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깊은 밤, 달은 지고-15- >
***
도훈 일행이 저녁 식사를 하는 사이, 혜민과 혜공은 사찰 북쪽에 자리한 암자에서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굳이 수행승들의 눈을 피해 외진 곳으로 자릴 옮긴 것으로 보아 필시 진지한 이야기가 오갈 분위기였다. 평소 허례허식이나 체면을 따지지 않기로 유명한 혜민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웃음기를 쫙 뺀 진중한 모습.
쌍둥이 동생 혜공은 잔뜩 긴장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긴 침묵 끝에 혜민이 입을 열었다.
"공아."
"예, 형님."
"무공의 근원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느냐."
"선종의 조사이신 달마 대사께서 9년의 면벽을 하시는 동안 굳어지는 몸을 풀기 위해 역근경(易筋經)을 만드시면서부터라고 알고 있습니다."
혜공은 누구나 아는 뻔한 이야기를 묻는 혜민의 의도를 종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 승려들이 좌선만 한다고 앉아있으면 몸이 쇠약해 지기 마련. 몸이 쇠약하면 정신의 집중도 안 된다. 따라서 육체를 단련해야 좌선도 가능한 것이지."
혜공은 혜민이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아리송했다. 하지만 뭔가 깊은 뜻이 있겠거니 짐작하며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면벽을 마친 달마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면 과연 그것이 참선으로 인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무공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었을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쩌면 무공으로 인해 막혔던 벽을 돌파한 것은 아니었겠느냐는 소리다. 달마께서 깨달음을 얻은 이유가 9년의 면벽이 핵심이 아니라, 그간 익혔던 무공 덕분이었다면?"
"송구하오나 어찌 육체의 단련만으로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만불조종(萬佛祖宗)이라고 했다. 무엇이건 궁극에 달하면 부처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는 법. 오로지 참선만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한다면 어찌하여 근래까지 깨달은 자가 이리도 적겠느냐?"
거기까지 말을 마친 혜민은 품속에서 낡은 서적을 꺼냈다. 표지가 누렇게 바랜 책은 수백 년도 더 되어 보이는 고서적이었다.
"우연히 중국을 여행하던 중 이 서적을 발견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세수경(洗髓經)이다."
"세, 세수경이면 설마!"
"그래. 실전(失傳)되었다고 알려진 달마 대사의 두 번째 비급."
"어찌 이런 귀한 것이···."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다. 그럴싸하게 이름만 붙인 위작이라고 의심했지.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 오묘한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전은 아니겠지만, 원전을 보고 배낀 필사본이 틀림없어 보였다."
"아! 기연(奇緣)입니다! 참으로 기연입니다. 부처님께서 형님을 위해 안배해 두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게 어찌 나만을 위해서겠느냐. 내가 오늘 이곳에 들른 이유도 너와 함께 세수경을 나누고 싶어서 였느니라."
"혀, 형님."
혜공은 쌍둥이 형의 마음 씀씀이에 크게 감동했다.
쌍둥이로 태어나 나란히 불가에 입적했지만 언제나 형의 커다란 그늘에 가려 열등감을 느끼던 혜공이었다. 철없는 시절엔 자기도 모르게 시기와 질투를 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혜민은 그런 못난 동생을 여전히 아끼고 있었다. 천하의 둘도 없는 기연을 얻었음에도, 동생과 나누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혜민이 계속 말했다.
"그간 우리와 같은 무승이 무공만으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이유도 아마 세수경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탓일 것이다. 역근경이 몸을 단련하는 수련법이라면, 세수경은 뼛속까지 기로 닦아 채운다는 의미. 두 무공이 조화를 이룬다면 진정한 경지에 오를지
도 모른다."
"하면 이것을 어찌 익힐 수 있습니까?"
"세수경은 달마께서 9년의 면벽 수련 동안 완성 시킨 내공수련법이다. 따라서 움직임은 거의 없이 명상과 호흡을 반복하도록 되어있다. 또 내기를 다스려야 하므로, 명상 중에는 일체의 말도 할 수 없다."
"그 자체가 묵언 수련법인 셈이군요."
"그렇다. 만에 하나 수련 중 조금이라도 방해를 받는다면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모른다."
"주화입마라 하시면···."
"너와 내가 평생을 익힌 동자공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아··!."
"하여, 이를 익히기 위해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또 수련을 위한 은밀한 장소 역시 필요하다."
혜공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이곳 암자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래된 토굴이 하나 있습니다. 옛날 무학대사께서 면벽 수련을 하던 곳인데, 지금은 버려진 곳입니다. 그곳이라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수련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구나. 그럼 오늘 밤부터 그곳에서 세수경을 익혀 보자꾸나."
"네, 형님."
두 형제는 모처럼 찾아온 기연 앞에 두근두근했다.
***
커다란 전당에는 템플 스테이에 참여 중인 손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뷔페식으로 운영되는 자율 배식대에서 먹을 만큼 음식을 덜어 먹는데, 메뉴를 본 태영이 반찬 투정을 해댔다.
"템플 스테이가 아니라 무슨 채식주의자 집회 같네요."
"왜?"
"반찬이 죄다 풀대기 뿐이잖아요."
"절밥이 다 그렇지. 일단 한 번 먹어봐."
도훈의 말에 태영은 젓가락을 깨작거리다 산나물 무침 맛을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아, 무슨 나물이 이렇게 맛있죠?"
"괜찮지? 사찰 음식이 은근 퀄리티 높다니까."
"이건 완전 고기랑 똑같은데요? 식감이 무슨···."
"콩고기라는 것입니다. 대두 단백질을 이용해 만들지요."
대답을 한 사람은 음식을 나르던 희원 보살이었다.
그녀는 전당에서 부족한 반찬을 채우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음식은 입에 맞으신가요?"
"네, 엄청 맛있어요."
"저도 사찰음식이 이렇게까지 맛있는지 몰랐어요. 혹시 이 음식들 보살님께서 직접 만드신 거예요?"
"저 혼자 한 것도 아닙니다."
희원이 겸양을 떨며 도훈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사실 그녀가 태영에게 다가온 이유는 맞은편에 앉은 도훈에게 다가가기 위함이었다. 희한하게 도훈을 보고 있으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연스레 몸이 끌렸다.
‘왜 자꾸 저 총각에게 눈이 가는 것일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달리 음기가 강한 그녀에게 있어 도훈은 상극의 에너지를 지닌 인물. 자석이 서로를 잡아당기듯 본능적인 끌림이 그녀를 도훈에게로 향하게 했다.
"덕분에 맛있게 먹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맛있게 드셔주시니 제가 더 고맙네요."
희원이 나르던 음식을 마저 채우기 위해 사라지자 태영이 조용히 말했다.
"도훈이형 저 보살님 되게 예쁘지 않아요? 제가 다니는 교회에도 저 정도 미인은 거의 없는데."
"왜? 이제 교회 오빠 그만두고 절 동생 하게?"
"절 동생?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반찬을 떠 온 정음의 물음에 태영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아냐 아무것도."
"둘이서만 아까부터 쏙닥쏙닥, 수상한데."
"흐흐 그냥 남자들끼리 얘기야."
"근데 저녁 먹으면 판 벌리는 거야?"
"판?"
"우리 도박하기로 했잖아."
"근데 템플 스테이 와서 그런 거 해도 될까요? 좀 걱정되는데."
"뭘 어때. 안 들키면 그만이지. 일일이 방문 열어 확인할 것도 아니고. 료코도 하는 거지?"
"전 그런 거 잘못합니다. 구경만 하겠스므니다."
"에이, 금방 배워. 그림만 볼 줄 알면 돼. 내가 알려줄게."
태영이 자신감 있게 소리쳤다.
"정음이도 할 거지?"
"그래 뭐. 딱히 할 것도 없는데."
"오, 정음이 자신 있나 보네?"
"그냥 그림만 맞추면 되는 거라며?"
"꼴등한 사람이 내일 점심 쏘기야, 알고 있지?"
"알았어. 근데 판돈도 없는데 어떻게 순위를 재?"
"일단 만 원씩 나눠주고 제일 먼저 돈 떨어진 사람이 지는 걸로 하자."
"좋아."
저녁을 맛있게 먹은 일행은 굳은 결의를 다지고 한 방으로 모였다.
***
"섯다는 두 패를 받아서 짝을 맞추는 게임이야. 끝이랑 땡은 다 알지?"
"십 자리 때고 일의 자리로 세는 게 끝. 같은 그림으로 두 장 받으면 땡 아니에요? 땡이 끝보다 높고."
"잘 알고 있네. 그리고 조합에 따라 끝과 땡이 아닌 족보가 있어."
"좆보가 난데스까?"
"료, 료코···. 족보라고 불러."
"하이, 좆보."
료코의 발음이 묘하게 욕같이 들렸기 때문에 다들 민망해했다. 그녀에게 정확한 발음을 기대하기는 무리였기 때문에 다들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암튼 족보는 뭐냐면 두 개의 숫자 조합이 끝과 땡이 아닌 특수한 효과를 발휘하는 걸 말해. 가령 예를 들면 이 숫자와 이 숫자가 뭐야."
정음이 샘플로 깔린 숫자 패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노란색은 9고, 싸리같은 것은 4니까 합이 13. 그럼 3끝 아니야?"
"땡. 이건 구사파토라 불리는 족보야. 광땡을 제외한 모든 게임을 리셋 시키지. 섯다 용어로는 나가리."
"아, 그 파토가 그 뜻이었어? 광땡은 뭐야?"
태영은 다시 3광과 8광을 찾아 보여주었다.
"여기 그림에 보면 한자로 빛 광자가 적혀 있잖아. 이렇게 조합되면 무적패인 삼팔광땡이야. 숫자 조합 중에 가장 높은 장땡보다 더 높지. 그냥 광땡이 나오면 무적 패를 쥐었다고 생각하면 돼. 누구도 이길 수 없거든."
"오! 신기하다."
"원래 이런 족보가 지역마다 달라서 굉장히 복잡하거든. 장소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장소?"
"가령 10자랑 4자랑 모인 것은 장사라 불리는 족본데, 이건 상갓집에선 광땡보다 높게 쳐. 왜, 장사지낸다고 하잖아. 그래서 상갓집에선 장사가 짱이야."
"아아!"
"이것 말고도 장삥, 구삥, 세륙, 갑오, 독사, 알리 등등 엄청나게 많은데 두 사람이 초보니까 기본적인 족보만 넣고 할게."
"그래서 뭐 뭐 넣게?"
팔짱을 낀 체 설명을 듣던 주찬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그래도 구사파토나 삼팔광땡, 그리고 땡잡이 정도는 넣어야죠. 나머진 없다고 치고."
"오케이. 도훈이도 이해했지?"
"응. 어려울 건 없네."
"일단 패부터 돌리자. 설명하다 시간 다 가겠다. 정음이랑 료코는 초보니까 자본금 두배로 주고 시작하는 건 어때?"
"2만원요? 그럼 두 배나 많이 들고 하는 건데?"
태영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주찬이 비웃었다.
"왜? 설마 초심자들한테 쫄리냐?"
"아, 아니 자본이 한정된 상황에서 판돈을 두 배로 들고 시작하면 코만 파도 절대 안 말라 죽을 거 아니에요."
"무리 안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혹시 여자애들한테 얻어먹을 생각이었냐, 태영이 넌?"
노골적인 도발.
실은 주찬은 모처럼 자신 있는 도박에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특히 아까 정음이 앞에서 자존심을 구겼던 탓에 태영이에게 앙심이 남아있는 상황.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태영이 만큼은 눌러 주고 싶었다.
이쯤 되자 태영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역시 노름에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
"쫄리긴요, 저를 어떻게 보고. 콜!"
두 사람의 신경전에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상관없어. 근데 이런 방식은 어때?"
"뭐요?"
"솔직히 지금은 꼴등 뽑는 게임이잖아. 그럼 한 명만 오링나면 끝나 버리니까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초반에 돈 좀 딴 사람이 레이스 안치고 버티면 지지부진해질 수도 있고."
"이런 데서 공무원 도박하면 쪽팔린 거지. 배짱 있으면 배팅해야지."
"아니 그러니까 차라리 룰을 이렇게 바꾸는 건 어때?"
"어떡해요?"
"1등 한 사람이 기분 좋게 내일 점심 사기로. 점심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아?"
도훈의 제안에 두 남자가 머리를 굴렸다.
‘그렇네. 기왕이면 꼴등을 뽑는 것보다 1등 해서 기분 좋게 쏘는 편이 멋있어 보일지도···.’
‘하긴 잘못해서 정음이나 료코가 걸리면 그것도 곤란하니까 도훈이 말이 일리가 있겠어.’
"좋아. 이긴 사람이 기분 좋게 쏘는 걸로."
"저도 찬성요."
"너무 남자들끼리만 신난 거 아니에요?"
정음이 발끈하며 말했다. 시작 자본을 두 배로 준다느니 자꾸 여자를 무시하는 발언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거죠."
"그래. 누가 이길지 모르지. 일단 판부터 시작하자."
***
"9끝이요."
"아! 또 한 끝 차이네."
"넌 나한테 안된다니까."
"흥, 끝날 때 까지 끝난 게 아니죠."
점심쏘기 겸 시간때우기로 시작된 섯다는 어느새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예상대로 료코는 초반 반짝 초심자의 행운을 보여주는가 싶더니 곧바로 돈을 잃기 시작했다.
특히 숫자를 잘 못 읽는 바람에 실수로 몇 판 날리더니 눈에 띄게 소심해졌다. 가랑비에 옷 젓듯 야금야금 잃은 돈이 어느새 절반을 넘어서자 좋은 패를 들고도 상대편 블러핑에 곧바로 죽기 일수였다.
반면 정음은 배짱이 넘쳤다. 시원시원한 성격이 도박에서도 드러나, 물러설 때와 나아갈 때를 확실하게 구분했다.
하지만 역시 도박에 어울리는 페이스는 아니었다. 그녀의 단점은 패를 받았을 때 좋고 나쁨이 표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
흥분한 목소리로 대번에 레이스를 한도까지 때릴 적에는 무조건 좋은 패를 들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는 물론이고 태영이나 주찬이도 그것을 간파한 뒤론 정음은 전혀 재미를 보지 못했다.
특히 9끝 이상부터는 죽지 않고 레이스를 따라온다는 습관을 역이용해 크게 한 방 먹은 뒤부턴 완전히 석이 죽었다. 자고로 쩐이 딸리기 시작하면 도박판에선 힘을 못 쓰는 법.
한편 불광동 타짜, 전라도 아귀라 자신하던 태영과 주찬은 의외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두 사람은 료코와 정음의 판돈을 갉아먹고 돈을 불려 사이좋게 2강을 형성했다.
그들의 목표는 이제 본전치기만 겨우 하고 있는 나를 말려 죽는 것. 일단 나머지 셋을 정리하고 둘이서 끝장 승부를 볼 생각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숨 고르기일 뿐.
나의 도박은 이제부터다.
"레이스, 이천."
< 217. 깊은 밤, 달은 지고-1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