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옆방에 BJ-1- >
다음 날 아침.
술에 곯아떨어져 있던 태영은 으스스한 기분에 눈을 떴다.
'으, 누가 야밤에 창문을 열어놨담?'
찬 기운에 몸을 떨며 반쯤 열린 창문을 닫았다.
‘흠, 정음이는 자는 모습도 귀엽구나.’
그는 구석에 곤히 잠든 정음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음은 아이 같은 얼굴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어? 근데 원래 여기서 잤었나?’
태영은 분명 정음 옆에서 잠을 청했다.
뭘 해보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근거리에서 잠을 잔다는 것만으로 한 발짝 다가선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침에 깼을 때 정음은 처음 위치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잠결에 뒤척인다고 해도 저 정도로 굴러갈 순 없을 텐데···
‘추워서 옮겼나 보군.’
태영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 누군가 부스스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이름이 효민이라고 했던가?
평범한 외모에 왜소한 체구.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 별로 관심 없는 여자애다.
"일어났니?"
"응. 나 화장실 좀."
효민은 깨어나자마자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어기적거리며 걷는 폼이 흡사 포경수술이라도 한 사람처럼.
‘어라? 어디 안 좋나?’
태영은 문득 그런 걸음걸이가 아다를 막 따인 여자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설마.’
태영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데서 무슨 아다를. 사람들 다 같이 자고 있는데. 내가 아직도 술기운이 남아있나 보네.'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했다는 생각에 태영이 자기 머리를 쿵 때렸다.
새터 기간 눈치 보느라 딸딸이를 못 잡는 바람에, 머릿속이 야한 생각으로 가득 차 버린 것 같다.
태영은 먼저 일어난 김에 어제 못 치운 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자기가 먼저.
그것이 태영이 인생을 살아가는 모토였다.
한참 혼자서 빈 병을 치우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부지런하네. 태영이."
"어? 도훈이 형 일어나셨어요?"
거실로 나온 사람은 도훈이었다.
"으 골이야. 나 어제 어떻게 된거냐?"
"사발주 마시고 기절하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맞다, 사발주."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그러게. 어지간해선 한 병으론 잘 안 취하는데."
"에이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조금씩 천천히 마셨으면 모를까 한 번에 소주 한 병 마시면 누구라도 취할 거에요."
"그럼 어젠 별일은 없었어?"
"그게···"
태영은 어젯밤 벌어진 소동을 간략하게 전달했다.
"괜히 미안하네 나 때문에. 분위기 완전히 가라앉았겠다."
"아니에요. 형이 왜 미안해요. 동기 놈들이 의리가 없어서 그런 건데. 형한테 그렇게 많이 남을 줄 알았음 제가 무리해서라도 더 마실 걸 그랬어요."
"아냐. 넌 할 만큼 했잖아."
태영은 도훈과 함께 어질러진 술자리를 정리했다.
남은 안주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비우고, 쓴 그릇을 설거지하며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갔다.
"참, 너 혹시 별풍이란 말 아냐?"
"별풍요? 아, 파프리카 병풍선 말씀하시는 거예요?"
***
"별풍요? 아, 파프리카 병풍선 말씀하시는 거예요?"
혹시나 한 마음에 물어봤는데 요즘 세대답게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왠지 알 것 같더라니.
"그 왜 인터넷 개인방송 하는 얘들 있잖아요. 거기에 시청자들이 돈처럼 주는 게 있어요, 별풍선이라고. 그걸 줄여서 별풍이라고 불러요. 그건 왜요?"
인터넷 개인방송?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인터넷 뉴스로 읽은 기억이 났다.
"아니 누가 그 말을 하던데 이해를 못해서."
"도훈이 형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거 전혀 안 하시는구나?"
"음, 그렇지. 근데 그런 건 왜 하는 거야?"
"그게 돈이 엄청 되거든요."
"돈이 돼?"
"네. 거기 방송하는 사람을 BJ 라 부르는데 잘나가는 BJ들은 어지간한 직장인보다 많이 번다고 해요."
"진짜?"
"네. 억대 연봉자도 있을 걸요?"
"대단하네. 그럼 뭘 방송하는 건데?"
"다양해요. 시사나 정치 관련 이슈로 입 터는 애들도 있고, 제일 많은 종류가 먹방이나 게임 쪽이에요. 사람들이 은근히 직접 하는 것보다 보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그럼 여자들도 있어?"
"여자 BJ요? 엄청나죠. 솔직히 어중간한 콘텐츠로 방송하는 사람보단 여자들이 훨씬 수입 좋을 거예요."
"왜?"
"아이참, 형도 순진하시네."
태영은 능글맞게 웃더니 살짝 톤다운 해 속삭였다.
"···여자들은 이게 상품이잖아요."
태영은 갑자기 자기 가슴을 겨드랑이부터 끌어모았다.
있지도 않은 가슴을 영혼까지 모으는 모습이 퍽 우습다.
"노출 조금만 해줘도 남자애들이 환장하고 별풍 날리거든요."
"노출이라니? 그런 것도 돼?"
"그런 걸 전문용어로는 성방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런 방송 하는 여자들을 별창이라고 하구요."
"별창?"
"별창녀 말이에요. 창녀처럼 별 구걸한다고."
"아하!"
"초기엔 파프리카도 어느 정도 허용하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유두만 나와도 밴당해요."
"밴이라니?"
태영이 자기 모가지를 쓱 긋는 시늉을 했다.
제스쳐가 참으로 풍부한 아이다.
"짤린다구요."
그나저나 태영의 말을 듣고 나니 뭔가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옆방 신음녀는 인터넷 성방을 하는 별창이었구나!'
"암튼 요샌 그래서 벗방만 전문으로 하는 사이트로 옮겨서 활동한 다라고요. 수입 짭짤하죠. 솔직히 컴퓨터 앞에서 옷만 벗어도 돈 버는 건데···"
"거참 신기하네."
"형 궁금하시면 제가 나중에 깨톡으로 좋은데 좌표 찍어드릴게요."
"아냐. 됐어."
"왜요? 진짜 꼴릿하실 걸요. 거기 애들 괜히 돈 쓰는 게 아니라 까요. 잘하면 BJ랑 오프도 할 수 있다고 하고."
"오프? 그러니까 만난다는 거야?"
"그죠. 물론 화대라고 생각하면 비싼데, 인터넷 스타랑 하니까 마치 연예인이랑 하는 기분이잖아요. 흐흐."
태영은 이런 쪽으로 지식이 해박한 것 같다.
아재인 나로선 이런 녀석 하나 알아두면 쓸모가 많을지도 모르겠군.
***
점심을 먹고 복귀를 준비하던 중 학회장 유미가 후배들을 한데 모았다.
"어제 일은 다 잊어버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해프닝인 걸로. 알았지? 교수님들도 아침 되니까 화 많이 풀리신 것 같더라."
유미는 모든 걸 털어낸 듯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꿍하지 않은 점은 맘에 드는군.
"그리고 이도훈."
"네?"
"속은 좀 괜찮니?"
나에 대해서 집착만 안 한다면 더 좋겠지만.
"네, 괜찮습니다."
그때 성수가 한 걸음 걸어 나왔다.
"너희들에게 알려줄 사실이 하나 있다. 실은 도훈이는 새내기가 아니고 15학번이야."
"네에?"
성수의 폭탄선언에 다들 깜짝 놀란 표정.
특히 정음과 효민은 입을 크게 벌리며 눈을 깜빡였다.
"헐, 오빠 스물 한살이 아니고 스물셋이었어요?"
"그럼 조, 졸업반 선배님?"
성수는 동요하는 새내기들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졸업반은 아니고 나랑 같은 학번이야. 군대 갔다 와서 올해 복학했고."
"와! 어쩐지 형 뭔가 새내기답지 않더라니!"
"너무해요. 어떻게 우릴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요?"
갑작스러운 성수의 커밍아웃에 나는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일부러 속이려는 건 아니었어."
"맞아. 도훈이는 내가 특별히 요청해서 이번 새터 X맨으로 투입된 거야. 임무 수행을 잘해줘서,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 이제 개강하면 동기가 아니라 선배니까 깍듯이 모셔라. 그리고 2학년들도 잘 챙겨주고. 아직은 민간인보단 군인에 가까우니까."
"넵, 잘 부탁드립니다. 도훈이 형."
"와, 완전 반전이당."
"너무 동안이라 짐작도 못 했어요."
"맞아, 맞아."
나는 한동안 새내기들에 둘러싸여 질문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힐끔 정음 쪽을 쳐다보니 뚱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자기한테까지 속인 것을 실망하는 눈치다.
나중에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나는 정음을 따로 불렀다.
"정음아.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네. 오빠."
"미리 말 못 해서 미안."
"아니에요."
"사실 어제 말할까 했는데 성수 형이 끝까지 숨기라고 해서."
"이해해요. 선배 중 하나가 X맨으로 투입되는 게 체육과 전통이라면서요?"
"응."
정음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 오빠랑 같이 수업 들을 줄 알고 엄청 좋아했는데."
그것 때문이었나, 정음이 실망한 이유가?
하긴 같은 학년이면 확실히 얼굴 볼일도 많겠지.
나는 정음의 단발을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그게 아쉬웠어?"
"···네. 당연하죠. 동긴 줄 알았는데 선배라니."
"그래도 중간에 군대 안 가는 게 낫지 않아?"
"군대라뇨?"
"역시 잘 모르는구나. 남자들은 중간에 대부분 군입대 하거든. 여자처럼 스트레이트로 졸업하는 일이 드물다고."
"아~."
정음이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학년이 달라도 2년간 아주 못 보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든 것일까?
"그럼 더 좋은 거네요?"
"뭐 3년 동안은 같이 학교 다닐 테니까."
"헤헤. 좋으당."
방긋 웃는 정음을 보니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정음은 플레이어 위업만 아니면 본처로 삼고 싶을 정도다.
그녀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참. 효민이는 걱정하지 마세요."
"뭘?"
"제가 잘 말해놨거든요."
잘 말해놔?
"너 설마 때린 건 아니지?"
"무, 무슨 말이에요! 저 사람 안 때리거든요?"
"왜 찬혁이는 잘만 패더구먼."
"그, 그건! 걔는 맞을 짓을 해서 그런 거고요!"
"나중에 나도 때리면 안 된다?"
나는 씩씩거리는 정음이 귀여워 농을 던졌다.
"어떻게 제가 오빨 때려요."
***
"어떻게 제가 오빨 때려요."
‘난 오빠한테는 영원히 약잔데···’
정음은 도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앞에선 왜 그렇게 작아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 그렇담 다행이고."
"아무튼, 효민이한텐 어젯밤일 다 잊어버리라고 했어요. 걔도 그러겠다고 했고요."
어제 일을 빌미 삼아 오빠한테 찝쩍대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한 건 쏙 빼는 정음이었다.
"오빤 이제 집에 가면 뭐할 거예요?"
"난 바로 알바가야 돼. 새터 간다고 이틀이나 뺐거든. 알바생 한 명 빠진 상태라 좀 힘들 거야."
"아···아르바이트하시는구나."
"응. 근데 곧 끝낼 거야. 복학하면 바빠질 테니까."
"그럼 저흰 개강할 때나 보겠네요."
"그렇지. 개강이 다음 주던가?"
"네."
"뭐 중간에 시간 되면 가끔 보자."
"정말요?"
"응. 바쁜 일 없으면."
"히히. 신난다."
정음은 애처럼 기뻐했다.
***
버스에선 계속 잠만 잤다. 확실히 새벽에 쓰리썸이 무리였나 보다.
잠에서 깨니 어느새 대학에 도착해 있었다.
다들 피곤했는지 지친 얼굴로 집으로 향했다.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작별인사를 하는데 유미가 나를 불러 세웠다.
"도훈 오빠."
"응."
"바로 가시게요?"
"응. 알바하러 가야 해."
"알반 몇 시에 끝나는 데요?"
"새벽 2시?"
"그때까지 기다릴까요?"
"아니. 너무 피곤해. 다음에 보자."
"다음에 언제요?"
너무 집요하군. 난 주변을 살펴 아무도 못 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경고했다.
"마유미. 내가 말했지. 나한테 집착하는 거별로라고."
"아···실은 제가 내일부터 배구부 전지훈련이 있어가지구요. 서울에 없거든요."
"그럼 다녀와서 보자."
"정말이죠?"
"그래. 오늘은 너무 피곤해. 일 끝나면 더 피곤할 거 같고."
"알았어요."
유미는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
"나 세컨드라도 상관없어요. 무슨 말인지 알죠?"
"훈련이나 열심히 해."
"치."
유미와 헤어지고 택시를 타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김민주였다.
"여보세요?"
-주인니임~ 방금 교수님들 모셔다드리고 헤어졌어요. 어디세요?
"네, 조교 선생님. 저 알바가는 중이에요."
-알바요?
"네. 이번 주까지 하기로 해서요."
-히잉~ 어제 주인님 상 주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다음에 드릴게요. 오늘은 곤란해요."
-알겠어.
갑자기 민주의 목소리가 착 바뀌며 사무적인 말투로 바뀌었다.
-그런데 도훈아. 다음 주 개강인 건 알지?
"네."
무슨 투 페이스도 아니고.
연극배우 하면 잘할 여자다.
-개강 준비 잘하고 모르는 거 있음 샘한테 전화해.
"넵.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겨우 전화를 끊고 시트 뒤에 머릴 기댔다.
따먹을 땐 좋았는데 한번 맺은 연을 이어가자니 영 피곤한 일이었다.
‘어휴, 진짜 분신술이라도 썼으면 좋겠네. 몸뚱이는 하난데 여자가 대체 몇이야? 로시, 혹시 그런 스킬은 없어?’
[자가 복제 기술 말씀이시군요. 일부 플레이어 중에선 그런 스킬을 받는 예도 있습니다.]
‘헉? 진짜?’
[네. 지금은 작고한, 유명한 탈출 마술사였죠.]
‘아니 그럼 스킬을 마술처럼 위장한 거네?’
[그렇습니다. 오히려 속임수처럼 보이기 위해 더 노력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능력을 남용한 죄로 결국엔 신의 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분노?’
[마지막 탈출에서 능력이 봉인되어 버렸거든요. 결국 수장되어 생을 마감했죠.]
‘수장이라니···거 참. 해도 너무 하는구먼.’
[그는 능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챙겼습니다. 위대한 마술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저버리고 범죄에 가담했죠. 주인님도 명심하십시오. 절대로 신께 받은 능력을 남용해선 안 됩니다.]
‘알았다고. 그만 겁줘.’
나는 택시 차창으로 가로수를 보며 생각했다.
나에게 능력을 하사한 신은, 언제든 다시 빼앗아 갈 수 있는 존재이구나 하고.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설마 또 유미나 민주는 아니겠지?
그런데 화면이 이상하다. 이건 영상통화?
이름을 확인하니 "Rachel"이었다.
나는 엉겁결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Hello!"
화면 속에는 머리띠를 한 깜찍한 여자애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누구···?"
"뭐야, 오빠. 장난해? 여동생 얼굴을 벌써 까먹었어?"
여동생이라니?
설마 도훈의 여동생?
왠지 불길한 기운이 도는 것은 기분 탓이겠지?
< 72. 옆방에 BJ-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