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하수 탈출-14- >
최근 구매한 아이템은 이지환을 달리기로 제압할 때 사용한 ‘신속의 물약’, 그리고 오늘 새벽에 쓴 ‘몸에 좋은 크림’이다.
각각 300포인트와 400포인트.
저번에 남은 포인트가 대략 1,400포인트였으니 소모한 포인트와 새로 받은 합산 포인트를 더하면···
[현재 남은 포인트는 3201.7 포인트군요.]
‘뒤에 소수점은 기적의 복리 계산기 이자가 붙은 건가?’
[네.]
‘귀찮으니까 다음부턴 절삭하도록 해.’
[그럼 총 3201포인트 되겠습니다.]
‘그나저나 포인트도 제법 모았는데 스킬 레벨 좀 올려볼까? 로시, 스킬 트리 띄워봐.’
[네, 디스플레이를 확인하십시오.]
스킬 : 현재까지 보유한 스킬 개수 (4)
*정보창(1Lv)
-상대의 스텟 정보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재능 모방자(3Lv)
-상대의 운동 재능을 모방할 수 있습니다.
-체조 적성(재능 공여자, 이나연)이 생성되었습니다.
*싸이코메트리(2Lv)
-사물에 담긴 기억을 영상으로 보여줍니다.
*아직 한발 남았다(1Lv)
-사정 즉시 발기력을 회복하여 2 연사를 가능케 합니다.
현재 내가 가진 스킬은 모두 4가지.
이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단연 정보창 스킬이다.
‘레벨업 당 쿨타임 감소가 10%씩이랬지?’
[그렇습니다. 최초 레벨업시 필요한 포인트는 100포인트이며, 다음 레벨로 올라갈수록 비용은 두 배가 됩니다.]
정보창의 사기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신중하게 써야 하는 이유는 10시간에 달하는 긴 쿨타임에 있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현재로썬 최선의 투자가 될 것이다.
‘4레벨까지 올리는데 모두 700포인트가 필요한 거 맞지?’
[네. 대신 효율은 갈수록 떨어진다는 걸 상기하십시오. 예상총 절감 수치는 27.1%입니다.]
음, 바로 이게 문제다.
비용은 배로 증가하는데 쿨타임 절감 효과는 고작 10%뿐이라는 것.
처음 100포인트로 10%를 줄일 수 있지만, 두 번째 200포인트로는 최초의 9%, 세 번째 400포인트로는 8.1%밖에 감소시키지 못한다. 대충 생각해도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다.
나는 적정한 지점에서 타협을 선택했고, 그 지점은 700포인트로 27%의 쿨타임을 줄이는 것이었다.
‘정보창 스킬 4레벨까지 올려.’
[신중히 처리하기 위해 한 번만 더 묻습니다. 700포인트를 사용해 정보창 스킬의 레벨업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이 선택은 불가역적이며, 소모된 포인트는 어떤 경우에도 환불 되지 않습니다.]
‘그래.’
[정보창 스킬을 4레벨로 업그레이드하셨습니다. 현 시간부로 정보창 스킬의 쿨타임은 7시간 17분 24초로 변경됩니다.]
좋아. 10시간마다 한 번씩 쓰던 걸 7시간까지 줄였군.
나쁘지 않다.
내친김에 ‘아직 한 발 남았다’ 스킬도 100포인트 들여 2레벨로 올렸다. 재사용 대기가 1주일이나 되는 무지막지한 이 스킬은, 한 번의 레벨업만으로 16시간 48분이라는 시간이 앞당겨졌다. 아직 써본 적은 없지만 언젠간 2 연사를 해야 할 때를 대비하는 차
원이었다.
그렇게 800포인트를 쓰고 남은 포인트는 2400포인트 가량. 이제 이걸 종잣돈 삼아 열심히 불려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폰으로 문자가 도착했다.
"응? 과대가 아침부터 웬일이람?"
문자 발신인은 2학년 과대 정우선이었다.
-우선 : 도훈이 형 어젠 잘 들어가셨어요?
잘 들어가긴 했지.
나연이랑 연두 구멍 속으로 쏘옥.
-도훈 : 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우선 : 다음 주 MT 때문에요. 어제 성수 형이랑 형 없을 때 잠깐 얘기했는데 이번 MT는 2학년을 주축으로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도훈 : 그걸 왜 2학년이 준비해? 집행부는 뭐하고?
-우선 : 3학년 선배들은 좀 있으면 교생실습 들어가야 되서 여력이 없다더라고요. 작년에도 실습 끝나자마자 바로 중간고사라서 말이 많았거든요. 그것 때문에 올해는 실습을 좀 앞당겨 들어간다네요.
사범대의 3학년 1학기는 교생실습 기간.
보통은 4월 초부터 한 달가량 실시하는데, 올해부터 일정이 당겨진 모양이었다.
-우선 : 혹시 시간 되시면 오전 수업 시작 전에 잠시 뵐 수 있을까요? 2학년 전공 시간 전에 모두 모이기로 했어요.
다 모인다니 안갈 수도 없잖아?
귀찮게 됐군. 하필 잠도 많이 못 잤는데···.
이것으로 2시간은 더 잘 수 있을 줄 알았던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나는 담배를 모두 태우고 들어가 선잠이 들어 있던 나연과 연두를 깨워 작별인사를 했다.
"바로 학교 가봐야 할 것 같아."
"벌써요?"
"이제 8신데요? 1교시 수업 있으셨어요?"
"아니. 과대가 2학년 전원 소집했어. 전공수업 전에 회의할 게 있다고."
"아···. 우선 선배 진짜, 도움이 안 되네요."
"오빠도 많이 피곤하실 텐데."
"정 졸리면 과방에라도 쓰러져 한숨 자야지 뭐. 너희들은 푹 쉬어."
"네."
"오빠. 저희 새벽에 있었던 일은···."
나연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날이 밝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셋이 함께 떡국 열차 놀이를 하던 것이 부끄러워진 모양이다. 하긴 그런 말을 어디 가서 할 수 있겠어?
"당연히 비밀이지. 서로 입조심하자고."
"네."
두 사람을 뒤로하고 나오는데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가만, 나연이랑 연두 둘 다 처녀 아니었던가? 왜 피를 못 본 것 같지?’
[처녀혈 말씀이신가요? 처녀라 할지라도 항상 처녀막이 있는 건 아니죠. 격렬한 운동이나 자위 등으로 손상되기도 하니까요.]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중요한 건 두 사람을 동시에 땄다는 사실이다.
이것으로 우리 과 17학번 탑3를 모두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팔선녀 중 남은 사람은 셋.
남은 애들은 MT 가서 하나씩 눕혀야 겠군.
***
대학본부 앞 주차장.
며칠째 같은 자리에 세워진 대형 벤 안에서 남자의 호통 소리가 바깥까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지연, 누가 멋대로 개별행동하랬나?"
"죄송합니다, 팀장님. 술김에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하면 다냐? 들켰으면 어떡할 뻔했어! 허락받지 않은 행동을 왜 멋대로 해?"
"면목 없습니다."
지연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빌었다.
지연의 돌발 행동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경호팀장 박문수는, 압박붕대를 감은 그녀의 다리를 보고는 마음이 약해졌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리는 괜찮고?"
"네?"
"깁스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오전에 병원이라도 다녀와. 치료 대충 하면 골병든다 너."
문수의 따스한 말 한마디에 설움에 복받쳐있던 지연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평소엔 무뚝뚝하지만, 가끔 부하들을 챙길 때 비치는 모습에서 그의 잔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엄하지만 인정이 있는 사내다.
"괘, 괜찮습니다, 팀장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집부리기는. 어쨌든 별일 없이 끝났다니 이쯤하고, 변경된 사항에 대해 알려주겠다. 모두 주목."
"옙."
밴에 함께 타고 있던 기술자와 대리가 문수의 브리핑에 귀를 기울였다.
"한동안 은신해 있던 고성민이 저번 사건으로 전면에 드러나면서 그룹 후계구도가 심상치 않다."
"네?"
"고 회장 살날이 몇 년 안 남은 것 같으니까 슬슬 일가 친척놈들이 시체라도 뜯어 먹으려고 이빨을 드러내고 있단 소리야. 특히 성민이 예상치 못하는 타이밍에 튀어나오는 바람에, 분위기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그 말씀은···."
대리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동네 아저씨처럼 보이는 평범한 인상이지만, 실은 서울대 출신에 영국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중의 인텔리다.
"그래. 여기서 저런 잡놈이나 염탐하고 있기엔 여기 모인 인력이 아깝다는 소리지. 사실 배후에 놈을 사주한 세력이 있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고성민을 추문으로 실각시키려는 음모가 아닐까 하고."
"그것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죠."
"하지만 아무리 정보망을 돌려도 별다른 연결고리를 못 찾겠더라고."
"역시 그랬군요. 지난 3일간 감시한 결과 역시 평이했습니다. 그저 후배들에게 인기 많은 대학생 정도랄까요?"
"팀장님 설마 이대로 철수하신다는 말씀인가요?"
지연의 물음에 문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래도 아직까진 의심 점이 남아 있어. 은성 아가씨와의 관계도 걸리는 구석이 많고. 일단 이도훈에 대한 밀착 감시는 한지연 단독으로 마크하는 것으로 하자. 나머지는 오늘부로 짐 챙겨."
대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서포트 없이 지연이 혼자 괜찮을까요?"
"한지연. 지난 3일간 가까이서 지켜봤으니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서포트가 필요할 정도로 위험한 녀석이던가?"
문수의 물음에 지연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 동향파악 정도면 저 혼자도 충분합니다."
"그래. 부디 경거망동 말고 특이사항 생기면 나한테 직통으로 보고 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지연의 빠릿빠릿한 대답에 문수가 한 번 더 당부했다.
"···넌 다 좋은데 가끔 칠칠찮아서 걱정이야. 단독행동하다 혼자 다쳐서 오질 않나."
"조심, 또 조심하겠습니다."
"그럼 장비들은 어떻게 할까요?"
기술자가 물었다.
"일단 그대로 둬. 혹시나 나중에라도 써먹을 데가 있을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저기 팀장님."
"왜?"
"그런데 계속 캠퍼스 생활만 감시할까요? 어제 보니 방과 후에도 이리저리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것 같던데요."
"혼자 24시간 밀착 감시가 가능하겠어? 너 퇴근은 안 할래? 아까도 말했지만 당장은 지원할 여력 없다."
"되는 데까진 해보겠습니다."
"우리 쪽 일은 초과근무 수당 같은 거 없는 거 알지? 나중에 청구해도 얄짤없다."
문수의 농담에 지연이 모처럼 미소 지었다.
"걱정 붙들어 매십쇼. 열정 페이로 때우겠습니다!"
문수는 지연의 환한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흠, 저 녀석만 두고 가는 게 적합한 판단인지 모르겠군. 능력은 충분한 데 항상 덜렁거리는 게 걱정인데.’
하지만 하나뿐인 손자의 후계구도부터 확고히 다지라는 고회장의 특명 이후, 박문수는 우선순위를 따져 인력을 재배치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분명 이도훈에게 모종의 비밀이 있다고 굳게 믿지만, 당장은 보이지 않는 적보다 보이는 적에 전력투구해야 할 시점. 고성민의 부탁이 있긴 했지만, 자신의 상관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월급을 주는 고회장이었다.
‘뭐 어쨌든, 감시망을 완전히 해제한 것도 아니니 그동안 지연이 잘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천진난만 웃고 있는 지연을 바라보는 문수의 눈으로 불안한 기색이 스쳐 갔다.
***
"일단 MT 장소부터 섭외해야 돼. 그게 가장 급한 일이야."
"작년에 갔던 데는?"
"난 거기 반대. 자는데 바퀴벌레 나오겠더라. 잠잘 곳이 최악이야."
"꺄아! 싫어. 바퀴벌레라니."
"그럼 어디로 가? 누구 아는 데 있어?"
체육과 2학년 학생들은 전공수업 1시간 전 강의실에 모여 회의를 했다. 그러나 행사를 주도한 경험이 전무한 2학년들로서는, 시작부터 의견이 엇갈리며 제자리걸음만 계속되었다.
회의 시작 20분째 MT 장소조차 정하지 못하는 모습에 도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애들이라 그런지 회의가 중구난방이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우리 이러지 말고 몇 개 딱 정해서 다수결로 끝내자. 이러다 아무것도 못 짜겠다."
"나도 다수결 찬성."
"어디가 되더라도 무조건 따르는 거로."
"콜!"
결국 세 곳의 후보지가 물망에 올랐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작년에 갔던 을왕리 해변.
다른 과가 작년에 다녀왔는데 좋았다는 한탄강 숲속 팬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온 곳은 가평 대성리 캠핑장이었다.
"하던데로 하자. 선배들도 따라갈 텐데 괜히 새로운데 갔다가 망하면 2학년이 옴팡 뒤집어쓰면 어쩌려고?"
"그때 바퀴벌레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차라리 한탄강 쪽으로 가. 국어과 친구가 얘기해줬는데 레프팅도 하고 엄청 재밌었데."
"어차피 어딜 가도 민박하거나 팬션 들어가 놀 텐데 그게 무슨 재미야? 차라리 캠핑장가서 텐트 치고 놀자. 바비큐도 먹고 모닥불 피고 얼마나 재밌어? 요샌 캠핑이 대세라니까?"
도훈은 앞의 두 곳보다 텐트 쪽이 더 괜찮아 보였다.
‘새터 때도 그랬지만 한방에 모아놓고 자는 건 떼씹할거 아닌 이상 너무 위험해. 차라리 독립된 텐트가 애들 공략하긴 훨씬 수월할 거야.’
무엇이든 여자와 자는 것부터 생각하는 도훈은 당연히 캠핑에 손을 들었다. 표가 갈리는 바람에 다수결의 결과는 아슬아슬 캠핑장으로 결정되었다.
"좋아. 장소는 이제 정했으니 장보는 것은 누가 할지, 레크레이션 준비랑 맴버십 트레이닝 조교도 뽑아보자."
"MT 조교까지 우리 학년에서 해야 돼?"
"성수 형 말론 집행부들은 이번 MT 완전 손 놓을 거래. 몇 명 가지도 못할 것 같다고 말하더라고."
"와, 너무하네 선배들도. 아무리 실습이랑 맞물려도 그렇지 과 MT를 2학년한테 떠넘기냐."
"어쩌겠어. 교생실습 점수도 임용에 들어간다는데···. 똥줄 타는 사람은 오히려 3학년 들이지. 사범대 다른 과도 사정 들어 보니 올핸 2학년 위주로 움직일 거래. 너무 불만 품지 말자."
우선이 어른스럽게 동기들을 다독였다.
‘음, 언제봐도 듬직하단 말이지. 저녀석도.’
역할 분담이 대충 정리되었을 때 우선이 도훈에게 부탁했다.
"혹시 도훈이 형이 MT조교 좀 맡아 주실 수 있으세요?"
"나?"
"네. 보통 군필자 형들이 많이 맡는데 지금 저희 동기 중에 군필자는 형밖에 없으셔가지고···."
‘하-! 이거 시키려고 날 아침부터 부른 모양이구나? 이 자식 처음부터 노렸네노려.’
졸지에 MT 조교를 맡게 된 도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 190. 하수 탈출-1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