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4화 (84/2,000)

< 86. 옆방에 BJ-15- >

***

자리로 돌아간 희주는 잔뜩 골이 나 있었다.

"아이 씨, 짜증 나."

"왜 그래?"

"우리 편은 왜 항상 병신들만 걸리지? 진짜 거지 같아."

캐릭터가 죽은 희주가 홧김에 ALT+F4를 눌러 게임을 강제종료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태영이 뒤에서 혀를 내둘렀다.

‘누가 누굴 보고 병신이래? 지가 트롤이구만. 생긴 것도 오크 같은 게 하여간 매너하고는.’

태영의 평가대로 희주는 못생긴 편이었다.

여드름이 난 피부는 울긋불긋했고, 유난히 튀어나온 광대가 각박한 인상을 풍겼다. 그나마 타고난 신체 비율이 좋은 편이라 실루엣은 나쁘지 않았다.

전형적인 100미터 미인이랄까?

멀리서 볼 땐 미인인 줄 알고 설렌 마음으로 다가서지만, 가까이 와서 보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마는.

게임마저 원하는 데로 풀리지 않자 희주는 속으로 부쩍 짜증이 났다.

‘오늘은 왜케 되는 일이 없담? 아침부터 여드름이 유난히 올라오더니 화장도 잘 안 먹고, 버스까지 놓쳐서 수강신청은 엉망 되고. 게임하면 병신들이나 만나고···.’

희주는 고개를 돌려 카페테리아에 앉은 도훈과 정음을 힐끔 쳐다보았다.

‘거기다 도훈 오빠도 있는 앞에서 쪽팔리게 쿠사리나 먹질 않나.’

사실 그녀가 화난 결정적인 이유는 정음이 때문이었다. 뚱뚱한 여잘 보고 뒤에서 험담 좀 했기로서니 친구한테 그렇게 무안을 주다니. 하지만 정음의 과격한 성격을 아는 희주는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쳇. 태권도 좀 배웠다고 나대기는. 지가 깡패야 뭐야?’

본인 잘못은 생각지도 않은 체 시기심에 불타는 희주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오늘 어떻게든 정음에게 창피를 줘야겠다는 마음이었다.

***

"형, 굳이 안 사주셔도 괜찮은데···."

"됐어. 비싼 것도 아닌데."

"어쨌든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저두요."

피씨 방을 나온 후배들과 어제 검색해둔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그래도 맛집이라고 가격에 비하면 상당히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이제 다들 집으로 가는 거?"

"기왕 나왔으니 좀만 더 놀다 가자."

"뭐하고?"

"멀티방 어때요?"

"멀티방이 뭐야?"

나의 물음에 태영이 답했다.

"군대 가기 전에 안 가보셨어요? 그때도 있었는데?"

"들어는 봤는데 가본 적은 없어."

"형, 진짜 운동이랑 공부만 하셨나 보구나. 멀티방은 비디오 게임기랑 노래방 시설이 같이 있어서 이것저것 즐기기 좋아요. 만화책 같은 것도 있고."

"그래. 거기 가자. 그리고 도훈 선배가 밥 샀으니 이건 우리가 내는 게 어때?"

"그래. 그럼 되겠다."

"나도 찬성."

정음의 배려에 괜히 가슴이 뭉클했다.

내 지갑 사정 생각해 주는 사람은 너뿐이구나. 가까운 멀티방을 찾아 올라가려는데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많아 나까지 타기 힘들었다.

"올라가 들 있어. 나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갈게."

내가 뒤로 한 발 물러서자 태영도 같이 내렸다.

"그럼 나도 도훈이 형이랑 같이 갈게."

셋을 먼저 올려보낸 우리는 건물 밖 골목으로 나왔다.

"넌 담배도 안 피우는데 왜 따라 왔어?"

"형님 혼자 쓸쓸하실까 봐요."

넉살 좋은 태영의 대답에 절로 웃음이 났다.

"짜식, 너 군대 가서 잘하겠다."

"왜요?"

"군대 가면 휴식시간에 담배 엄청 피우거든. 할 게 없으니까. 그럴 때 비흡연자들은 멀뚱히 있는 경우가 많단 말이지. 근데 가끔 담배도 안 피우면서 선임들 옆에서 얘기 들어주는 후임이 있단 말이야. 그런 애들이 대개 A급이더라고."

"아하! 근데 형 군인 월급으로 담배 사기 빠듯하지 않았어요?"

"뭔 소리야 연초가 있는···."

"연초요?"

아차! 요샌 연초보급 안 하던가?

무슨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를 하냐는 듯 의뭉스럽게 쳐다보는 태영을 보며 급히 말을 돌렸다.

"···그러니까 연초 보급될 때가 좋았다는 말이지. 그땐 한 달에 열다섯갑 씩 줬다지 아마?"

"아항, 저 순간 형 회귀잔 줄 알고 깜놀 했잖아요."

"···회귀자라니?"

"연초 보급되던 시절에 군대 다녀온 아잰 줄 알았다구요."

"하하하. 너 판타지 소설 너무 읽는 거 아니냐? 내가 회귀자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 벌써 주식 사서 부자 됐지."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농담으로 넘기긴 했지만, 심장이 철렁하던 순간이었다.

‘이 새끼 예리한데?’

[주의하셔야겠습니다. 상상력이 몹시 풍부한 인물 같습니다.]

‘뭐, 그냥 농담한 걸 가지고.’

[어찌됐건 방심은 금물입니다. 언제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까요.]

‘되도록 주의할 게.’

담배를 중간쯤 태워가는데 태영이 물었다.

"형, 그나저나 어제 보내준 파일은 보셨어요?"

"대충은? 근데 일하는 데서는 못 보겠더라. 손님들 계속 들락거려서."

"마스크 걸 몸매 진짜 쩔지 않았어요?"

"엉."

‘이놈아. 믿기 어렵겠지만 난 걔랑 오늘 새벽까지 뒹굴다 나왔다.’

"저도 파일로 받아 본 다음에 얼굴 너무 궁금해서 싸이트 가서 본 적 있거든요?"

"직접 방송을 봤다고?"

"네. 근데 그 마스크는 절대 안 벗을 건가 봐요. 방송 내내 사람들이 계속 벗어라벗어라 하는데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더라니까요? 괜히 쌩 돈 날렸잖아요."

"···그렇구나."

태영이 방송을 시청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일이다.

‘눈치 빠른 태영이가 혹시 다음에 방송 보고 나 의심하는 거 아냐?’

[얼굴 가린다지 않으셨습니까?]

‘얼굴은 가려도 목소리는 숨길 수 없잖아. 이거 좀 곤란하게 됐는데?’

[방법이 있습니다.]

‘뭔데?’

[음성을 변조해주는 아이템이 있거든요.]

‘그런 것도 가능해?’

[지난번 구매하신 ‘오늘은 내가 가수다 목캔디’ 기억하십니까? 그것의 자매품 ‘성대모사의 달인 목캔디’입니다.]

‘그것도 설마 5분짜리야?’

[아닙니다. 기존 제품에서 모창을 관장하는 파트만 특화해 사용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렸습니다. 최장 2시간까지 원하는 목소리로 변조가 가능합니다.]

‘시간은 마음에 드는군. 가격은 어떻게 돼?’

[마찬가지로 200포인트입니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자. 당장 필요한 건 아니니까.’

담배를 마저 핀 나는 태영과 함께 멀티방으로 들어갔다. 먼저 올라간 애들이 노래방 책자를 펴놓고 선곡을 하는 중이었다.

"어? 노래 부르게?"

"응, 게임은 피씨방서 많이 했잖아."

"이럴 거면 차라리 노래방을 가자고 하지."

"그래도 여긴 앉아서 부를 수 있잖아."

기남의 말대로 멀티방은 바닥에 장판이 깔려 앉을 수 있는 구조였다. 이런 곳에 처음 와 보는 나로선 신기할 따름이다.

스타트는 기남이 끊었다.

나름 열심히 불렀지만, 호흡이 딸리는지 뒤로 갈수록 숨을 헐떡거렸다. 결국 기남은 1절만 부르고 스스로 반주를 껐다.

"헉헉. 너무 오랜만이라 숨차다. 다음 사람 누구야?"

"내 곡이야."

다음으로 희주가 마이크를 잡았다.

모니터를 향해 등 돌려 서자 뒤태가 보기 좋았다. 허리도 잘록하고 탱탱한 골반도 훌륭하다.

‘쟤는 얼굴은 빻았는데 몸매는 참 보기 좋단 말이지?’

[주인님, 혹시 후배 위하는 선배가 되고 싶으신가요?]

‘아니. 그래도 희주는 아냐. 얼굴에 비닐봉다리라도 씌우면 모를까.’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농담이야 인마. 무슨 내가 여자 따먹지 못해 안달 난 사람으로 보이냐? 오늘은 그냥 즐겁게 놀다 갈 거야.’

[의지가 약해지신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걱정 마. 얘쁜 애들 보면 여전히 불끈불끈 하니까.’

나는 템버린을 들고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정음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둘이서 왔으면 노래는 반주만 나오고 신음만 가득 했을 텐데···.

희주가 부르는 노래는 아이돌 가수의 노래였는데, 중간에 남자 랩퍼의 피쳐링이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다른 마이크를 뽑아 들더니 멀뚱히 서 있던 나에게 건넸다.

"오빠, 도와주세요!"

"어? 나 이 노래 모르는데?"

"진짜요?"

"내가 해줄게."

태영이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

왠지 실망한 표정의 희주다.

‘뭐지? 쟤 갑자기 나한테 왜 저래?’

[주인님께 관심 있는 게 아닐까요?]

‘저런 얜 줘도 안 먹을 거거든?’

[편식은 해롭습니다.]

‘됐어! 너 혹시 나 레벨업시키면 인센티브라도 받냐? 왜 자꾸 꼬시는 거야? 오늘따라 수상한데.’

[주인님의 상태가 걱정되서 그렇습니다.]

‘뭐가 또.’

[정음 양이 함께 있으면 바람둥이가 아니라 달달한 연애를 하려는 것 같달까요?]

‘내가?’

[예전에 주인님이 농담처럼 그러셨죠? 남자는 배고 여자는 항구라구요. 제아무리 미항(美港)이라 한들, 한곳에 오래 정박하는 순간 노는 썩고, 갑판은 문드러질 겁니다.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십시오. 전 세계의 항구를 들러보는 것이 주인님의 목표 아니셨습니까? 플레이어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목적의 상실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신께선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걸요.]

‘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로시가 지적하는 바는 와 닿는 데가 있었다.

한 여자에 정착했다간, 플레이로서의 목적을 망각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 정음의 매력에 빠져 조금은 안일했던 걸까?

"도훈이 형도 한 곡 하세요."

"나 최신곡은 잘 몰라. 전역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요샌 군인들이 최신곡 더 많이 안다던데요? 맨날 생활관에서 음악 틀어 놓는다며."

"우리 생활관은 선임이 맨날 야구만 틀어놔서 말이지."

"아···. 그래도 기왕 왔는데 빼지 말고 한 곡만요, 네?"

"저두 선배 노래 듣고 싶어요."

정음이까지 나서자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너를 위해 부른다.

"···그럴까?"

나는 주머니에 챙겨 나온 ‘오늘은 내가 가수다’, 목캔디를 꺼내 삼켰다.

혹시 몰라서 가지고 다니던 게 요긴하게 쓰이겠군.

"좀 옛날 노래긴 한데 워낙 유명해서 다들 들어봤을 거야. 3867, 부탁해."

리모컨을 든 기남이 번호를 입력하자 모니터에 제목이 나왔다.

<너를 위해>, (영화‘동감), 임재범 노래.

"오오오! 도훈이형 18번인가 봐!"

"끼약! 나 임재범 완전 팬인데!"

"형 이거 소화하시겠어요?"

"흠흠. 다들 조용히 감상하자."

나는 마이크를 잡고 리듬을 떠올렸다.

그리곤 정음을 한 번 쳐다보고는 첫 소절을 시작했다.

"어쩜 우린 복잡한 인연에···"

***

도훈의 노래를 듣던 체육교육과 새내기들은 충격에 빠졌다.

자꾸 사양하길래 노래 실력은 별론가보다 했는데, 막상 마이크를 잡으니 완전히 가수 뺨치는 실력이었다.

‘세상에! 오빠에게 이런 재주가 있었다니!’

정음의 눈에선 하트가 쏟아졌다.

얼굴도 잘생겼지, 몸도 멋있지, 운동도 잘하지, 심지어 노래까지···.

이런 완벽한 남자가 자신과 비밀스런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게 너무나 뿌듯했다.

‘아아···. 오빤 완전히 매력 덩어리구나.’

정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태영이나 기남이 역시 도훈의 압도적인 노래 실력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특히 소싯적에 노래방에서 좀 놀았던 태영은 그야말로 멘붕상태였다.

‘역시 엄친아였어!’

자기도 어디 가서 노래로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지만, 도훈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그는 다음 곡으로 선곡해 놓았던 같은 가수의 ‘고해’를 슬며시 취소했다.

‘신은 왜 도훈이형은 낳고 나를 낳았단 말입니까! 어찌하여!’

희주는 평소 노래 잘하는 남자가 이상형이었다. 특히 발라드를 잘 부르는 남자는 뻑이 갈 정도로 좋아했다.

‘와, 완전 대박. 이거 찍어놨다가 애들한테 보여줘야지.’

그녀는 몰래 스마트폰을 켜 도훈의 노래를 녹화했다.

도훈의 노래를 끝내자 한동안 정적이 일었다.

‘어라? 별로였나? 비슷하게 부른 거 같았는데···.’

도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뒤돌아보자 여자들은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도훈의 기막힌 노래 솜씨에 감동한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린 기남이 박수를 보내자, 나머지 아이들이 일제히 박수를 따라쳤다.

짝짝짝짝짝-!

"우아아아아, 진짜 대박이네요."

"형, 나가수 나가도 되겠어요."

"완전 임재범인 줄?"

도훈이 쑥스럽게 말했다.

"아냐. 이거 한 곡만 겨우 부르는 거야."

"오빠, 앵콜 곡 하나만 더 해줘요."

희주의 요청에 도훈이 손사래를 쳤다.

"난 목이 안 좋아서 한 곡 완창하면 연속은 무리야."

‘목캔디가 5분밖에 못 가기도 하고.’

"에이, 잘 부르시면서 괜히 빼신다."

"다른 사람도 얼른 불러."

"전 쪽팔려서 취소했어요. 형 다음으론 도저히 부를 자신이 없어서요."

"어, 간주 나오는데? 저건 누구 노래야?"

"여자노랜데?"

"정음이 건가?"

"정음이 파이팅!"

간주가 나오자 어쩔 수 없이 정음이 마이크를 잡았다. 정음이 고른 노래는 신나는 댄스곡이었기 때문에 다들 일어서서 흥겹게 춤을 추었다.

정음은 노래를 썩 잘 부르는 편은 아니었지만, 원체 얼굴이 예쁘다 보니 호응이 상당했다. 기남이나 태영은 말할 것도 없고, 도훈 역시 어울려 템버린을 두들겼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희주는 왈칵 질투심이 솟구쳤다.

‘뭐야? 나 부를 땐 가만 앉아 있었으면서 정음이 부른다니까 쪼르르 다 일어서네? 완전 짜증 제대로다!’

질투심이 많은 희주는 남자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히 정음과 함께 와서 비교되는 바람에 기분만 안 좋았다.

그녀는 한창 흥이 올랐을 때 바닥에 떨어져 있던 리모컨을 밟아 노래를 취소시켜 버렸다.

‘흥, 쌤통이다.’

갑자기 노래가 중단되자 희주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머어머, 이를 어째. 미안 정음아. 내가 모르고 리모컨을 밟아 버렸나 봐. 기남이 너 왜 여기 다 놔뒀어?"

"어? 나 거기다 안 뒀는데?"

"몰라. 지금 여기 있잖아. 정음아 다시 켜줄까?"

그러나 이미 흥이 식어버린 정음은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아냐. 같은 노랠 어떻게 또 하겠어."

정음의 시무룩해진 표정에 희주가 만족했다.

‘흥, 너만 주목받게 놔둘 줄 알고? 계속 괴롭혀 줘야지.’

< 86. 옆방에 BJ-15-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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