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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섹터!07
2월 중순이지만 매우 추웠다.
인근 스키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눈발이 섞여 피부를 찢을 것처럼 매섭게 몰아쳤다. 두꺼운 패딩을 입었음에도 오들오들 몸이 떨린다.
풋살장으로 집결한 신입생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집합 대형으로 섰다.
"다 나왔냐?"
어느새 예비군 복장에 빨간 모자를 쓴 성수가 연단 위에서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완벽한 조교 복장.
나는 긴장된 와중에도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저 새낀 허리 다쳐가지고 의병전역 했다는 놈이 왠 똥폼이람?’
"임시과대. 인원보고 해."
"네?"
강찬혁이 말귀를 못 알아듣고 되묻자 우리를 포위하듯 둘러싼 2학년 선배들에게서 날선 비아냥이 쏟아졌다.
"쟤 방금 네라고 했냐?"
"미필 티내고 자빠졌네."
"니들은 이제 뒤졌다."
선배들의 거친 야유에 새내기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분명 버스에 타고 있을 때는, 아니 교수님들이 인사 방문 했을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고 후배 사랑으로 가득한 선배 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며칠 굶주린 승냥이 마냥 우릴 노려보고 있다.
‘완전히 기를 꺾어 놓겠다는 거구만.’
체육인들은 선후배 관계를 무척 중시한다고 했다. 심한 곳은 예비 장교인 ROTC보다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게 한다고.
싸늘한 정적이 흐른 뒤 박성수가 입을 열었다.
"귀 먹었냐?"
"네?"
"인원보고 하라는 말이 뭔 말인지 몰라?"
"아, 그, 그러니까 저희 17학번 신입생들은..."
시건방지기 짝이 없던 강찬혁은, 180도 돌변한 박성수의 고압적인 태도에 바짝 쫀 느낌이었다.
듣기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과대 하겠다고 나섰다는데 막상 완장을 채워놓으니 병신도 저런 병신이 없다.
나름 복싱 좀 배웠다고 한들 눈앞에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각종 운동으로 다져진 시커먼 선배들 열댓명이 노려보고 있으니 긴장해서 어버버 거리는 것이다.
박성수는 강찬혁의 쭈뼛거리는 태도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야, 2학년 과대 튀어와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2학년 남자애가 번개처럼 달려 나갔다. 놈은 관등성명이라도 대는 것처럼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2학년 과대, 정우선!"
"너 애들 인원 보고 안 갈쳤냐?"
"시정하겠습니다!"
"야이 새끼야! 내가 묻는 거나 대답해! 인원 보고 안 갈쳤나고!"
성수의 일갈에 풋살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목청하나는 우렁차군.
"일정 상 따로 교육할 시간이..."
"엎드려."
2학년 과대가 번개처럼 엎드린다.
"풋샵 100개 실시."
"실시!"
2학년 과대는 기계처럼 풋샵을 실시했다. 분명 땅에선 한기가 올라와 시멘트처럼 딱딱할 텐데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자세였다.
그를 바라보는 1학년 학생들의 표정이 슬슬 공포로 질려 갔다. 룰루랄라 즐거운 마음으로 오티에 참여했다 이런 꼴을 당할 줄은 전혀 예상 못했을 것이다.
이는 군대에서도 가끔 쓰는 방법인데, 편하게 대해주던 선임이 난데없이 정색빨며 화내기 시작하면 바짝 긴장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더구나 직접 당사자를 혼내기보다 바로 윗선임, 즉 2학년 과대를 갈구면 가시밭길에 맨발로 선 것처럼 온몸이 불편해진다. 2학년 과대가 풋샵에 돌입한 가운데 성수가 입을 열었다.
"내가 제일 못 참는 게 딱 두 가지 있어."
"..."
"첫째, 시간약속 안 지키는 거."
"...."
"둘째, 변명하려는 태도. 기억해라. 절대 내 앞에서 변명하지 마. 알겠나?"
"넵!"
긴장한 새내기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지만 옆에 있던 선배들은 여전히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와, 목소리 봐. 완전 정신 줄 놨네."
"개미가 소리쳐도 니들 보단 크겠담마."
"우리 땐 목이 다 쉬도록 악을 썼는데 말이지."
마치 짜놓은 각본 같았다.
2학년 선배들이 못된 시누이처럼 재잘대며 신경을 긁으면, 무게를 지키고 있던 성수가 벼락같이 소리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17학번 이 자식들! 진짜 목소리 그 따위로 밖에 못 내냐!"
"아닙니다!!!"
"근데 왜 그 따위로 하나!"
"아닙니다!!!"
"아냐? 뭐가 아닌데?"
"..."
"여기가 밖이지 안이야?"
"..."
"대답 바로 안 나오지?"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아닙니다!!!"
"죄송한 게 아니라고?"
"..."
성수는 무슨 말을 해도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군대를 다녀온 나로선 저것이 그저 갈굼을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대답을 해도 성수는 멈추지 않는다. 놈은 우리가 겁먹고, 움츠러들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니까.
‘...적당히 좀 하지. 무슨 군대보다 더하네.’
나로선 이런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잘 안다.
사회 나가보면 대학에서의 선후배 문화가 그저 애들 장난이었구나 하는 것을 뼈져리게 느낄때가 올 것이다.
사회에서의 갑질이란 훨씬 은밀하며, 지독하고, 잔인하니까.
다만 저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살짝 이해가 되었다.
이런 전통이 구시대적이며 폐지되어야 할 악습이긴 해도, 이로 인해 선후배간의 위계가 생겨나고, 동기들 사이에 끈끈한 연대 의식이 싹트게 된다.
한마디로 이는 평범한 고등학생에서, 국성대 체육교육과라는 집단에 소속되기 위한 통과의례인 셈이다.
어차피 누군가는 악역을 자처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그 배역을 맡은 사람은 성수였다.
그가 나를 엑스맨으로 지목할 당시, 선배 중 누가 제일 욕 많이 먹는지 알아오라 한데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성수는 그 뒤로 갖은 핑계를 대며 체력단련을 빙자한 얼차려를 시작했다.
PT체조나 오리걸음은 기본이고, 꽁꽁 언 땅위에서 버핏테스트, 유격 8번 자세를 시키고 1시간을 넘도록 우릴 굴렸다.
새내기들은 어느새 추위도 잊고 땀을 뻘뻘 흘렸다. 몸에서 올라온 열기가 수증기가 되어 퍼져나가는 모습이, 바깥의 차가운 공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또 다시 이어지는 유격자세. 성수가 순시를 도는 것처럼 내 머리 맡으로 오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받을만하냐?
나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악에 바친 나의 목소리에도 성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쓰윽 지나쳐 갔다.
아오, 저 새끼!
엑스맨 하면 재밌을 거라더니 퍽이나 재밌다 개새끼야.
나는 성수의 뒤통수를 대고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물론 속으로.
얼차려는 그러고도 한참을 지나서야 끝이 났다. 성수는 헐떡거리는 새내기들을 편히 앉힌 다음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다들 고생했다."
"아닙니다!"
"이제 악 안 질러도 돼."
"..."
"나도 사실 하기 싫지만 이게 우리과 전통의 신고식이다. 교수님한테도 양해 구한 거야. 추운데 고생시켜서 미안했다."
부드러워진 성수의 목소리에 갑자기 새내기들이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지? 무슨 꿍꿍이지? 하는 표정.
그러자 성수의 뒤에 일렬로 도열한 2학년 선배들 역시 90도로 폴더인사를 하며 사과했다.
"후배들아 미안하다. 잘 견뎌줘서 고맙다."
그리고는 갑자기 머리위로 하트를 그리며 애교 작렬하는 포즈를 취하는 것이었다.
"사랑한다!"
그 순간 갑자기 여자 새내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앙! 겁나 죽는 줄 알았잖아요!"
긴장이 풀리면서 터진 울음에 몇몇 여자애들도 훌쩍거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심지어 남자 애들마저 코끝이 찡한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얼싸안는 탓에, 나는 오징어처럼 손발이 오그라 들었다.
"고생했어!"
"우린 잘 견뎠어. 잘했어 다들!"
"17학번 최고다."
‘어휴...이 순진한 놈들. 이런 단순한 어르고 달래기에 당하다니. 하긴 스무살이면 그럴지도.’
나로선 의도가 뻔히 보이는 행동에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이것이 젊은이들이만이 내보일 수 있는 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야 말로 나이답지 못한 애늙은이 일지도...
"자자. 다들 추운데 수고 많았다. 이제 강당에 가서 레크이션이나 하고 놀자. 따뜻한 코코아도 준비해 놨어."
박성수가 말에 17학번 새내기들 모두 감동에 벅찬 표정이었다. 심지어 싸가지 밥 말아 먹은 강찬혁마저 울컥하는지 콧물을 훌쩍거렸다.
‘너도 애는 애구나.’
강당으로 향하는 길에 우연히 육정음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얼차려를 받을 당시 계속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너 기합 잘 받더라?"
"나?"
"응. 다른 여자애들은 되게 힘들어 하던데, 씩씩하더라고. 멋있었어."
"그 정도야 뭐. 나 태권도 오래배웠어."
"태권도?"
"응.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뽑혔거든. 고2때."
"와, 진짜? 근데 왜 우리과를..."
"연습시합 때 발목이 돌아가서."
"아..."
국가대표를 노릴 정도였다면 평생 꿈이었을 텐데...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정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쿨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 어차피 지난 일인데, 뭘. 너 한 살 많댔지?"
"어, 재수로 왔거든. 동기니까 말 편하게 해."
"말은 편하게 해도 호칭은 제대로 붙여야지."
"응?"
"앞으로 형이라 부를 께."
"형?"
오빠도 아니고 형이라고?
"응. 난 남자들은 다 형이라고 불러. 앞으로 잘 부탁해. 도훈이형."
육정음이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 순간 그녀의 숏컷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며, 톡 튀어나온 이마가 귀엽게 모습을 드러냈다.
‘귀, 귀엽다.’
나는 그녀의 악수를 받으며 말했다.
"그래. 정음 동생. 나도 잘 부탁해."
왠지 미션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공략하고 싶어졌다.
***
"말뚝박기요?"
"그래. 왜 문제 있어?"
"아, 아니... 여자들이."
"여자? 동기 사이에 남녀가 어딨나? 니들 내외하냐?"
"아닙니다!"
"그럼 편 나누자."
실내 레크레이션의 첫 게임은 예상도 못한 말뚝박기였다.
다 큰 남녀 대학생이 섞여 하는 말뚝 박기.
"너희들 딱 16명이니까 반반 나누면 되겠다. 진 팀은 새터 끝날 때까지 설거지 당번 할 줄 알아."
"옙!!"
나는 누구보다 우렁차게 대답했다.
성수를 보며 콧잔등을 부비는 척 따봉을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씨발, 존나게 고맙다 성수야.’
내 따봉을 알아 챈 성수가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