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니여친쩔더라-17화 (17/325)

〈 17화 〉 수진이와 데이트(2)

* * *

유민혁의 휴일은 아주 간단하다.

가족과 보내기! 언제든지 죽어서 가족의 곁을 떠날 수 있는 직업인 지라 휴무가 아주 소중했다.

오늘은 아쉽게도 딸이 외출을 한다고 하지만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저녁은 양고기 스테이크로 해볼까, 단란한 가족 식사를 상상하며 민혁은 딸의 방문을 활짝 열었다.

"울 딸램~ 오늘 저녁 먹고 들어와~?"

마침 수진이 원피스를 찾아서 들어 올린 순간과 민혁이 방에 들어온 순간이 딱 겹쳤다.

민혁은 학창 시절 때 잘 나갔던 남학생으로 숱한 연애 경험과 재빠른 눈치를 가지고 있었다.

수진은 평소엔 약속이 있어서 나간다고 했을 때 깔끔한 옷을 선호했다.

캐쥬얼룩을 주로 입기에 외출은 보통 청바지에 후드티 정도가 끝이었는데, 오늘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 아빠! 나가 빨리! 아니 왜 노크도 안 하고 들어와!"

노크하고 들어오면 가족끼리 과하게 조심한다며 타박을 했던 딸이다.

근데 지금은? 나가라고 소리를 친다.

수상함을 넘은 확신이 민혁의 머리에 박혔다.

'내 딸이 오늘 만나는 건, 친구가 아닌 남자다.'

남자사람친구? 평생을 살면서 그런 건 들어 본 적이 없다.

남녀 관계는 둘 중 한 명이라도 마음이 있어야 연락이 이어진다.

남자는 전부 늑대가 맞았다.

자신도 그렇게 해서 결혼에 골인 했는데, 정말로 순수하게 우정만 가지고 만남을 이어간다?

웃기지 말라지.

"딸램... 오늘은 화장도 좀... 했네?"

남들이 보면 꼰대다 뭐다 할 수 있었다.

허나 한 번도 하지 않던 행동을 갑자기 몰아서 하는 자식을 보며 누가 관심을 두지 않을까?

민혁은 이 대화가 끊기는 순간 더 이상 자기 딸을 만나는 놈팽이의 정보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 그냥 좀 한 거지 뭘..., 근데 그... 어때? 괜찮아?"

"당연히 예쁘지 우리 딸램이 한 건데..."

"그, 그래? 풋풋한 첫사랑 느낌이 좀 나?"

"풋풋한 첫사랑...?"

그때 수진은 말실수했다는 표정으로 급하게 유민혁을 밀어냈다.

민혁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풋풋한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울려댔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걸까?

쫓겨난 민혁은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슬쩍 딸의 방을 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달칵 소리도 난 걸 보면 잠겨 있기까지 한 거겠지.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방심한 것일까.

충격이 말이 아니었다.

'...우리 딸램이 행복하다면 오케이...'

하지만, 만약에 우리 딸과 데이트하는 놈이 쓰레기라면?

이 여자 저 여자 다 후리고 다니는 망나니라면?

그땐 자비 없이 움직일 생각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잘못된 선택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걸 바로잡아 주는 일은 부모의 몫이었다.

'조만간 한 번 학교에 가야겠군'

S급 던전 17회 클리어 , 백두산 게이트 웨이브 단독 돌파, 1급 중의 1급 헌터, 유민혁의 다짐이었다.

+++++++++++

'첫 데이트...'

운명 같은 만남은 아니었다.

만난 지 하루 만에 몸을 섞었지만 가벼운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쁜 애도 아니고...'

첫인상이 불량스러워서 그렇지 관계를 하고 난 뒤 부드러운 모습을 많이 보여줬었다.

하지만 얼굴값을 하는 건지 전학 온 날부터 예쁜 여자애랑 식당을 가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래도 걘 딱 봐도 남자 친구 있어 보였는 걸'

여자애 옆에 딱 붙어 있고 싶어서 안달 난 더벅머리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나도 저런 눈을 하고 있을까, 애정을 담고 있는 눈이란 뭔지 너무 잘 알려 줬었다.

나도 널 보면서 그런 눈을 했을까? 수진은 모든 게 처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연애하고 섹스한다던데.

순서가 바뀐 건 알고 있었지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거였으니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며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오늘은 뭘 입어야 하냐 그게 제일 중요했다.

'남자들은 뭘 입어야 좋아할까...'

끼리끼리 논다고 친구들도 연애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게 괜히 원망스러웠다.

나는 안 해도 니들은 좀 하지! 심지어 친구 중엔 맨날 남친 급구 소리를 내뱉는 녀석도 있었다.

근데 결과는? 가장 먼저 첫 경험을 한 것도, 데이트하는 것도 다 수진이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게 딱 이 경우였다.

'원피스? 원피스 좋아하겠지?'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되도록 청순가련한 느낌을 주면 좋아한다고 했다.

옷장을 뒤적거린다. 하늘하늘한 옷이 분명 있었을 텐데, 아빠가 들어왔다.

잠깐 소란이 생겼지만 얻은 건 분명하게 있었다.

아빠의 표정을 보니 무조건이었다.

'풋풋한 첫사랑 느낌!'

이대로만 가면 태양이는 바로 넘어올 게 분명했다.

빅토리 아카데미 근처에서 노는 거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고 싶어도 생길 수가 없었다.

치안률 100%를 자랑하는 최강의 지역인데, 무슨 변수가 생기겠는가?

'그렇게 생각 했는데, 역시 쉽지가 않네.'

데이트하는 장소에 게이트가 열리는 건 반칙이었다.

특별한 징조도 없이 허공이 갈라지고 고블린이 비처럼 떨어진다.

수는 열셋, 바로 게이트가 사라지는 것도 특이했다.

게이트가 붕괴하면 게이트는 보통 그대로 남아 있다.

근데 지금은 무슨 보따리 마냥 몬스터를 풀고 사라졌다.

'태양인 이런 상황이 처음이니까 내가 지켜야 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본인만 하더라도 처음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 했으니까.

태양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도와주자, 예전에 내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철혈 발동! 온몸에 철혈이 깃듭니다!]

==================================

[메인스킬]

철혈(???) :: 내가 살아온 시간은 철, 내가 걸어갈 시간은 혈.

피와 가죽으로 단련된 육체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

주먹에 검붉은빛이 모인다.

출력 정도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며 여태까지 노력한 정도에 따라 출력을 조정할 수 있다.

미래를 담보로 힘을 끌어 올 수도 있었지만 고블린 상대로 그 정도는 필요 없었다.

순식간에 고블린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아직 인명 피해는 없다는 점까지 아주 안심됐다.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도 들었다. 원피스를 입고 주먹을 휘두르는 여자, 매력 조금 떨어지지 않을까.

뒤에 눈이 달려 있어서 널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람을 구할 때마다 주먹에는 녹색 피가 덧칠된다.

이걸 보고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고민이 수진의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고민과는 별개로 고블린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숫자도 적었으며 바로 눈앞에서 떨어졌기에 금방 진압이 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빅토리 아카데미를 연신 외치며 감사함을 표했다.

앞으로 남은 고블린은 세 마리, 이 사태를 진정시키고 나도 옷을 사야겠네.

수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빨리 끝나서 다행이네'

안심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태양이가 무사하니까.

그러나 모든 걸 누군가 지켜보기라도 한 걸까?

"키에에엑!"

"퀙...퀙...클...컹!"

"췩, 취익... 췩..."

사라진 줄 알았던 게이트가 다시 열리며 몬스터를 뱉어낸다.

아까와는 다르게 눈앞에서 생성된 게 아닌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고블린 스물하나, 코볼트 열넷, 오크 셋.

파악은 빨랐지만 몸은 그러지 못 했다.

혼자서 모든 걸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은 일개 생도가 견디기엔 너무 가혹한 무게였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사람이 죽으며, 구할 사람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원래 하고 있던 고민만으로도 벅찬데, 부담감까지 더해지니 수진의 몸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원피스는 녹색 페인트를 마구잡이로 그은 것처럼 엉망진창이었고 하얀색 스타킹은 드문드문 찢어진다.

출력을 높인다면 빠르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일반인도 휘말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보조 스킬? 수진에겐 오직 근거리 보조계 뿐이었다.

"살려 줘!, 어떻게 좀 해 줘!"

처음 가볍게 고블린을 죽일 때만 해도 멀리서 환호하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삶을 구걸하며 누구보다 이기적으로 변한다.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근데 안전하지 않다면? 당장 내 머리 위에 고블린의 방망이가 떨어지려고 한다면?

"빨리 와서 구하라고! 각성자잖아!"

단 한 사람을 향한 적의가 사방에서 쏟아진다.

몬스터 토벌 순위를 따지고 보자면 오크를 먼저 잡는 게 맞았다.

근데 오크를 잡고 있을 때 코볼트의 화살에 아이가 죽는다면?

코볼트의 화살에 아이를 구할 때 고블린의 방망이가 노부부한테 떨어진다면?

노부부를 지킬 때 오크의 도끼가 직원들의 몸을 양단시킨다면?

끊임없는 변수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쉴 틈 없이 움직이며 주먹을 휘두른다. 발을 움직인다. 가끔은 소리도 지르며 이목을 끌어본다.

모든 게 전부 다 일시적이었다. 몬스터 전부가 수진한테 달려들어도 수진을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굳이 달려들 필요가 있을까? 몬스터들은 영악했다.

압도적인 폭력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손쉽게 생명을 약탈하는 쾌락을 우선시했다.

"구해! 구하라고! 빨리! 네가 죽이고 있는 거야! 왜 나부터 구하지 않는 거야! 왜!"

눈물이 앞을 가린다.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쏟아진 지 삼 분도 안 된 시간에 복도가 지옥으로 변했다.

구원자는 한 명, 미숙한 생도는 손이 닿는 거리까지만 지킬 수 있었다.

생면부지 사람의 팔이 잘린다.

마네킹을 휘두르며 저항을 해 보려고 해도 금방 제압 된다.

누군가의 인생이 덧없이 끝나려고 한다.

아무리 움직여도 눈앞의 사람밖에 구하지 못 하는 자신을, 수진은 자책했다.

시야가 흐려진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수없이 되뇌지만 눈물이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나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고? 감정은 파도 같아서 수진을 통째로 빠트렸다.

절망했다. 무력감이 몸을 휘감는다.

"씨발! 빌어먹을 새끼들! 다! 다 니네 때문이야!"

죽기 직전에 생을 갈구하는 단말마가 보인다.

고블린의 방망이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매듭 지으려 하는 게 보인다.

"선배, 처음엔 다 그럴 수 있어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아까까지 굳어 있던 등이 듬직하게 수진의 앞을 가로막는다.

백발을 휘날리는 사내가 팔찌를 만지자 모든 몬스터가 땅에 처박힌다.

"아무도 죽지 않을 테니까, 괜찮아요."

사내는 방금은 다 잊으라는 듯 환하게 웃는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안심되어 수진은 펑펑 울고 말았다.

* * *

9