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하수 탈출-7- >
‘로시 야광 투시경 같은 아이템은 없나?’
[밤눈이 필요하신가요?]
‘재냬 뭐하는 지 궁금하잖아. 보나 마나 불 꺼놓고 있을 텐데.’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아이템 목록을 갱신해 보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관련 아이템을 띄워놓았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디스플레이엔 인터넷 쇼핑몰 비슷한 화면이 나타나 있었다. 나는 일일이 스크롤을 내려가며 목록을 확인했다.
[나이트 비젼]고글, 500p
-완전한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이미지를 제공함.
*스마트폰 충전기로 충전 가능.
-사용 시간 : 완충 후 30분.
[심야의 감시자]카메라, 550p
-탁구공 크기의 소형 카메라.
-비접촉식으로 대상물체의 온도분포도를 보여주는 장비. 적외선으로 감지된 주파수 반응을 전기적 신호로 만들어 화상 시스템으로 구현함.
*스마트워치와 연동됩니다.
-사용 시간 : 완충 후 1시간.
‘가만, 이걸 어디다 설치해? 애들 자는 방에 문 열고 들어가기라도 하란 말이야?’
[흠···. 그것도 문제로군요. 아니면 이건 어떻습니까?]
[음향 증폭기]스티커, 200p
-부착한 주변의 소리를 증폭시킴.
-스마트 워치 스피커로 증폭된 소리를 전송 재생.
-소모성 아이템, 부착 후 1시간 뒤 효력이 사라짐.
‘스티컨데 도청 기능이 있다고?’
[천상계의 발전된 나노 기술은 종이 수준의 얇기에서도 도청 가능한 장치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그럼 이걸 문에 붙이면 반대편 소리가 증폭되어 들린다는 소린가?’
[네. 바로 옆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죠.]
‘효력이 사라지고 나면 어떻게 되는데?’
[다시 회수할 필요가 없도록 일상에 쓰이는 형태로 인쇄 가능합니다. 쿠폰이나 광고전단처럼요.]
‘그거 괜찮은데? 앞에 두개는 너무 값이 비싸고 당장 사용하기 어려우니, 일단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부터 들어 봐야겠어. 그래야 작전을 짜지.’
[스티커 디자인은 어떻게 할까요?]
‘음···, 치킨 쿠폰. 그게 좋겠군. 아까 냉장고 앞에 노노치킨 쿠폰 몇 개 붙었거든. 그 디자인으로 빼 줘.’
[알겠습니다. 인쇄 후 전송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는 점 양해 바랍니다.]
5분쯤 지났을까?
로시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주인님 지정 위치로 음향 증폭 스티커가 전송되었습니다.]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정말로 치킨 쿠폰이 들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영락없는 치킨 쿠폰이다.
‘이런 게 도청이 된다니 신기하네.’
준비를 마친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혹시나 애들이 소릴 듣고 눈치채지 못하도록 문고리를 돌릴 때도 숨을 죽여야 했다.
‘일단 작은방까지 살살···.’
[마치 밤손님처럼 움직이시는군요.]
‘당연하지. 은밀 기동은 기도비닉 유지가 생명이걸랑.’
도둑고양이처럼 사뿐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작은방에서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워낙에 작게 소곤거리고 있어 뭐라 말하는지 밖으로 새어 나오질 않았다. 문의 방음도 생각보다 잘돼있는 것 같았다.
‘흐흐. 하지만 나에겐 이 아이템이 있지.’
나는 치킨 쿠폰과 똑같이 생긴 스티커를 조심스럽게 문에 붙였다. 그리곤 다시 원래 방으로 돌아왔다.
[부착에 성공했습니다. 음향 증폭기와 스마트워치를 연결하시겠습니까?]
‘그래. 어디 한번 음질 한번 감상해 보자.’
[연결되었습니다. 스마트워치의 원형 휠을 돌리면 볼륨 조절도 가능합니다.]
싱크가 완료되자 스마트워치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로시 말처럼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한 음색이었다.
"···연두 너 진짜 도훈 오빠한테 관심 없어?"
"진짜라니까? 아까부터 계속 말했잖아."
"근데 아깐 왜 그런 거야?"
"내가 뭘?"
"오빠랑 단둘이 택시 타고 가려고 했잖아."
"내가 가자고 했니? 오빠가 알아서 데려다준다고 한 거지."
"정말 오빠 혼자 그런 거라고? 미리 말 맞춘 게 아니라?"
"그렇다니까? 나도 사실 의외였어. 나한테 왜 그러나 싶더라고."
"혹시···. 도훈 오빠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걸까?"
"그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까 손병호 게임 할 때 못 봤니? 나 아주 잡아먹으려고 드는 거? 너 같음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서서 오줌싸라고 시키겠어?"
"쉿-! 목소리 너무 커. 오빠 깨겠다."
"암튼, 난 진짜 도훈 오빠한테 관심 없어. 정확히 말하면 남자한테 별로 흥미가 없다고 해야겠지만···."
"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커밍아웃하는 건가?’
나는 휠을 돌려 볼륨을 높였다.
"아무튼, 지금은 남자친구 사귀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어."
"정말이지? 내가 오해한 거 맞지?"
"그렇다니까. 나연이, 너 나 못 믿어?"
"믿지. 그니까 너한테 다 말한 거 아냐. 내가 도훈 오빠 좋아 하는 것까지."
[오,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어느새 나연 양의 마음을 훔치셨군요.]
‘포인트 쓰면서 노력한 보람은 있네.’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나연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저렇게 귀엽고 예쁜 애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니···. 흐흐. 역시 대물로 태어나고 볼 일이군. 아니지, 이건 대물이랑 상관없나?
"넌 도훈 오빠가 어디가 그렇게 좋아?"
"전에도 말했잖아. 키 크지, 잘생겼지, 운동도 잘하지."
"지환 오빠도 그렇잖아? 키 크지, 훈남이지, 육상 오래 해서 몸매도 잘빠졌지."
"야. 그 사람 얘긴 꺼내지도 마. 어찌나 변태 같던지···."
"DVD방에서 말이지? 근데 남자라면 누구나 다 그러지 않을까?"
"남자라고 다 똑같니? 그리고 지환 선배는 여친도 있으면서 나한테 찝쩍댔잖아."
"도훈 오빠는 안 그럴 거 같아?"
"무슨 말이야?"
"원래 잘생긴 사람은 다 똑같다고. 옆에 여자친구 있어도 한눈파는 거. 도훈 오빠도 얼굴값 하겠지. 여자들이 가만 놔둬야 말이지."
"흠, 하긴 정음이도 좀 티 나더라. 서현이도 그렇고. 다들 오빠한테 잘 보이려고 무진장 애쓰더라고."
"걔들만 그러면 다행이게? 희주 고 계집앤 완전히 대놓고 들이대던데? 저번에 개강총회 때 보니까 옆에 다른 사람들 없으면 아주 자빠질 기세더라야."
"으, 짜증 나! 이게 다 오빠가 확실하게 선을 안 그어서 그래. 모든 여자한테 잘해주니까."
"남자들은 별수 없다니까? 솔까말 주면 안 먹을 남자가 어디 있니?"
"주다니? 뭘 줘?"
"그거 말야."
"응?"
"대주는 거."
"야! 넌 진짜 무슨 그런 말을···."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연두가 교묘하게 나를 깎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속셈은 뻔하다.
나를 이지환과 도매금으로 매겨 남자는 결국 똑같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치사하고 얄팍한 수작이다.
"진짜라니까 그래? 남자라는 동물은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났어. 사랑같은 거 없어도 본능적으로 여잘 찾게 돼 있다고."
"아닐 거야. 도훈 오빤 그런 사람 아니야."
믿음을 저버려서 미안하구나 나연아, 난 그런 사람이야.
"증명이라도 해줘?"
"어떻게?"
"내가 만약 도훈 오빠 유혹하면, 오빠가 나 안 덮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연두 너 미쳤니? 무슨 그런 장난을 쳐?"
"거봐. 너도 자신 없잖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내가 지금이라도 도훈 오빠 곁에 가서 알몸으로 홀딱 벗고 있으면 도훈 오빠가 과연 참을 수 있을까?"
"하지 마. 하면 진짜 두 번 다신 너 안 볼 거야."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나연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격해진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장난이야, 장난. 뭘 그렇게까지 정색해?"
"장난칠 게 따로 있지! 너 내가 오빠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그치만 너도 불안한 건 사실이잖아. 도훈 오빠나 지환 오빠나 둘 다 똑같은 사람이면 어쩔 건데? 그래도 계속 좋아할 거야?"
"흠. 오빤 정말 착해 보였는데···."
"그러지 말고. 우리 진짜로 한 번 테스트 해볼까?"
귀가 솔깃했다.
연두는 대체 무슨 꿍꿍인걸 까?
"테스트?"
"내가 취해서 실수한 척 도훈 오빠 옆에 잠깐 누워있다가 올게. 도훈 오빠가 깨어나서 나 안 건드리면 오빤 정말로 좋은 사람이지. 그러면 너도 안심할 수 있을 거 아냐."
"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뭘 고민하니? 어차피 둘 중 하나야. 도훈 오빠가 만약 날 거들떠보지도 않잖아? 그럼 너가 계속 오빠 좋아해도 괜찮은 거야."
"만약에 건드리면?"
"그럼 더 확실하지. 여자 후배가 술 취해 자고 있다고 건드리는 남자를 뭐하러 계속 좋아하니? 이지환이랑 하나도 다를 거 없구만."
‘요 앙큼한 계집애 보소?’
[저게 무슨 수작일까요?]
‘모르겠어? 일부러 나연이한테 보여주려는 거잖아. 내가 이지환하고 똑같은 종자라는 걸. 그래서 나연이가 정 떼게 하려고.’
[저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자기 몸을 희생해가면서?]
‘희생은 무슨? 쟤 레즈비언이잖아. 남자가 자기 몸 주무른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걸? 남자가 남탕 가서 남자 그거 보고 꼴리겠어?’
[지금의 비유는 잘 이해할 수 없군요.]
‘남자가 남자 그거 보고 꼴리는 건 게이란 소리야. 연두에게 있어 난 여자나 다름없을 거란 말이지. 쟤는 여탕 가면 꼴리는 애니까.’
[아하!, 이제 이해했습니다.]
"그러다 도훈 오빠가 너 진짜로 덮치면 어쩌려고 그래?"
"그땐 바로 소리 지를 게. 그땐 너가 그 방으로 재깍 뛰어와."
"흠···."
"왜? 찝찝하면 네가 해볼래?"
"시, 싫어. 난 그런 거 무섭다고."
"한 번도 안 해봐서?"
"아니···. 그냥 실망할 거 같아."
"실망?"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고백도 안 했으면서 막 몸부터 섞고 그러는 거. 난 그런 거 진짜 별로야. 오빠가 잠결에 날 덮친다면 정말 정말 실망스러울 거 같아."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내가 할게. 대신 소리치면 무조건 뛰어와야 해. 알았지?"
"으응···. 근데 우리 이런 짓 해도 되는 걸까?"
"무슨 짓? 난 아무 짓도 안 하는데? 오빠가 날 안 건드리면 그냥 술김에 실수했구나 하고 끝나는 거지. 쉽게 생각해."
"아, 증말. 나도 모르겠다!"
잠시 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시, 스피커 연동 종료.’
[넵.]
나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생각했다.
연두의 속셈은 이거다.
내가 자길 건드리도록 도발해 나연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 그렇게 남자에 대한 불신과 실망을 나연에게 보여준 뒤 나연을 독차지하려는 것이다.
‘독한 년 같으니라고. 서서 오줌쌀 때부터 어딘가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하는군.’
살신성인이랄까?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나연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 하는 그녀의 집착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인 법. 그녀의 작전을 미연에 알았으니 이제 적절하게 대처하면 될 일이다.
‘로시, 그 아이템 준비 되지?
[뭘 말입니까?]
***
연두는 냉장고 문을 열어 찬물을 꺼내 마셨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으, 술이 좀 과하긴 했나보구나. 아직도 머리가 띵 해’
도훈을 먼저 보내려다 자신이 더 취한 꼴이었지만, 어쨌든 도훈은 넉다운되어 있다.
‘나연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오빠지만, 나연일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연두가 스스로를 미끼로 삼아서 이런 짓까지 벌인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바로 그녀의 마음속에서 도훈을 밀어내는 일.
‘이렇게 해서 나연이를 빼앗을 수 있다면···.’
연두가 각오를 다지고 도훈의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암, 피곤해."
연두는 어둠 속에서 불도 켜지 않고 손을 더듬어 침대로 향했다. 혹시나 도훈이 깨어있더라도 실수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연기였다.
연두는 등 돌린 도훈의 옆에 살포시 누웠다.
‘남자 몸엔 전혀 흥미 없지만 그래도 이건 연기니까.’
연두가 천천히 도훈의 몸을 백허깅 했다.
"하아암···."
일부러 하품 소릴 내며 도훈을 껴안자, 연두의 가슴이 도훈의 등에 바짝 붙었다.
물컹-
자는 척 누워있던 도훈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뭉클한 촉감에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헉-. 시작부터 대담한 거 봐라? 어떻게든 날 흥분시켜보려고?’
도훈은 연두의 얄팍한 수작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도훈이 깊은 잠에 빠졌다고 착각한 연두는 도훈의 허리를 감싸고 더욱 가슴을 밀착해 왔다.
‘어쭈? 이래도 안 깨?’
요지부동한 도훈의 모습이 괘씸해진 연두는 파자마 앞 단추를 끌렀다. 속옷이 모두 젖어 노브라 상태였기에 연두의 보기 좋은 가슴이 고스란히 밖으로 끄집어 나왔다.
‘칫. 별로 내키진 않지만···.’
그리고는 도훈의 티셔츠를 말아 올려 등 짝을 노출시키곤 그대로 맨살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흐응, 흐응."
‘커헉. 설마 내 등에 닿는 오돌토돌 한 게 젖꼭지인 건가?’
도훈은 참아보며 했지만 스무살 꽃다운 아가씨의 대담한 도발을 당해낼 길이 없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발기가 이루어졌다.
‘젠장, 이건 참을 수 없구나.’
도훈의 지퍼 부근이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도훈의 텐트 상태를 확인한 연두가 피식 웃었다.
‘이거 봐. 사내놈들 다 똑같다니까?’
하지만 여전히 도훈이 잠든 시늉을 하고 있었기에 연두로서는 좀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다.
‘내 명품 가슴으로는 부족하다 이거지? 칫. 어쩔 수 없군.’
도훈을 뒤에서 껴안고 있던 연두가 손이 서서히 도훈의 바지춤으로 내려갔다.
< 183. 하수 탈출-7-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