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83화, 전염은 막았으나...
“아! 이렇게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족장님! 덕분에 숱하게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장 돌아가는 대로 상단 전체에 알려 이 포푸리 풀을 섞도록 타진하겠습니다. 물론 새어나갈 수도 있으니 어디까지나 심심한 죽의 맛을 살리기 위한 재료로 소문을 내어 일반 가정에서도 시행할 수 있도록 조처하겠습니다.”
척하면 척이었다. 그는 자신들 상단뿐 아니라 일반적인 가정에서도 포푸리 풀을 섞어서 음식을 만들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그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인 밀크는 그가 나가지 전에 잠시 불러서 다른 내용을 하나 더 이야기했다.
“가기 전에 잠시만.”
“예?”
“그 반돌프 상단의 레이나 반돌프 남작과 연락은 가능한가?”
“예 가능합니다만?”
“남작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고 도움을 요청해봐. 모르긴 몰라도 그녀 역시 포푸리 풀을 사용하여 백성들 구호에 도움을 줄 거야.”
“그렇겠지요. 제가 알고 있는 남작의 성격으로는 분명 그리 할 겁니다. 그럼 이 내용은 밀크님의 제안인 걸로 제가 알려두겠습니다.”
“그래 수고 좀 해달라고 바로 옆에 있는 렘톤 마을에 전염병이 퍼졌다가는 아무리 건강한 우리라도 장담을 할 수 없으니까. 제발 자네들이 전염병을 빨리 막아주길 바라지. 그것이 바로 우리 부족을 살리는 길이니까.”
“하하하~ 부족 때문이라고 겸손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일이 성공한다면 밀크님은 아무도 모르게 저희 첼슨 왕국의 생명을 살린 영웅이 되시는 겁니다. 이 영웅적인 행동을 알릴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쉽군요. 하지만 지나친 관심은 오히려 밀크님께 독이 될 테니 이 일은 저만 아는 것으로 조용히 마음속에 묻어 두겠습니다.”
생각이 깊은 퍼슨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그와 밀크는 해어졌다. 그 후 첼슨 왕국에서는 점차 몸이 회복되어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포푸리풀을 다량으로 채집하여 구호활동 중에 나누어주는 무료 급식인 죽에 섞어 만든 포푸리죽은 녹색으로 물들어 조금 그래 보여도 맛은 일품인 별미로 자리 잡았다.
말이 죽이지 밀가루를 사용하여 만든 수프에 가까웠지만, 이곳에서는 수프도 모두 죽으로 통하기에 그냥 죽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견 풋내가 덜 빠져 약간 씁쓸하게 느껴지는 풀이 생으로 씹히는 예도 있었지만, 이는 조리 미숙으로 생긴 일이지 그것을 제하더라도 포푸리 죽의 맛은 생각보다 괜찮아서 얼마 후 첼슨 왕국 전역에서는 포푸리를 채집하여 죽을 끓여 먹는 광경이 펼쳐졌다.
살아가기 위해 먹어야 하는 밀가루죽에 포푸리가 들어가니 옅은 단맛이 풍기는 별미가 된다는 소문에 너도나도 포푸리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본디 포푸리는 어디서나 잘 자라는 잡초와도 같은 풀이라 산에, 또는 들에 나가보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고 만들기 전에 물에 잘 씻어 흙을 털어낸 뒤 조리할 때 푹 익혀 풋내만 빠지면 조리가 끝나니 죽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포푸리 풀의 효능을 보고 내장 기관이 치료되고 보호되어 전염병에 시달리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으며 이미 전염병에 걸린 이들은 이후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왕족과 귀족들이 민생에 관심이 없는 이때 에스타 상단과 반돌프 상단은 본의 아니게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전염병을 다스리게 된 것이었다.
또 한 밀크의 걱정과는 달리 마법사나 신관들에게서의 견제는 들어오지 않았다. 반돌프 상단도 그렇고 에스타 상단 역시 그들이 건드리기 껄끄러웠을 뿐만 아니라 이미 나라로부터 구휼을 하라는 명까지 받았기에 건드릴 부분이 없던 것이다.
애당초 신관들은 포푸리 풀의 효능은 전혀 모르고 그저 배고픈 천민들이 돼지들이나 먹을법한 음식을 만들었다고 치부했으며 마법사들의 경우는 포푸리 풀의 효능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조리하여 사용한다고 큰 효과를 볼 것이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운이 좋아서 여름에 기승을 부리던 전염병이 빠르게 호전되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특히나 신관들은 노골적으로 행동을 하며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신의 보살핌이라며 사람들을 혹세무민하여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려는 극악무도한 모습까지보였다.
결국, 백성들의 민심을 모으는 것에는 성공한 상단이었지만, 이로 인하여 금전적인 타격은 어쩔 수가 없었고 나라에서는 보상으로 아주 조그마한 성의를 보일 뿐이었다. 가장 큰 이득을 본 곳은혹세무민으로 사람들을 속인 신관들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왕권을 위한 다툼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더욱 심한 모략과 크고 작은 다툼이 이어지며 더욱 심화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신료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가진바 힘이 약한 3 왕자와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귀족들의 힘이 전혀 더해지지 않아서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4 왕자는 절충하여 3 왕자가 왕위에 앉은 후 4 왕자에게 병권과 함께 부왕의 자리를 맡기겠다는 합의를 보며 세력을 규합했다.
이는 1 왕자와 2 왕자에게는 거대한 하나의 세력이 적으로 등장하게 된 일이었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리를 보전한 버밀리온 첼른 국왕이 일구어온 첼슨 왕국은 3 세력이 어지럽게 싸우는 각축장이 되어갔다.
충성스러운 이들은 작금의 상황을 좋지 않게 보고 어서 빨리 국왕이 완쾌되기만을 기다렸고 기회를 아는 자들은 각 왕자에게 붙어서 다음 대 국왕이 될 그들에게 아첨하며 이후에 주어질 거대한 포상을 받기 위한 도박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원치 않는 불씨는 밀크의 부족에게도 조금씩 영향을 가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세금이었다.
“뭐라? 지금 뭐가 어쩌고 어쨌다고?!”
“홀스타우로스의 젖을 유통하는 일에 막대한 세금이 부과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마다 검문이 강화되어 상단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마을을 찾아온 퍼슨이 알려온 내용. 겨우겨우 백성들을 전염병과 배고픔에서 구호한 에스타 상단을 향해 노골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저의 에스타 상단은 원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그저 이문을 취하는 것에만 중점을 둔 개인 상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단주님은 어딘가 귀족과 연줄이라도 만드는 날 상단의 모든 것이 휘둘리게 될 것이라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하였으며 필요 이상의 뇌물을 사용하지 않고 정 필요하다면 나라에 후원금을 받친다는 명목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버밀리온 국왕의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돌기 시작하면서 끈 떨어진 연 신세가돼버린 겁니다. 각 왕자 파가 노골적으로 자신들을 따르라 사람을 보내왔고 상단주님이 이를 모두 거절하자 보복이 시작된 겁니다.”
“하…. 그래서 지금 홀스타우로스 젖으로 벌어들이는 이문이 어떻게 되는데?”
“세금을 제하고 100L 당 80골드의 이문을 남기던 홀스타우로스 젖이100L 40골드의 이문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문이 반 토막 나버렸어요.”
즉 원래는 100L에 100골드에 판매되던 홀스타우로스 젖에 세금이 20골드 붙었는데 이것이 세배나 불어 세금이 무려 60골드가되었다는 뜻이었다.
“세금이 세배 뛰었다고? 하…. 이문보다 세금이 높다니 제정신들이 아니로군.”
“상단을 쥐어짜도 후에 충분히 갈아엎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벌이는 일일 겁니다. 작금의 누워있는 국왕이 아닌 새로운 국왕이 등극한 뒤에는자기들 입맛대로 정국을 마음껏 차려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때가 되면 저희를 노린 공격이 더 극심하게 변할 수도 있습니다.”
에스타 상단이 피해를 보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밀크에게도 이어지게 된다. 홀스타우로스 젖을 판 대금으로 받을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품들이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아직은 당장에 젖의 가격이 반 토막 나는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퍼슨의 말대로 좀 더 집중적인공격을 받아 부과되는 세금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무시 못 할 문제로 다가올 테니 말이다.
“미치겠군…. 방책은 없나?”
“죄송합니다. 저희 상단에서도 지금 다방면으로 방책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다른 나라에 젖을 파는 것은 어때?”
“홀스타우로스 젖을 다른 나라에 파는 것은 금전적으로 오히려 손해입니다. 마법적 처리가 된 항아리에 마나 충전을 위한 마법사가 다른 나라까지 같이 파견을 나가야 하는데 그 파견 비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겨울이라면 모를까 이런 여름의 펄펄 끓는 온도에 젖을 그냥 옮겼다가는 모조리 상해 버릴 겁니다.”
숙성과 부패는 다른 것이다. 젖을 시원한 곳에서 오래 숙성시켜 술을 만들 수 있다곤 하지만, 더운 여름날에는 조금만 잘못 관리해도 바로 상해서 먹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음…. 뭔가 방법이 없으려나….”
“족장님”
퍼슨과 밀크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잠겨 있을 때 밖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을 지키고 있는 벨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반돌프상단장인 레이나 반돌프 남작이라고 합니다.”
“레이나가? 어서 이리로 모셔라.”
“예 족장님.”
벨의 목소리를 끝으로 잠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족장의 이 방문이 열리며 예의 온몸을블랙볼 광석으로 만든 검은 갑옷으로 무장한 여인이 들어와 밀크의 앞에서 공손하게 읍을 하였다.
“반돌프 상단장 레이나 반돌프가 족장님을 뵈어요.”
“레이나! 정말 오래간만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밀크는 레이나의 양쪽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워준 후 의자를 가져와 그곳을 권하여 앉으라 권했다.
그런 뒤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물리고는 퍼슨과 레이나만 따로 두었다. 세 사람만 남아 있자 밀크는 편하게 레이나를 대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뿐이니까 이제 편하게 이야기하자고. 보아하니 레이나 너도 작금의 상황 때문에 온 거 같으니까.”
“역시, 여기 있는 퍼슨 대행수님도 같은 일을 겪고 있는 거로구나?”
“홀스타우로스 젖에 큰 세금이 붇고 있어 너희는 어때?”
“우리도 마찬가지야. 밀크에게 사 오고 있는 데빌베어 가죽에 세금이 늘어났어. 그 때문에 이번에 에스타 상단과 거래한 물품 대부분이 거의 이득을 보지 못했지. 솔직히 말하면 적자나 마찬가지야.”
“아니…. 같은 나라의 귀족에게까지 그런 행동을 하다니 왕권 다툼이 얼마나 심해지고 있는 거야?”
“우리 아버지는 아인 멸시 사상이 있긴 하여도 나라에 바치는 충성심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분이거든 그래서 그 어떤 곳에도 몸담지 않아서 그 화가 나에게 미치는 중인 거지.”
“아니 그게 무슨….”
“아버지랑 동생이 이끄는 반돌트 백작 상회는 손대기 버겁지만, 여식에 불과한 내가 이끄는 남작 상회는 건드리기 편했던 거지. 이렇게 하면 고지식한 우리 아버지도 결국에는 포기하고 왕자파에 가담할 거로 생각한 걸 거야. 참고로내 상회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1왕자파야.”
“아가씨도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희 에스타 상단을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2 왕자파입니다. 이번 일은 2 왕자 파의 일부 귀족들이 행한 일이라고 하더군요. 2 왕자는 품성이 바른 편이니 아마 그분 모르게 진행된 일일 겁니다. 하하하…. 이렇게 보니 서로 짜고 치는 장난질 같군요.”
입은 웃고 있지만, 퍼슨의 손을 꽉 쥐어져 있었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여간 분노한 것이 아닌 거 같았다.
“이미 버린 자식인데 설마 내 상단을 흔든다고 아버지가 눈 하나 깜짝하리라 생각하다니…. 생각 이상으로 1 왕자파는 무능한 인사들만 모인 모양이야. 이렇게 정보가 부족해서야 어디에 쓰겠어?”
당장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레이나는 오히려 1왕자파의 행동이 경솔하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불쌍히 여겼다. 다만 그녀 역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분노를 보기에 이번 사태 때문에 오히려 1 왕자파에 넌더리가 난 듯했다.
“덕분에 우리 부족은 거래하는 두 상단이 보는 피해를 고스란히 같이 받게 되었군…. 생각 같아서는 거래고 뭐고 다 끊어 버리고 그냥 이주라도 하고 싶은데 벌려 놓은 것이 이렇게 많으니 그것도 여의치가 않네.”
지금까지 이루어온 밀크의 부족 마을, 인간들의 문명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과거 자신이 했던 막노동의 지식을 되살려 석제 건축물까지 만들기에 이르렀다. 다른 건 몰라도 그는 한때 건설업에 종사하며 소장이라는 직책에까지 올라가 본 적이 있었다. 가진바 지식이 얄팍하긴 했어도 자신이 종사하던 일에 대해서는 천부적인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정말 운이 좋지 않고 세상의 쓴 물이란 쓴 물을 다 마셨다 할 정도로 그에게 주어진 삶이 팍팍하여 이제 막 피어볼 찰나에 져버리고 만 비운의 꽃이었기에 그의 건설업 지식은 미처 세상에 빛을 보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지금 이 새로운 세상에서 그를 통하여 세로 이 다져지는 중이었다. 부족한 부분은 자신의 대장장이 기술을 이용하여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재료도 풍부하여 오히려 과거보다 더대단한 건축물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는 밀크의 마을, 아니 도시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기 위해 고민을 하던 밀크에게 썬더버드의 부리, 그리고 미노타우로스의 빠진 뿔과 다른 부족과 연계를 하며 받은 소재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