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하수 탈출-5- >
"어? 갑자기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아니 둘이서만 가지 말라고요, 저도 같이 가요."
"엉? 나연이 너도?"
"생각해 보니 개포동 쪽이면 저희 집 가는 방향이거든요. 가는 길에 저 좀 내려주세요."
나연이 서둘러 핑계를 댔다.
도로에 손을 내밀어 택시를 잡던 성수가 대꾸했다.
"그렇게 해. 택시비도 아끼고 괜찮겠네. 저기 온다. 셋이 저거 타고 가."
"부회장님은요?"
"난 다음 거 탈게 . 잘 가라."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남자인 도훈이 보조석에 앉고 사이가 불편한 나연과 연두가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도훈이 말했다.
"기사님, 개포동요. 아, 그전에 공대 뒷문에서 한 명만 내릴게요."
"벨트메세요."
피곤해 보이는 택시 기사가 미터기를 누르며 차량을 출발시켰다.
어떻게든 둘 사이에 끼어들긴 했지만 나연은 여전히 둘만 남게 될 상황에 대해 전전긍긍했다. 자신이 내리고 나면 도훈이 뒷좌석으로 자릴 옮긴 뒤, 기사가 룸미러로 쳐다보건 말건 연두랑 물고 빨고 해버릴 것 같았다.
'연두 요 계집애, 분명 도훈 오빠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틀림없어. 아까도 내 편 안 들고 도훈 오빠 편들었잖아? 우선 오빠가 군대 가면 편지를 써주느니 어쩌니 하는 것도 오빠한테 관심 한 번 끌어 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나쁜년 같으니. 저번에 도훈 오빠한테 관심 일도 없다더니 순 거짓말이었잖아?'
나연은 망상 속에선 이미 연두와 도훈은 몰래 떡을 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내내 같은 술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조금만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억측이었지만, 불타는 질투심이 그녀의 눈을 멀게 했다.
둘이 우연히 눈만 마주쳐도 남몰래 사인을 보내는 것 같았고, 핸드폰을 보고 있으면 톡으로 통해 필담을 나누는 것이라 여겼다.
‘이대로 두 사람을 보내선 안 돼. 가만 놔뒀다간 오늘 밤 필시 사달이 날 거야. 무조건 찢어 나야 돼.’
결심을 굳힌 나연이 연두에게 말했다.
"연두야, 너 그냥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어? 아깐 안 되겠다며?"
"그건 그냥 심술 한 번 부려본 거지 바부탱아. 그렇다고 진짜로 집에 가버리면 내가 뭐가 되니? 응? 나랑 같이 가자."
'이 변덕쟁이 같으니!'
연두는 나연의 오락가락하는 태도가 얄미웠지만, 한편으론 그녀와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자기를 바래다 주겠다며 동승한 도훈만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꼴.
"근데 갑자기 행선지를 바꾸면 도훈 오빠가···."
"뭐야? 연두 너 집에 안 간다고?"
뒷좌석에 들리는 대화에 도훈이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네, 연두가 자기랑 같이 가자네요. 실은 집에 못 들어간다고 진작 말해 놨거든요. 어차피 지금 집에 가도 주무시는 부모님 깨우기도 민망하고···. 이 일을 어쩌죠?"
‘어쩌죠는 니미! 벌써 나연이랑 같이 잔다는 사실에 입이 귓가에 걸렸고만?’
나연이 합승하는 순간부터 이런 사태를 예감했던 도훈이지만, 짐짓 짜증난 어투로 투덜거렸다.
"그럼 나도 굳이 비싼 택시비 내고 거기 갈 필요 없었잖아? 난 연두 너 혼자 택시 타고 가기 부담스러울 까봐서 따라 간건데."
"오빠 미안해요."
"어쩔 수 없지. 저기 기사님 정말 죄송한데, 공대 뒷문 쪽에서 세워주실래요?"
"뭐야? 학생들 개포동 안갈 거야?"
"네,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장거리 탑승 손님에 기뻐하던 기사는 기본료 거리에서 멈춘다는 얘기에 기분을 잡쳤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야밤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죄송합니다."
셋은 결국 쫓겨나듯 택시에서 내려야 했다. 도훈은 미안한 마음에 거스름돈도 받지 않았다.
도훈이 떠나는 택시를 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성수 형이랑 같이 타고 갈 걸. 여긴 완전 우리 집이랑 반대 방향이네. 택시 타고 더 멀어져버렸다."
도훈을 일부러 들으라는 듯 투덜거렸다. 나연이 뻘쭘함에 푹 고개 숙였다.
"미안해요 오빠."
"미안한 줄은 알고? 여긴 택시도 잘 안 오는 것 같은데 또 언제 집에 간담? 됐고, 일단 앞장서."
"네?"
"집까진 바래 다 줘야 할 거 아냐. 보니까 가로등도 별로 없구만."
"오, 오빠···."
나연이 도훈의 매너에 감격했다.
하지만 도훈은 속으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오늘 밤은 한 이불 세 가족인가? 어떤 핑계를 대서 집에 따라 들어간담?’
연두 역시 머릴 굴렸다.
‘도훈 오빠 빨리 보내버리고 나연이랑 같이 씻자고 해야지. 장난스럽게 비누칠을 하다 가슴을 마구 주무르고 하아···. 같이 하는 상상만 했는데 벌써 젖을 거 같아.’
"여기에요. 저 건물 2층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
연두가 도훈에게 꾸벅 인사했다.
"오빠도 조심히 가세요. 진짜 매너 짱이에요!"
나연은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는 도훈을 바라보았다. 둘을 찢어 놓기 위해 연두를 억지로 끌어 들이긴 했지만, 같이 들어가는 사람이 연두가 아니라 도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도훈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참, 혹시 나연이 너 보조 배터리 있음 빌려줄래?"
"네?"
"아니 배터리가 떨어져서 충전 좀 하려고. 깨깨오 택시 부르려는데 폰에 배터리가 하나도 없네."
"보조배터리 같은 거 없는데···."
사실 나연은 보조배터리가 있지만 거짓말을 했다.
잘하면 도훈을 집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님 저희 집에서 잠깐 충전하고 가실래요?"
"그럴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두가 훼방을 놓았다.
"오빠, 그냥 제거 빌려드릴게요. 가방에 하나 있어요."
‘아니 저 계집애가!’
도훈은 일부러 폰을 꺼뜨리면서 핑계를 댄 것인데 연두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언제나 반전은 있는 법.
"아, 이걸론 안 돼. 내 폰은 5Pin케이블이 안 맞아."
"혹시 에이폰이에요?"
"어."
"에이폰이면 저희 집에 충전기 있어요. 잠깐 들어와서 충전하고 가세요."
‘흐흐. 아무리 봐도 나연이는 연두보다 나랑 더 있고 싶은가 보군?’
"그래도 돼? 괜히 나 때문에 불편한 거 아냐?"
"괜찮아요. 저희 집이 좀 넓거든요. 투룸이라."
"원룸 아녔어?"
"네. 제가 좁은 걸 싫어해서 부모님이 투룸으로 구해주셨어요."
"오, 부자구나."
"에이, 그 정돈 아니구요."
도훈이 집에까지 따라 들어가자, 연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빤 왜 눈치 없이 집까지 따라오는 거야? 얼른 폰 충전시켜서 쫓아 보내야지.’
그렇게 생각이 다른 세 사람이 한 집으로 들어갔다.
***
연두의 집은 혼자 사는 집치고는 상당히 넓었다.
거의 20평 아파트 정도는 되어 보였다.
"투룸인데 방이 3개야?"
"하나는 너무 작아서 그냥 옷방으로 쓰고 있어요."
"우리 집은 진짜 좁은데 거의 두 배 되는 거 같다."
"참, 오빠 원룸 사신다 그랬죠?"
"어. 나는 정문 근처. 학교까진 걸어서 15분 쯤 걸려."
"아하, 저도 정문 쪽도 알아봤었는데 주변에 술집 많다고 부모님이 이쪽으로 구해주셨어요."
‘진짜 집이 좀 사나 보구나. 여긴 주택가라서 보증금도 훨씬 셀 텐데···. 하긴 저번에 러시아 유학까지 갈라고 했다 그랬지?’
"오빠, 여기 에이폰 충전기요."
"응. 10분만 충전하면 될 거야."
"혹시 배고프심 뭐라도 드릴까요?"
나연이 냉장고를 열었다.
"연두 너도 뭐 마실래?"
"난 그냥 물."
"오빠는요?"
"뭐 있는데?"
"음, 우유랑 오렌지 주스요, 아 맥주도 있네?"
"맥주? 너 술 좋아해?"
"아뇨, 그정돈 아닌데 가끔 생각날 때 한 캔씩 마시려고요."
"혼술, 좋지."
"맞다. 아까 호프집에서 어떤 여자분 혼술 하고 있던데. 요새 유행인가 봐요."
연두가 호프집에서 봤던 한지연을 떠올리며 말했다.
나연은 혼 술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저었다.
"혼술 그런 거 까진 아니고요, 저번에 마트에서 장볼 때 6개들이 세트를 싸게 팔길래 좀 사놨어요. 근데 아직까지 한 캔도 못 뜯었네. 자리만 차지하니까 얼른 치워야 되는데···. 그러지 말고 우리 맥주 한 잔씩 더 할래요?"
"어?"
나연은 도훈을 집안으로 끌어들이자 갑자기 그를 주저앉히고 싶어졌다.
특히 단짝인 연두가 자신을 배신하고 도훈을 유혹한다고 오해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 질투심에 더욱 도훈을 빼앗고 싶었다.
평소라면 이런 생각까지 못했겠지만 연두라는 라이벌이 촉매제가 되어 그녀를 좀 더 대범하게 만들었다.
"야, 오빠 곧 가야 되잖아."
연두가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도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받았다.
"급한 일도 없는데. 그럼 한잔씩만 할까? 안주는 뭐 있는데?"
"냉동실에 만두 사놓은 거랑, 아. 라면도 있어요, 해물짬뽕. 그거 끓이면 되겠다."
갑자기 죽이 맞는 두 사람을 보며 연두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꼴을 보아하니 도훈은 최소 1시간 이상 게기다 갈 판이었다.
‘쳇. 도훈 오빠 전혀 도움 안 되네. 그냥 빨랑 먹이고 후딱 보내버려야지.’
"두 사람 잠깐 거실에 쉬고 있어. 안주는 내가 할 게."
"아니에요. 그래도 손님인데···."
"아니야. 나 요리하는 거 좋아해. 만두는 군만두가 좋겠지? 프라이팬이랑 식용류만 꺼내줘. 라면 냄비는 저거 쓰면 되겠고."
"요리도 잘하세요? 오빤 정말 못하는 게 없구나!"
"잘하는 건 아니고 자취하니까 먹고 살려고 배운 거야. 맛은 장담 못해."
"그래두요, 저보단 잘하실 거 같은데."
주방에서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는 대화에 연두는 슬슬 위기감을 느꼈다.
‘가만있으면 안 되겠어.’
"나연아. 나 옷 방 좀 구경해도 돼?"
"어. 저기 저 방."
"같이 가자."
"응?"
연두는 도훈에게서 나연을 때놓기 위해 억지로 손을 끌고 옷 방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 모두 생각이 다르다 보니 견제가 치열했다.
레즈비언인 연두는 나연을, 나연은 자신이 좋아하는 도훈을, 도훈은 둘 다 상관없지만 기왕이면 업적과 보상을 위해 연두를 노리고 있었다.
‘동상이몽도 아니고, 삼몽이네. 완전 개판 오 분 전이야.’
[그래도 주인님이 가장 유리한 상황 아닙니까? 여차하면 둘 다 한 방에···.]
‘어떻게든 한 집에 들어오긴 했는데 저 레즈비언이 과연 나한테 박힐까 모르겠어.’
[계획은 있으신지요.]
‘일단 둘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가야 견적 나올 거 같아. 쓰리썸은 무리니 순차 공략으로 가야지.’
[주인님의 능력만 믿습니다. 필요한 아이템이 있다면 언제든 문의 주십시오.]
‘알겠어. 이럴 땐 포인트 아끼는 게 아니지.’
"안주 다 됐다!"
도훈이 끓인 라면과 프라이팬에 달군 만두를 들고 나갔다.
"밑에 깔 것 좀 받쳐 줘봐."
"네."
거실 테이블에 안주를 놓자 시원한 맥주캔이 올라갔다. 여자 둘은 조그만 쇼파에 앉아, 도훈은 컴퓨터 의자를 끌어 당겨 앉았다.
"우리 짠할까?"
"네."
"짠!"
세 사람은 서로를 힐끔거리며 맥주를 들이켰다. 서로 목적이 다르다 보니 조용한 가운데서도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빠를 먼저 취하게 해서 보내야겠어.’
‘나연이 부터 재워야 하나?’
‘연두가 지금이라도 집에 가주면 좋겠다.’
***
"도훈이 이 새끼. 내가 놓칠 줄 알았지?"
한지연은 늦은 시각 대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그곳엔 월주차를 끊어놓고 장기 주차중인 대형 벤 한 대가 서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자동차지만 양쪽으로 열리는 뒷문을 열고 들어가면 첩보시설을 방불케 하는 각종 첨단 기기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크크. 내가 이럴 줄 알고 아까 추적기를 달아 놨지롱?"
지연은 아까 체육관으로 다시 찾아갔을 때 도훈의 옷에 조그만 소형 추적기를 붙였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추적기는 GPS 신호를 발신하는 장치로, 차량에 달린 기계를 통해 위치를 추적할 수 있었다.
"흐흐. 이 홍두깨 자식 걸리면 아주 묵사발을 내줘야지."
혼자 술을 홀짝거리다 과음을 하고만 지연은 살짝 제정신이 아니었다. 퇴근 이후 타겟에 대한 감시는 상부의 허락을 거쳐야 하는 사안임에도 제멋대로 차량으로 돌아와 도훈을 찾아 나선 것이다.
하루에 두 번이나 물을 먹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어딨니 두깨야? 홍두깨, 얼른 나오렴."
해당 추적기의 가용범위는 반경 5Km로 국성대를 포함한 인근 상가까지 샅샅이 뒤질 수 있었다. 곧 모니터의 지도위로 빨간 점이 깜빡거리며 도훈의 위치가 나타났다. 지도를 확대해 보니 흔히들 공대 뒷길로 불리는 대학교 원룸촌이었다.
"어? 여긴 어디지?"
지연이 숙지하고 있던 도훈의 집주소가 아니었다. 위성사진 모드로 바꾸어 보니 상가 건물 같지도 않았다.
"···원룸인가?"
지연은 해당 주소를 핸드폰에 담은 뒤 차에서 내렸다. 술에 취해 살짝 비틀거리긴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 밤도깨비 같은 자식, 집에도 안 들어가고 남의 집에서 잔다 이거지? 밤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지 밝혀내고 말겠어. 이건 절대 스토킹이 아냐. 24시간 밀착 감시를 좀 더 일찍 시작하는 것일 뿐."
스스로의 일탈을 합리화한 지연은 지도에 적힌 주소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
"하하! 오빠 또 걸렸다!"
"아니 이런 법이 어딨어? 치마 없는 사람 접으라니? 아깐 귀걸이 안 한 사람 접으라고 그러고!"
"규칙은 규칙이죠! 언넝 접어요. 이제 손가락 하나 남았네?"
아까부터 연두는 나를 맥이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흔히들 손병호 게임이라 불리는 손가락 접기 게임에서 계속 나밖에 걸릴 수 없는 내용으로 밀고 나간 것이다.
‘아무리 맥주지만 너무 빨리 마시면 위험한데···.’
새터에서도 느꼈지만, 원주인의 몸은 덩치에 맞지 않게 술이 약한 편이다. 이대로 가다간 공략이고 뭐고 술에 취해 골뱅이가 되고 말 것이다.
‘일단 치사해도 게임부터 이겨야 겠어.’
결국 돌아온 내 차례에서 나는 절대 여자들이 할 수 없는 멘트를 날렸다.
"야! 여기서 서서 오줌싸는 사람 빼고 접어!"
< 181. 하수 탈출-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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