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2화 (142/2,000)

< 144. 낭만의 캠퍼스-13- >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의 준말.

도훈의 이기적인 성격을 한 마디로 압축하는 설명이다.

그는 남의 여자를 강탈하면 했지, 빼앗길 생각은 추호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전생의 트라우마 때문이든, 남성 특유의 소유욕이든 좌우간 그랬다.

그래서 태영이 정음과 잘되게 밀어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짜증 섞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걔는 대체 왜 그런데요?"

"엉? 뭐가?"

"아니 저랑 방금도 같이 수업 듣고 왔거든요."

"맞다. 너 교양수업 같이 듣는댔지? 뭔 일 있었어?"

"거기서 우연히 일본인 교환학생이랑 같은 조로 편성됐는데."

"일본인?"

"네. 근데 걔한테 엄청 들이대더라고요. 보기 민망할 정도로."

"이뻤냐?"

"그냥 일본사람처럼 생겼어요. 약간 서구적인 느낌?"

"혼혈인가?"

"오키나와 출신이란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래 놓고선 또 형한테는 정음이 밀어달라고 했다고요? 얘가 줏대란게 없네."

성수가 유독 흥분한 도훈을 보며 껄껄 웃었다.

"얀마, 사내놈이 다 그렇지. 기회만 되면 껄떡거리는 게 본능 아니겠냐? 태영이도 그냥 찔러나 보는 거지."

"찌르다뇨?"

어딜?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 들어봤지?"

"포트폴리오 기법 말이에요?"

도훈이 주식용어로 받아치자 오히려 말을 꺼낸 성수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그도 어디선가 주워들었을 뿐 개설된 증권계좌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너 주식도 할 줄 아냐?"

"관심 있어서 책 좀 읽었어요. 아, 군대에서."

"흠, 책···. 거 참 군대 한 번 다녀오더니 사람이 확 달라졌네. 암튼, 태영이도 뭐 그런 거 아니겠어? 한 사람에게 몰빵했다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긴 싫은거지."

태영의 심리를 분석한 성수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여전히 씩씩거리는 도훈을 향해 말했다.

"어째 너 평소보다 훨씬 열 내는 것 같다? 설마 정음이한테 맘 있어?"

도훈은 감정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지만 애써 부정했다.

"맘은요 무슨···. 그냥 태영이 태도가 꼴사나워 그렇지."

"크크. 니가 이해해. 이제 막 대학 왔는데 얼마나 여자가 고프겠어? 여자애들도 마찬가지야. 대학 가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남자친구 사귀는 거래잖아. 사람 생각 다 똑같다니까?"

"아니, 무슨 학생들이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인마. 우리나라 공분 고등학교 때가 마지막이야. 요새 누가 대학을 공부하러 다녀?"

"그럼요?"

"간판 달려고 가는 거지. 학력란에 고졸 쓰면 창피하니까."

도훈은 제 딴에는 재밌는 농담을 던졌다고 으쓱해 하는 성수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티를 내진 않았지만.

‘덩치는 산만해서는···. 성수 너도 아직 애구나. 하긴 고작 24살 먹은 애 데리고 내가 지금 뭘 기대하는 거람? 회사 다닐 땐 20대 후반 신입사원조차 핏덩이로도 안 봤으면서.’

"여튼 오늘 개강총회 때 임용준비 중인 4학년까지 싹 다 올 거야. 오랜만에 체육교육학과 총 집합이란 소리지. 혹시 맘에 드는 사람 있으면 눈 여겨 봐 둬. 형이 확실하게 밀어줄게. 형 힘 세다."

"뭘 자꾸 밀어요. 괜찮아요."

"아니야. 너 군대 갔다 온 사이 우리 과 은근히 물갈이 많이 됐어. 수질 좋아."

"말만으로 감사하네요."

‘풋-.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도훈이 여자 걱정이란  말을 못 들었나? 내 밥줄은 내 알아서 챙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담배를 다 피운 성수와 옥상을 내려가며 도훈은 학과 최고의 인기녀인 정음을 사수하는 일이 녹록지 않음을 생각했다.

내 눈에 예뻐 보이면 남들 눈에도 이쁜 법.

굳이 태영이 아니더라도 정음을 노리는 늑대들은 호시탐탐 출몰할 것이다. 공식적인 연인 관계가 아닌 그로서는, 정음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할 순 없다.

‘물론 그렇다고 뺏기진 않아. 내건 내 거, 네 것도 내 거.’

도훈이 남다른(?) 각오를 다졌다.

***

개강총회는 사실상 신입생과 재학생들의 대면식이나 마찬가지다. 짧은 행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술자리가 벌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거창한 것은 아니고 강의실 하나를 통째를 비운 뒤, 바닥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전형적인 노상 술판이긴 했지만.

"안녕하십니까! 땀방울로 하나 되는 무·적·체·육! 16학번 변형태입니다! 별명은 불·완·전·변·태!"

"넌 무슨 곤충이냐? 변태면 변태지 불안전은 또 왜 붙이는데?"

"그러니까 실제론 변태가 아니란 소리죠."

"뭐? 하하하!"

"다들 봤지? 자기 소갠 형태처럼 우렁차게. 잘 기억할 수 있도록 인상 깊은 별명 하나 쯤 덧붙이는 게 좋아. 물론 오늘 지나고 나면 아마 또 물어보긴 하겠지만."

"넵!"

2학년 변형태의 시범을 끝으로 공은 다시 1학년들에게 돌아갔다.

강의실 책걸상을 모두 복도로 밀어내고 바닥에 둘러 앉은 체육과 학생들은, 일어서서 자기소개를 시작한 1학년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7,8명 단위로 원을 그리는 배치된 자리 가운데는 통닭을 비롯한 안주 일체와 소주병과 맥주피쳐, 그리고 종이컵 등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양희주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도훈의 표현으로 "빻녀" 양희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리자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주목되었다.

못생긴 얼굴에 모델 같은 몸매를 지닌 그녀는, 남학우들에게 모순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마냥 못생겼다 하기엔 몸매가 너무 우월했고, 몸매만 보자니 얼굴이 다소 아쉬웠다.

그때 여학생들의 입에서 예쁘다는 칭찬이 터져 나왔다.

"와, 양희주 예쁘다!"

"희주가 선이 진짜 곱구나!"

"저런 애가 진국이지."

여자들은 못생긴 애들에겐 유독 관대한 측면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도훈이 속으로 생각했다.

‘저 얼굴이 정녕 예쁘다고? 지들보고 양희주 닮았다 하면 어디서 욕하냐고 화낼 거면서···.’

이후 여러 신입생들의 소개가 잇따랐지만, 과연 최고로 주목을 받은 사람은 육정음이었다.

"선배님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체육교육과 17학번 새내기 육정음입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90도로 폴더인사를 하는 정음의 공손한 태도에 남학우들의 반응이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오오! 17학번 에이스!"

"올해 사범대 메이 퀸은 보나마나 우리 과 차지네!"

"너 태권도 잘한다며? 발차기 한 번 만 보여줘!"

누군가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순진한 정음이 눈을 껌뻑거리며 되물었다.

"여, 여기서요?"

"응. 멋지게 돌려차기 한 방!"

"제가 지금 치마로 입고 있어서···."

"와하하하! 제 진짜 시범 보이려고 했나 봐."

"너 재밌다. 나중에 술 한 잔 줄게!"

정음이 소개에 대한 여학우들의 반응은 남자들과 정반대였다. 여학우들은 짜게 식은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도훈은 옆자리에 앉아 두 사람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쟤가 새터 장기자랑에서 확 뜬 애 맞지?"

"그러게. 근데 가까이서 보니까 눈은 했네. 쌍꺼플 디게 자연스럽다."

"눈만? 코도 한 거 아니고?"

"그런가? 암튼 얘가 운동만 해서 무식하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실기 만점으로 가까스로 턱걸이."

도훈은 여학생들의 험담에 속으로 기가 찼다.

빻녀에겐 성인(成仁)군자가 다름없는 관후함을 보이더니, 체육과 얼짱으로 불리는 정음에겐 성형을 했다느니 무식하다느니 뒷담화나 일삼다니.

아무리 질투심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참으로 고약한 심보가 아닐 수 없었다. 정음에 대한 비난이 도가 지나치다고 여긴 도훈은 소심한 복수를 계획했다.

"거기 술잔 빈 거 아니야?"

"앗, 도훈 오빠가 따라주시면 땡큐죠."

3학년이라 소개한 여학생이 냉큼 종이컵을 내밀었다. 도훈은 맥주 피쳐를 들어 술을 따르다가 실수한 척 확 쏟아버렸다.

"어머머!"

소매까지 잔뜩 맥주가 엎질러진 여학생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미안. 손이 흔들려가지고."

"괘, 괜찮아요. 오빠도 참, 사랑이 넘치시네."

‘어라? 이게 아닌데?’

옷을 버린 여학생은 배시시 웃더니 화장실로 뛰어갔다.

도훈이 둘러앉은 모둠은 체육교육과 구기 1과.

담당 지도교수에 따라 모두 8개 분과로 흩어져 있었기에 모둠의 학년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골탕 먹이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낙담하는 도훈에게 또 다른 여학생이 물었다.

"오빠 이번에 복학하셨다면서요?"

"응."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안 그래도 저희 분과에 남자가 많이 없어서 분과 모임 심심했는데. 히힛."

체육과 여덟개 분과 중 구기 관련 분과는 모두 3개.

배구와 여자핸드볼을 담당하는 도종완 교수 밑에 있었기에 다른 분과에 비해 여자들의 수가 많은 편이었다.

"근데 우리 분과는 이게 총원이야?"

구기 1분과의 수는 평균 8명인 다른 분과에 비해 6명으로 적었다. 도훈의 물음에 여학생이 답했다.

"아뇨. 지금 유미 언니랑 정찬 오빠가 전지훈련 가 있어서 그래요. 춘계 대학리그 준비 때문에 빡시게 하나 보더라구요. 회장님은 아시죠?"

"마유미? 새터 때 인사했어."

"참, 이번 새터에 오빠 엑스맨으로 갔었다면서요? 오빠 가는 줄 알았으면 저도 따라갈 걸 그랬나 봐요. 히히."

노골적인 관심을 내비치는 여학생은 자신을 2학년이라 소개했던 것 같다. 그러나 도훈은 이름조차 기억 못 할 만큼 흔한 얼굴이었다.

"저도 그땐 형 엑스맨인 줄 전혀 몰랐는데···."

또 다른 2학년 남학생이 도훈을 향해 말했다.

도훈과 함께 배구 분과에 소속된 남학생.

‘로시, 누가 누군 줄 전혀 모르겠는데. 뭐 이렇게 처음 보는 얼굴이 많아?’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원주인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어차피 4학년 뿐. 나머지는 실제로 첫 대면이기 때문에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차차 알게 되겠죠.]

‘그래. 근데 도훈이 지도교수는 누구야? 복학했는데 인사 한 번 하러 가야하나?’

[도종완 교수 말입니까? 원주인이 2년 전 군대 갈 때도 학과 일엔 별 신경 쓰지 않았던 분입니다. 아마 얼굴도 기억 못 하지 않을지···.]

‘그래? 그럼 뭐 논문 쓸 데 말고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 어차피 학사 학위 논문이야 날림으로 해도 상관없을 테니까.’

"도훈이 너 왜 근데 나한테 아는 체 안 해?"

모둠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여학생이 대뜸 물어왔다.

로시가 빠르게 얼굴을 캐치 해 설명했다.

[같은 동기 오수정 양입니다. 오랜만이라 못 알아봤다고 발뺌하십시오.]

"아, 수정이였구나? 너무 이뻐져서 몰라봤다 야."

"···어?"

도훈의 뻔뻔한 대답에 오히려 수정이 당황했다. 그녀는 군 휴학 전의 도훈을 굉장히 말수가 없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어? 도훈이 저런 성격이었던가?’

군대에 다녀와 성격이 변한 사람들이 있다는 얘긴 들었지만, 도훈의 경우엔 상당히 극적이었다.

‘아, 어쩌면 그 일 때문에···.’

수정은 불쑥 도훈의 흑역사를 떠올렸다. 군대 가자마자 여친에게 배신당해 처절하게 버려진 이야기.

그 후에 떠돈 무수한 소문들.

‘토끼랬었지···? 아마. 충격이 크긴 컸나 보네.’

수정은 오랜만에 다시 만난 동기의 과거를 들출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지금 4학년들만 쉬쉬하면 후배들은 모를 일이다.

"임용공부는 잘 돼가니?"

도훈이 수정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물었다.

"말도 마. 3학년 겨울방학부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어쩌면 이번 개강총회가 졸업반이 참여하는 마지막 행사가 될 걸."

"언니 그 정도로 힘들어요?"

"운동이라도 할 때가 좋은 거야. 앉아서 공부하고 먹기만 하니까 살이 막 차오르는데···. 아휴."

"에이, 괜히 그러신다. 아직도 출중하신데요, 뭘. 4학년 체교과 몸짱하면 오수정 아니던가요? 우리 1분과의 자랑!"

남자 후배의 넉살에 수정이 손사래를 치면서도 기분 좋은지 피식 웃었다.

"겉보기만 그렇지 안 보이는데 살 많아."

수정의 말에 도훈이 힐끔 그녀의 몸매를 훑었다.

도서관에 바로 나왔는지 츄리닝을 걸치고 있지만, 불룩 튀어나온 가슴선은 상당한 볼륨감을 자랑했다.

‘오. 쟤도 은근 몸매 좋네. 혹시 도훈이랑 썸씽 같은 거 있었어?’

[아뇨. 그런 기억 전혀 없습니다. 원주인이 워낙 말수가 없기도 했고 군대 가기 전엔 당시 여친에게 한참 빠져 있을 터라 눈 돌릴 틈이 없었죠. 그나마 같은 분과라서 다른 동기들보단 안면이 익은 편이긴 합니다만.]

도훈은 수정의 훌륭한 몸매에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공부에 지친 그녀를 위로해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언니, 분과장도 없는데 언니가 건배사 한번 해주세요. 언니도 작년 분과장 출신이잖아요."

"그럴까? 자, 다들 잔 채워."

마침 화장실에서 돌아온 3학년 여학생까지 여섯 명이 모두 모이자 수정이 건배를 제의했다.

"도훈이 우리 분과 건배사 기억하지?"

[죽자만 외치면 됩니다.]

‘엉? 죽어?’

"마시고!"

"죽자!"

때창하듯 울려 퍼진 건배사에 다른 분과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야, 1분과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는데 우리 육상이 지면 섭섭하지!"

"어헛. 체조분과가 술론 밀릴 순 없다고. 주모! 여기 소주 궤짝으로!"

"주모가 어딨어 미친놈아! 니가 가서 가져와!"

"넵!"

순식간에 경쟁적으로 변한 분위기에, 개강총회 뒷풀이자리가 급속도로 달아올랐다. 청춘 남녀 60여 명은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술잔을 비워나갔다.

도훈은 성수의 말을 상기하며 최대한 취하지 않도록 자제했다. 물론 성수의 조언 때문만은 아니었다. 술에 취해 잠들어 버리면 오늘 밤이 삭제될까 두려웠다.

‘이렇게 산해진미가 펼쳐져 있는데 잠들 순 없지!’

여전히 여자를 맛있는 음식으로 생각하는 도훈이었다.

< 144. 낭만의 캠퍼스-1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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