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따먹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
* * *
"아빠는 무슨 애 부담 되게 그런 말을 해..."
유민혁은 지금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겪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으며 평생 남의 일이라고 믿었던 이야기.
"얼마나 부담이 되겠어! 진짜 미워!"
딸들이 자기 말을 무시한다며 고민을 털어놓던 아빠들의 모임, '파파더'
거기서 유민혁은 절대적인 존재였었다.
빅토리 아카데미 선도부 딸이 있음과 동시에 자신에게 사춘기를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딸.
애정 표현도 잘해주고 말도 자주 걸어 준다.
심지어 고민 상담도 할 정도로 친근감이 있는 부녀 관계까지!
유민혁은 파파더에서 신이었다.
"태양이가 나 미워하면 어떡해...?"
근데 지금 그 절대적인 위치가 한순간의 실수로 무너져 버렸다.
이젠 다른 아빠들처럼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한숨을 내뱉는 신세로 전락되리라.
수진이의 삐진 얼굴을 살면서 처음 마주했다.
도저히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바닥을 응시했다.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걸 딸에게 말했다.
당연히 칭찬을 받을 줄 알고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는데, 날 맞이한 건 참혹한 현실이었다.
심지어 아내도 은근히 딸의 편에서 자신을 질타하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초대해서 뭘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치까지 준다.
'어차피 오래 안 가겠지.'
유민혁은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변화는 항상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 마련이니까.
지금도 단지 초대의 좋은 방향을 이끌어내기 위한 반발력이겠지.
수많은 죽을 고비가 닥쳐왔을 때도 항상 최선의 방법으로 해결했던 나다.
가족의 눈치와 분노는 자연스럽게 흘러 넘기면서 얼마든지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넘길 수 있다.
유민혁은 자신감이 가득 찬 표정으로 상황을 마주했다.
하루, 아직 아내와 딸이 화가 나 있었다.
이틀, 아침밥이 밥과 깍두기 뿐이다.
사흘, 따듯한 아침밥은 좋지만 컵라면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
뭔가 상황이 잘못 되고 있었다.
내일이 되면 이 대접이 끝날 건 확신했다.
손님이 오는 마당에 찬밥 신세를 계속 지속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백태양이 가고 난 다음에도 이 상황이 이어진다면?
어쩌면 파파더 모임에서 꼴찌가 될 정도로 신세가 추락하는 거 아닐까.
'...그것만은 막아야 된다.'
여태까지 놀린 업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매일매일 칠첩 반상을 먹기가 힘들다며 기만질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추락한 모습을 알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방법은 단 하나.
여보세요?
"나다 백태양 헌터, 잘 지냈나?
그럼요, 유민혁 헌터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상황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백태양과 통화를 한다는 걸 큰 소리로 말한 뒤 베란다로 걸어 나갔다.
베란다 문을 닫으면 통화 소리가 안쪽까지 흘러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냅뒀다.
각성자의 발달된 청력이라면 방 안에 있어도 통화 내용이 다 들릴 터.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스피커폰 모드까지 켜놨다.
"평소에... 수진이를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하길래 내가 초대를 제안 했었지."
네?
한 번도 손발을 맞춰 보지 않았지만 유민혁은 백태양을 믿었다.
백태양이 보여 준 인터뷰 실력과 처세 그리고 사회성이라면 분명 통할 거로 생각했다.
원래라면 백태양이 무슨 짓을 해도 좋게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니 물 흐르듯 백태양을 인정하게 된 유민혁이었다.
"저번에 그랬잖나, 꼭! 우리 집에서 밥을 먹고 싶다고 말이야."
아...아아...! 아아... 맞습니다. 그랬죠... 제가 꼭! 따님과 식사 자리를 가지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 드렸었죠.
"하하 맞네... 그래서 말이야..."
유민혁은 여기까지만 말을 내뱉고 스피커 모드를 종료 시켰다.
많은 대화를 들려줄 필요는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몇 마디를 나눈 것만으로도 딸을 만족 시키기엔 충분할 테니까.
'...태양이가 날?'
실제로 유수진은 모든 통화 내용을 엿듣고 있었다.
발달된 각성자의 신체 능력은 벽 너머 통화 소리 듣는 것쯤은 가볍게 수행할 수 있게 해준다.
'나랑 태양이는 같은 마음이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아빠한테 뭐라고 한 자신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무턱대고 식사 자리에 초대한 건 줄 알았는데 저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수진은 침대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내일 뭘 입을 지 더욱 자세히 고민했다.
"...너무 꾸몄다는 느낌을 주기는 싫은데..."
자연스러우면서도 풋풋한 첫사랑 누나 느낌을 주고 싶었다.
봄향기를 흩날리면서 정신을 차리게 되면 남자가 저절로 품에 들어오는……
'꺅! 미쳤나 봐.'
물론 태양이와 살을 몇 번이고 섞었기에 이 정도로 반응하는 건 이상한 게 맞았다.
그러나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호텔에서 씻겨달라는 말을 무슨 용기로 했는 지가 의문이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끼리끼리 논다고 수진의 주변엔 다 수진과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밖에 없었다.
남자랑 대화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꾸며본 적이 별로 없는 친구들.
지금 만큼은 그런 친구들이 아주 조금, 정말로 조금 원망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뷰티쪽으로 관련된 인플루언서 영상을 챙겨볼 걸.
후회가 됐다.
'...날 얼마나 보고 싶어 했을까.'
당장 메시지를 보내서 물어보고 싶었다.
마음이 콩닥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일 만날 순간을 위해 수면 팩도 하고, 욕조에 입욕제까지 풀어서 은은하게 살냄새도 풍기게 했다.
이대로 잠을 자면 완벽할 텐데.
날 보고 싶어서 몰래 부탁했다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들으니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내일 몰래 물어봐야지...'
메시지로 물어보면 모든 흔적이 화면에 그대로 남기 때문에 절대 불가능했다.
순간을 위한 말을 혀 위에 올려서 잠깐이라도 만족하면 충분했다.
'일단 자자!'
아무리 많은 생각해봤자 자는 게 최우선이었다.
컨디션 관리를 실패해서 다크서클이 생긴 얼굴을 태양이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보고 싶어.'
속으로 짧게 소망을 빌며 눈을 감았다.
얼른 내일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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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쪽에서 본 손해가 얼마인지 아시나요? 기자들 입도 막고 인터넷에 뿌려진 영상도 수습하느라고 엄청 힘들었어요. 근데 당신은 어떻게 저한테 연락 한 통이 없나요? 이러려고 부탁을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한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나도 진짜 바빠서 그랬어, 연락할 겨를이 없었다니까. 솔직히 멜라니 너도 내가 그렇게까지 염치 없는 놈으로 보이지는 않잖아."
아침부터 핸드폰으로 농축된 분노가 날라왔다.
어제 연락하지 않고 왜 오늘 했나 싶었더니, 엄청 바빠서 그런 거였다.
김민수의 절규와 관련된 영상들을 하나하나 다 삭제하거나 내리는 데 많은 수고를 들였겠지.
그래서 별 말없이 분노를 가만히 받아줬다.
솔직히 잘못한 건 전적으로 내 말이 맞으니까.
물론 운전 중이어서 제대로 대답을 못 하는 이유도 한몫 하긴 했다.
신무기 테스트 한 번으로 안 끝날 줄 알아요. 짐작하고 계셨죠?
"그럼 당연하지, 나 진짜 그렇게 염치 없는 놈 아니라니까? 큰 수고를 해줬다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멜라니가 무능해서 김민수의 치욕스러운 행동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주인공 입지를 다 뺏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행동이 위축될 텐데.
'그건 안뚱땡이 있어서 불가능하려나.'
놈이 김민수를 얼마나 아끼는 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일부러 처녀서큐버스까지 준비해서 자지를 대물로 만들 빌드업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아마도 부족한 점을 하나하나 퀘스트를 해결해 나가면서 채워줄 생각이었겠지.
당신 근데 설마 또 로시난테로 운전하는 거 아니죠? 엔진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네요.
"맞아, 내 차가 로시난테 말고 뭐가 있다고."
전 제발 당신이 각성자로서의 자격을 갖췄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은 이걸 훨씬 좋아해."
멜라니의 말도 일리가 있긴 했다.
근데 지금 여론은 전적으로 내 편이었다.
인지도가 부족한 민수가 길거리에서 울었기 때문에 놀림감이 된 거지, 내가 울었다면 모두가 걱정을 했을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상황은 실시간으로 변하기 마련이니까.
아무튼! 조건을 다시 조정해요, 지금 당장!
"내가 지금은 좀 바뻐, 알아서 조율하고 나한테 말해 줘. 너무 심한 것만 아니면 수락할게."
지금, 이것보다 바쁜 게 어디 있……
"걱정해 줘서 고마워, 다음엔 내가 연락할게, 끊을게."
통화를 더 하고 싶었지만 코 앞이 바로 수진이네 집 앞이었다.
주소를 찍어 준 대로 왔는데, 상상 이상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확실히 1급 헌터는 1급 헌터네...'
수진이가 기숙사로 통학하지 않는 이유가 다 있었다.
오층 짜리 단독 주택에 정원까지 딸려 있는 집이 있는데 왜 기숙사에 살겠는가.
유민혁에 대해 잠깐만 검색해 봐도 그의 업적이 5페이지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실적이 전부인 헌터의 세계에서 어마어마한 입지도를 가졌단 소리였다.
그 말은 즉 부유하단 말이었고, 어찌 보면 눈앞의 결과는 너무 당연하였다.
'백화점 게이트 아니었으면 주눅 좀 들었겠는데.'
로시난테를 역 소환 시키고 정문의 벨을 눌렀다.
삐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문이 곧바로 열렸다.
치안이 걱정 됐지만 곧바로 생각이 바뀌었다.
누가 각성자 집안을 습격하겠는가.
지능이 아무리 부족해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알고 있을 거다.
"안녕하세요."
대문을 지나 현관문에 노크하며 입을 열었다.
문 안에서 잠깐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이내 벌컥하며 문이 열렸다.
"왔나. 백태양 헌터."
"안녕하세요, 아버님."
"...갑자기 너무 거리를 좁히는군, 늘 부르던 대로 부르게."
솔직히 유민혁이 환영을 해주진 않아도 예민하게 반응은 안 할 줄 알았다.
'내가 어제 그렇게 훌륭한 임기응변까지 해줬는데...'
분명 어제 통화를 했을 땐 짝짝궁이 잘 맞아서 친해진 줄 알았다.
분위기도 좋았고, 원하지 않은 연극까지 해줬으니까 나한테 잘해주는 게 맞지 않나?
문을 연 유민혁은 과거의 일은 모두 잊어 버린 듯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초대 해 놓고 이런 취급을 하다니, 정말로 억울했다.
'따먹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
물론 꽤 급진적인 면이 없지는 않았다.
상황을 이용했다기보다는 스킬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부분도 인정했다.
하지만 사후처리가 아주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데이트도 하고 그 이후엔 스킬을 쓰지 않고도 즐겁게 살까지 섞었다.
이 정도면 상호합의 하에 이뤄진 깔끔한 관계지 않은가.
"아빠! 왜 그래 대체!"
앙증맞은 목소리가 굵은 유민혁을 바로 흩어지게 만든다.
아기자기한 별구름들이 뭉친 듯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단번에 바꿔 버린다.
"태양아왔어?"
"네 누나, 보고 싶었어요."
"지...진짜? 헤헤..."
수진이가 발그레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띄자마자 거친 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콰직.
유민혁이 잡은 문고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압축 됐다.
'이거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면 안 되겠는데.'
차라리 S급 게이트에 들어가는 게 더 마음은 편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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