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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92화 (172/2,000)

< 174. 낭만의 캠퍼스-43- >

"선배, 진짜 해도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내가 뭘?"

"연습경기를 그렇게 피터지 게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가뜩이나 다음 주부터 리그 시작이라 다들 예민한데···."

유미 말대로 여자 대표 팀의 표정은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체육과라고 한들 설마하니 선수도 아닌 일반 학생들과 박빙의 경기를 펼칠 것이라곤 예상 못 했을 터. 주전들로 가볍게 호흡이나 맞춰보려던 여자 대표 팀은 완전히 멘붕에 빠진 모습이었다.

‘내가 좀 오버했나?’

사실 스킬의 도움으로 이뤄낸 결과다 보니 조금은 찝찝한 마음이 든다.

심지어 지금의 배구 능력은 유미에게서 획득한 것.

그녀의 능력을 훔쳐 승부를 이긴다는 행위가 진한 부채의식을 남겼다.

"그렇게 이기고 싶어?"

"당연하죠. 이기지 못하는 게임은 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요!"

확실히 성격이 강하다 보니 승부욕도 남달랐다.

나는 선수 유니폼을 입고 씩씩거리는 유미를 쳐다보았다.

민소매 형태의 조끼는 블로킹을 위해 팔을 들 때마다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노출했다.

핫팬츠나 다름없는 하의는 엉밑 살이 보일 정도로 타이트하다.

게임에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는데 유니폼을 입은 유미는 어느 때보다 섹시해 보였다. 역시 운동하는 여자는 땀 흘리고 있을 때가 가장 매력적인 걸까? 땀에 찌든 저 상태로 바로 따먹고 싶어진다.

성욕이 치밀어 오르자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이깟 경기 이겨봐야 뭐하겠나?

괜히 유미 기분을 잡치게 했다간 나에 대한 호감마저 깎아 먹을 것이다. 연습 경기에 이기고 여자를 잃느니, 차라리 그녀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편이 낫을 지도 모른다.

가끔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

오랜 삶의 경험으로 체득한 교훈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나는 유미만 들리게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너무 내 기분만 냈나보다. 블로킹 열어 줄 테니 내 쪽으로 때려."

"네? 뭐라고요?"

"방금 말한 대로야."

삑-

경기가 재개되자 2학년 과대 우선이 오버핸드 서브를 날렸다.

후위까지 날아간 공은 상대 수비수의 리시브를 맞고 튀어 올랐다. 여자 팀의 세터가 낙하는 공을 받아 유미를 향해 띄웠다. 네트 앞에 서있던 성수와 내가 타이밍을 맞춰 동시에 뛰어 올랐다. 이제껏 유미의 공격을 몇번이나 무위로 그치게 한 철벽의 더블

블록.

공격 방향을 완전히 틀어막는 통곡의 벽 앞에, 유미의 시선이 갈피를 못잡고 흔들렸다.

점프 도중 유미와 눈이 마주친다.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빛.

내 말을 곧이곧대로 신뢰하기엔 지금껏 보여준 나의 태도가 너무나도 가열찼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결심을 굳혔는지 내 쪽으로 스파이크를 때렸다.

원래대로면 블록에 막혀 튕겨나갈 공이었지만, 나는 결정적인 순간 두 팔을 벌리며 가운데를 개방해 버렸다.

"으앗!"

실수를 가장해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유미의 공은 블록을 뚫고 지나간 뒤.

삐빅-!

"라인 인! 여자 팀, 매치포인트!"

유미의 스파이크는 아슬아슬 라인에 걸치며 득점을 인정받았다. 듀스 직후 곧바로 내준 허무한 실점에 성수가 탄식을 내뱉었다.

"아오! 어떻게 딱 그 사이로 가냐."

"죄송해요, 형."

"아니야. 운이 없는거지. 괜찮아."

마음씨 넓은 성수는 실수에 대해 질책하지 않았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다 진 경기를 멱살 잡고 캐리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열 번 잘하다 한 번 못한 것으로 구박받기엔 이 경기에서 내 지분이 적지 않다. 경기 시작부터 사생팬 수준으로 나를 응원하고 있는 연두와 나연 콤비 역시 격려를 보냈다.

"도훈 오빠 괜찮아여! 이길 수 있어요!"

"아자아자, 파이팅!"

"자자! 한 번만 더 막고 다시 듀스 가보자!"

성수가 동요하는 팀원을 다독였다. 경기 중 성수가 내보이는 카리스마는 생각했던 이상.

플레이 메이커는 나였지만, 파이팅 넘치는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은 3학년 부회장인 성수였다.

‘확실히 쓸만한 녀석이란 말이지. 리더쉽도 좋고.’

다시 시작된 여자팀의 서브.

나는 스크린을 펼치고 선 유미에게 또다시 속삭였다.

"···페인트 대비해라."

약속대로 다음 공격에서 나는 강타를 날리지 않고 손목을 비틀어 페인트를 시도했다. 그러나 미리 대비하고 있던 유미가 손쉽게 페인트를 걷어 올렸고, 상대편 레프트가 곧바로 속공으로 반격했다. 2타 만에 돌아온 공격을 우리 팀 수비수들은 제대로 대응

할 수 없었다.

삑-삑삑!!

결과는 남자팀의 아쉬운 패배.

비록 지긴 했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전형적인 ‘졌지만 잘 싸운’ 경기 내용 때문이었다.

"으! 아깝다!"

"그러게 듀스까지 갔었는데···."

"확실히 여자 대표 팀은 강하네. 2부 리그 8강 팀 다운 전력이었어."

다들 서로를 격려하고 있는데 우선이 나를 보고 물었다.

"그나저나 도훈이 형 지금이라도 남자 대표팀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공격이 장난 아니시던데?"

성수도 거들었다.

"그래. 교수님한테 부탁드려봐. 복학 전이라 대표 팀 선발전 못 나간 거라고."

"괜찮아요. 당장 시즌 시작하는데 연습도 안하고 어떻게 경기를 뛰겠어요. 내년에 정식으로 도전하면 되죠."

스포츠 모드로 활성화된 배구 능력은 기대했던 이상이었다.

당장 남자팀의 주전 공격수까지 힘들더라도 교체 선수 정도는 가능한 정도랄까?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두 번 사는 인생을 운동선수로 지내고 싶은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여자 꼬실 시간도 없게 죽겠는데 무슨 놈의 배구 선수?

"게임은 22 : 20으로 여자팀의 승리다. 남학생들도 연습 게임 상대 해주느라 고생많았다. 일동 차렷. 상호 간에 경례!"

심판의 선언에 네트를 사이에 둔 남녀 선수들이 나란히 서서 악수를 하며 지나쳤다. 유미는 나와 악수할 때 손바닥을 살살 긁으며 윙크했다. 왠지 야릇한 싸인이군.

스포츠 타올로 몸을 닦고 있는데 성수가 말했다.

"혹시 지금 사우나 갈사람 있냐? 끝나고 시원한 맥주도 한잔 마시고."

성수의 제안에 서너 사람 정도가 손을 들었다.

"도훈이 넌 안 가?"

"네. 저녁에 약속이 있어요."

"먼 약속?"

"친구 만나기로 했거든요."

"오, 여자냐?"

"아뇨."

"알았다. 아무튼 오늘 고생 많았어. 끝이 좀 아쉽긴 했다만 이 정도면 선방했지.."

"죄송해요. 체력이 달려서 마지막에 힘이 빠졌어요."

"아냐 잘했어. 어차피 너 아니면 듀스 가지도 못했어. 근데 넌 군대 가더니 배구가 더 늘어서 온 것 같다? 역시 대한민국 군대 최고구나."

"하하. 형이 공을 잘 올려주셔서 그렇죠. 그럼 맥주 맛있게 드세요. 참, 우선아 축구유니폼은 집에 가져가서 빨아서 갖다 줄게."

"네 형. 들어가세요."

짐을 챙겨 체육관을 나가는데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예상대로 유미였다.

-유미 : 선배, 끝나고 저 볼 거죠?

-도훈 : 어디서?

-유미 : 모텔 잡아놨어요. 택시 기본료 거리에요. 샤인 모텔 610호.

-도훈 : 헐, 모텔은 언제 또 잡았데?

-유미 : 방금 전 어플로요. 저 애들하고 뒷마무리하고 가야 되니까 좀 늦을 거예요. 먼저 가서 씻고 계세요.

캬. 역시 화끈해서 좋구나. 모텔까지 손수 예약해놓고 기다리라니.

마지막에 아량을 배푼 게 이렇게 돌아왔군.

예상대로 악수할 때 손가락을 간질 거린 건 한 판 하자는 싸인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답장하며 룰루랄라 택시를 잡으러 나갔다.

가만 내가 뭔가를 잊고 있는 것 같은데?

***

"오빠! 저 버려두고 내내 체육관에 계셨던 거예요?"

"읏, 송이든!"

체육관 입구 앞에선 잔뜩 독이 오른 한지연이 도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체육관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미안. 급하게 교수님 호출이 있어서 말도 못하고 와버렸다. 면접은 잘 봤니?"

"와, 진짜 어떻게 저를 그런 오타쿠 소굴에 던져두고!"

"왜? 무슨 일 있었어?"

"말도 마요. 완전 또라이들 이었다니까요?"

지연은 면접 때 겪었던 황당한 일을 언급했다.

"진짜 어이가 없었어요. 알고 보니까 애니메이션 동아리도 아니더라고요."

"아니라고?"

"몰라요. 무슨 자기들이 PK단의 하부조직이래나 뭐래나? 아오, 말도 마요 진짜. 정신병자들 보는 줄 알았으니까."

‘PK? 어디서 많이 들어본 단언데? 게임에서 쓰는 말이던가?’

[자, 잠시 만요. 주인님. 그들이 정확하게 PK단이라고 했다고요?]

‘어. 너도 방금 같이 들었잖아.’

[한 번 더 확인해 보십시오. 그들이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과대망상증 환자들이었을까? 걔들이 정확히 뭐라던데?"

"그러니까···."

지연은 최대한 상세하게 놈들이 했던 말을 전달했다. 자신이 얼마나 황당한 일을 겪었는지 알려주고 도훈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받고자 하는 심정이었다.

‘너도 들었지? 그냥 오타쿠들이 컨셉 잡고 장난친 모양인데?’

[···그런가 봅니다.]

‘왜? 뭐 걸리는 거 있어?"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제가 좀 과민했나 봅니다.]

로시의 변명이 왠지 석연치 않았지만 도훈의 당장 눈앞의 지연을 따돌리는 게 더 급했다.

"이든아, 오늘일은 정말 미안하고 나 중요한 약속 때문에 가봐야 할 것 같으니 다음에 내가 밥 한번 살게."

"네?"

"그럼 다음에 봐!"

도훈은 냅다 줄행랑쳤다.  거머리처럼 따라붙는 한지연을 떨쳐내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도망치는 도훈을 보며 지연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뭔데 저건···. 뻐꾸기. 응답바람."

-여긴 뻐꾸기. 이도훈은 다시 만났나?

"방금 만났는데 또 다시 도주 중이다."

-도주라니?

"모르겠다. 미친놈처럼 뛰어가는데 추격해 볼까?"

-달리기도 엄청 빠르다면서···. 됐다. 아직 24시간 밀착감시에 대한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이만 퇴근하자, 올빼미.

그세 도훈은 멀리 점이 되어 있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어쨌든 밥 약속은 받아냈으니 그때 친해지면 되겠지. 뭐."

퇴근 명령이 반가운 그녀는 영락없는 대기업 직장인이었다.

***

도훈은 유미가 알려준 모텔로 향하며 로시에게 물었다.

‘유미랑 진행하는 SM 마스터 위업 진도 좀 알려줘 봐.’

[······.]

‘로시?’

[아, 예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뭐야? 딴 생각했어? 와, 요샌 인공지능도 태업하냐?’

[아닙니다. 잠시 위와 교신 하느라.]

‘교신? 너 천상계랑 교신도 돼?’

[네. 아이템 수령 할 때도 늘 접속 하는 걸요.]

‘그래? 방금은 아이템 신청한 것도 아닌데 무슨 교신을 했어?’

[별 내용 아닙니다.]

도훈은 로시가 뭔가를 숨기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 나한테도 비밀이 있어? 넌 영원히 내 편이라며?’

[당연히 저는 언제나 주인님 편이죠. 방금 교신한 내용은 시스템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범위이므로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흠. 뭔가 수상한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금 SM마스터 진도에 대해 물으셨나요?]

도훈은 살짝 기분이 상했으나 로시가 이유가 있어서 그러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껏 시스템이라던가, 플레이어에 대해 여러 의문점이 있었지만 정말 궁금한 것들은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적이 많았다.

‘가만 보면 신이라는 작자도 은근 비밀이 많단 말이야?’

[현재 S 도달도는 54%, M 도달도는 48%입니다. 아시겠지만 SM 마스터 위업은 이전보다 강한 자극이 와야 도달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어떤 수치를 올리실 계획입니까?]

‘S는 강민주가 있으니까 얼마든지 올릴 수 있을 거 같아. 유미랑은 M에 도전해야지.’

[호오, 각오가 되셨습니까? 지난번엔 그렇게 질색하시더니.]

‘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잖아. 레벨을 빨리 올려야 성기능도 강화시키고 새로운 스킬도 받지. 아예 시작을 안했으면 모를까 절반쯤 채운 게 아까우니 후딱 끝내버리려고.’

[주인님의 의지는 날이 갈수록 강해지시는 군요. 외적인 성장뿐 아니라 내적으로도 강해지시는 것 같아 제가 다 기쁩니다.]

‘흐흐. 하수 타이틀은 때야 할거 아니냐. 그나저나 유미 이 변태 계집애 전지훈련 가서 바짝 독이 올랐을 텐데···. 무슨 짓을 벌일지 벌써부터 두려워 지는 군.’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때와 비교해 주인님의 멘탈이 훨씬 단단해 지셨으니까요.]

"여기 세워주세요. 기사님."

택비는 유미 말대로 딱 기본료만 나왔다. 모텔로 바로 가는 것이 창피했기 때문에 인접한 건물 앞에서 내린 도훈은 100M 정도를 걸어 모텔에 입성했다. 무인텔 형식의 모텔은 카운터 앞에 모니터가 있어 빈방의 여부를 알려주고 있었다.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도 바로 결제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와, 초저녁부터 만원이네. 불타는 청춘들이 여기 다 모여 있구나?’

대학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니 만큼 이용하는 손님들 중에 대학생도 많을 것이다.

‘여기서 아는 사람 만나도 웃기겠네. 가만, 예약을 했다고 했는데 카운터에 물어봐야 하나?’

도훈은 커텐이 내려진 카운터 유리문을 두들겼다.

잠시 후 알바로 보이는 학생이 얼굴을 내비쳤다.

"네. 말씀하세요."

"어플로 예약했는데요, 610호요."

"성함이?"

"마유미요."

"확인했습니다. 문 열려있으니 바로 들어가시면 돼요."

도훈은 먼저 모텔에 들어가 땀에 젖은 운동복을 벗고 샤워를 했다.

깨끗이 몸을 씻고 넓은 침대에 홀로 누워있으니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왔다.

‘좀 걸린다 그랬나? 잠 좀 자고 있을까?’

도훈은 티비를 보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 174. 낭만의 캠퍼스-4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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