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낭만의 캠퍼스-42- >
벚꽃 핀 가로수길 양 옆에는 좌판이 벌어진 것처럼 동아리 회원들이 포진해 있었다. 허름한 책상 하나, 간이 의자 몇 개 그리고 그 위엔 가입 동의서 및 각종 홍보전단이 어지러이 널려있다.
"클래식 기타에 관심 있으신가요?
"안녕하세요! 하늘을 사랑하고 별을 애정하는 아마추어 천문 동아리 별밤지기입니다!"
"야구동아리에서 17시즌 신규 회원을 모집합니다. 여자 매니저도 뽑아요!"
"도를 아십니까? 저희 중산도 동아리는···."
홍보를 위해 나온 동아리 회원들은 저마다 목청을 높이며 신규 회원 유치에 열을 올렸다. 도훈은 시장 통처럼 혼잡한 가로수 길을 가로질러 가장 한적해 보이는 동아리를 찾았다.
‘옳지, 저기가 좋겠군.’
다른 동아리와 달리 인적이 뚝 끊긴 그곳엔 [국성대 애니메이션 동아리, 십덕(十德)]라는 배너가 외롭게 걸려있었다.
"저긴 어때?"
"네? 산악 바이크요?"
"아니 그 옆에."
"옆이면··· 애, 애니메이션 동아리?"
"응."
"오빠 저런데 관심 있으세요?"
지연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도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크크. 이건 예상 못 했겠지?’
"왜? 재밌을 것 같지 않아?"
"그, 글쎄요 굳이 다른 동아리도 많은데···."
"나 어렸을 때부터 일본 애니 엄청 좋아했거든. 코스프레 같은 것도 해보고 싶고."
지연이 똥 씹은 표정을 애써 감추었다.
‘아씨, 하필이면 하고 많은 동아리 중에 오타쿠 동아리람?’
"이든이 너랑 같이 하면 재밌을 것 같아."
"조, 좋죠. 코스프레···. 하하."
도훈은 애니 동아리 홍보 부스에 앉았다. 맞은편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뚱뚱한 남학생이 인기척을 느끼고 깨어나더니 입가에 흘린 침을 빠르게 훔쳤다. 혐오감을 주기 충분한 첫인상이다.
"스읍-. 어, 어떻게 왔냐는?"
"네? 동아리 가입하고 싶어서 왔는데요?"
"아, 그렇지. 내가 잠시 심각한 문제를 고민하느라···."
되지도 않는 변명을 둘러댄 남학생은 허둥대며 책상 위를 뒤적이더니 가입 원서가든 파일 철을 꺼내들었다.
"여기 이름이랑 연락처 적고 학과도 좀···."
가입 동의서 종이엔 지금까지 방문한 사람들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3일 동안 꼴랑 2명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한 사람은 두 줄로 삭선이 그어진 걸 보아 중도 포기한 것으로 보였다. 도훈은 볼펜을 받아 양식에 기입한 뒤 지연에게 건넸다.
"너도 적어."
"여, 여자도 같이?"
괴상한 말투를 쓰는 남학생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 저희 둘 다 가입할 건데요."
지연이 마지못해 가입 양식에 이름을 적는데 자신을 보는 남학생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우리 동아리에 여자 회원이라니···."
"네? 여자는 없나요?"
"몇 해 전까진 동인녀들도 함께 있었는데 뜻이 안 맞아서 갈라선 뒤부턴 쭉 없었거든."
"근데 여긴 정확히 뭐하는 동아리에요?"
도훈의 물음에 십덕 동아리 모집책 오탁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사실 우린 비밀 결사라는."
"네?"
"그건 가입하면 알려 주지."
모락모락 풍겨오는 십덕의 기운에 명부에 이름을 적던 지연이 멈칫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눈빛이다.
"저기 도훈 오빠, 잠시 저랑 얘기 좀."
"그래."
부스에서 멀어진 지연이 도훈을 향해 말했다.
"저 사람 왠지 기분 나쁘지 않아요?"
"뭐가?"
"아니 무슨 쳐다보는 눈빛도 그렇고···. 비밀결사니 뭐니 이상한 소리나 해대고."
"하하. 웃기려고 그런 거겠지. 후덕하니 인상 좋아 보이던데?"
‘후덕은 개뿔! 대놓고 얼굴에 오덕이라고 쓰여있구만!’
지연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도훈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 싫으면 가입 안 해도 돼. 애니에 별로 관심도 없는 것은 데 굳이 같이할 필욘 없잖아. 내가 먼저 같이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아, 아뇨. 그런 뜻이 아니고요···."
‘이 새낀 생긴 건 멀쩡한 놈이 취향이 왜 이따위야?’
"여자 회원이 한 명도 없다고 하니까 괜히 부담스러워 서요."
"뭐 어때? 홍일점이면 인기도 많고 좋지."
‘아오! 씹덕들한테 인기 끌고 싶진 않거든?’
"얼른 가입원서나 쓰자. 괜히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네."
결국 지연은 원치도 않는 오타쿠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다.
오탁훈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마지막으로 가입 심사가 남았는데 지금 동방에 가볼 꺼냐는."
"네? 그냥 가입 원서만 적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요?"
"십덕을 갖추는 길이 쉽지 않아."
"그렇군요. 이든이 너 시간되니?"
"예 뭐···."
"그럼 가보자."
오탁훈은 학생회관 건물 3층 동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회장님께 미리 연락해 놨으니 회원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대신 한 명씩 들어와야 하는데 괜찮겠어?"
"이든이 너 먼저 할래? 난 배가 좀 아파서 화장실 가려고."
"저, 저 부터요?"
"역시, 젠틀맨. 레이디 퍼스트라는."
‘미, 미친 소리 하고 있네, 씹덕 새끼가.’
도훈이 망설이는 지연을 향해 앓는 소릴 했다.
"아까 점심 먹은 게 탈 났나봐. 너부터 면접 보고 와."
도훈은 지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남자화장실로 쌩하고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게 된 지연을 향해 오탁훈이 말했다.
"너무 긴장 안 해도 돼. 형식적인 절차니까."
"아, 예."
동방 안은 대낮부터 암막커튼이 쳐져 어두웠다. 벽면엔 대형 브로마이드가 잔뜩 걸려있었는데, 대부분 노출이 과도한 10대 미소녀 그림이었다.
‘으, 왠지 기분 나쁜 분위기야.’
동아리방 중앙에 위치한 책상 앞에는 세 남자가 앉아있었다. 지연은 첫눈에 그들의 별명을 지었다.
‘안경멸치, 씹덕돼지, 문어대가리 인거냐? 가만, 대학생이 뭔 벌써부터 탈모가 저리···.’
지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있는데 가운데 앉은 씹덕 돼지가 물었다. 다른 사람과 달리 PC방 가죽의자를 차지한 것으로 보아 그가 이 동아리의 회장으로 보였다.
"···음, 여자인가? 특이한 일이군."
회장의 물음에 모집책인 오탁훈이 대신 답했다.
"아,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새로운 ‘옵저버’가 되실 적격자입니다."
‘뭐, 뭔 소리야, 쟤는? 뜬금없이.’
"오호? 그 말로만 듣던?"
"과연 그에 걸 맞는 인물인지는 의문이군."
양 옆의 안경멸치와 문어대가리가 추임새를 넣자 오탁훈이 계속 말을 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확실히 ‘자격’에 어울리는 사람일 테니까요."
맥락 없이 진행되는 대화에 지연은 뒤통수에 땀이 흐를 것 같았다.
"저기,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요?"
"훗··· 역시 그랬나? 어리석긴."
"전 그냥 애니메이션 동아리 가입을···."
"뭐야? 탁훈이 너 제대로 데리고 온 것 맞아?"
문어대가리의 역정에 깜짝 놀랐지만, 지연은 그 정도로 기가 죽을 인물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수틀리면 이 정신 나간 오탁후 녀석들 쯤 한방에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지금 대체 뭐하는 거죠? 전 분명 신규 회원 면접이라고 해서 온건데요?"
지연의 짜증 섞인 물음에 오탁훈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흰 사실 그런 허접한 동아리가 아닙니다. 애니메이션 동아리는 단순한 간판에 불과합니다."
"그게 무슨···."
"프리메이슨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예?"
"아님 일루미너티라든가."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아무튼 그에 필적하는 비밀 조직이 암약하고 있습니다."
오탁훈은 잠시 호흡을 멈추더니 엄청난 비밀을 발설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중한 태도로 말했다.
"···바로 플레이어라 불리는 이단아들입니다."
동시에 의자에 앉아있던 오덕 삼종세트가 연극톤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
"혼란을 가중시키고,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악의 무리."
"우리가 바로 그런 플레이어를 색출해 처단하고자 하는 PK단의 하부조직."
"더 헌터즈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진짜로 미친 또라이 새끼들이었잖아?’
황당해 하는 지연의 반응에 회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오탁훈에게 물었다.
"이봐, 그녀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역시 아직 그‘힘’이 발현되지 않은 걸까요?"
"···실망스럽군요. 살짝이나마 기대했는데."
알 수 없는 말로 떠들어 대는 십덕 회원들을 향해 지연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저기, 전 도저히 안 되겠어요. 이만 가볼게요."
"포기하는 척 하지마. 넌 이미 탈락했으니까."
"먼 길 나가지 않곘어."
"역시 3D여잔 쓸모가 없다는."
‘미친놈들 같으니 아오! 확 그냥 패 죽여버리고 싶네.’
지연이 동방 문을 박차고 나와 도훈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제야 도훈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연이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했다.
"이도훈 이 새끼가 진짜!"
***
"크크크. 쌤통이다. 보아하니 아직 중2병 완치가 덜 된 어른아이 같던데, 곤욕 좀 치렀으려나?"
나는 지연을 애니메이션 동방에 집어넣고 곧바로 체육관으로 향했다.
때마침 성수의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너 어디야? 수업 끝나지 않았어?
"네 형. 잠깐 동아리 홍보하는 데 구경한다고요."
-벌써 4시 넘었다. 얼른 체육관으로 튀어 와. 경기 전에 몸 풀어 놔야지.
"형도 배구 뛰세요?"
-말도 마. 후보까지 탈탈 털어서 전지훈련 데리고 나가서는, 선수 없다고 시간되는 체육과 남자애들 모조리 튀어 오랜다.
"누가요?"
-누구긴 인마. 너네 지도교수지. 하여간 그 양반 성미 하고는.
"아···."
-일단 오기나 해. 내가 세터하게 생겼다. 오랜만인데 너랑 호흡 맞춰봐야지.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실내 체육관에 도착하니 체육과 키 큰 남학생들은 죄다 모아놓은 것 같았다.
"도훈이 왔냐."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성수가 서브 연습을 하다 말고 나를 불렀다.
"복장이 그게 뭐야?"
"아침에 갑자기 연락받아가지고 츄리닝을 못 챙겼어요."
"인마, 당연히 과방에 놔두고 다녀야지. 명색히 체육과라는 놈이."
"형, 그럼 제거라도 입으실래요? 락커에 축구 유니폼 남는 거 있는데."
2학년 과대 정우선이 말했다.
놈의 키는 180정도로 나보다 작지만 얼추 사이즈는 맞을 것 같았다.
"그럼 그거라도."
탈의실에서 우선의 축구 복으로 환복하는 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훈이형?"
같은 2학년 이지환이었다. 나한테 달리기로 짓밟혔던 그 놈.
"너도 왔어?"
"네. 선수 없다고 무조건 오라던데요. 이제 보니가 키 큰 순으로 연락 돌렸나 봐요."
단 둘이 있으니 지환이 불편하게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평생의 자부심을 뭉갠 사람과 함께 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나는 어색함을 풀기 위해 상의를 벗으며 물었다.
"너 육상 배웠다 안그랬나? 배구는 좀 해봤어?"
"리시브 정돈 가능해요. 형은 배구 분과니까 잘하시겠네요?"
"그냥 하는 거지, 뭐. 군대 가서 오래 쉬어가지고 잘 되려나 모르겠다."
"어차피 연습 경긴데 대충 하죠. 아무리 여자팀이지만 저희가 이기긴 벅찰 거예요. 유미누나 요새 완전 물올랐다더라고요."
"학회장 말야?"
"네. 우리학교 여자팀 간판 공격수잖아요."
흐음. 그러고 보니 새터 때 그녀에게 스팽킹을 당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스파이크로 냅다 후리는데 맞은 부위가 하루 종일 얼얼했다. 그 새디스트 계집애가 얕보였다간 기가 살아 감당이 안 될 텐데.
"글쎄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지 않겠냐?"
나는 달리기로 놈을 눌렀을 때 외쳤던 대사를 재탕하며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
배구공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스텝을 밟고 빠르게 높이 뛰어오른다. 활처럼 휘어진 허리에서 뻗어 나온 팔이 회초리처럼 강하게 공을 향해 휘둘러진다.
팡-!
손바닥에 감기는 느낌이 제대로다. 총탄처럼 날아간 공에 수비수는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삐익- 듀스!"
스코어는 이제 20 : 20.
친선경기라 21점 세트스코어로 하는 경기를 겨우 듀스까지 끌고 갔다.
과연 학교 여자 배구팀의 실력은 명불 허전이었다. 마유미를 중심으로 한 공격진은 혀를 내두를 정도. 평균 신장 180이 넘는 여자 배구팀 공격수들은 운동 좀 한다는 체육과 남학생의 블로킹 벽을 손쉽게 뚫어냈다.
시작부터 서브 득점만으로 더블 스코어까지 몰렸으나, 성수의 적절한 토스와 우선의 기가 막힌 리베로 수비로 최대한 점수를 따라 붙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나의 공격. 앞차, 빽차, 오픈 공격 등 공이 뜨기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스파이크를 내리꽂는 미친 활약으로 패색이 짙은 팀을 멱살 잡고 끌어 올렸다.
주말 포함 5일 동안의 전지훈련을 끝내고, 자신감이 팽배해 있던 여자 배구팀은 멘탈이 흔들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설마하니 남자 배구팀도 아닌, 어중이 떠중이를 모은 체육과 남학생들과 팽팽한 접전을 펼칠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한 눈치다.
"이제 듀스다. 유미야."
"칫- 선배 진짜."
나는 맞은편에 라이트로 서 있는 유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승부욕이 유달리 강한 그녀는 경기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몹시도 분개해 있었다.
"선배. 군대 가서 배구만 하다왔어요?"
"군대에 코트가 어딨냐? 오늘 그냥 컨디션이 좋은가 보지."
< 173. 낭만의 캠퍼스-42-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