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3화 (83/2,000)

< 85. 옆방에 BJ-14- >

"전공?"

"네. 전공필수랑 선택, 그리고 교양과목으로 모두 18학점을 채우라는데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체육교육과 커리큘럼은 나도 잘 모르는데···.’

하지만 우물쭈물하다간 괜히 우스운 선배처럼 보일 것 같다. 정음이도 옆에 있는데 쪽팔린 순 없지.

"학점이 뭔지는 알지?"

"A+이나 F 같은 거요?"

"그건 평점이고."

"평점요?"

역시 새내기는 새내기군.

대학수업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어.

"학점은 대학에서 교과과정을 이수(履修)하는 단위를 말해. 가령 사범대 이수학점이 모두 144학점이면, 4년 기준으로 한 학기당 18학점씩 채워야 한다는 뜻이야."

"아하, 그래서 18학점이구나."

"맞아. 학점 하나당 1시간을 뜻하는데 3학점 과목이면 주당 3시간짜리 수업이란 소리지. 그런 과목들을 하나씩 골라서 모두 18학점이 되도록 채우는 거야."

"오, 역시 선배님."

"학점은 아무렇게나 채우면 안 되고, 일정한 비율이 정해져 있어. 크게는 전공과 교양, 또 전공은 아까 말한 필수와 선택으로 나뉘지."

대학 과정에 대한 일반론을 소개하자 기남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선배 정말 똑똑하시네요."

"뭘 이런 걸 가지고."

"야. 오티 때 조교 샘이 다 설명해 줬잖아. 기억 안 나?"

옆에서 듣고 있던 태영이 핀잔을 주자 기남이 머쓱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때 깜빡 졸아가지고."

"넌 근데 왜 자꾸 조냐? 봄도 안 왔는데 벌써 춘곤증이야?"

"요새 이상하게 가위 눌리네.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

"크크. 혹시 귀신이라도 붙은 거 아냐?"

"야. 그런 소리 마. 안 그래도 자꾸 헛것 보여서 무서워 죽겠구만."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데 옆에 있던 정음이 나에게 물었다.

"선배는 교양과목 뭐 들을지 결정하셨어요?"

"나?"

"네. 선배랑 수업 같이 듣게요. 교양은 학년 구분 없이 신청할 수 있다고 해서···."

"그래?"

수업에 대해선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대답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너무 여자만 만나고 다녔나. 나도 잘 모르는데···.’

때마침 정음의 폰이 울렸다.

"어, 여보세요? 희수니? 너 왜 안 와? 뭐? PC방을 못 찾겠다고? 지금 어딘데?"

통화를 하던 정음이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선배. 죄송한데 저 잠깐 내려가서 희수 좀 데려와야겠어요. 못 찾고 헤매고 있나 봐요."

"그렇게 해."

휴, 잘됐군.

정음이 나가자 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난 잠깐 흡연실 좀."

"네 형."

PC방 귀퉁이에는 흡연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이 바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다.

***

"조교 선생님 저 뭐 좀 여쭤보려고요."

-응, 뭐든지 물어봐.

"수강 신청 때문에 그러는데···."

도훈은 강민주를 통해 인기 많은 교양과목 목록을 추천받았다. 또 2학년 과정 중 이수해야 할 전공에 대한 정보도 입수했다.

-하여튼 강민제 교수님 수업은 절대 듣지 마.

"왜요?"

-옛날부터 여학생들한테만 점수 잘 주고, 남자들에겐 짜기로 유명했어. 차라리 설경호 교수님 걸로 들어.

"고마워요. 도움 많이 됐어요."

-근데 도훈이 너 주말엔 뭐해?

"이번 주말요?"

-응. 개강 전에 밥이나 한 끼 사줄까 해서.

‘밥만 사줄 리가 없는데···.’

"이번 주는 미국에서 여동생 귀국한대서 좀 바쁠 것 같아요.

-미국? 유학 갔어?

"뭐 비슷해요."

-힝, 아쉽네.

"개강하고 봐요.

-알았어. 수강 신청 잘하고.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

"네."

통화를 마친 도훈이 자리로 돌아가니 어느새 정음과 희주도 도착해있었다.

"형. 곧 서버 열려요. 준비하세요."

태영의 외침에 다들 긴장한 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새로 고침을 거듭하자 곧 수강 신청 페이지가 떴다.

도훈은 강민주에게 추천받은 교양과목을 정음에게 귀뜸했다.

"종교미술의 이해랑 한국사 산책, 이거 괜찮데."

"이걸로 들을까요?"

"응."

교양과목을 고르고 나머지 전공과목들을 선택하자 빠르게 수강 신청이 완료되었다. 도훈은 나름 만족스러운 시간표를 짰으나 옆에 있던 후배들은 대부분 그렇지 못한 표정이었다.

"으악! 망했다!"

"왜?"

"아침 9시 수업 시작인데 공강이 4시간씩 잡혔어요. 어쩌다 이렇게 됐지?"

"윽. 난 주 3파로 몰빵 됐어."

"그건 좋은 거 아냐? 3일만 학교 나오면 되잖아."

"문제는 월수금 주 3파란 말이죠. 엉엉."

"난 깜빡하고 점심시간 빼먹었어. 강제 다이어트 시작인가!"

아무래도 교양 비중이 높은 1학년의 특성상 원하는 과목을 고르긴 쉽지 않은 것 같았다.

"크헉, 수강 신청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이야."

"어쩔 수 없어. 내일 정정 때 다시 도전해 봐야지."

"그나저나 피씨방 시간도 남았는데 게임이나 하다 갈까요?"

"고급시계 하자. 같이 하실 분?"

"난 에로엘 할래. 랭겜 돌려야 돼서."

하나둘 좋아하는 게임을 켜는데 정음과 도훈만 멀뚱히 앉아있었다. 둘 다 게임 쪽으론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음아, 커피나 한 잔 할래?"

"그럴까요?"

도훈은 정음을 데리고 카운터에서 주문하러 갔다. 최근 피씨방들은 음식이나 음료를 파는 게 주 수입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메뉴가 마련되어 있었다.

"여긴 완전 커피숍이네."

"그러게요. 오빠 뭐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정음이 지갑을 꺼내려고 하자 도훈이 만류했다.

"후배한테 어떻게 얻어먹니. 넣어둬."

"그런 게 어딨어요? 다 같이 용돈 받는 건 처진데."

정음의 대답에 도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정음이는 개념녀라니까. 에구 이쁜 것.’

"그래도 난 돈 벌잖아."

"돈요?"

"편의점 말야. 방학 때 알바해서."

"그래도 오빠가 힘들 게 번 돈이잖아요."

"괜찮아. 자꾸 사양하면 민망하다. 얼른 골라."

정음은 미안해하는 얼굴로 음료를 골랐다. 두 사람은 음료를 받아들고 PC방 한 켠에 설치된 테이블에 자릴 잡았다.

"여긴 PC방이 아니라 무슨 까페 같구나."

"요샌 다 그렇잖아요."

"PC방 자주오니?"

"자주는 아니고, 친구들 중에 게임하는 애들이 몇 명 있어서 몇 번 따라갔어요."

"여자들도 게임 많이 해?"

"하는 애들은 다 하죠. 전 아니지만. 차라리 몸 움직이고 땀 흘리게 좋아요."

정음의 대답에 도훈이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새터에서 그녀와 몸을 부대끼던 게 떠올 랐던 것이다.

"···음, 확실히 그런 거 같더라. 땀이 좀 많더라고."

"엇, 오, 오빠도 참···."

정음이 당황하자 도훈은 슬며시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치마 잘 어울리네."

"···고마워요."

"이번에 산 거야?"

"네. 맨날 츄리닝만 입고 다닌다고 고모가 입학 선물로 사줬어요."

"그렇구나."

도훈이 물끄러미 다리를 쳐다보자 정음은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렸다.

"부, 부끄럽잖아요. 그만 보세요."

"왜? 나 보여 주려고 입고 온 거 아니었어?"

도훈의 도발적인 물음에 정음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실제 그녀가 평소 안 입던 치마를 입고 나온 이유는 도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정곡을 찌르자 민망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화장실로 향하던 희주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

"어, 선배! 저도 커피 사주세요!"

***

"어, 선배! 저도 커피 사주세요!"

‘에이 씨, 둘이 놀려고 했더니···.’

갑자기 들이닥친 훼방꾼의 등장에 기분이 안 좋아졌다.

게다가 언제 봤다고 다짜고짜 커피를 사달래? 방금 전 정음의 모습과 대조되면서 희주란 후배의 첫인상이 무척 별로였다. 하지만 나는 감정을 곧바로 드러낼 만큼 철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 너도 하나 고르렴."

"히히. 전 그럼 아메리카노!"

희주는 거리낌 없이 주문을 완료하더니 나와 정음이 앉은 테이블에 와 앉았다.

"뭐라고 있었어요? 둘이? 설마 데이트?"

‘알면 좀 짜져, 이년아.’

"무, 무슨 소리야!"

"그냥 게임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요? 역시 오빤 운동만 좋아하시는구나."

희주는 노골적으로 나의 가슴근육을 쳐다보았다. 새터 때 별로 말도 안 섞은 것 같은데, 웬 오지랖이람?

"참, 오빠 그 소식 들었어요? 찬혁이 자퇴한 거?"

"어. 같은 카톡방에 있었잖아."

"아, 맞다. 그렇지."

희주는 정음이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고 나에게만 계속 말을 걸었다. 얼굴도 별로인 얘가 눈치까지 없으니 점점 짜증이 밀려왔다.

‘아오, 이 날파리 같은 년을 어떻게 쫓아 보낸다? 로시, 확 정떨어지게 만드는 스킬 같은 건 없어?’

[안타깝게도. 현재 보유하실 스킬은 주로 이성을 유혹하는데 적합한 구성입니다. 그러지 말고 ‘후배 위하는 선배’ 위업이나 도전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희주 양도 엄연한 후밴데 말이죠.]

‘야. 나도 골라 먹을 자유 정돈 있는 거 아니냐? 저렇게 빻은 애랑 뭐하러 해? 예쁜 애들도 차고 넘치는 고만.’

[위험한 발상이군요.]

‘뭐가?’

[달성 가능한 위업 가운덴 미적으로 미흡한 대상을 공략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헉? 진짜?’

[가령 ‘강한 여성, 왜곡된 성욕’의 경우가 그렇지요. 100Kg이상, 혹은 175Cm 이상의 운동선수급 여성을 공략해야 하니까요.]

‘에이, 마유미가 성격이 지랄 맞긴 했지만, 외모가 꿀린 건 아니지.’

[그건 주인님께서 운이 좋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자 배구선수가 아니라 역도 선수라거나 여타 다른 종목이었다면 분명 힘든 경험이 되었을 겁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네. 또 뭐 있는데?’

[70세 이상 비구니에게 몸을 바치는 육보시 위업도 있지요.]

‘으악. 이건 패스. 인신공양은 사양하겠어.’

[자꾸 그렇게 하나씩 넘기다 보면 랭커도 요원한 일이 됩니다.]

‘아니, 다른 건 둘째 치고 70세는 좀 아니지 않냐? 연상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런 건 어떻습니까? ‘육덕녀와 육떡치기’]

‘그게 뭔데?’

[BMI지수로 고도비만에 해당하는 여성과 하룻밤 동안 6번의 섹스에 성공하는 겁니다.]

‘아하, 그래서 육덕녀와 육떡? 근데 고도비만이면 어느 정도야?’

[마침 저기 지나가는군요. 저 정도 몸매면 됩니다.]

로시의 말에 앞을 바라보니 비대한 몸집의 여성이 카운터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헉, 깜짝이야. 진짜 저 정도라고?’

[가능하시겠습니까?]

‘와. 위업 달성이 이렇게 어려운 거였다니.’

로시와 속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희주가 카운터에 있는 여성을 보고는 실실 쪼갰다.

"정음아 저기 저 사람 봐. 완전 돼지야, 돼지. 키키."

"그런 소리 하면 못써.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면 안 되는 거야."

정음이 정색하자 뻘쭘해진 희주가 꾹 입을 다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단단히 삐친 모양새다. 하여간 못생긴 애들이 성격도 더럽다더니 하는 짓마다 꼴불견이구만.

"···난 게임이나 하러 갈래."

기분 상한 희주가 물러나자 다시 정음과 둘 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정음이 나를 향해 물었다.

"오빠도 예쁜 사람 좋아해요?"

"나?"

"네. 남자들은 예쁜 여자한테만 잘해주잖아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답을 해서 안 될 것 같다.

"아니 난 착한 여자 좋아해."

"착한 여자요?"

‘얼굴도 착하고, 가슴도 착하고, 몸매도 착하고···.’

"그냥. 뭐랄까, 그런 거 있잖아. 예쁜 데 성격 나쁜 애들. 자기 잘난 맛에 남 깔보고 우습게 보는 애들. 그런 애들이 제일 별로야."

"아···."

이건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이전 삶에서 마누라였던 윤하가 그런 여자였으니까.

전형적인 된장녀.

남편을 돈 벌어다 주는 기계쯤으로 여기고, 사치와 과소비를 즐기는.

거기다 집으로 남자를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대물로 다시 태어나 여자들을 실컷 따먹고 다니는 나의 여성편력은, 전생에서 여자에 겪은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쁜 여자에게 한 번 크게 데이고 나자(데인 정도가 아니라 칼 맞아 죽었지만), 그에 대한 복수심으로 여자들을 자빠뜨리고 다니는 것이다.

물론 나의 콤플렉스도 없잖아 있지만.

"오빤 착한 여자 좋아하시는구나···."

내 대답에 정음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전 그럼 별로겠네요."

"무슨 소리야?"

"저 안 착하잖아요."

"정음이 니가?"

"네. 과격하고 다혈질이고,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갈 때도 많고···."

음, 뭔가 오해하고 있군.

"아냐. 그건 그냥 성격이지. 정음이 넌 정의감이 있고, 남을 배려할 줄 알잖아."

"제가요?"

"응. 내가 보기엔 그래. 게다가 얼굴도 예쁘고."

"앗."

갑작스런 칭찬에 정음이 두 뺨을 가렸다. 저럴 때마다 키스하고 싶어지는군.

< 85. 옆방에 BJ-14-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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