 단추를 여미자, 어느새 도회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성숙한 여성이 도도한 자태를 뽐냈다.
"그럼 나갈까?"
"네."
지희는 능수능란 도훈을 리드했다.
주차장에서 리모컨을 누르자 앙증맞게 생긴 미니 쿠페가 헤드라이트를 깜빡거렸다. 조그만 소형차지만, 외제차답게 가격은 전혀 소박하지 않은 기종이었다.
‘재력을 과시하는 타입인가?’
도훈은 그녀의 장단에 맞춰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허영끼 넘치는 지희에게 적당한 아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우아, 이거 누나 차에요?"
"응. 올 초에 한 대 뽑았어."
"되게 비싸 보이는데···."
"그래 봐야 쬐그만 소형차 가지고···. 타."
도훈은 전생에 외제 차를 많이 몰아 봤기 때문에 이정도 재력에 위축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나 평범한 대학생이라면 20대 중반의 직장인이 그녀가 무척이나 성공한 커리어우먼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로시, 지희네 집이 원래 좀 사는 편인가?’
[아닐걸요. 남아 있는 기억에 따르면 그녀의 아버지는 평범한 공무원이었습니다.]
‘공무원이라···. 지희도 고작 2년 차 교사잖아?’
[그렇죠.]
‘참나. 그런데 이런 외제 차를 몬다고? 제정신 아니군.’
[왜 그러십니까?]
‘생각해봐. 교사라 해봐야 말단 공무원이잖아. 2년 차면 모은 돈도 거의 없을 텐데 무슨 수로 이렇게 비싼 차를 샀겠어. 백퍼 할부야.’
[그렇군요.]
‘차량 유지비에 보험비, 할부금까지 갚으려면 월급의 절반은 그 즉시 날아갈걸? 게다가 입는 옷이나 구두도 죄다 명품이잖아. 딱 보니까 받는 족족 고스란히 탕진하는 스타일이 분명해.’
[벌써 거기까지 파악하셨나요?]
‘한마디로 전형적인 된장녀란 소리지. 주제에 맞지 않는 소비. 저축 따윈 없는 습관. 그냥 될 대로 사는 거지. 저러다 호구하나 물어서 혼테크 하려고.’
[듣고 보니 제법 낭비벽이 있어 보이는군요.]
이미 견적을 끝낸 도훈이지만, 우쭐거리는 지희 앞에서 도훈은 과장된 감탄사를 연발했다.
"누나 대단해요. 역시 직장인은 대학생과 비교할 수가 없네요."
"풉-. 왜 이리 촌스럽게. 너도 나중에 취직하면 좋은 차 한 대 뽑아."
"네. 꼭 그러고 싶어요. 누나 근데 저희 어디로 가요?"
"음, 그래도 오랜만인데 맥주 한잔해야지?"
"호프집?"
"아니. 난 사람 많은 덴 질색이라···. 룸쏘방 어때?"
"룸 소주방이요?"
"왜? 누나가 잡아먹을까 봐 겁나니?"
"하하. 무슨 소리세요. 그래요 그럼."
‘누가 누구를 잡아먹는 건지 아직도 모르는군. 스스로 범의 아가리로 들어간다니 말릴 필요도 없겠지.’
곧 두 사람은 인근 룸소방으로 이동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지희는 복학한 도훈의 생활에 관해 물었다.
"그럼 지금도 학교 근처에서 자취 중이야?"
"네. 여동생이 아직 고등학생이라 부모님이 미국에 같이 있어서요. 내년쯤엔 한국에 오실지도 모르지만."
"아, 그 음악 한다는 여동생 말이지?"
"네. 혜은이요."
"멋지다. 외국으로 유학도 가고. 나도 교사만 아녔음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데서 유학하고 싶었는데···."
‘지랄, 허세는.’
"왠지 누난 그런 것도 잘 어울렸을 것 같아요."
"후후 그러니? 난 근데 뭐 지금도 괜찮아. 애들이 여자 체육 선생님은 처음 보나 봐. 남자 애들이 어찌나 쉬는 시간만 되면 달려드는지···."
"누난 인기 많을 것 같아요."
"그럼 뭐하니. 어차피 애들인데···."
‘풋고추는 이제 물린단 말이지.’
"학교에 젊은 남자 선생님은 없어요?"
"울 학굔 조금 있는 편이야. 근데 쓸만한 남자들은 죄다 결혼해 버리고, 남은 애들은 다들 쭉정이뿐이지."
"아···."
"그래서 내가 요새 연애를 못 하고 산다니까? 에효."
지희가 넌지시 자신이 솔로임을 알렸다.
"누나 정도면 남자 골라서 사귈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뭐··· 예쁘고 능력 있고···."
"내가 예뻐?"
"음···. 그렇죠. 객관적으로."
"너한테 그렇게 상처 줬는데도?"
"다 지난 일인데요. 뭐."
"어쭈, 도훈이 많이 컸네?"
‘크기는 이년아. 마흔살 넘은 아재다.’
"다 온 것 같아요."
룸 소방 인근에 주차한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들어갔다.
"여기 소맥 각각 세 병이랑요, 안주는 아무거나 주세요."
"네."
웨이터가 주문을 받고 나가자 도훈이 놀란 듯 물었다.
"저렇게 마셔도 돼요?"
"왜? 취하면 업어가게?"
"아, 아니 내일도 수업 있으시니까."
"괜찮아. 고작 소맥가지고. 아, 안에 들어오니까 덥네."
지희가 외투를 벗더니 옷걸이에 걸었다.
그녀가 입은 스웨터는 가슴 부근이 V라인으로 파여 다소 도발적인 스타일이었다. 허리 밑도 짧아 조금만 팔을 들어도 속살이 숭숭 드러났다. 도훈은 그녀의 유혹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느끼고 슬슬 자신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게요. 여긴 좀 덥네요."
도훈이 잠바를 벗자, 그의 탄탄한 몸매가 여실히 드러났다. 얇은 티 밖으로 불거진 흉근과 두툼한 이두박근이 뽐내듯 자리 잡고 있었다. 지희는 도훈의 발달 된 상체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와···. 생각보다 훨씬 좋아졌네? 벗겨놓은면 볼만 하겠어.’
"도훈이 너 운동 진짜 열심히 했구나?"
"그런가요?"
"한 번만 만져봐도 되니?"
"어딜요?"
"꼭 어디라고 말해줘야 하나?"
지희가 응큼한 표정을 짓더니 도훈의 탄탄한 가슴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녀의 손은 훌륭한 조각품을 어루만지듯 천천히 쓸며 내려오더니 알토란 같은 식스팩을 품은 복부를 더듬었다.
‘이년 보소? 아주 자기 몸처럼 주무르네?’
"옛날엔 이렇게 안 딱딱했던 것 같은데···."
그녀의 손이 슬그머니 더 밑으로 내려가려던 차, 웨이터가 벨을 누르더니 술과 안주를 들고 들어왔다.
"주무하신 안주 나왔습니다."
지희가 아쉬워하며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치잇.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도훈은 짧은 순간 그녀의 표정을 읽었다.
‘슬슬 몸이 다는 모양이군. 쉽게는 안 줘야지.’
[이건 누가 누굴 공략하는지 모를 지경인데요?]
‘동정 킬러와 아다 폭격기의 콜라보인데 어련하겠어? 하여간 뼛속같이 야한 년이야.’
도훈이 맥주와 소주를 섞어 폭탄주를 제조했다. 거의 소주 반 맥주 반의 1:1 비율이었다.
"그럼 다시 만난 기념으로 한잔하실까요?"
"좋지, 오랜만에 너 보니까 괜히 설렌다야."
‘끼 부리지 마시고.’
"짠"
"짠!"
두 사람의 소맥 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동시에 서로의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꼬맹이, 누나가 오랜만에 고추 맛 좀 볼까?’
‘덤벼라, 동정 킬러. 너에게 따인 수 많은 총각들의 원혼을 담아, 기필코 후장을 뚫어 주마.’
***
술잔은 한동안 쉬지 않고 채워졌다. 주거니 받거니가 이어지면서 지희의 낯빛이 붉게 달아올랐다. 거울을 보지 못했지만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몸 안에 들어간 알콜이 피를 데우며 심장을 뛰게 했다.
지희의 몸은 피사의 사탑처럼 조금씩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술기운을 핑계 삼은 전형적인 스킨십이었다.
"나 실은 너한테 많이 미안했어."
지희가 머리를 어깨에 기대며 진지한 톤으로 입을 열었다. 모든 게 거짓이라는 게 가증스러울 만큼 뛰어난 연기력이다.
"뭐가요?"
"그냥 다. 군대 간 너 상처 준 거. 너무 미안해."
"왜 그래요, 누나. 이미 다 지난 일인데···."
"그래도···."
지희가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나를 올려 보았다. 얼굴이 가까워지며 그녀의 뽀얀 피부와 촉촉한 입술이 움찔거린다.
‘키스해 달란 소리군. 하지만 어림없지.’
"누나. 괜히 울적해지는 데 분위기 전환할 겸 노래나 부르고 놀래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살포시 눈을 감던 지희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아마도 나를 눈치 없는 놈이라며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웬 노래?"
"저 군대에서 코인 노래방 자주 갔었거든요. 연습 많이 했어요."
"그, 그러니···."
"혹시 신청곡 있어요?"
"너 부르고 싶은 거로 하렴,"
지희는 겨우 잡은 분위기가 깨지자 조금은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에이, 그래도. 누나를 위한 노랜데요. 얼른요."
"내가 말하면 다 불러 줄 수 있어?"
"음, 너무 최신곡만 아니면?"
"그래? 그럼 이거 불러줘."
"뭐요?"
"내 여자라니까."
‘풉-. 속 보이기는.’
다행히 들어본 적 있었다.
한때 공중파를 휩쓸던 노래였기 때문에 듣고 싶지 않아도 길거리에서 자주 흘러나왔던 가수 이승기의 노래다.
나는 등 돌려 ‘오늘은 내가 가수다.’ 목캔디를 꺼내 물었다. 몇 알 남지 않은 아이템이지만, 그녀에게 매력을 어필하기 위해 아끼지 않았다.
"못해도 박수 쳐줘야 돼요. 알았죠?"
반주가 흘러나오는 동안 지희가 삐딱하게 소파에 기대앉으며 성의 없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도를 빼기도 바쁜데 마이크나 붙잡고 있는 내가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건방지기는. 하지만 노래는 듣고 나면 내가 더 갖고 싶어질걸?’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첫 소절을 땠다.
"나를 동생으로만, 그냥 그 정도로만···."
시큰둥 앉아있던 지희는 나의 노래가 시작되자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나의 목소리는 오리지날 가수의 음색을 완벽하게 모사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노래에 점점 심취해가는 지희를 똑바로 바라보며 하이라이트를 열창했다.
"누난 여자니까, 너는 내 여자니까아!"
"아···!"
"너라고 부를게. 뭐라고 하든지 남자로 느끼도록 꽉 안아줄게. 너라고 부를게.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 놀라지 말아요.
알고 보면 어린 여자라니까···."
"꺄아···."
지희는 나의 노래 솜씨에 완전히 뻑이 간 표정이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아이템의 위력은 절대적.
모르긴 몰라도 음반 관계자가 보면 당장 캐스팅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장한다.
노래를 완곡하고 자리로 돌아가자, 나를 보는 지희의 눈빛이 더욱 간절해져 있었다.
"도훈이 너 이렇게 노래 잘했었니?"
"연습 많이 했거든요."
"와···. 나 방금 완전 소름 돋았잖아. 여기 팔뚝 봐."
지희가 내 손목을 잡아끌더니 강제로 팔을 매만지게 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손바닥을 스치자 슬슬 대물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누난 피부가 여전히 부드럽네요."
"어머, 별걸 다 기억하네?"
"그럼요. 어떻게 잊겠어요. 태어나 처음이었는데···."
"야야, 너 갑자기 그런 얘길하면···."
자신을 위해 헌정한 노래가 감격해서일까?
아니면 두툼한 손으로 어루만진 스킨십에 자극이 되었을까?
지희의 목덜미가 새빨개지며 고조된 흥분을 알려왔다.
나는 그녀를 매만진 손을 떼지 않고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왜요? 누난 다 잊었어요?"
"아니···. 둘밖에 없는데 그런 얘기 하니까 기분 이상하잖아."
"누나."
"으, 응?"
"나 정말 하나도 안 보고 싶었어요?"
노래로 한창 분위기를 고조시킨 뒤, 단번에 숨통을 끊을 것처럼 들어간 역공에 오히려 지희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저 나를 잠깐의 노리개로만 생각했던 그녀에겐 무척 설레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도, 도훈아···."
"난 누나 정말 보고 싶었어요. 진심으로."
그녀의 눈빛이 대번에 촉촉이 젖어 들었다.
몸을 뺏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녀가 진정으로 절망하길 원했고, 따라서 단순한 육체의 결합보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싶었다.
"내가 너한테 그런 짓까지 했는데도···."
"괜찮아요. 다 잊었어요. 말했잖아요. 충분히 이해한다고."
미안함. 죄책감.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는 인간적인 감정.
자신을 씹다 버린 껌처럼 가지고 논 당사자에게 다시 한번 진심을 다해 다가선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앙금이 되어 그녀의 양심을 쿡쿡 찌르도록.
"도훈아 난 정말···."
"누나, 오늘만 내 여자 해주면 안 돼?"
와락-
나는 지희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지희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아니,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지희의 손이 곧 나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리곤 나에게 속삭였다.
"···그래. 얼마든지."
나는 그대로 지희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스르륵 눈을 감는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송지희.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은 네가 자초한 거야.’
***
열정적인 키스를 퍼붓던 도훈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의 손은 뱀처럼 등으로 파고들어 단번에 브라 후크를 벗겨냈다.
"아!"
지희는 너무나 능숙한 손놀림에 잠시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알던 도훈은 키만 멀대마냥 큰 숙맥이었다. 여성을 어떤 식으로 애무해야 하는지도, 또 어떻게 해야 즐겁게 할 수 있는지도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그러나 단번에 브라 후크를 벗겨낸 도훈은 곧바로 스웨터를 들어 올려 가슴을 한입에 담았다. 그것은 여자를 능수능란 다루어본 카사노바의 솜씨였다.
< 254. 좋은x, 나쁜x, 이상한x.-2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