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57화 (137/2,000)

< 139. 낭만의 캠퍼스-8- >

‘···오빤 모든 여자에게 잘해줘.’

공식적인 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도훈에게만큼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정음이었다.

-나는 차가운 도시 남자. 그러나 내 여자엔 친절하겠지.

이런 무리한 컨셉까지 바라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도훈에게 있어, 자신은 다른 평범한 후배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너무 섭섭해. 난 오빠한테 내 소중한 것까지 다 줬는데···.’

대학생이 되면 첫사랑에게 순정을 바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등록금 납부 영수증에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새내기 배움터에서, 그것도 사귀지도 않은 남자에게 처녀를 내줄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물론 처녀를 바친 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고, 그만큼 도훈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다만 좋아하는 마음에 비례해 사랑받고 싶은 것은, 사람이라면 응당 갖게 되는 당연한 감정.

정음은 어떻게 하면 도훈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다시 강의실로 입장했다.

***

"커피 잘 마실게요, 도훈 군."

"별말씀을. 잘 봐달라는 뇌물인데요."

도훈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손 교수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호호. 도훈군은 보기보다 재미난 학생이군요. 하지만 전 학점에 있어선 누구보다 엄정한 사람이란 걸 명심하세요."

"당연하죠. 전 실력으로 A+을 맞을 겁니다. 제가 잘 봐달라는 건 앞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여쭈러 가겠다는 의미였어요."

"아, 그래요? 내 연구실은 예술대 본관 3층 교수 연구동에 있어요. 공강 시간이나 오후 3시 이후론 자릴 지키고 있으니까 언제든 찾아와요."

‘오케이, 연구실 위치 파악 완료. 로시, 머릿속에 입력해놔.’

[예술대 본관 3층. 접수했습니다.]

"참고로 도훈 군에게 미리 귀띔하자면 제 수업에서 A+받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왜요?"

"그건 수업 끝날 때쯤 알려 줄게요."

쉬는 시간 이후 이어진 수업에서도 열강을 펼치던 손 교수는 수업 말미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오늘 수업은 10분 일찍 마칩니다. 대신 여러분이 제출해야 할 게 하나 있어요."

"헉! 첫 수업부터 리포틉니까 교수님?"

"아니, 그건 아니고. 이번 학기엔 중간고사를 현장 답사로 대체할 예정이에요. 그러니 6명씩 조를 짠 후 조교에게 명단 제출하고 가세요. 팀별 과제니 만큼 협력할 수 있는 팀원으로 구성하는 게 좋을 거예요."

‘윽, 교수가 말한 게 이거였나? 팀별 과제는 팀 빨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도훈이 난처해 하고 있는데 누군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교수님, 무조건 6명으로 조를 짜야 하나요?"

"네. 클라스 총원이 48명이니 모두 8개 조로 구성할 생각이에요. 그래야 인원이 공평하게 나뉘죠."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손 교수가 씩 웃었다.

"맞아요. 21세기 사회는 협업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죠. 잘 모르는 사람하고도 팀웍을 발휘할 수 있는지, 협동심, 의사소통능력 같은 것도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해요."

"아···."

손 교수가 말을 마치고 강의실을 떠나자 남은 학생들이 눈치를 보며 삼삼오오 뭉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6명이란 숫자를 채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수강생의 절반 가까이가 신입생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도훈은 일단 체육과 후배들을 한데 모았다.

"일단 우린 네 사람이니까 두 명만 더 받으면 되겠다."

"선배 혹시 아는 사람 없어요?"

"음, 나도 군대 갔다가 막 복학한 처지라···."

물론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원주인 몸에 빙의한 입장이라 알리 없었다. 서현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오빠가 너무 동안이라 순간 현역으로 착각했지 뭐에요. 헤헤."

눈에 보이는 서현의 아부에 정음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아까부터 자꾸 도훈에게 끼를 부리는 서현의 모습에 슬슬 열이 뻗친 것이다.

‘저 끼순이가 자꾸 오빠한테 꼬리 치는 것 좀 봐?’

성질 같아선 당장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공식적으로 아무 관계도 아닌 정음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남몰래 한숨만 쉴 뿐.

"무슨 내가 동안이야. 그냥 나이만큼 생겼지."

"아니에요. 오빠 새터 가서 재수생이라고 속였을 때 아무도 눈치 못 챘잖아요. 재수라고 말 안 했으면 현역이라고 생각했을 걸요?"

"에이, 무슨.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얼른 팀원부터 포섭해 보자."

도훈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는데 태영이 말했다.

"형. 머릿수 채운다고 아무나 받지 마세요. 조별 과제에 무임승차하는 애들 걸리면 그것대로 짜증이니까."

"당연하지."

그때 남녀 둘이 체육과 학생들이 있는 쪽으로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혹시 사람 더 필요하시지 않아요?"

"맞아요. 두 명."

"잘됐다. 저희가 마침 둘인데."

둘은 커플인 것처럼 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다.

둘 중 남자 쪽이 자기소개했다.

"저흰 경영대 2학년들이에요. 실례지만 다들 무슨 과시죠?"

"저흰 모두 체육 교육관데요."

"아···."

체육과라는 말에 커플 중 여자가 남자친구의 소매를 잡아끌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친구의 눈치에 남자가 겸연쩍게 둘러댔다.

"···그러시구나. 저흰 네 분이 다 같은 관 줄은 몰랐어요. 괜히 저희가 끼면 불편하실 것 같네요. 그럼 이만."

경영대 커플이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런 사례가 두어 차례 반복되자 도훈이 슬슬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설마 우리가 체육교육과라고 까이고 있는 건가?’

의심에 심증을 더한 것은 맨 처음 왔던 커플이 인접한 조에 합류하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이후였다.

"네 분 다 영어교육과 시라고요? 잘됐네요. 저희만 잘 적응하면 팀웍은 문제없겠어요."

‘뭐야 저 새낀? 아깐 네 명 다 같은과라서 싫대 놓고 영어 교육과에 가서는 팀웍이 잘 맞아서 좋겠다고?’

그러나 도훈보다 먼저 나선 것은 바로 태영이었다.

태영은 영여교육과 학생들이 모인 조로 다가가더니 느닷없이 인사했다.

"혹시 영어교육과?"

"네? 그런데 누구···?"

"왜 우리 사범대 새터 때 장기자랑 공연했었잖아요. 그때 얼굴 뵌 것 같아서요."

"사범대세요?"

"네. 체육교육과요."

"아, 체육."

태영은 더는 영어교육과엔 별일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경영대 커플에게 말했다.

"두 분은 아까 저희 조에 왔던 분들 아니세요?"

"네."

"이상하네? 저희 팀에 와서는 같은 과라서 안 되겠다더니 여긴 별로 상관없으신가 봐요?"

"뭐 그렇게 됐어요."

"하-. 참. 무슨 학과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노골적인 태영의 비아냥에 두 커플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영어교육과의 리더로 보이는 남학생이 태영에게 말했다.

"어이 거기. 체육과 새내기 같은데 나 영어과 16이거든? 지금 남의 조에 와서 뭐하는 거지?"

"제 이름은 거기 아니고 태영이라고 하는데요? 그냥 이리저리 간 보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길래 구경 좀 하러 왔어요."

"뭐? 간?"

태영의 대꾸에 영어과 16학번이라고 밝힌 남학생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아무리 소속이 달라도 단대가 같으면 얼굴 볼일도 많은데, 신입생에 불과한 태영의 태도가 몹시 건방지게 느껴진 것이다.

"하여간 운동 배운 놈들이 더 싸가지 없다니까?"

"뭐요?"

"오빠, 그만 해요. 무식한 애들이랑 말 섞어서 뭐해요."

"그래요. 형이 참아요. 딱 보니까 시비 걸러 온 것 같구만."

태영은 무식하단 소리에 흥분하고 말았다. 게다가 16학번을 향해 오빠라고 부른 걸 봐선 같은 새내기임이 틀림없었다.

"야! 너 방금 나한테 뭐랬냐? 뭐? 무식?"

심상치 않은 기미를 감지한 도훈이 급히 달려왔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아니, 쟤가 날 언제 봤다고 무식하다고 그러잖아요."

"뭐래? 니가 먼저 시비 털었거든?"

"내가 너한테 그랬어? 어? 왜 남의 일에 참견인데?"

"태영아. 그만해."

"선배, 저 자식들이 먼저···."

"그만하라고."

도훈이 목소리를 깔고 말하자 태영이 분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같이 온 정음과 서현이 그를 달랬다.

"너희들은 태영이 데리고 잠깐 밖에 나가 있어."

"네, 선배."

혼자 남게 된 도훈이 영어과 학생들에게 말했다.

"우리 후배가 철이 없어서 그런 거 같은데 내가 대신 사과할게."

"보아하니 체육과 선배 같은데 후배 교육 좀 똑바로 하세요. 운동하는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도훈의 저자세에 기세가 오른 영어과 학생들이 기고만장한 태도로 대응했다.

그러자 이제껏 점잖게 있던 도훈이 짜게 식었다.

"···방금 그 말은 좀 과한데?"

도훈의 덩치는 비리비리한 영어과 학생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인상을 굳히자 대번에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뭐가 아닌데? 너 16이랬지?"

"네."

"나 군대 갔다 와서 원래 14거든? 영어관 원래 이렇게 위아래도 없냐? 타과 선배는 선배도 아냐?"

"죄, 죄송합니다."

"사람이 사과를 하면 적당히 받아 줄 줄도 알아야지 정도가 지나치네 좀."

"···네."

"그리고 거기 경영대."

"예?"

뜬금없이 불똥이 튀자 경영대 커플이 움찔했다.

"니들도 그러는 거 아니지. 학점 잘 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는데, 그딴 식으로 사람 면전에서 무시하지 마. 바로 옆에 있는데 체육과 지나서 영어과로 가는 건 무슨 경운데? 우리가 우습게 보이냐?"

"죄송합니다."

"됐고. 별것도 아닌 일로 얼굴 붉히지 말자. 오늘 일은 그냥 서로 조금씩 말실수 한 걸로 치는 거야. 알았지?"

"네."

도훈이 따끔하게 혼을 내고 돌아서는데 어느새 뒤로 정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영을 밖으로 데리고 나간 뒤 혼자 있는 도훈이 걱정돼 다시 들어온 것이었다.

그녀가 도훈에게 말했다.

"선배, 쟤들 밟아 버릴까요?"

"그러지 마. 대학이 무슨 싸움터야?"

태권도 선수 출신인 정음은 누구보다 호승심이 강했다.

도훈은 씩씩거리는 정음을 연행하듯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정음은 잔뜩 흥분했다가도 도훈이 손목을 잡아끌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아···. 오랜만에 오빠랑 스킨십이···.’

"형, 어떻게 됐어요?"

"대충 넘겼어. 넌 그리고 인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니 전 영어과에 아무 감정 없어요. 그냥 그 경영대 커플이 하도 박쥐같이 굴길레 한마디 하는데 괜히 저한테 시비 걸잖아요. 운동하는 애들이라 무식하다느니···. 누가 보면 체육과는 공부도 안 하고 들어온 줄 알겠네."

"알아, 무슨 말인지 아는데. 그래도 방법이 세련되지 못했다."

"죄송해요. 형."

태영도 잘못을 뉘우치는지 도훈에게 사과했다.

"선배. 근데 저희 이렇게 밖에 나와 있으면 조원 못 구하는 거 아녜요?"

서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차피 8개 조로 나눠야 하니까 마지막 남는 사람들이라도 거둬야지."

"흠. 이래선 조별 평가 잘 받긴 힘들텐데···."

"너무 걱정하지 마. 도훈이 형이 어떻게든 멱살 잡고 캐리해 줄 테니까."

"응?"

"형 이번에 전장 노린다고 했거든."

"정말요? 전장은 사범대 통틀어 한 학년에 한 명만 받는 거 아니에요? 도훈 오빠 엄청 공부 잘하시나 보다."

도훈이 머쓱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열심히 하겠다는 소리였어. 애들 나오는 거 보니까 어느 정도 정해진 것 같네. 들어가서 남는 사람 찾아보자."

조를 구성한 이들이 명단을 제출하고 떠난 사이 강의실에는 두 명의 남녀만이 남아있었다.

"혹시 아직 조 못 구하셨어요?"

"예. 그쪽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잘해봐요. 저흰 체육교육과 학생들이에요."

"오, 사범대? 전 농대 14학번이요. 군대 갔다 복학했더니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가지고···."

M자 머리가 훤히 드러난 학생의 말에 도훈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저 얼굴에 14? 헐, 04라고 해도 믿겠구만···.’

"···저쪽 분은?"

혼자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도훈을 향해 여학생이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시므니까."

"잉?"

이상한 말투에 당황하는데 농대 14학번이라고 밝힌 청년이 대신 대답했다.

"아까 보니까 일본에서 온 교환학생 같더라고요. 한국말이 조금 서툰 것 같았어요."

"하지메 마시떼. 와따시와 료코데쓰."

(반갑습니다. 저는 료코입니다.)

‘헐! 첩첩산중이네. 액면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농대 복학생에 한국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일본 교환학생이라···.’

"혹시 한국말 못 하세요?"

"듣는 것은 잘 하니므니다."

"아, 듣는 거."

"하잇."

도훈은 일단 되는 데로 조교에게 명단을 적어 제출했다.

태영은 처음 본 일본 교환학생이 마음에 드는지 자꾸 되지도 않는 일본어를 써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저 새낀 지가 먼저 무임승차 받지 말라더니, 딱 봐도 짐 덩이 두 개 얹혀졌는데 뭐가 좋다고 실실 쪼개는 거야?’

한 조로 묶인 여섯 명은 대강의 연락처만 교환하고 일단 다음 수업을 위해 흩어졌다. 연달아 수업이 있는 서현이 먼저 떠나고, 도훈과 정음 그리고 태영이 남았다.

세 사람은 잠시 벤치에 앉아 종교 미술의 이해 조 구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 참, 조별 평가가 가장 난관이구나."

"그러게요. 저희 과가 이런 이미진 줄 몰랐어요. 그래도 나름 사범 댄데···"

"근데 태영이 너 일본어도 할 줄 알아?"

"네. 한번 보여 드릴까요? 야메떼 구다사이 기모찌 오니짱 이따이요~"

‘뭐, 뭐야 이 새끼. 일본어를 야동으로 배웠잖아?’

도훈이 당황하는데 순진한 정음이 의미를 물었다.

"그게 뭔 뜻이야?"

"응. 애들은 몰라도 돼."

"됐다. 흥. 치사하게."

"암튼 료쿄짱 엄청 귀엽지 않았어요? 와세다대 다닌다더라고요."

"와세다 대?"

"네. 거기서 교환학생 왔는데 1년간 한국어 배우러 왔데요. 여기 수업 들으면 거기서도 학점 인정 돼서 교양 몇 개 듣고 간다고."

"하아-. 그게 왜 하필 우리가 듣는 수업에 우리 조냐 이거지. 마지막까지 아무도 안 데려간 거 보면 한국어 상태가 엄청 심각한 것 같은데···."

"그래도 말귀는 알아듣긴 하더라고요. 형, 어차피 이제 와 물릴 수도 없는데 저희가 안고 가죠."

흠.

안고 간다고?

그건 좀 솔깃하군. 이 기회에 일본말도 좀 배워봐?

< 139. 낭만의 캠퍼스-8-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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