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그래도 책임은 지니까 괜찮죠 아버님?
* * *
"많이 들어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일반 가정용 식탁에 아무리 가득 차려봤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메인 디쉬가 아무리 많아 봤자 다섯 개를 넘지 못하고 나머지는 반찬 느낌으로 채우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하지만 일반 가정용이 아니라면?
만화에서나 볼 법한 파티홀 식탁에 음식이 쫙 깔려 있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심한데 이건.'
복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도 음식이 너무 과했다.
오랜만에 온 손님이어서 힘을 좀 썼다는 말도 그냥 하는 말 정도로 생각했다.
근데 장소를 옮기자면서 제대로 차려 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뭔가 이상하단 걸 감지했다.
그저 손님 한 명 초대하는데 이렇게 사용인을 많이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일반 손님이 아니긴 하네.'
새삼 내 위치가 다시금 자각 됐다.
굵직한 사건을 인명 피해 없이 말끔히 클리어한 1학년의 생도.
최영남 회장이 보장하며 이민준 헌터가 지지하는 인물.
그게 바로 나였다.
기자들이 날 부를 때 '생도'가 아닌 '헌터'라고 불릴 때 감을 잡았어야 했다.
멜라니가 늘 말하던 각성자의 자격이라는 게 이걸 말하는 걸 테지.
'일반 대접 받을 위치가 아니라는 거구나.'
일반 대접을 넘어서 늘 이런 대접을 받는 거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몰랐다.
물론 오늘같은 경우는 수진이가 힘을 써서 이렇게 화려하게 음식이 차려진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푸대접을 받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오늘부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누나 제가 랍스타 살 발라드릴까요?"
"어...? 아... 그래줄래...?"
수진이는 내 옆에 다소곳 앉아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자리 배치 때문일 텐데, 수진이와 나는 나란히 앉아 있었고 수진이의 부모님은 맞은편에 앉았다.
어떻게 보면 상견례처럼 보일 수도 있는 위치여서 무의식적으로 긴장한 듯 보였다.
수진이는 하얀색 플라워 패턴의 레이스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차분하게 내린 검은 생머리와 블라우스와 청치마의 조화는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부끄러워할 때마다 치맛자락이 움직이면서 허벅지 안쪽을 보여주곤 했는데.
아마 부모님만 없었다면 당장 손을 뻗었을지도 몰랐다.
"우리 수진이는 알아서 랍스타 잘 발라먹는다만 백태양 헌터 그보다…"
"여보?"
"아빠?"
"…랍스타가 오늘따라 좀... 안 발라지긴 하는군... 여보도 내가 발라줄게요."
"고마워요."
대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수진을 챙겨 주면 수진이는 배시시 웃으며 작게 미소를 짓는다.
그걸 본 유민혁이 반응하고 그의 아내와 수진이가 항상 브레이크를 건다.
이렇게 정겹게 식사하고 있는 풍경을 보더라면 나도…
'나도 뭐지?'
어떤 기억을 꺼내려고 했고 무슨 풍경을 떠올리려고 했지?
정겨운 다음에 어떤 반응하면서 분명 생각해내야 하는 게 있었는데.
아무것도 연상 되지 않았다.
맑은 강가를 바라보자 나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머리가 하얗게 물들고 '나'를 제외한 모든 기억이 불투명한 색으로 덧칠 된다.
"태양아 괜찮아?"
"네? 아... 네 괜찮아요. 너무 맛있어서 감동 했나 봐요."
"진짜? 헤헤... 이거 내가 한 건데..."
지금 식사하는 이 순간이 굉장히 멀게 느껴진다.
불투명하던 기억을 천천히 곱씹어가며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나는 이태옥이고... 가족이 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단 한 번도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 언행도 '이태옥'의 초점에 맞춰진 게 아닌 '백태양'을 중점에 두고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S급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오히려 활자 조합물로 이루어진 생명체들이 죽든 말든 신경을 쓰지 말자라는 주의였다.
근데 원더랜드에선 자연스럽게 인명 피해를 생각했다.
'기억이 섞이는 건가?'
백태양의 기억 속에 가족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설정하지 않은 걸 수도 있었고 고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태옥'의 가족 관계까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누나 진짜 요리 잘하네요. 이건 뭐예요?"
"아 그건 고추장 닭날개 조림인데 바질을 곁들인…"
최대한 말을 안 하고 대답만 하는 쪽으로 대화를 유도 한다.
얼굴은 과하지 않게,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고를 가속한다.
속으로 들어온 지 한 달이 될까말까 한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벌써 기억이 섞이면서 지구에서의 일들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빙의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클리셰 중 하나였지만 그게 나한테 일어날 줄이야.
'일기라도 써서 기록을 해야 하나...'
이걸 알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NTL 퀘스트를 깨서 그다음 단서라도 찾아야 진전이 있으리라.
근데 그동안 소설 속에 완전히 섞여서 등장인물로서의 사고를 갖춘다면?
정말로 여기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빠져나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와 이거 소고기 너무 맛있다... 부위가 뭐예요?"
"어머나 백태양 헌터가 입맛이 되게 고급지네. 바로 알아보는 거 보니까. 이건 '송하나'라는 브랜드의 안창살이예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편하게 어머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네 어머님."
"그래요 사위, 많이 먹어요."
"여보!"
"엄마!"
부드럽게 주제를 돌리면서 대화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에 모두 충격 어린 얼굴로 어머님을 바라봤다.
어머님은 오히려 굉장히 당당한 얼굴로 '어차피 그렇게 될 거잖아, 아냐? 아니냐고'하는 눈빛으로 모두와 눈을 맞췄다.
유민혁조차 반박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수진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큰일 났네'
굉장히 난해한 상황에 봉착했다.
여기서 대놓고 거절하면 분위기가 이상하게 꼬인다.
그렇다고 좋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면 갑자기 공식적으로 사귀는 사이가 될 수도 있다.
어제 계산한 바로 당장 관계를 가져야 할 여자의 총 합이 일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코를 꿰이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바.
중도를 걸으면서도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대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보통이 아니다.'
유민혁의 식사 초대는 단순한 미끼였을 지도 모른다.
최종 흑막이 따로 있었을 줄이야.
침묵이 길어지면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아직 저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이게 최선의 대답이라고 생각하기엔 어려웠다.
근데 당장 생각나는 게 이거 하나뿐이었다.
자신을 낮추면서 수진이를 올려주고 겸손하다는 걸 은연중에 알린다.
또한 관계를 거절하지는 않지만 현재는 불가능하다고 돌려서 전하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호호 진지하게 안 받아도 돼요, 그냥 장난 쳐본 거니까."
"아니 당신은 무슨 그런 장난을 쳐, 백태양 헌터 놀라게."
"내 말이... 그냥 단순히 밥 먹는 자리에서 왜 애한테 부담을 줘..."
유민혁은 또 무슨 말이 터질 지 몰라서 수시로 아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수진이는 내가 기분이 상한 지 확인하기 위해서 날 힐끔힐끔 쳐다 봤다.
나는 수진이의 어머님과 눈을 맞추고 있었는데, 절대로 저 눈은 장난기를 담은 눈이 아니었다.
'빈틈을 보이면 코가 꿰인다.'
맹금류의 눈빛보다 날카로운 눈빛이 날 꿰뚫으려 하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어쩌구에 혼란스러워할 때가 아니었다.
"저도 이런 장난 좋아합니다 어머님. 괜찮습니다. 하하하"
"호호호!"
"하하하!"
식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는 분위기였다.
이리저리 떠드는 사이에 음식도 빠르게 줄고 있었고, 처음 만난 자리여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이유가 컸다.
대뜸 호구조사를 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확실히 아내와 딸이 참 요리를 잘해. 안 그런가?"
"네 정말로 행복하실 것 같습니다."
"맞아, 정말로 행복하네. 그래서 딸이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유민혁은 '남자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다.'라는 말로 날 서재로 끌고 올라갔다.
서재는 5층 전체를 차지할 만큼 굉장히 크고 넓었다.
책만 있는 게 아니라 헌터들이 애용하는 무구라던지 장비들도 즐비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남자 둘이 커피를 마시고 마주 보는 상황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우리 딸은…"
교과서적인 아버지의 대사가 이어졌다.
이게 나에겐 두 번째 고비였다.
러브코미디식으로 봤을 때 보통 여기서 유민혁의 이야기가 끝나면 나는 감동을 받고 있어야 했다.
부성애를 진하게 전달하면서 남자와 남자의 대화로 여자를 책임지는 스토리!
그런 걸 유민혁은 바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니 난 안 된다니까.'
챙겨야 될 여자들이 너무 많았다.
곧 있으면 상시 발동형 능력자들만 모이는 정기 소집일도 가까워진다.
그때 혹시라도 김민수의 히로인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언제든지 새로운 여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순애맹세 같은걸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신 다 책임은 질 수 있어.'
광란의 섹스 파티를 하더라도 거뜬하게 모두를 보내버릴 수 있는 신체를 가졌다.
안뚱땡이 만든 세계관인 만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렘으로 엔딩을 낼 수 있는 장치가 있을 터였다.
'그 뚱뚱한 놈이 분양을 생각할 리가 없어.'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주인공을 김민수로 만들지도 않았을 거다.
자기랑 비슷한 성격을 만들어놓고 대리만족을 하려는 음습한 욕망이 가득할 텐데.
갑자기 메인 히로인 하나만 챙기는 엔딩을 계획할 리는 없었다.
'다 책임지고 엔딩 본 다음에 이 소설을 뜬다.'
다시금 다짐하며 진지한 눈빛으로 유민혁을 바라봤다.
슬슬 말도 끝나고 있었고 이런 표정을 해야 말에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진한 눈매에 힘이 들어가니까 유민혁도 움찔할 정도였다.
"…해서 내 딸을 잘 부탁하네."
"부족하지만 제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유민혁의 최선과 내 최선은 아마 매우 다를 테지.
하지만 결말이 행복하다면 상관없는 거 아닐까?
"아빠! 언제까지 태양이 잡고 있을 거야 진짜로."
대화가 꽤 오래 걸렸는지 수진이는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기다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날 데리러 온 거였다.
"이야기 다 끝났다, 나랑 한 약속 잊지 말도록 백태양 헌터."
"네 감사합니다 아버님."
"태양아 내 방으로 가자."
"좋아요 누나."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내 결말과 유민혁의 결말은 다를 테니까.
'근데 뭐?'
그래도 책임은 지니까 괜찮죠 아버님?
"누나 오늘 되게 예뻐요, 미리 말 못 해서 미안 해요."
"아냐 괜찮아 우리 부모님이 너무... 막 그래서 부담스러웠지?"
"부담은요, 다 관심이고 잘되라고 해주시는 말씀이신데요 뭘. 좋았어요."
"다행이다아...."
수진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날 방으로 안내했다.
하얀색 양말 속에 발가락이 꼼질거리는 게 너무 귀여웠다.
진한 미소를 지으며 수진이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넓은 저택에서 단둘만 있는 방으로 간다니.
이건 어쩔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